<운디네>

영화는 운디네가 요하네스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운디네는 요하네스에게 “날 떠나면 널 죽여야 해. 알잖아.”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당혹스럽다. 이별의 대가가 죽음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를 요하네스도 알고 있으리라 확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그러나 요하네스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또는 알면서도 부정한다.) 이 순간 운디네의 말이 영화를 보는 관객을 향하고 있다면 어떨까. 우리가 운디네의 말로부터 유럽의 운디네 설화를 정확히 연상할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나,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일상적 언어의 세계를 벗어나는 이상한 움직임을 감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마지막까지 영화 속 운디네가 설화에 나오는 그 물의 정령 운디네라고 확정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직접적으로 운디네 설화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 수 있다. 그보다 이 영화는 자기 입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이 자신의 이름을 기어코 부르고 싶게 만들고 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만큼 <운디네>에는 토템의 신화적 세계를 빌려 오지 않고서는 해소할 수 없는 환상이 현실을 지배한다.

자연과 사물을 상징물로 다루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자연과 사물이 영화적 현실을 이끈다는 점에서 <운디네>에 깃든 토템은 환각적이다. 수족관의 잠수부 장식품을 둘러싼 궤적을 떠올려 보면, 이 장식품은 단지 미래에 대한 암시라기보다 스스로 사건을 일으키는 저주 인형에 가깝다. 스스로 운디네를 불러 내는 목소리의 주인이 되고, 잠수부 크리스토프가 운디네의 새로운 연인이 될 것을 알려 주며, 이대로 사랑과 행복이 지속될 것 같던 연인에게 닥칠 파국을 예고하기도 한다. 그 순간마다 잠수부 인형을 향하는 카메라의 응시는 잠수부 인형이 주술적 힘으로 운디네와 크리스토프의 서사에 침입해 들어온 것 같이 느끼게 만든다. 마지막에 이 잠수부 인형은 운디네의 환영을 통해 크리스토프에게 돌아오기도 한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환상의 중핵이 이것에 투사되어 있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정령은 운디네가 아니라 정작 이 잠수부 인형에 깃들어 있고, 운디네로 하여금 신화적 운명으로 끌어 당기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잠수부 인형처럼 이 영화에서 사물은 말 그대로 현실을 마술적으로 끌어 당기는 힘이 있다. 도시의 모형이 실제 건물과 거리를, 물이 운디네를 끌어 당긴다. 또는, 쉼 없이 개발되는 도시 문명 아래 잠긴 습지의 신화적 세계가 베를린을 끌어 당겨 삼켜 버린다.

서사가 뒤틀려 있는 것도 이 때문일까. 크리스토프가 사고를 당한 날 밤 운디네가 그와 전화로 다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영화에서 서사적으로 명시적이다. 이보다 더 이상한 것은 운디네가 잠수부 인형의 다리를 부러뜨린 날 예기치 않게 크리스토프가 찾아 와 하는 첫마디 말이다. 멀리서 운디네의 집을 찾은 크리스토프는 운디네를 보자마자 2번 터빈의 제어 장치에 결함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내 운디네와 깊이 포옹하면서 이 말은 더 이어지지 않는다. 잊혀질 뻔한 이 말은 이후 크리스토프의 사고 현장을 찾은 운디네에게 크리스토프의 동료가 설명하는 사고 경위와 연결되는 것만 같다. 그 동료는 수중 터빈이 열렸고 크리스토프의 다리가 끼어 제때 물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고 말한다. 앞선 크리스토프의 말을 사고 경위 설명과 포개어 생각해 보면 운디네와 크리스토프가 함께 한 현실에서의 시간은 더 짧아질 것이고, 그 이후의 서사도 더 광범위하게 환각의 영역으로 재편될 것이다. 파국을 수행하고 물 속으로 침잠하는 운디네가 그려 내는 물 속 공기방울의 운동이 시간의 순행을 거스르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환각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을 집어 삼켰다.

<운디네>에 동참하려면 이 영화가 우리의 인식을 교란하는 방식을 즐겨야 한다. 운디네가 강의에서 말하듯이 동독 붕괴 30주년이라면 2020년 현재임이 분명하지만, 인물들의 손에 쥐어진 소품이 피처 폰이라는 사소한 교란까지 말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특정한 단서와 인식 틀을 자꾸 교란하는 것은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이 즐겨 쓰는 전략인 것 같다. 그러나 현대식 카페와 자동차가 시대 인식을 흔들어도 결국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침공을 연상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트랜짓>), <운디네>에서 벌어지는 인식의 교란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 덕분에 우리는 설화의 알레고리로 향하고야 만다.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의 또 다른 전작 <피닉스>에서는 넬리에 대한 남편 조니의 인식이 교란된다. 넬리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인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 남았다. 그러나 총상을 입고 성형수술을 해야 했던 넬리를 조니는 알아 보지 못한다. 넬리가 죽은 줄만 알고 있는 조니는 넬리의 유산을 노리고 얼굴이 바뀐 넬리를 가짜 넬리로 행세하도록 만드는데, 조니가 깨닫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넬리에 대한 이해에 가까이 다가간다. <피닉스>가 향하는 목적지는 조니가 넬리를 끝내 알아 보는 것이다. 어쩌면 펫졸트 감독의 영화에는 이처럼 교란을 경유하고야 만날 수 있는 온전한 인식에 대한 열망이 관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운디네>는 신화적 환상을 교란의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이것은 우리 안에 상실된 채 억압된 것을 직시하고 해소하려는 내적 성찰에 가깝다. 도시 개발 역사학자 운디네가 습지를 덮고 무한히 확장해 온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품은 사라진 것의 좌표를 설명하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직접적이다. 베를린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사라진 것의 역사를 살펴 봐야 하는 것처럼, 우리 내부로부터 사라진 신화적 세계의 흔적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흔적으로 남은 그것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이길래.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그것이 속죄의 여정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11
(중략)

시선으로서의 가시적인 것, 바라보는 행위의 주체로서의 가시적인 것, 즉 이면, 숨겨진 곳, 유보된 장소 쪽으로 뚫린 구멍이라는 의미에서의 시선. 그것은 보는 주체로서의 가시적인 것이다. 개개의 사물이 가시적이 되는 것은 보기 시작함으로써, 어떤 시선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니까. 그 시선이 그것에게 진정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도록 주어지기만 한다면 말이다.
또다시 그리고 항상 예(exemplum, eximo – 공통되고 구별되지 않는 조건으로부터 추출해 낸 것이라는 의미)를 들건대, 마틴 루터 킹의 사무용 책상 뒷벽에 걸려 있는 자격증은 오직 그것이 나름대로 카르티에-브레송의 시선의 그 어떤 것, 또 그와 더불어 그 시선이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은 – 그의 두 눈을 통해서 그 가시성이 드러나는 어떤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 – 바와 같은 마틴 루터 킹의 시선의 그 어떤 것을 담고 있어야만 가시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두 눈은 그 뒤에 있는 자격증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까. 그 무슨 덧없는 추억 효과로서라면 모를까 그 일상적인 존재는 결코 그 시선을 끌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 자격증은 지금 우리를 바라보면서 우리들 쪽을 향해서 어떤 타이틀, 어떤 자격, 어떤 직업 혹은 권위, 소속을 우리에게 지시해 준다. 우리 눈앞에 있는 초상의 장본인의 생각들과는 아무리 봐도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한 부차적인 물건에 대한 호기심 혹은 무관심을 우리에게서 적발해내기 위해서 그렇게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처럼 신호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쩌면 어떤 의미작용이 소진되어 가는 가운데 신호를 하는 것에 대한 어떤 호기심 혹은 무관심, 시야 속으로의 포착 혹은 은폐, 시선의 존재 혹은 부재를 우리에게서 적발해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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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마주하는 것은 무엇이건 우리를 ‘본다(regarde)’.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눈이 그 대상을 대하는 것같이 우리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파고들고 우리들 마음을 차지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흔히 쓰는 프랑스 말 “Ça me regarde!” 즉 “그것은 내 문제다” “그건 내 소관이다” “그건 내 책임에 속한다”라는 그 말의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를 어떤 한 의미나 방향으로, 무수한 의미들이나 방향들 중 하나로 우리들을 끌어들인다. 사진은 마틴 루터 킹의 모자, 북 나이프 혹은 수염 못지않게, 마릴린 앞에 있는 개의 목끈 못지않게 그 의미나 방향의 동시적인 광채인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어떤 의미를 만든다. 그러나 감지할 수 있는 의미를, 만져 보아도 느낄 수 없는 미세한 터치처럼, 무슨 공기처럼 – 어떤 분위기와 태도처럼 – 어떤 방식, 의향, 아비투스(habitus), 에토스(ethos), 표현방식, 은총 혹은 배려처럼, 요컨대 어떤 시선, 어떤 선물처럼, 눈에 붙여 놓은 의미를 만든다. 시선이 그 대상들에 준 것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선물로 주는 것은 오직 그들, 즉 흔히들 ‘모델’ 혹은 ‘주제’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지칭하는 그 남자들, 그 여자들이 그것을 취했기 떄문에 가능했다. (선물이란 그것이 받아지고 취해질 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 쪽으로 이끌었고 그들의 신비 속으로, 다시 말해서 그들의 말없이 빛나는 자명함 속으로 유인했다. 그 선물이 거기에 편안하게 맡겨지려면 이 자명함이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그는 그것이 언제 어떻게 맡겨지는지 알지도 못한다. 그는 그 정확한 시공간을 계산하고 깊이 생각하긴 하면서도 그 시공간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이것이 선물의 포인트이며 순간이다. 결코 그것 자체의 이유와 동기가 설명될 수 없는 자명함과 확신의 순간이다. 설명된 동기는 이미 타자의 속에, 즉 그것 자체로 환원된 이미지, 즉각적으로 그것에게로 환원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부재로부터 이끌어낸 이미지 속에 있으니까 말이다. 도처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이미지는 환한 빛으로서, 잘 보이는 얼굴로서, 그러나 또한 그것의 디테일들 속으로, 그것의 그림자들 속으로 물러나 숨는다. – 그러나 그 물러나 숨는 행위는 다름 아닌 선물의 비밀, 바로 그것이다.

내면의 침묵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 (열화당) 중
 ‘시선을 주었다’ (장-뤽 낭시 Jean-Luc Nancy) p20 ~ 21

사진으로는 시선을 전달하는 것이다.
주체의 시선은 어떤 감정, 사상, 기억 따위를 품고 있을테고 그 시선은 사진을 통해 전달된다.
그러나 사진은 시선을 고스란히 재현하지 않는다.
사진은 자기만의 형식과 구조를 갖춘 한에서 (촬영자의) 시선을 대리하여 전달할 뿐이다.
다시말해 사진은 촬영자의 시선을 인용하고 있는 타자의 편지다.
따뜻한 사진,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사진 등등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사진의 이상형에 대한 피상적인 말은 이 타자를 알지 못하는 한에서 가질 수 있는 주관성의 착각이다.
사진은 촬영자의 의도대로 나오지 않는다.
사진은 항상 촬영자가 보고 있는 것 이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에서의 빨간 색은 시선이 파악한 빨간 색에 비하면 정말 의외의 것이지 않은가)
사진을 찍고 난 후에 이 과잉이 마치 원래 자신의 시선이었던 것처럼 얼버무리는 것은 얼마나 정상적이면서도 안타까운 거짓말인가.
그런데 이 거짓말을 너무나도 진실되게 하거나 너무나도 솔직하게 인정하고 간극을 놔 버리는 것은 눈여겨볼 만한 태도다.
이 양극단에서 시선은 과잉의 영역과 뒤섞여 버린다.
주관적 시선이 한쪽에서는 물질적 형태 자체가 되려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스스로를 텅 비워 버리고 객관성만 남겨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시선은 자신의 물화한 현전에 대해 강박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즉 시선이 품고 있는 어떤 감정, 사상, 기억 따위가 바로 그 물질적 현전 말고는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물신주의의 순수한 태도.
그리고 이 물화한 현전, 사물화된 시선으로서의 사진이야말로 스스로 말을 건네는 작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