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하얀 인화지 위에 나무 한 그루와 검게 발자국으로 그어진 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 대해 언젠가부터 나는 그의 사진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키아로스타미가 찍어 온 사진에서 사물은 어떤 시적 영감을 지닌 것처럼 여백 위에 도드라져 있다. 그의 사진에서 사물은 현실의 물질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가상의 세계로 진입해 버린, 상징화된 존재처럼 보인다. 나무, 길, 그리고 능선은 우리가 부여한 그들 이름의 층위부터 점과 선, 면이라는 기하학적 수준까지 다층적 기호와 상징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그의 사진에 놓인 사물은 상징화되어 우리에게 감흥을 일으킨다. 사진은 회화가 아니다. 사진은 대체로 피사체를 창조하거나 조작할 수 없다(는 믿음이 우리에게는 있다). 키아로스타미의 사진은 가장 조작하기 힘든 사물을 담지만, 그것을 가장 회화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여기서 키아로스타미의 사진에 대해 믿기 힘들다는 경이로움이 분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을 다시 본다. 눈밭 위의 한 그루 나무가 진짜 나무가 맞는지 더 가까이서 유심히 본다. 인화지의 은염 입자가 모여서 나무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조작되지 않은 진짜 나무가 맞는 듯하지만, 우리는 나무라는 사물을 은염 입자의 물적 조건 위에서 감각한다. 비약하자면 우리가 사물과 세계를 그 자체로 대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감각과 인식의 제한적 구조를 통해서만 우리는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사진의 경우 은염 입자를 통해 구현된 나무의 형상을 감각하는 한에서만 나무의 실재성을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영화로 돌아와 보면, 키아로스타미의 경이로움은 그것이 너무 진짜 같거나 너무 허구 같다는 의아함에 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선생님께 혼나며 잔뜩 겁먹은 네마자데의 울음과 그에게 공책을 돌려줘야 하는 아마드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 친척을 지진으로 잃었다는 어느 할머니의 눈물이 너무나도 진짜인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에, 코케와 포슈테를 잇는 작은 언덕에 난 길이나 주반과 코케를 잇는 가파르고 긴 자동차 도로의 지그재그 형상은 너무 상징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를 통해 알게 되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가 이란의 대지진이 있고 1년 후에 촬영되었다는, 다시 말해 지진 재난 현장의 모습들이 사후에 연출된 장면이라는 점은 믿기 쉽지 않은 사실이기도 하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 대해 그것의 현실성과 허구성을 모두 믿거나 의심하게 되는 것이 본질적인 반응이기는 하겠지만, 결국 그의 영화는 그 경계를 나누는 것에 무심해 보인다는 점을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대신, 예컨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지진이라는 재난 앞에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출연한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을 걱정하는 마음을 현실과 가상의 모든 세계로 전하고 싶어 한다. 감독 역을 맡은 배우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포스터를 들고 다니며 안위를 물을 때, 그 배우는 영화 속 감독 역이기도 하면서 키아로스타미 자신이기도 하며, 그 포스터의 아이는 영화 속 아마드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아마드 푸르이기도 하다. 키아로스타미가 재현한 재난의 현장은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재난의 희생자를 기억하고 기리기 위한 재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인용하고 <올리브 나무 사이로>가 앞선 두 영화를 다시 인용하면서 현실과 가상의 구분은 점점 혼미해진다. 상호 참조는 영화 사이에 국한되지 않고 현실로도 연결되어 있다. 이 세 영화에서 현실의 배우와 극중 인물이 혼동되고 대지진이라는 재난이 중첩된다. 나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이후 이란에 닥친 대지진이 이 가상 세계를 거기서 멈출 수 없게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세 영화, 순환적인 상호 참조의 세계는 재난 현실에 대한 가상의 응답을 위해 추동한 결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드 푸르를 애타게 찾는 마음, 호세인이 날 서게 말하는 불평등에 대한 저항심 같은 것을 영화와 현실 모두에 도달케 하는 것이 세 영화를 관통하는 욕망일 것이다.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다층적인 가상 세계는 현실을 공감각하게 만든다. 가상과 현실은 상호적이며 서로를 창조하는 순환 고리가 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마지막, 익스트림 롱 쇼트의 시선 안에서 인물과 차는 언덕 도로의 지그재그 형상이 만드는 도형에 속해 있을 것만 같지만, 그들이 서로를 도와 함께 길을 오르는 것을 응시하고 있으면 그들의 실존과 행위가 도형 내부에서 진정한 운동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도형의 상징이 존재를 집어삼키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존재가 이를 통해 현현하는 세계의 모습을 키아로스타미는 그렇게 알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종착역>

스냅 사진은 길을 헤매는 것으로부터 탄생한다. 스냅 사진은 발터 벤야민이 체현한 도시 산책자의 태도를 사진의 원리 안에서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헤맨다는 것은 목적지로 가는 길을 잃었거나 목적지 자체를 잃어버린 상태일 것이다. 그 순간 비로소 모든 것이 예기치 않게 낯설어지고 무심코 지나쳤던 사소한 사물과 시공간이 피사체가 될 자격을 얻는다. 스냅 사진에 실패란 없다. 벗어난 초점, 잘못된 노출, 망가진 구도, 무심한 피사체도 우리의 시각적 무의식을 열어 낸다. 카메라는 언제나 우리의 시선이 누락하는 세계를 무작위적 원리로 포착하고 있다.

<종착역>은 스냅 사진에 대한 영화적 고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네 아이가 찍은 사진이 영화 곳곳에 꾸준히 삽입되어 있다는 점에 연연한 말은 아니다. 물론 이것이 가장 직유적인 방식이기는 하다. 이 영화가 스냅 사진의 정지된 이미지에 시간을 할애하면서 우리는 운동 이미지의 영화적 세계 안에서 놓치기 쉬운 것을 경험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인물 자체의 시선을 경험한다. 설령 그것이 일회용 카메라의 렌즈를 경유한 상상적 시선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 이에 대해 우리는 영화에서 시선을 상상된 형태로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을 보태야 할 것이다 — 우리는 아이들이 찍은 스냅 사진을 통해 그들이 실제로 보았다고 믿을 법한 것을 경험한다. 이것은 영화가 일반적으로 구사하는 시점 쇼트의 방식보다 더 직접적인 시점 쇼트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영화에 삽입된 스냅 사진이 영화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불균질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진 자체가 통제되지 않은 방식으로 찍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카메라를, 의탁한 시선 장치를 통제하지 못한다. 지하철 노선도는 초점이 나갔고 동네 풍경 사진의 3분의 1은 손가락이 가려 버렸다. 스냅 사진의 즉흥적인 통제 불가능성이 오히려 그 시선의 주인을 상상하게 만드는 역설적 효과가 이 영화에서는 아이들의 미숙함과 조응한다. 정지된 스냅 사진 이미지를 응시하는 동안 우리는 통제되지 않은 세부와 실패한 시선을, 그리고 그 시선의 주인을 지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인물들의 연기나 플롯의 구성을 통제하지 않는 것을 원리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을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연기를 하기보다 현실에서 볼 법한 일상적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몸짓도 계획되지 않았고 어떤 발화도 정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인물의 대사를 정확히 알아 듣기 어려울 때도 있다. 강세도 리듬도 없고 다듬어지지 않은 온전한 구어적 대화에 아이들의 실생활 언어까지 보태면 아무리 훌륭한 녹음 환경을 갖춰 촬영했어도 이 영화에 담긴 대화가 온전하게 내러티브를 구성하기는 힘들 것이다. 플롯도 어떤 우연적 상황을 제시하는 것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소정이 핸드폰을 분실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구신창역에서도 떨어진 외딴 노인정을 찾게 되고 송희가 고양이를 만나는 바람에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놓쳐 버린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가능성에 몸을 맡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영화적 결을 구축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 이들의 영화다.

이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의 끝이라는 목적지를 잃고 헤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순간을 다룬다. 어떤 길도 초행인 그들에게 화면 바깥에서 갑자기 끼어 든 개 짖는 소리 같이 예견치 못한 놀라움이, 아이들이 노인정 안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고양이가 슬며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카메라의 프레임이 유례 없이 이동하는 우연한 영화적 선택이 그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가 아이들의 손에 일회용 카메라를 쥐어 주고 그들이 이미지를 만나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아이들이 자꾸만 낯선 길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미지의 이미지가 발생하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네 아이의 사진 여행은 자꾸만 산책하는 스냅 사진가의 태도를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헤매는 그 곳이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끝 지점이라는 것을 이 영화에 포개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낯선 길을 거니는 아이들이 만난 이미지가 포착한 것은 익숙한 것의 생경한 감각만은 아니다. 아이들의 사진에는 그 순간의 감정이 내재한다. 이를 전학 온 시연이가 연우, 소정, 송희와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분식집을 찾고, 여름 방학 사진 숙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지하철 1호선 종점을 가고, 함께 비를 맞고, 낯선 시골 노인정에서 같이 밤을 보내면서 네 아이가 모험심으로 친밀함을 키운 기억이 총 열 세 장의 스냅 사진 이미지 이면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스냅 사진을 전면에 두고 말하자면 이 영화를 네 아이의 사진에 담긴 맥락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때 나는 영화가 사진을, 사진이 영화를 보충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진과 영화가 각자 시선의 불가능한 지점을 보완하면서 피사체의 표면에 인물과 영화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채워 주고 있다고 말이다. 이 때 한낱 사물도 기억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제, 젖은 흙에 포개진 발자국이나 문앞에 널브러진 신발들이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것을 생각해 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