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shoot pictures…

사진 찍기.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시간 속의 뭔가를 도려내 다른 형태로 지속될 수 있도록 전이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으로부터 도려낸 그 무엇이
카메라 ‘앞’에 놓여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
사진 찍기는 양방향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하나는 앞에서, 또 하나는 뒤에서.
그렇다. ‘뒤’와도 상관이 있다.
이러한 비유는 그렇게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마치 사냥꾼이 눈’앞’의 맹수를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듯,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 반동으로 몸이 ‘뒤’로 밀려나듯,
사진을 찍는 사람 역시 셔터를 누르는 순간, ‘뒤’로 튕겨 나간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말이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은 언제나 이중적인 상을 갖게 된다.
사진은 찍히는 피사체를 보여주게 마련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뒤에 있는 것’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대립상’이다.
촬영하는 순간 사진을 찍는 사람 즉, 자신의 상 말이다.
모든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이 대립상은 렌즈로 포착할 수 없다.
사냥꾼은 자신이 쏜 총알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반동의 충격을 느낀다.
그렇다면 사진을 찍는 행위에서 이 ‘반동’이란 무엇일까?
반동을 어떻게 느끼고, 사진 속에 묘사할 수 있을까?
사진 속에 반동은 어떻게 투영될까?

독일어에는 이런 상황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
매우 다양한 관계 속에서 터득할 수 있는 단어.
‘태도 혹은 관점 Einstellung’이다.
이 단어는 심리적, 도덕적으로 ‘어떤 대상을 대하는 고정된 상태’를 말한다.
또한 뭔가를 위해 준비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사진이나 영화에선 영상의 배치, 세팅
(뷰파인더의 테두리 안 알맞은 위치에 피사체를 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사진가가 피사체를 ‘받아들이는’
순간의 노출값과 셔터 속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의 단어가 ‘태도’를 뜻하면서
한편으론 태도에 의해 생산된 상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태도'(즉, 모든 영상)는 실제로
이러한 영상이 ‘받아들여지도록’ 만든 관점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냥꾼이 느끼는 반동은 사진에서,
셔터를 누른 뒤 어느 정도 가시화되는 사진가의 자화상에 해당한다.
사진가의 얼굴 표정이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관점,
눈앞의 피사체에 대한 사진가의 태도가 반영되는 것이다.

카메라는 일종의 눈이다.
그것도 앞뒤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눈.
앞으로는 사진을 찍고,
뒤로는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그림자 같은 윤곽을 그려낸다.
그렇다. 앞으로는 피사체를 바라보면서,
뒤로는 이 피사체를 포착해야 하는 그 근거를 바라본다.
카메라는 사물들과 동시에 그 사물들을 향한 (사진가의) 바람을
보여주는 셈이다.

매순간, 이 세상 어딘가에선
누군가 셔터를 누르며
뭔가를 포착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누군가는
특정한 빛에,
어떤 얼굴에,
어떤 제스처에,
어떤 풍경에,
어떤 기분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혹은 그저 단순히 어떤 상황을 잡아두고 싶기 때문이다.
사진의 피사체는 명백하게 드러나 있고, 수없이 널려 있다.
매순간 끊임없이 늘어난다.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 사진을 찍을 때,
그 순간은 모두 일회적이며 고유하다.
시간이, 멈추지 않는 시간이 그 일회성과 고유성을 보장한다.
심지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찍어대는 스냅 샷 역시
그들 각자에게는 고유하고 유일무이한 것이다.
관광객들이 흔하디 흔한 스냅 샷을 찍는
가장 진부하고 단순한 그 순간들 역시
유일무이하고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다.
이때 정말 놀라운 것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
‘시간을 붙잡았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진을 통해 매번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흐른다는 점이
새로이 증명된다는 데 있다.
모든 사진은 우리 자신의 유한함을 상기시키는 하나의 기억이다.
모든 사진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포착된 모든 영상은 고귀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고,
사진을 찍는 이의 시선 그 이상의 것이며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다.
말하자면, 모든 사진은 시간의 저편에서, 신의 시야 밖에서
이루어지는 창조행위다.
또한, 점점 잊혀 가는 신의 계명을 떠올리게 한다.
“너의 우상을 만들지 말지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사진을 찍어도 되는 것은,
‘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아름다운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아름답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진실한 행위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또한 언제나 교만하고 무례한 행위다.
그래서 사진 찍기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무절제함을 가르치고 겸손함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도 혹은 관점’이란 말을 겸손함보다 허풍으로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카메라를 양쪽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앞으로, 뒤로.
그러면 카메라는 두 개의 상을 하나로 융합시킨다.
그러면 ‘뒤’가 ‘앞’에서 사라진다.
그러면 카메라는 촬영을 하는 그 순간 비로소,
사진가가 피사체와 분리되지 않는 것을 허락한다.
이때 사진가는 ‘뷰파인더’를 관통하여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세상의 ‘다른 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잘 기억하고,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
(물론, 유감스럽지만 더 많은 경멸을 담게 될 수도 있다. ‘악한 시선’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세상의 모든 사진, 시간 속의 모든 ‘한 번은(once)’,
한 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모든 사진은 한 편의 영화를 시작하는 첫 장면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 찾아오고,
두 번째 셔터를 누르는 순간 몇 걸음 더 나아가고,
다음 사진이 이어지면서,
고유한 공간, 고유한 시간을 가진 이야기로 발전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 사진 찍기와 나의 사진들은 점점 더
‘이야기를 감지하게 해주는 것’이 됐다.
이 책에 한 장 한 장의 사진보다 시리즈 사진들이 더 많이 들어간 이유다.
두 번째 사진부터는 이미 ‘몽타주’가 시작되어,
독자적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치밀한 공간감과 시간감각을 느끼게 해주며,
첫 번째 사진에서 예고된 이야기가 발전해나간다.
가끔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인공인 줄 알았던 인물이 조연에 지나지 않았단
사실을 알려주기도 하고,
어떨 땐 중심이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이었단 사실이
밝혀지기도 한다.

나는 풍경이 지닌 서사의 힘을 굳게 믿는다.
도시, 황야, 아니면 산맥, 혹은 바닷가든
풍경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외치고 있다.
풍경이 주인공이 되고, 그 속에 서 있는 사람들은 엑스트라가 된다.
마찬가지로 난 소품들이 품고 있는 서사의 힘도 굳게 믿는다.
사진 속 한쪽 구석에 무심하게 펼쳐져 있는 신문은
그 어떤 이야기도 들려줄 수 있다!
배경 속에 보이는 광고판도!
사진 모서리에 살짝 잘려나간 모습으로 서 있는 녹슨 자동차!
누군가 방금 벌떡 일어선 게 분명해 보이는 의자 하나!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책, 제목이 절반쯤 보이는 책 한 권!
보도블록 위에 버려진 텅 빈 담뱃갑!
아직 스푼이 들어 있는 커피 잔!
사진 속에서 사물들은 즐거워 보일 수도, 슬퍼 보일 수도 있다.
심지어 우스워 보이거나, 비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홀로 남겨진 옷들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진에서 옷은 가장 흥미진진한 소재다.
어린아이의 발목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양말 한 짝!
뒤에서만 눈치챌 수 있는, 남자의 셔츠 칼라가 살짝 뒤집어져 있는 모습!
땀으로 얼룩진 옷!
옷에 진 주름들!
해진 부분에 헝겊을 대고 꿰맨 옷!
단추가 떨어진 옷!
방금 다림질을 한 옷!
한 여인의 인생사를 축약해서 보여주는, 고통스런 역사가 담겨 있는 옷!
한 사람의 인생 드라마가 그대로 묻어나는 외투!
옷은 사진 속의 온도를, 날짜와 시간을, 전시인지 평화로운 시절인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이 모든 일이 카메라 앞에서 단 ‘한 번’ 일어난다.
사진은 이 단 한 번에서 영원을 만들어낸다.
사진을 통해 시간이 비로소 가시화되는 것이다.
첫 번째 사진과 두 번째 사진 사이에서,
만약 이 두 장의 사진이 없었다면 영원이 잊힐 수도 있던
한 편의 이야기가 태어난다.

사진을 찍는 순간 우리가 세상 속으로 사물들 속으로 사라지려 할 때,
세상과 사물들은 사진에서 빠져나와
사진을 바라보는 관찰자를 파고들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바로 관찰자의 두 눈 속에서 말이다.

이 책이 그런 이야기책이 되기를 바란다.
아직은 아니지만,
독자들이 ‘보이는 것’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면
그런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빔 벤더스 <한 번은(Wim Wenders ‘einmal’)> 서문 ‘To shoot pictures’ 발췌 

11
(중략)

시선으로서의 가시적인 것, 바라보는 행위의 주체로서의 가시적인 것, 즉 이면, 숨겨진 곳, 유보된 장소 쪽으로 뚫린 구멍이라는 의미에서의 시선. 그것은 보는 주체로서의 가시적인 것이다. 개개의 사물이 가시적이 되는 것은 보기 시작함으로써, 어떤 시선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니까. 그 시선이 그것에게 진정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도록 주어지기만 한다면 말이다.
또다시 그리고 항상 예(exemplum, eximo – 공통되고 구별되지 않는 조건으로부터 추출해 낸 것이라는 의미)를 들건대, 마틴 루터 킹의 사무용 책상 뒷벽에 걸려 있는 자격증은 오직 그것이 나름대로 카르티에-브레송의 시선의 그 어떤 것, 또 그와 더불어 그 시선이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은 – 그의 두 눈을 통해서 그 가시성이 드러나는 어떤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 – 바와 같은 마틴 루터 킹의 시선의 그 어떤 것을 담고 있어야만 가시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두 눈은 그 뒤에 있는 자격증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까. 그 무슨 덧없는 추억 효과로서라면 모를까 그 일상적인 존재는 결코 그 시선을 끌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 자격증은 지금 우리를 바라보면서 우리들 쪽을 향해서 어떤 타이틀, 어떤 자격, 어떤 직업 혹은 권위, 소속을 우리에게 지시해 준다. 우리 눈앞에 있는 초상의 장본인의 생각들과는 아무리 봐도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한 부차적인 물건에 대한 호기심 혹은 무관심을 우리에게서 적발해내기 위해서 그렇게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처럼 신호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쩌면 어떤 의미작용이 소진되어 가는 가운데 신호를 하는 것에 대한 어떤 호기심 혹은 무관심, 시야 속으로의 포착 혹은 은폐, 시선의 존재 혹은 부재를 우리에게서 적발해내기 위해서 말이다.

12

우리와 마주하는 것은 무엇이건 우리를 ‘본다(regarde)’.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눈이 그 대상을 대하는 것같이 우리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파고들고 우리들 마음을 차지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흔히 쓰는 프랑스 말 “Ça me regarde!” 즉 “그것은 내 문제다” “그건 내 소관이다” “그건 내 책임에 속한다”라는 그 말의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를 어떤 한 의미나 방향으로, 무수한 의미들이나 방향들 중 하나로 우리들을 끌어들인다. 사진은 마틴 루터 킹의 모자, 북 나이프 혹은 수염 못지않게, 마릴린 앞에 있는 개의 목끈 못지않게 그 의미나 방향의 동시적인 광채인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어떤 의미를 만든다. 그러나 감지할 수 있는 의미를, 만져 보아도 느낄 수 없는 미세한 터치처럼, 무슨 공기처럼 – 어떤 분위기와 태도처럼 – 어떤 방식, 의향, 아비투스(habitus), 에토스(ethos), 표현방식, 은총 혹은 배려처럼, 요컨대 어떤 시선, 어떤 선물처럼, 눈에 붙여 놓은 의미를 만든다. 시선이 그 대상들에 준 것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선물로 주는 것은 오직 그들, 즉 흔히들 ‘모델’ 혹은 ‘주제’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지칭하는 그 남자들, 그 여자들이 그것을 취했기 떄문에 가능했다. (선물이란 그것이 받아지고 취해질 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 쪽으로 이끌었고 그들의 신비 속으로, 다시 말해서 그들의 말없이 빛나는 자명함 속으로 유인했다. 그 선물이 거기에 편안하게 맡겨지려면 이 자명함이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그는 그것이 언제 어떻게 맡겨지는지 알지도 못한다. 그는 그 정확한 시공간을 계산하고 깊이 생각하긴 하면서도 그 시공간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이것이 선물의 포인트이며 순간이다. 결코 그것 자체의 이유와 동기가 설명될 수 없는 자명함과 확신의 순간이다. 설명된 동기는 이미 타자의 속에, 즉 그것 자체로 환원된 이미지, 즉각적으로 그것에게로 환원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부재로부터 이끌어낸 이미지 속에 있으니까 말이다. 도처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이미지는 환한 빛으로서, 잘 보이는 얼굴로서, 그러나 또한 그것의 디테일들 속으로, 그것의 그림자들 속으로 물러나 숨는다. – 그러나 그 물러나 숨는 행위는 다름 아닌 선물의 비밀, 바로 그것이다.

내면의 침묵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 (열화당) 중
 ‘시선을 주었다’ (장-뤽 낭시 Jean-Luc Nancy) p20 ~ 21

오늘 퇴근길에 어제 사진동호회에 올라온 한 글이 문득 떠올랐다.
그 글은 브레송이 현상, 인화 작업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사진을 찍는 일에 더 전념하겠다고 한 말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 내용이었다.
때가 되면 반복되는 주제다.
요지는 현상, 인화작업을, 현대적으로 본다면 스캔, 포토샵 보정 작업을 포괄하는 이 보정작업을 예술적 범주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사진의 미학적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사진과 미술 또는 그래픽 아트를 구분짓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미술이나 그래픽 아트는 없는 형상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러나 사진은 현실에 존재하는 형상을 바라보는 작업이다.
미술과 달리 사진은 ‘복제의 원본’과 복제 결과물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질문이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은 불가피한 원본의 왜곡에 대한 이유와 정당성을 묻는다.
왜곡하는 이유와 그 정당성은 곧 사진가의 원본에 대한 태도를 뜻한다.
내가 보기에 이 태도가 사진이라는 미학의 핵심이다.
사진의 원본에 대한 왜곡이 극단으로 간다면 그것은 사진적 범주가 아니라 회화적 범주에 가까울 것이다.
이 지점 어딘가에 현상, 인화의 예술적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크로스 오버를 말하는 게 아니라면, 사진은 곧 태도다.
이 태도는 그렇다면 어느 지점에서 발현되는가.
나는 사진을 찍는 순간에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포토그램처럼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행위를 건너뛴 것이라 해도 이를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인화지에 상을 박는 그 순간 사진가는 찍는 행위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과 현실에 대해 당신의 시선은 빛과 구도와 감정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를 따지는 게 사진인 거다.
그렇다면 현상과 인화는…
이 시선의 태도를 관철하기 위한 하나의 사후적, 수단적 방법이다.
사진과 회화의 경계 사이에서 헤매지 않고 딱 사진적 범주에 정주하고 볼 때는 말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는 현상, 스캔, 포토샵 스킬, 스캔 스킬, 좋은 렌즈, 좋은 바디…이 따위에서 사진의 미학적 원인을 찾지 말고 바로 당신이 사진을 찍는 행위 속에서 당신의 태도에 대해 더 고민하는 것이 온당하다.
우리 아마추어 사진 동호인들은 이런 기술 미학에 많이 혹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 생각에 이건 덫이다.
사진 재미없게 하는 덫.

사진 찍는 것은 작곡하는 것과 같을 것이고
인화하는 것은 연주하는 것과 같을 것인데…
뛰어난 작곡자나 연주자 모두 예술가로 인정해주죠.
브레송은 작곡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니 사진으로 작곡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이고
삐에르 가스망은 연주에 소질이 있으니 브레송이 작곡한 사진을 암실에서 연주 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입니다.

오늘(2008.05.10) 이 댓글을 보고 또 아래와 같이 댓글을 달아 버렸다.

저도 현상, 인화 전문가에 대해 예술적인 어떤 영역을 인정하자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인화에는 연주처럼 작품에 대한 해석이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어쨌든 결국 우리는 사진을 인화물(또는 후보정 완료된 스캔본)로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음악과 달리 한 사진에 대해 다양한 인화본이 존재하는 게 아니니 사진이라는 작품에 있어 현상, 인화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사진은 음악과 달리 위대한 원곡에 대한 다양한 편곡과 연주 방식에서 그 미적 가치를 논하는 분야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마 우리는 많은 위대한 사진가들만큼이나 많은 위대한 인화 작업가들의 이름을 (미학적인 수준에서) 기억해야겠지요.
영화도 감독 이외의 크고 작은 기여를 한 수많은 스탭들은 잊혀집니다.
이건 분명 불공평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는 이유는 사진이나 영화 작품이 사진가의, 영화감독의 태도라는 시원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를 보고 ‘촬영감독 실력 죽인다’라고 기억하기 보다는 ‘드 팔마 영화의 화면 구성은 정말 죽여’ 이런 식으로 기억하는 것처럼요.)
저는 영화든 사진이든 주어진 결과물로서의 작품 자체만 두고 봐야 한다고 믿는 편입니다.
(심지어 사진가나 감독의 의도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작품 뒤에 숨어 있는 작가라는 작자를 불러내야 한다면 그건 인화한 사람이 아니라 찍은 사람, 스탭들이 아니라 감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공평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감상자, 비평자에게는 작품의 미적 가치에 가장 많은 책임을 져야 할 단 한 사람이 필요할 뿐이니까요.
(애가 잘못하면 선생보다 부모 탓하는 것처럼요)
어쨌든 사진이라는 예술 활동에 있어 현상, 인화의 기능적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미적 가치는 사진가가 책임진다, 이게 제 생각의 요지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좀 오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 분 댓글이 틀린 말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든 찍는 것이 뽑는 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설득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 보인다.
굳이 이럴 것까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