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 홍당무>

고교 시절 왕따였던 양미숙은 졸업 여행 기념 사진을 찍을 때조차 반 친구들이 곁을 내 주지 않아 무리들 뒤에 파묻힌 존재였다. 학생들은 돌아가며 스크럼을 짜서 양미숙이 파고들 틈을 틀어 막고 밀어 냈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반복되는 대사처럼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양미숙의 비상식적, 병리적 행동의 배경에는 배제되고 멸시 당한 상처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쓰 홍당무>는 양미숙의 역사를 길게 풀어 내며 그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학급 친구들 뒤로 밀려나 가려지는 불쌍한 양미숙이 아니라 그럼에도 무리 위로 뛰어올라 기어코 기념 사진에 찍히고야 마는 양미숙의 악다구니를 보여 주며 시작된다. 졸업 여행 기념 사진 속 양미숙의 얼굴은 독기를 품고 일그러져 있다. 양미숙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방식 만큼이나 영화는 그럴 만한 이유보다 비상식적 행동에 관심이 있다.

영화는 양미숙의 화법으로 양미숙을 보여 주려 한다. 그에게 새겨진 투쟁심, 집착, 교활함, 두려움 등은 이 영화 곳곳의 대사와 양식에 내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화면 바깥의 목소리를 삽입하는 방식은 너무나 기괴하여 계속 생각하게 된다. 양미숙이 서종철 선생과 모텔에서 잠자리를 가진 날 아침, 서종철이 끝내 양미숙의 마음을 부정할 때 돌연 들리는 학생들의 책 읽는 소리는 서종철이 집으로 가 부인 성은교에게 “사랑해, 여보”라고 말할 때까지 장면과 상관 없이 울린다. 말 그대로 에코, 메아리 같은 이 소리는 순간 아찔하게 정신적 공황을 일으킬 것 같은 순간을 만든다. 교장 선생의 명상 방송 소리, 학교 축제 공연 호출 방송 소리, 양미숙과 서종희의 공연 소리도 포함해야 할 이 화면 바깥의 소리는 이명과도 같이 이야기의 흐름에 정신적 혼미함을 가져 온다. 이경미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이 느닷없이 화면과 어긋나며 울리는 기괴한 목소리는 영화가 양미숙의 신경증적 불안을 드러내는 데 관심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영화가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여성이 영화의 서사와 욕망 전부를 구성하는 드문 한국 영화라는 점과 더불어 왕따 양미숙(과 서종희)에 대해 말을 하기보다 되도록 양미숙의 말을 하려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구성과 리듬이 복잡하고 어지럽지만 이야기가 치고 나가는 힘을 지닌 것은 양미숙이 품은 욕망과 망상의 에너지를 가공하지 않고 표출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양미숙의 욕망과 망상의 에너지로 웃음을 생산하며 앞으로 나아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양미숙의 컴플렉스와 불안이 야기하는 소동극에 대한 웃음과 비웃음의 경계가 아슬아슬한 것은 아닐까 주저하게 된다. 양미숙이 상황을 이해하거나 결핍을 해결하는 비상식적 방식을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납득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그 기괴한 감정을 해소하려는 웃음이라는 효과가 자칫 위험해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이상한 영화가 끝나고 나면 조용히 양미숙을 응원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방식은 삐뚤어 이상할지라도 지치지 않고 시도하는 양미숙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영화 <미쓰 홍당무>의 소수자성은 이 비웃으며 응원하는 마음이 아닐까.


<화양연화>의 마지막에 차우는 캄보디아까지 가서 앙코르와트의 벽에 난 작은 구멍에 한참을 속삭여 넣은 뒤 흙으로 구멍을 막아 버리고 굳은 얼굴로 걸어 나온다. 앙코르와트, 기나긴 시간을 머금은 채 멈추어 선 과거의 시간, 그 기억의 공간 속에 자신의 기억을 비밀히 묻어 둔다. 그러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아니고 산에, 앙코르와트에 구멍을 파고 묻는 것은 그 기억을 자신의 손마저 닿지 않는 어떤 곳에 감추어 두려는 것일 게다. 그것은 상기의 고통을 잊기 위한 인위적 망각의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억을 묻어 둔다고 기억이 사라질까? 그 기억에 달라붙은 고통이 사라질까? 왕가위의 생각은 이것일 게다. “잊으려 할수록 더욱 생각난다.” 왜냐하면 그렇게 인위적으로 지우고 감추어 두는 것은 역으로 누구도 지울 수 없게 감추어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지울 수 없도록 영원의 시간 속에 은닉해 두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각하기 위해서 잊는 것이고 잊지 않기 위해서 감추어 두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마시고 미련 없이 잊어 버리겠다던 황약사의 취생몽사와 다르다.
구양봉은 황약사와 헤어진 다음해 술을 찾아 취생몽사를 마시지만 예전에 살던 삶을 그대로 산다. 아무것도 잊지 않은 것이다.
이런 기억과 망각의 역설적 관계에 대해 명확한 개념적 통찰력을 보여 준 이는 프로이트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역시 지워지지 않는 기억, ‘트라우마’라고 불리는 상처의 기억에 주목한다. 그 기억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그 상처의 시간 속으로 반복하여 불려 들어간다. ‘증상’이라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자기의 행동을 통해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증상의 시간은 그 상처의 순간에 멈추어 있고 증상을 통해 우리는 그 멈춘 시간 속으로 불려 들어간다.
마치 “오, 이 순간이 영원하길!” 하고 외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상처의 무게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나아가도 다시 되돌아 온다. 증상이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반동적 힘이 드러나는 임상적 증거인 셈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트라우마라고 불리는 그 상처의 순간, 결코 잊기 힘든 그 사건이 하나 같이 망각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결코 잊을 수 없기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되돌아 오는 것인데, 그것은 필경 ‘의도적 망각’이다.
그 상처가 기억나는 것이 불편하거나 힘들어서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의도적으로 잊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적 망각은 그 상처의 기억을 소멸시키는 게 아니라 생각나지 않도록 의식이 닿지 않는 어떤 곳에 깊숙이 감추어 두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중에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한다. 그렇게 감추어 두는 것은 지울 수 없고 지우고 싶지 않은 욕망 때문이다.

<삶을 위한 철학 수업>, 이진경

망각은 기억을 지우지 않으려는, 증상으로 남겨 두려는 욕망 아닐까.

오늘은 메이데이.

19세기 말 미국에서 벌어진 5월 1일 노동자 총파업을 기념하고 세계 노동자의 연대를 다진다는 그 날이다.
노동절이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미국에서 있었던 노동자의 절규를 기린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오늘 세계 곳곳에서는 노동자들이 모여 갈수록 팍팍해져 가는 현실을 개선하자는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만큼 팍팍한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교묘하게 불허당하고 있지만 말이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상처, 사람들은 저마다 이를 떳떳하게 드러내고 하소연하고 해소할 권리가 있다.
사람은 상처를 둘러싸고 변화해 가는 존재다.
나는 비록 지금껏 온갖 상처를 숨기고 티 내지 않으려 노심초사하는 미련하고 비루한 인간이지만, 적어도 한국이라는 땅에서 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집단적 상처 만큼은 지금 당장 표출하고 위로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낀다.
자본가는 갈수록 여유롭고 온화하며 세련된 인간이 되어 가고 노동자는 갈수록 불안하고 날카로울 뿐만 아니라 좁은 시야에 갇혀 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상처들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발랄함과 세련됨, 그리고 우주를 보듬어 안을 만큼의 아량이 필요하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처를 하소연하고 행복을 상상할 수 있는 노동절이 되기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잠시 짬을 내서라도 콘서트 하나 구경하고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