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해준이 한 말은 정말 서래를 사랑한다는 뜻이었을까. 서래는 그렇게 확신하고 해준은 이를 부인한다. 그 말은 해준이 서래 남편 사망 사건을 종결하고 나서 뒤늦게 서래의 혐의점을 발견하고 서래를 찾아와 한 말이었다. 해준은 자신이 서래에게 빠져 서래의 혐의를 지우는 일을 도와 수사를 망쳤고, 그로 인해 붕괴됐으며, 증거가 될 핸드폰은 바다 깊이 버리라고 한다. 해준은 이 때 수사를 망친 자신을 책망하고 한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래는 이 말이야말로 해준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의 통렬한 고백이라고 받아들인다. 해준 자신은 모르는, 자기 말에 담긴 의도 이상의 진실을 서래는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게 직업 윤리를 저버리고 수사를 망친 이 사태가 모두 서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사랑은 주체의 빈틈을 넓히고 붕괴시킨다는 깨달음까지, 서래는 해준의 말에서 은폐된 사랑의 층위를 발굴해 낸다.

그리고 서래는 해준의 그 억압된 본심에 모든 것을 건다. 나는 서래의 이 태도가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를 성립시킨다고 생각한다. 서래가 사랑에 대해 취하는 방식, 이를테면 해준의 말과 행동을 반영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들, 해준을 안심시키고 불안하게 만드는 전략, 그리고 서로를 결속시키기 위해 전부를 거는 선택 같은 것들이 이 영화의 결을 조건 짓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은 과잉되었고 동시에 숭고하다.

그러나 나는 서래로부터 분출되는 멜로적 세계의 숭고함에 충분히 빠져 들지 못하는 것 같다. 무언가로부터 방해받는 느낌이라고 해도 될까. 이에 대해 나는 충분히 말할 자신이 없다. 다만 영화가 서래와 해준을 둘러싼 세계에 침잠하도록 가만 두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는 스타일과 서사의 표층부터 심층까지 해석해야 할 정보가 과잉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서래와 해준의 감정에 집중할 수 없는 것이다. 정보가 차고 넘쳐서 감각 과부하 상태에 빠지는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지나 사운드를 겹치지 않고 플롯의 구획을 정돈하거나, 카메라-스크린의 망막적 층위를 가시화하는 것을 자제했으면 어땠을까. 또는 초점을 활용한 광학적 수사학이나 표현주의적 미술과 조명의 즐거움을 조금만 드러냈다면……등. 그러니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다른 영화를 상상하게 된다. 서래와 해준에게는 수사적 소거법이 적용된 영화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랬다면 박찬욱의 영화가 아닐 것이다.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각자 할 수 있는 최대의 수사를 발휘한다고 느끼는 충만감이 박찬욱 영화의 핵심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어떤 지점에서 말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부족한 설명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설명도 존재를 포섭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 너무도 충만하기 때문에 어떤 말도 더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라면. 나는 이 영화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서래와 해준의 사랑이 지닌 과잉된 숭고의 가능성이 이 영화의 공백 없는 충만한 세계에서는 영속하지 못할 것만 같아 푸념을 하는 중이다. 과소의 결핍된 세계에 그들의 자리가 있을 것만 같아서.

바넷 뉴먼

모더니즘

대공황과 2차대전의 경험. 그러나 이런 위기 앞에서도 서구 회화는 “가장 깊은 경험을 묘사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 시대의 황폐함과 도덕적 충격을 표현하려면 유럽의 전통과의 단절이 필요했다. 예술의 본질은 교조의 반복이 아니라 창조적 저항에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뉴먼은 모더니스트다. 유럽의 전통과 단절하고 그것과 구별되는 미국의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미학적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여기에서 뉴먼은 ‘미’를 거부하고 ‘숭고’의 범주를 내세우게 된다. 이를 위해 Longinus, Burke, Kant, Hegel의 숭고론을 이론적으로 검토하고 거기에서 얻어진 결론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려고 함.

내용과 형식

뉴먼의 추상회화는 형식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의 작품에 보이는 형식의 추상성은 사유의 추상성과 관계, 즉 “추상적 사유”와 관련이 있다.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주제(subject matter)다.” 주제의 우선권. 그에게는 ‘어떻게 그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그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했다. 예술은 추상적 사유, 즉 형이상학적 진리를 추구한다.

추상과의 싸움

‘시각적 사실의 형식적 추상’이 아니라 숭고한 감정을 실어나르는 “살아 있는 물건”, “살아있는 매체”를 만들어내려고 함.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기하학적 형태는 묘사의 수단이 아니라 일종의 마술적 수단이다. 그것은 논리적, 수학적 추상의 결과가 아니라 인디언 회화에서 비롯된 형태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몬드리안을 비판한다. “그의 기하학(=완성)이 그의 형이상학(=exaltation)을 삼켜버렸다.” 뉴먼의 작품은 동시대의 색면회화(color field)나 옵아트와 달리 주제가 있는 회화이다. 하지만 이것이 미학이론의 시각화, 형상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학과 예술의 관계는 조류학과 새의 관계와 같다.”

숭고의 체험

그에게는 어떤 체험이 있었다. 언젠가 그는 자기의 그림에 스스로 압도당한다. “나는 거의 1년 동안 그 그림을 이해하려고 그것과 함께 살았다.” 후에 그는 “나는 내게 감명을 주는 진술을 만들었으며 그것이 내 현재 삶의 출발점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상징주의가 아니다. 언어로 번역될 수 없고, 연상을 통한 지시로부터 해방된, 그 자체가 절대적인 예술적 진술이었다. 그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체로서 “현전”으로서 체험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행동’, 즉 ‘사건’의 체험이다. 뉴먼은 자신을 추상화가라기보다는 액션 페인터에 가깝게 보았다. 한 마디로 뉴먼에게 회화는 숭고를 위한 심벌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숭고 그 자체를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료타르는 이를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 불렀다. 흔히 큰 그림은 먼 거리에서 보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뉴먼의 그림은 가까이서 보아야 한다. 뉴먼의 그림 앞에 서면 관찰자는 열광을 경험하게 된다. 혹은 감정, 감각의 물결을 뒤집어 쓰게 된다. 뜨거운 숭고와 차가운 시각적 사실 사이의 동요가 뉴먼의 캔버스의 제의적 효율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주제영역

(1) 창조의 행위와 사건(창세기=Genesis의 연출).
(2) 위치함의 행위와 성스러운 장소(“내 목적은 환경이 아니라 장소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 장소는 ‘공간’이 아니라 ‘장소’, 즉 유태교적 의미의 Makom이다. “네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알라.”)
(3) 영웅적, 숭고한 인물들.
(4) 빛.
(5) 존재의 상태.

zip

이러한 형이상학적, 영웅적 경험이 바로 매체를 변형시키려는 예술의 투쟁, 예술가 자신의 투쟁. 예술적 창조=신적 창조라는 유비. 바로 이것을 통해 숭고함에 ‘참여’하게 된다. 굳이 이를 위해 높은 산, 넓은 바다의 묘사가 필요하지 않다. 화면을 거의 무(無)로 돌림으로써 창조를 위한 신의 공간을 만들려 함. 이를 료타르는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 부름.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수직선(“zip”)은 어떤 초자연적인 가르침, 즉 oneness와 placeness의 영적 긴장을 표현한다.

숭고의 부정적 묘사

숭고는 노랗지도 파랗지도 빨갛지도 않다. 그는 예술에서 자연을 배제하려고 했다. 색채는 “사고의 복합체” 속에서 파괴되고 해체되어야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색으로 이루어진 부분들이 아니라 전체성과 그것의 효과였다.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 하랴> 다양한 색채-> 3원색->이윽고 전체 속에서 사라지는 영점. 형이상학적 기능을 위해서 형태와 색채는 사라진다. 크기, 모양, 색채, 재료에 관계 없이 ‘일자'(Oneness)가 되는 것, 그 일자성(oneness)를 전달하는 것이 회화. 따라서 emptiness가 필수불가결한 배경이 된다. 총체성과 공허함의 모순적 결합. 존재와 부재의 결합. 세속예술을 통한 종교예술의 효과. 이를 위해 체->면->선->점… 이윽고 모든 형상은 점이 되어 사라진다.

숭고와 시뮬라크르

-현대철학과 현대예술의 동형성에 관하여-

사물  

발터 벤야민은 복제의 등장으로 아우라가 파괴되는 것을 ‘현대'(Moderne)의 징후로 보았다. 그에게서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나타남”이라 규정된다. 이 표현 속에 들어있는 “나타남”이라는 낱말을 우리는 ‘현전의 체험’이라는 익숙한 표현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일회성과 지속성”을 가진 원작과는 달리 기술복제의 산물들은 그저 “일시성과 반복성”만을 가질 뿐이다. 하지만 이 일시적으로 반복되는 복제물들은 단지 원작을 베끼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원작 자체에 존재론적 영향을 끼쳐, 현실성 혹은 현실감의 상실을 가져온다. 그것들은 “사물의 역사적 증언가치”를 위협하고, 그 결과 “위험에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사물의 권위이다.”

벤야민이 살던 당시에 복제기술은 단지 원작을 베끼는 수준에서 벗어나 창작과정 자체에 변화를 초래하고 있었다. 이미 드가는 창작에 사진을 활용한 바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과 앤디 워홀이 모델 없이 오직 복제물인 사진만으로 작업을 하기 훨씬 이전에, 예술에서는 이미 사물성의 상실이 시작되고 있었다. 가령 모네의 <루앵 성당> 연작에서 돌로 된 스콜라 철학은 그 견고한 사물성을 잃고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흐늘거리는 여러 장의 시뮬라크르들 속으로 해체된다. 이 시뮬라크르들에 다시 견고한 사물성을 되돌려주려 한 세잔느는 사물의 마지막 구원자였는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 구원의 시도가 좌초한 지점에서 재현을 포기한 현대예술이 시작된다.

“시뮬라크르는 단순히 하나의 복사물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복사물의 개념 그리고 모델의 개념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 들뢰즈가 플라톤을 대신하여 이렇게 말했을 때, 그는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 혹은 ‘사물의 권위’의 상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플라톤이 우려하고 벤야민이 환호한 대로, 복사물의 존재는 그것이 복제하고 있는 원작에까지도 존재론적 영향을 끼친다. “일회성과 지속성”을 갖는 사물의 세계가 서서히 “일시성과 반복성”을 갖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로 변해가는 것, 그리하여 도처에서 “사물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이, 전통과 뿌리를 상실하고 부유하는 ‘현대’의 시대적 징후다.

이 징후가 벤야민에게는 기술의 진보로 실현된 민주주의 문화의 특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문화보수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존재의 근원에서 멀어지는 몰락의 징후일 뿐이었다. 시뮬라크르는 그저 예술만의 현상도 아니고, 지각만의 문제도 아니다. 어느새 그것은 우리의 생활세계 전체를 규정하는 개념이 되었다. 실제로 자본주의적 생산은 “일회성과 지속성”을 갖는 장인적 공예를 “일시성과 반복성”을 갖는 기성품의 대량생산으로 바꾸어 놓는다. 뒤샹은 대량생산된 레디메이드를 예술에 도입함으로써 자본주의하에서 유일하게 유일물을 생산하던 예술가의 장인적 창작을 해체시켜버렸다. 그리하여 또 다시 “위험한 상태에 놓인 것은 사물의 권위다.”

기호

줄리아 크리스테바와의 대담에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기호학이 가진 두 가지 모순되는 측면에 대해 언급한다. 한편으로 그는 기호를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규정한다. 이때 한 기호에 의미를 주는 것은 물론 초월적 기의의 의식내적 ‘현전’일 것이다. 여기서 소쉬르는 근대의 형이상학자로 나타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소쉬르는 ‘기호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직 다른 기호와의 대립 속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경우 그 기호에 의미를 주는 것은 ‘현전’이 아니라 다른 기호와의 ‘차이’일 것이다. 여기에서 근대의 형이상학자 소쉬르는 돌연 탈근대적인 차이의 철학자로 나타난다.

낱말의 의미가 ‘차이’에 있다면, 설사 ‘현전’의 체험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눈앞에 ‘현전’하는 그 ‘기의’는 더 이상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차이에 의해 구조화된 언어 ‘내재적’ 현상일 것이다. ‘내재적 기의’란 결국 또 하나의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새로운 기표의 의미는 다시 또 다른 ‘내재적 기의’, 즉 또 하나의 기표에 의존한다. 기표의 밖으로의 초월의 도약은 불가능하다. 기표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의가 결국 또 다른 기표에 불과하다면, ‘기표+기의’라는 기호의 정의 자체가 위험해진다. 그리하여 데리다는 지붕에 올라간 후 사다리를 치워버려야 했던 어느 철학자처럼 어느 단계에선가 ‘기호’의 개념을 버릴 것을 제안한다.

현전의 형이상학의 붕괴는 이미 현대예술에서 재현의 붕괴로 예고되었다. 회화의 이념도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규정되는 것이라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근대회화는 ‘환영주의’의 원리를 따르고 있었다. 회화는 가시적 세계의 시각적 재현이며, 그것의 진리성은 원본과의 일치에 있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 회화는 외부 세계의 재현을 포기하고, 순수한 형태와 색채의 유희가 된다. 추상회화는 더 이상 사물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그 닮음을 통해 그림 밖의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이기를 포기하고,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 된다. 현대회화가 지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기호란 정의상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대리하는(‘stand for’) 것이다. 그러나 기호가 대리하는 것이 결국 또 다른 기호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호가 아닐 것이다. 기호가 아닌 기호,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기호의 예를 우리는 재현을 포기하고 대상성을 상실한 현대회화의 자기지시성(referentiality)에서 찾을 수 있다. 읽을 수 없는 문자의 모양을 한 앙리 미쇼의 작품은, 현전을 포기하고 초월을 지시하지 않는 기호, 기호 아닌 기호의 예술적 엠블렘이다. 칼리그람이 아닌 칼리그람은 말로 지시를 하지도 않으며 현전을 보여주지도 않는, 순수한 기표의 유희다. 현대회화는 기호를 흉내낸 기호, 즉 시뮬라크르다. 그리하여 오늘날 위험한 상태에 놓인 것은 기호의 권위다.

흔적

‘재현’의 에피스테메 근거한 근대의 환영주의 예술을 포기한 후 현대의 예술가들의 창작은 중세의 장인의 그것을 닮아간다. ‘아직’ 사물과 기호가 두 개의 존재질서로 나뉘어 재현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던 중세에, 장인들은 가시적 대상의 재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창작을 무엇보다도 ‘재료의 처리’로 이해했고, 이는 ‘이미’ 근대의 환영주의를 포기한 현대예술가들의 창작원리로 부활한다. 중세의 필사본의 미니어처, 중세 성당 안의 모자이크와 스테인드글라스가 현대예술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형태와 색채가 가시적 대상과의 닮음을 창조하는 데에 복무할 필요성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유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기표들 역시 초월을 지시할 의무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유희하는 시뮬라크르다.

볼프강 벨쉬에 따르면 데리다는 자기의 사상을 구축하는 시기에 현대의 추상예술, 특히 당시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앵포르멜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앵포르멜’이란 굳이 분류하자면 추상표현주의 계열에 속하나, 미국에서 발생한 ‘액션페인팅’과 달리 그리기의 행위성이 아니라 그 행위가 남긴 자취에 주목을 한다. 가령 물감을 칠한 인체가 지나간 흔적을 남기는 이브 클라인의 퍼포먼스를 생각해 보라. 미술은 이렇게 더 이상 가시적 대상을 ‘현전’시키지 않는다. 다만 우리 눈앞에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데리다의 사상과의 친연성은 명백하다. 데리다에게 의미란 한꺼번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초월을 포기한 시뮬라크르들 무한연쇄 속에 존재하는 듯 부재하는 듯, 그렇게 ‘흔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앵포르멜에서는 초기 추상과는 달리 ‘형태'(form)마저 해체된다. 중세의 장인들의 창작은 ‘재료’에 기하학적 ‘형태’를 주는 것이었다. 그 바탕에는 물론 기독교적으로 재해석된 플라톤주의가 깔려있었다. 마찬가지로 재료에 기하학적 형태를 준 초기 추상화가들, 가령 몬드리안의 작품은 비록 가시적 대상의 재현을 포기했으나 재현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감각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물의 비가시적 본질을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플라톤적이다. 하지만 앵포르멜은 다르다. 그것은 ‘형태’마저 해체시킨다. 그리고 ‘마티에르’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낸다. 여기서 재료는 형태로 관념화하지 않고 물질로 남는다. 데리다의 시니피앙 역시 소쉬르의 그것처럼 의식내적 현상으로 관념화하여 초월적 기의로 승화하지 않고 물질로 남는다.

상사

칼리그람은 현전의 형이상학을 위한 엠블렘이다. 칼리그람은 ‘말하기’와 ‘보여주기’를 통해 이중으로 의미를 고정시키는 데에 사용된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칼리그람은 다르다. 그것은 외려 현전을 파괴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할 토대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연작의 두 번 째 버전은, 그 어떤 것도 작품의 최종적 해석임을 주장하지 않는 여러 개의 시뮬라크르(“일곱개의 봉인”)로 해체된다. 여기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의미의 일의적 동일시는 불가능하다.

마그리트는 유사(ressemblance)와 상사(similitude)를 분리해 내고, 후자로 하여금 전자에 반대하게 만드는 것 같다. ‘유사’에게는 주인이 있다. 근원이 되는 요소가 그것으로서, 그로부터 출발하여 연속적으로 복제가 가능하게 되는데, 그 사본들은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약화됨으로써, 그 근원요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된다. 유사하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 반면 비슷한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퍼져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 (S.72)

마그리트의 작품에는 3차원 공간의 환영이 있다. 그리고 그 안의 대상들은 일러스트레이션을 연상시킬 정도로 정확한 자연주의적 묘사로 재현되어 있어, 현실의 사물을 쏙 빼닮았다.  하지만 닮음을 통해 지시를 하려고 했던 근대의 환영주의 회화에서와는 달리 마그리트에게서 유사성은 더 이상 현실의 대상을 지시하는 데에 사용되지 않는다. 그의 칼리그람에서 ‘닮음’은 현실의 대상을 지시하는 데에 늘 실패한다. 가방은 ‘하늘’이 되고, 주머니칼은 ‘새’가 되고, 나뭇잎은 탁자가 된다. 스폰지는 ‘스폰지’가 되기도 하나, 이 현전은 한갓 우연으로 나타난다.

유사는 재현에 쓰이며, 재현은 유사를 지배한다. 상사는 반복에 쓰이며, 반복은 상사의 길을 따라 달린다. 유사는 전범에 따라 정돈되면서, 또한 그 전범을 다시 이끌고 가 안정시켜야 하는 책임을 떠맡는다. 상사는 비슷한 것으로의 한없고 가역적인 관계로서의 시물라크르를 순환시킨다 (S.73)

그의 작품에 ‘닮음’이 있다면, 그것은 원본과의 유사성이 아니다. 원본이 없는 복제, 굳이 원본과의 일치를 전제하지 않는 시뮬라크르들 사이의 서로 닮음, 즉 상사일 뿐이다. 그의 그림은 원본과의 동일시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림의 의미는 탈동일화한다. 조형 요소의 의미는 소쉬르가 말하듯이 기표와 기의의 통일, 즉 현전이 아니라, 시물라크르들이 만들어내는 ‘차이’의 놀이 속에서 다양하게 무한히 전개된다.

이 전사술 덕분에 우리는 유사에 대한 상사의 우위를 알게 되었다. 유사는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을 재인식하게 하지만, 상사는 알아볼 수 있는 대상, 친숙한 실루엣이 감추어 못 보게 하고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을 보게 한다. 유사는 유일한, 언제나 똑같은 단언을 내포한다. ‘이것, 그것, 또 저것. 그것은 저것이다.’ 상사는 함께 춤추고 서로 의지하며 서로 겹치는 상이한 단언들을 (여러 겹으로) 배가시킨다. (S.76)

이 차이의 놀이를 통해 의미는 열려진다. 그리고 한번 열려진 의미는 이제 생산적, 창조적 역할을 발휘한다. 그것은 서로 춤추고 서로 의지하며 서로 포개짐으로써 단언의 의미를 다변화한다. 나뭇잎에는 나무가 들어 있고, 새의 형상이 들어 있다. 하늘은 비둘기 모양의 바다를 담고 있고, 맥주병은 자라나 당근이 된다. 유사성은 의미를 고정시키고, 우리의 지각을 고정시켜 ‘나뭇잎은 나뭇잎’이라는 동어반복의 진부한 진리를 말한다. 반면 상사의 놀이는 친숙한 사물의 질서가 가리는 세계의 측면을 우리에게 새로이 열어 보여준다. 유사성의 재현은 우리에게 가시적인 대상을 보여주지만, 상사성의 유희는 우리로 하여금 보게 만들어준다. 그리하여 여기에는 모종의 해방의 즐거움이 있다.

언젠가 이미지 그 자체와 그것이 달고 있는 이름이 함께 길다란 계열선을 따라 무한히 이동하는 상사에 의해 탈동일화되는 날이 올 것이다. 캠벨, 캠벨, 캠벨. (S.89)

숭고

“텍스트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명제는 기호의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언어적으로 분절되지 않은 세계, 기호의 체계로 구조화되지 않은 세계, 그 어떤 형이상학으로도 해석되지 않은 세계의 체험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결국 실재론과 관념론의 안티노미라는 의식철학의 낡은 패러다임이 오늘날 언어학적 전회를 거쳐 기호학적으로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칸트가 인식을 현상세계로 제한했듯이, 탈근대의 기호학은 유의미한 언표가 이루어지는 세계의 한계를 시뮬라크르의 현상계로 제한한다. 칸트에게 현상계 밖에 비록 언표될 수는 없으나 물 자체가 존재해야 했듯이, 시뮬라크르의 저편(dehors)에는 언표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곳은 숭고의 영역이다.

료타르는 재현을 포기한 현대회화를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 부른다. 숭고의 묘사에는 간접적 방식과 직접적 방식이 있다. 숭고의 간접적 묘사의 예를 우리는 낭만주의 화가들의 자연숭고의 묘사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숭고의 부정적 묘사의 예는 헤브라이의 신의 율법에서 찾을 수 있다. 야훼는 인간에게 눈에 보이는 사물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했듯이, 현대의 예술은 가시적 대상의 모방을 스스로 포기했다. 20세기에 들어와 회화는 재현을 포기하고, 음악은 조성을 파괴하고, 시는 의미를 포기하고, 연극은 부조리해졌다. 료타르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실은 숭고를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것, 그림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언어적 묘사와 회화적 재현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19세기까지 회화의 이상은 ‘아름다운 가상’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20세기의 회화는 ‘아름다움’도 포기하고, ‘가상’으로서의 성격도 포기했다. 그 결과 현대예술은 ‘숭고’의 미학을 따르게 되었다. 료타르는 그 대표적인 예로 버넷 뉴먼의 작품을 든다. 시뮬라크르는 모든 숭고한 것의 아우라를 파괴한다면, 커다라 색면의 병렬로 이루어진 뉴먼의 작품은 그와는 정반대의 체험을 매개하려 한다. “Sublime now”라는 그의 논문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의 작품이 매개하는 것은 ‘숭고’라는 아우라의 체험이다. 그런 의미에서 앤디 워홀과 버넷 뉴먼의 작품세계는 하나의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인지도 모른다. 워홀의 시뮬라크르의 뉴먼의 숭고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낡은 관념론과 실재론의 대립인지도 모른다.

현시

홉스와 데카르트는 낱말의 혼용을 막는 것을 철학의 임무로 생각했다. 의미를 고정시키려는 근대 형이상학의 강박관념은 한 낱말에 단 하나의 의미만을 대응시키려고 한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이상언어의 기획에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오늘날의 철학을 지배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충동인 것 같다. 데리다는 고호의 <구두>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마이어 샤피로와 하이덱거를 함께 비판한다. 서로 대립하는 두 사람이 모두 작품의 최종적 의미를 고정하려고 한다는 데에서는 일치한다는 것이다. 초월의 희망을 포기한 탈근대의 철학자들은 기호작용을 원본과 닮을 의무로부터 해방시키고, 그 결과 세계는 시뮬라크르의 유희가 된다. 시뮬라크르는 원본과의 닮음을 전제하지 않기에, 담론은 참, 거짓의 인식론적 기준 대신에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주는 창조성이라는 미적 기준을 따라 전개된다.

오늘날 진리는 인식론적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예술적 현시(presentation)로 존재한다. 현전의 포기라는 인식론적 회의주의의 멜랑콜리가 창조의 기쁨이라는 미적 낙관주의로 전화했다. 탈근대 철학자들의 글이 문학을 닮아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령 푸코의 계보학적 연구는 원본적 재현(representation originaire)이라는 아르토의 잔혹극을 연상시킨다. <쾌락의 활용>에서는 윤리까지 미학화하려 한다. 데리다의 글쓰기가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들뢰즈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토대로 감각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로티는 “구원적 진리” 대한 신학적 열망 대신에 “문학적 문화”를 갖자고 주장한다. 볼프강 벨쉬는 아예 탈근대의 철학이 “현대예술의 정신에서 탄생”했다고 말한다. 탈근대 문화의 유미주의적 경향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것이 담론의 생산에서 창조적 포텐셜을 갖고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니체적 창조의 기쁨에 들뜨기 앞서 먼저 이 모든 미적 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두 가지 현상에 대해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크게 두 가지가 필요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날로 가속화하는 시뮬라크르화에 대한 가치평가, 다른 한편으로는 현전의 형이상학을 파괴한 해체주의의 언어철학적 정당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언어는 세계를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세계 속에서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게임과 맞물려 돌아가는 실천의 차원을 배제한 언어철학은 기호학적 형이상학에 빠지게 된다. 이 실천의 차원이 프랑스의 기호학에서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데리다는 과연 언제 비트겐슈타인의 해체에 착수할 것인가?

참고문헌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in: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83
자끄 데리다,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 in: ‘입장들’ (박성창 편역) 솔 출판사 1992  
           V rit  en peinture, Paris 1978
장 프랑수아 료타르, <숭엄과 아방가르드> in : ‘포스트모던의 조건’ (유정완 외) 민음사 1999        
미셸 푸코, ‘이것 파이프가 아니다’ (김현 역) 민음사 1998
        ‘성의 역사 II-쾌락의 활용’ (문경자 외) 나남 1999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하태환 역) 민음사 1995
       , <플라톤과 시뮬라크르> in : ‘의미의 논리'(이정우 역) 한길사 1999
Wolfgang Welsch, in: ‘ sthetisches Denken’ Stuttgart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