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소녀백서>

이 영화는 어쩐지 슬프다. 이니드와 레베카가 짓궂은 장난을 치는 중에도 흘러 나오는 처연한 첼로와 피아노 선율 때문만은 아니다. 이니드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 속에서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궁극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과 그 다음에 따라오는 상징적 자살이라는 선택에서 일말의 절망을 느끼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신비한 버스를 타고 떠난 이니드의 다음 삶이 못마땅한 세상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었을지 염려하는 마음이 남아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극도로 까다로운 사람 이니드를 둘러싼 엉뚱한 사건들보다 이니드의 마지막 판단과 선택이 던지는 잔향을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이니드가 품고 있던 환상,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져 세상에서 자신을 삭제하고 새로운 삶을 도모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나는 항상 슬라보예 지젝이 언급한 소설 <세계들의 상점>과 <말타의 매>의 일화가 떠오른다. <세계들의 상점>에서 주인공 웨인은 특수한 약을 이용하여 다른 차원의 삶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노인을 만난다. 웨인은 한 번 경험해 볼지 말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가정사를 챙기고 일상을 영위하며 차일피일 미루면서도 그 생각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웨인은 잠에서 깨어 나고 노인은 만족스러운지 묻는다. 웨인은 당황하며 그렇다 답한다. 감자 배급을 받으러 서둘러 떠나는 웨인을 맞는 것은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세계다. 한편 <말타의 매>에서 주인공 샘 스페이드는 건설 현장에서 죽을 뻔한 경험을 한 후 갑자기 직장과 가족을 버리고 사라진 한 남자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았던 일을 말한다. 그 때 샘 스페이드는 그 남자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발견한 그 남자는 다른 도시에서 다른 이름으로, 그러나 놀랍게도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새로운 삶도 그토록 벗어나고자 한 것으로 돌아와 있다. 일반적인 지혜의 관점에서 단절은 이처럼 불필요한 일이지만, 지젝은 단절이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과문한 내가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렵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아마도 지젝은 나라는 주체와 삶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욕망이 산산조각 나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면, 욕망을 위기에서 구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삶의 단절은 필요한 일이라고 말한 것이리라. 설령 나로 하여금 욕망하게 만드는 그것이 공허한 표면에 불과할지라도, 그 공허한 대상에 대한 믿음을 다시 구축하기 위해 단절을 결행해야 한다고 말이다. 앞서 <말타의 매>의 그 남자가 새롭지만 다르지 않은 삶을 시작한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이니드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책임을 뒤로 하고, 나는 그래도 이니드의 새로운 삶이 이들과 같기를 바란다. 그가 결행한 단절이 위기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여기기를 바란다. 이니드를 태운 신비한 버스가 당도한 곳이 그저 또다른 유령의 세계일지라도, 머저리 같은 타인과 세계의 질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조차 품었을 불만이 다시금 이니드를 무너뜨리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이 정도라는 것을, 현실의 공허한 표지에 욕망을 매달아 놓고 견딜 뿐이라는 것을 절망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니드가 단절 후 마주해야 할 다음 단계일 것이다. 나는 이니드의 그 후를 응원하고 싶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프로듀서로 일해 온 찬실이는 평생 함께 작업해 온 감독의 돌연사로 한 순간 삶의 기반을 잃어 버린다. 작가주의 영화로 유명한 감독이 떠나고 난 후 뒤에서 실무를 챙겨 온 프로듀서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찬실이는 즉시 경제적 곤궁에 처하고 소명과도 같던 영화 만드는 일을 지속할 길도 찾지 못한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이 상황을 더 비참하게 느끼게 만든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이처럼 자신을 추동하는 근거를 잃고 삶의 나락에 빠진 찬실이에게 다시 일어서라고 응원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자기 반영적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찬실이가 영이에게 거절 당한 후 눈물 젖은 버스를 타고 돌아올라치면 주인집 할머니가 냉해를 입고 죽어 가는 꽃을 보며 “불쌍해라” 말하는 숏이 뒤를 잇고, 찬실이가 할머니의 시를 들으며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고 나면 다음 숏에서 소피의 프랑스어 수업 시간에 ‘너도 그렇다’라는 시를 읊는 영이의 목소리가 이를 이어 받는 것처럼, 영화는 스스로 찬실이의 감정을 반영하고 응답한다. 한겨울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숨 죽은 열매만 가까스로 매달고 있는 모과 나무를 바라보던 어느 외국인은 찬실이가 그 모과를 동일시하도록 이끄는 영화 자신, 그리고 작가의 응시를 전한다. 영화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찬실이의 마음을 살핀다. 귀신 장국영은 그 자체로 찬실이가 사랑하는 대상이 찬실이에게 되돌려 주는 반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오직 찬실이만 모른다.

여기서 이 영화의 감흥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찬실이가 절망에 빠져 자기 자신조차도 지각하기 힘들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화가 찬실이의 욕망을 전개하고 의인화한다. 찬실이는 모르는 찬실이의 마음이 곧 영화이고 그 뒤에 숨은 작가의 마음이 되는 세계에 참여하고 나면 우리는 찬실이를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처럼 확정된 태도의 세계가 단지 순진한 위로의 결을 넘어서게 만드는 것은 찬실이라는 인물 자체 덕분이다. 찬실이는 본래 자신이 사랑하고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데 진심인 인물이다. 영화를 더 이상 만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의 앞에 놓인 폐허가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찬실이가 맹목적이고 순진한 쾌락원칙 주의자라고 생각할 때쯤 찬실이의 다른 면모를 확인하게 된다. 찬실이를 측은히 여긴 배우 친구 소피가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하자 찬실이가 직접 일을 해서 벌겠다고 말할 때부터, 그가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원칙의 문제를 비껴가지 않고 투쟁하는 것과 함께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찬실이에게 영화가 알려 주려는 것은 “당신은 이미 당신이 원하는 것을 두고 계속 투쟁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찬실이를 향하는 이 메시지가 우리에게까지 반영되고 나면 이것을 단지 순진한 자기 승인의 기제라고만 말하고 싶지는 않게 된다. 우리는 투쟁하지 않는 것은 그것대로 치러야 할 대가가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찬실이가 사랑해 마지 않던 영화의 흔적을 폐기하고 영화 마을을 떠나려고 할 때 귀신 장국영의 눈물과 주인집 할머니의 시가 그를 멈춰 세운다. 지금 찬실이가 떠나려고 하는 그 곳이 갈증의 대상이 아니라 궁금한 대상이 되었다는 자기 고백을 떠올리면 찬실이는 앞선 두 붙잡음으로부터 끝내 자신이 외면할 수 없는 이끌림을 재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이를 예술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싶은 욕망에 대한 근본적인 각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만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찬실이에게 원경험을 새긴 영화 <집시의 시간>이 찬실이를 찾은 순간, 영화처럼 아코디언을 둘러 메는 찬실이를 카메라는 천천히 가까이 다가가며 바라본다. 집도 돈도 남자도 없이 청춘을 보낸 채 지루한 시나리오를 써 내려 가는 찬실이가 영웅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12월 비평의 편지 주제는 ‘집에서 본 영화, 영화관에서 본 영화’였다.(링크) 이 주제에 대해 내가 기대한 바는 사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다루었던,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관람 행위의 사회성에 대한 논의였다. 극장에서 보는 영화만이 영화적 체험의 본령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나는 언제나 벤야민의 이론을 떠올리며 의식하고 있었다. 벤야민을 사랑하지만 나는 이 이론에 대해서만큼은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벤야민을 오해해 오고 있었거나.

오랜 시간 수많은 시네필로부터 들어 온, 암실(Darkroom) 속에서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본다는 것의 고유함과 위대함을 찬양하는 태도는 라이트룸(Lightroom)의 시대에도 다른 환경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취향의 편협함에 불과하다. 그러나 벤야민이 말하는 극장이 가능케 하는 집단 관람의 사회성은 다른 문제였고, 그것을 영화의 고유한 체험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게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중 이주연의 영화음악에서 이상용이 하는 말을 들으며 영감을 받아 오래 전 트윗한 적이 있었다.(링크) 이를 다시 부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역사 초기에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와 함께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도 있었다. 키네토스코프는 만화경과 같아서, 뷰파인더 같이 작은 창을 통해 작은 암실 통에서 영사되는 영상을 감상하는 장치다. 이것은 오직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기술복제시대의 초기는 더 많은 관람 전파를 위해 거대한 스크린과 거대한 암실이 필요했고 영화 보기의 방법으로 시네마토그래프가 승리했다. 그러나 디지털 복제가 가능한 현대에 와서는 각자의 만화경, 키네토스코프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것이 이상용의 이야기였다.

영화적 환상에 대한 사적 경험이 집단적으로 관계 맺으며 감상과 비평적 태도가 사회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영화적 체험이라고 한다면, 암실의 거대한 스크린은 당대의 기술적 한계에서 연유하는 조건이었을 뿐, 극장 바깥 라이트룸 세계의 스크린에서도 그 체험은 가능하다.

24장의 사진이 모여 1초의 영상을 이루고 숏이라는 파편이 모여 총체적 작품이 되는 영화적 형식이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적 체험은 극장 안에서조차 사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다. 그것을 집단화하고 사회화하는 기능이 암실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이유가 라이트룸 시대에는 없다.

벤야민이 말하고자 했던 영화적 체험, 사적으로 고유하면서도 사회적인 체험은 기술복제가 가능한 예술로서의 영화가 지닌 가능성의 본질이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지만 그 가능성은 기술복제 자체에 있다. 필름과 극장보다 복제 기능이 더 확장된 시대, 라이트룸 시대, 디지털 키네토스코프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현 시대에 영화적 체험과 그 가능성을 여전히 극장과 암실에서만 모색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가능성을 갉아 먹고 혐오하는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