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빛>

예술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다. 청중과 관객 앞에서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일회적 순간을 딛고 예술은 오직 현존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라서 관객과 만나는 현재적 순간이 아니라면 영화를 이루는 다른 것은 그저 셀룰로이드 필름과 그 밖의 것처럼 사물의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예술, 영화가 사물 이상의 존재일 수 있는 것은 환상도 기억도 현재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능력 덕분일 것이다.

<작은 빛>에서 진무는 기억을 잃을지도 모를 뇌수술을 앞두고 훗날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한 기록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든다. 카메라에 담길 영상은 진무가 잃어버릴 기억의 보충물이다. 진무는 자신이 일하는 선반 공장의 작업 과정을 제외하고는 흩어진 가족을 만나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 데 시간을 쏟는다. 이 영화에 존재하는 세 개의 카메라 중 영화의 카메라는 진무와 그의 가족에게 벌어지는 변화를, 진무의 카메라는 흩어진 가족에게 한 데 모여 산 과거를, 그리고 말미에 등장하는 진무 아버지의 카메라는 이 가족에게 공통으로 새겨진 기억의 환상적 층위를 현재화한다.

진무는 기억의 누수를 막을 제방인 것처럼 카메라를 들고 카메라는 진무의 가족을 다시 모으기 위해 움직인다. 진무가 자신을 규명하기 위해 반드시 바라보아야 할 결핍의 장소가 가족에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운동이다. 어머니 숙녀는 정선에, 누나 현은 시흥에, 그리고 형 정도는 부천에, 뿔뿔이 흩어져 한동안 각자의 삶을 살아 온 것 같은 이들을 진무가 방문하면서, 우리는 아버지의 오랜 폭력이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음을 천천히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일견 아버지의 폭력이라는 외상적 기억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가족의 이야기로 보인다. 영화의 말미에 충격적으로 제시되는 무덤 속 아버지의 부패한 주검은 이 가족의 상처를 체현하는 끔찍한 물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이 장면을 향해 달려 왔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유일하게 스펙터클한 이 장면은 아버지에 대한 진무 가족의 원망과 증오라는 오랫동안 억압된 감정을 응축하고 있다. 영화는 가족들로 하여금 서로 함께 지낼 수 없도록 만드는 실체를 드러내어 직시하게 만든다. 오랜 세월 묻혀 있던 것은 아버지의 주검 뿐만 아니라 가족 각자를 고립시키는 상처에 대한 침잠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주검을 직접 손에 쥐는 행위를 통해 진무의 가족은 과거 아버지가 자행한 폭력이 입힌 상처를 공유하고 서로에게 인정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상징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진무의 가족이 직시해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상처만이 아니다. 그들은, 또는 아버지는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가족의 삶을 상처로 지배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유령에 대해 아버지 당신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줘야만 한다. 이것이 진무 가족의 현재적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한 마지막 제의이다. 영화는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아버지의 관에 나무 뿌리를 박아 둔다. 이장을 포기하게 만들고 아버지의 주검을 가족이 직접 손에 쥐게 하기 위해. 이는 진무의 뇌수술을 앞두고 흩어진 가족이 재회하는 것이 너무 뻔한 서사이기 때문에, 또는 그것으로는 너무나도 미진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죽은 아버지를 극복하고 가족을 회복한다는 목적지에 완벽하게 도착하기 위해 이뤄지는 신적 개입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암시하는 가족 회복 여정의 이면은 매우 미묘하다. 이 영화는 가족의 복원을 위해 아버지를 벌하고 지우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오히려 아버지를 희구하는 욕망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주검 장면을 이어서, 주검을 담은 상자를 든 진무와 그 뒤를 따르는 가족이 어둠에 갇힌 선산으로부터 빛이 내린 들로 천천히 내려오는 것으로 끝난다. 빛과 구도가 의미하는 태도를 따른다면 이 영화는 죽은 아버지를 제 손으로 모셔 오면서 비로소 가족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 준다. 비록 주검의 모습이라 해도 아버지의 자리가 채워짐으로써 다시 가족이 완성되는 것이다.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동시에 필요로 하는 이 상태는 진무의 엄마 숙녀의 대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진무야, 어제 엄마가 얘기 잘못 한 것 같다. 네가 아빠 양복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걸 보니까, 네 아빠한테 좀 고맙더라.”

누나 현은 어머니의 피를, 형 정도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은 의붓 남매다. 정도가 숙녀, 현과 왕래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들 가족이 흩어진 것은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혼한 현과 함께 사는 조카 호선을 포함해, 아버지의 자리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정도를 어머니, 누나와 잇는 가교가 되고, 어머니의 남편에 대한 증오를 고마워 하는 마음으로 전치시키기 위해 진무가 존재한다. 진무는 아버지의 유산이다. 유일하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를 모두 물려 받은 진무만이 이 가족을 복구할 자격을 갖추고 있다. 진무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다른 태도를 제공한다. 서로가 혈육으로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완성시켜 주는 물질적 담지자로서의 아버지를 진무 자신을 통해 다시금 유추하도록 하는 것이다.

영화는 진무의 뇌수술 예후가 어떠했는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바로 선산에서 아버지의 주검을 맞이하는 마지막 시퀀스로 넘어 간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시퀀스가 기억을 잃어버린 진무의 환상인지 실제 벌어진 일인지는 단언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환상의 수준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칭하는 욕망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이 가족을 복원하고 싶다는 것. 어떤 위험이란 이를테면 아버지를 달리 기억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묻힌 선산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시퀀스에 느닷없이 삽입된 장면은 이 같은 분열적 환상을 드러낸다. 진무가 어머니 집에서 아버지의 유품인 카메라와 사진을 발견하고 그것을 한참 살펴 보는 이 장면은 그 시점도 알 수 없이 시퀀스 안에서 부유하는데, 이는 가족을 지배하는 외상적 기억의 실체처럼 등장한 나무 뿌리가 파고 든 아버지의 끔찍한 해골의 충격을 필사적으로 덮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여느 가족처럼 평온해 보이는 사진 속 허위적 환상으로라도 덮을 수만 있다면 남은 우리 가족의 결속을 지킬 수 있을 텐데.

과묵한 적자이자 내내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드러낸 적 없는 진무의 여정을 통해 영화는 어쩌면 소위 정상 가족을 욕망하는 자의 분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빛을 향해 걸어가는 가족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진무의 손에 들린 상자 속 부패한 주검이 계속 떠오르는 것을 나는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모르겠다. 부패한 주검은 진무 가족의 무궁한 결속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닌가.

<마녀 배달부 키키>

1. 내가 키키를 처음 만난 건 대학 신입생 때였다. 제목만 들어 온 <마녀 배달부 키키> 비디오 테입을 학교 어학실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침묵이 흐르는 어학실 안에서 흥분한 입을 애써 막아야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드디어 보는구나. 하지만 들뜬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내가 발견한 그 테입은 한국어 더빙도 자막도 없는 일본판이었다. 그 때는 일본 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드문 경험을 했을테지만 그림만으로는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기 어려웠고, 한동안 키키는 내게 미지의 사연을 간직한 아이로 남았다. 개인사를 끄집어 낸 것은 키키와의 완벽한 첫만남이 무산된 것이 여전히 아쉽기 때문이다. 그 때 키키의 이야기를 온전히 만날 수 있었다면 나는 키키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부모의 품을 떠나 낯선 서울에 홀로 던져진 스무 살의 내가 달리 구하지 못했던 위로와 용기를 여기서 얻지는 않았을까.

2. 열 세 살에 독립해 낯선 바닷마을 도시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고군분투하는 키키를 나는 이제 그저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나도 여전히 키키처럼 타인을 만나 관계를 만들고 세상에서 내가 해 낼 몫을 찾는 데 노심초사하는 경험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처 받거나 낙담하고 두려움에 휩싸여도 삶은 이 과정을 매번 되풀이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던 키키가 바닷마을에 도착하고 이내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노라면 그 감정이 또렷하게 와 닿아서, 그런 마음의 움직임은 예감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내가 익숙해지지 못한 문제라는 생각에 빠진다.

3. 내가 키키의 낙담에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마음 먹기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새겨진 것으로부터 발현되는 불가피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키키가 노부인의 의뢰로 그의 손녀에게 청어 파이를 배달하면서 직감적으로 갖게 되는 손녀에 대한 적대감은 손녀의 불친절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계급적 괴리에서 연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키키는 타인과 세상에 대해 적대하며 존재할 수 없다. 키키의 마법 능력은 선의를 잃는 순간 상실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키키가 자기 존재의 본질을 세상에 도움이 되는 마녀로 규정하는 한 그는 적대를 마주하고서도 삶을 의지로 낙관하고야 말 것이다.

4.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비행의 쾌감은 중요하다. 그의 작품이 원초적이고 불가능한 환상을 긍정한다고 볼 수 있는 징표가 비행 장면에 새겨져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에서 나는 것의 쾌감과 실감은 바람으로부터 일어난다. 찰랑이는 머릿결과 옷깃이 창공을 날면서 부딪치는 공기 저항의 촉각을 시각화한다. 모든 프레임을 손으로 하나 하나 그려 내야 하는 고된 셀 애니메이션 작업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시종일관 생략하지 않고 공 들여 묘사하기를 고집하는 것은 인물을 감싸고 도는 공기, 바람이다. 필모그래피에 ‘바람’이 들어가는 제목이 두 작품 있을 정도로 하야오는 바람을 사랑한다. 바닷마을의 계단 꼭대기 또는 수풀 우거진 언덕 위에서 하늘거리는 키키의 단발 머리로부터 바람을 생경하게 감각하다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세계를 낙관하는 근거는 우리가 여전히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고 나면 세상에서 선의는 드물고 항구적이지 않다고 여기게 된 내가 사실은 세계를 감각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타부>

미겔 고미스의 2012년 영화 <타부>는 무성영화 시대 표현주의 거장 무르나우(Friedrich Wilhelm Murnau)의 1931년 영화 <타부(Tabu : A Story of South Seas)>를 참고한다. 무르나우의 유작 <타부>는 폴리네시아의 보라보라 섬에서 신의 제물로 바쳐질 운명에 처한 레리와 그의 연인 마타히의 도피를 다룬 이야기인 반면, 고미스의 <타부>는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 아우로라와 벤뚜라가 나눈 금기를 넘은 사랑의 기억을 반추하는 이야기다. 고미스의 <타부>는 현재 시점을 다룬 1부 ‘실락원’과 과거를 회상하는 2부 ‘낙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무르나우의 <타부>의 구성을 뒤집어 배치한 것이다. 2부 ‘낙원’은 16mm 필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무성영화의 형식을 취한다. 고미스의 <타부>는 이렇게 무르나우의 영화를 끌어 와서 영화 역사의 여명기를 소환하고 추억한다.

고미스의 <타부>에서 무성영화의 형식은 현실과 환상을 나누고 연결하는 표지판이다. 1부 ‘실락원’ 앞에 짧게 덧붙인 무성영화는 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에 대한 느슨한 암시이다. 아내를 잃고 깊이 상심에 빠진 탐험가가 아프리카의 어느 강에 뛰어 들고, 언젠가 악어의 모습으로 아내의 영혼과 함께 한다는 짧은 액자 영화가 끝나면, 1부의 부제가 나오고 삘라르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 삘라르가 보고 있는 영화가 앞선 무성영화인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35mm와 16mm, 유성영화와 무성영화, 그리고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이질적 경계를 견디기 위해서는 삘라르-보는 자와 액자 영화-보이는 것으로 잇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이 영화에서 무성영화의 형식은 무언가 재현된 상상임을 알려 주는 장치다. 그런 의미에서 2부 ‘낙원’은 지안 루까 벤뚜라가 전하는 말이 이미지로 재현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고쳐 말하면 이 영화의 2부는 벤뚜라가 아니라 삘라르에 의해 재현되는 환상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를 ‘Be My Baby’라는 노래로부터 유추한다. 1부에서 삘라르는 그의 미술가 친구와 함께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앞선 1부의 시작 지점과 마찬가지로 삘라르가 무슨 영화를 보고 있는지는 제시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삘라르가 보는 영화에서 로네츠(The Ronettes)의 ‘Be My Baby’가 흘러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노래는 삘라르가 폴란드에서 여행 온 마야와 마주친 후 헤어져 걸어가는 직전 장면에서부터 겹쳐서 들린다. 치매가 심해지는 것 같아 보이는 이웃집 아우로라에 대한 걱정, 아프리카의 빈곤과 생태계 파괴에 대한 것으로 보이는 세계 이슈에 대한 근심, 그리고 자신의 집에 방문하기로 한 마야가 약속을 어긴 데 대한 상심 같은 것이 뒤섞여 극장에 앉은 삘라르로 하여금 울게 만든 것일까.

‘Be My Baby’와 눈물은 2부에서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 아우로라가 벤뚜라에게 마지막 간절한 편지를 쓰고 상심에 빠졌을 때 포르투갈어로 번안된 ‘Be My Baby’가 흐르고 아우로라는 슬픈 얼굴로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은 노래가 흐르는 본 장면 앞 쇼트에서부터 노래가 겹쳐 흐르는 방식까지 동일하게 1부에서 삘라르의 눈물을 재연한다. 마치 삘라르가 아우로라의 마지막 편지를 자신의 경험으로 미루어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순간 나는 벤뚜라의 목소리를 이미지로 상상하고 재현하는 주체는 바로 삘라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의 무성영화 장치는 삘라르의 환상을 향하는 통로이며 이 장치의 카메라는 삘라르의 상상을 대변하는 눈인 것이다.

<타부>는 아우로라와 지안 루까 벤뚜라의 금기를 어긴 사랑의 기억을 삘라르가 이미지로 상상해 보는 이야기다. 아프리카 식민지에 정착한 포르투갈 지주 집안의 아우로라는 남편과 사이에서 아이를 임신한 시기에 이웃에 이사 온 벤뚜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 끝은 도피와 살인으로 치달은 파국이었다.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그 기억을 아우로라 생의 마지막 순간에 벤뚜라가 증언한다. 금기를 어긴 둘의 사랑은 짧지만 강렬해서 벤뚜라의 말처럼 사랑하는 시간 동안 미래는 애매하고 실없어 보였다. 도덕률을 위반하는 데 대한 죄책감과 근심도 아우로라와 벤뚜라가 서로에게 몰입하는 것을 방해할 법하지 않았다. 아프지만 아름답게 추억하는 그들의 사랑은 아우로라의 농장을 품던 타부 산의 그것처럼 시원적인 낭만과 죄악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아우로라와 벤뚜라의 위험한 사랑 이야기에 빠져 드는 동안 동시에 나는 이 이야기를 추억하며 보는 것이 온당한지 갈등하게 된다. 소위 불륜에 대한 도덕적 지탄의 감정 때문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세탁된 낭만성을 감지하면서 드는 불편함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여전히 제국의 얼굴을 하고 아프리카 식민지를 통치하던 시기 지주 계급에게 허락된 특권적 낭만주의를 어떤 향수의 감정에 취해 봤다고 생각하면 나는 몇 번이고 돌아서서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미 내게 자신 안의 갈등을 보여 주고 있었음을 뒤늦게 생각한다. 무성영화의 구간에서 때때로 이야기를 겉도는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아우로라가 저택 앞 마당에서 탁구를 치다가 비를 피해 집에 들어가면 카메라가 빗속에서 탁구대를 치우는 아프리카 원주민을 한참 동안 더 쳐다보는 것처럼 말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은 이 영화의 이야기에서 배제되어 있지만 동시에 영화에서 내내 얼굴을 비춘다. 백인 인물들이 내레이션 속에서 사건을 만들어 가는 픽션의 세계에 있는 동안 원주민은 존재 자체의 세계로 이야기 사이의 간격을 채운다.

이는 무성영화의 형식 위에 목소리 내레이션을 배치하면서 도모하는 무성영화적 실험이다. <타부>는 내레이션을 무성영화 시대의 자막 같이 활용한다.그리고 내레이션의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 여백, 잉여 공간을 늘려 놓는다. 이미지는 목소리를 재현한 후 이내 잉여 공간을 식민지 원주민으로 채운다. 그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본래 무성영화의 이미지가 사운드와 불일치함을, 그리고 삽입 자막의 단순한 재현 이상의 서사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 속에서 2부는 이렇게 읽힌다. (1부의 마지막 장면으로부터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벤뚜라가 말하는 동안 삘라르는 즉각적으로 그 말을 이미지로 상상해 재현한다. 이윽고 벤뚜라의 말과 말 사이 간극 속에서 삘라르는 식민지 원주민이라는 다른 이미지를 상상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렇게 내레이션 목소리는 표면의 이야기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반면, 잉여를 채운 이미지는 그 이면에 자리한 침묵하는 다른 진실을 드러낸다.

결국 <타부>는 무성영화적 실험을 통해 벤뚜라의 이야기 목소리가 누락하는 타자를 상기하려는 시도다.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제국과 식민의 역사에 대한 죄의식이 자꾸 튀어 나와서 이야기의 균열된 틈으로 원주민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침입해 괴롭히는 상황을 다룬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내적 갈등 상황의 주인공은 물론 삘라르일 것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자 이타적 세계주의자인 삘라르의 면모는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이 영화의 상상적 자아가 삘라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왜 아우로라를 걱정하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것일까.

무르나우의 <타부> 속 연인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원주민의 체제로부터 스스로 해방되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제국이 보기에는 말이다. 이같은 생각이 내포한 오리엔탈리즘의 위험을 인식했음이 분명하게 미겔 고미스는 제국 백인의 사랑으로 이야기의 주체를 비틀었다. 여기서 감지되는 명백한 의도를 따라, 고미스의 <타부>가 무르나우의 <타부>를 무성영화의 가능성 안에서 반성하고 재발견하려는 시도라고 이해하려면 2부 ‘낙원’의 이야기를 향수 어린 태도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고미스의 <타부>는 제국의 아우로라와 벤뚜라를 둘러싼 이야기의 세계, 그리고 그 바깥에서 엄존하는 침묵하는 이미지의 세계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남긴다. 삘라르에게는 무엇이 실없는 것이었을까. 유념해야 할 것은 아우로라와 벤뚜라가 사랑에 빠진 그 시절 타부 산 어귀 아프리카의 식민지에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원주민의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 영화에 대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이야기에 현혹되지 않고 이미지를 반성하며 다시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