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닝 스톤>

밥은 어린 딸 콜린의 첫 성찬식 드레스 만큼은 빌려 입히고 싶지 않았다. 밥은 다가오는 성찬식이 콜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콜린이 어떻게 여기든 밥의 마음은 그렇다. 그 날 콜린은 밥의 마음에 흡족한 새 드레스를 입고 제단에 올라야 한다. 실은 새 드레스와 구두를 살 100파운드 남짓이 밥에게는 없다. 요금을 내지 못해 전화도 끊길 만큼 형편이 어려운 밥은 지금 실직자다. 그런 밥에게 콜린에게 입힐 새 드레스는 사치스러워서 허영에 가깝다. 그래도 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새 드레스를 살 돈을 만들겠다고 고집한다.

<레이닝 스톤>을 움직이는 감정적 힘은 밥의 고집이다. 나는 신념이 아니라 고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밥은 가부장의 얼굴을 하고 종교 의식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한다. 성찬식의 새 드레스는 딸 콜린이나 아내 앤이 아니라 밥의 의지다. 밥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기세다. 그 고집이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빈곤의 고난을 가중시킨다고 해도 말이다. 이를 타당하게 설명할 이론이 밥에게는 없다. 차라리 밥은 가부장의 권위와 종교적 의지라는 텅 빈 고집을 밀어붙이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종교적 신념과 가족의 생계를 모두 책임 지려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고군분투로 정리하고 싶은 유혹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반문한다. 밥은 왜 콜린의 성찬식 새 드레스를 고집하는가. 그는 무엇에 대항하여 그것을 고집하는가. 콜린의 새 드레스가 고집해야 할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가 가난한 실업자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산층이었으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 드레스 한 벌을 두고 밥은 자신의 가난과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가부장제와 종교라는 밥의 이데올로기적 고집이 빈곤 앞에서 세상과 불화하는 방식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이 영화에서는 빈곤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적 도덕률과 불화하는 다양한 양태를 지켜볼 수 있다. 밥과 이웃집 친구 토미는 방목하는 양과 보수당 당사 앞 잔디를 훔치며, 토미의 딸 트레이시는 마약을 팔아 돈을 번다. 그들은 돈을 구할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할 것이다. 건너 집 가난한 30대 여성은 절도 행위로 검거된 후 세 아이를 두고 목숨을 끊는다. 밥은 사채업자의 협박에 저항하다 살인 사건에 휘말리며, 밥을 도우려는 신부는 그가 사채업자의 사망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논쟁적인 상황은 시종일관 빈곤을 향하고 있다. 즉 가난한 이들에게 빈곤은 도덕에 선행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빈곤은 이데올로기의 텅 빈 실체를 드러낼 뿐이며, 노동은 신성하다는 좌파적 이데올로기도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 트레이시가 쥐어 준 용돈을 손에 구겨 넣고 혼자 서럽게 흐느끼는 토미에게 나는 가부장제적 맥락에서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성찬식에서 밥의 비밀을 숨긴 신부가 밥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 조각을 건네는 장면에서는 가련한 밥을 종교적 맥락 안에서 안타까워 하는 감정을 키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영화가 이데올로기적 현실과 일으키는 긴장은 빈곤에 처한 삶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맥락을 경유하려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모순은 중층 결정된다는 오래된 정식을 영화적으로 실천하려는 것처럼.

사채업자가 예고 없이 밥과 앤의 집에 들이닥쳐 빚을 갚으라고 협박하는 장면에서 콜린의 눈빛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사채업자가 테이블을 쓸어 버리며 앤을 윽박지르는 동안 이를 지켜보는 딸 콜린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그것은 상상할 법한 것이라기보다 현실에서 있을 법한 얼굴이다. 이 자본주의적 트라우마를 담을 감정이 아직 콜린에게는 없다. 두려움에 떨거나 폭력에 분노하는 것은 오히려 어른의 몫이다. 그 순간 콜린은 빈곤이 야기하는 사회적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텅 빈 감정으로 관찰한다. 황급히 돌아온 아빠 밥에게 사채업자가 엄마의 결혼 반지를 빼앗아 갔다고 전하는 콜린의 목소리는 침착하다. 이처럼 담담한 콜린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 텅 빈 목격자에게 세계의 진실이 폭로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제 콜린에게 세계의 진면목은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아니라 앤이 살피는 신문 모퉁이의 구인 광고나 밥이 사채업자에게 진 빚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레이닝 스톤>은 밥과 토미,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구원할 수 없다. 성찬식이 끝난 후로도 그들 앞에는 새로운 고난이 기다릴 것이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실직 노동자가 처한 빈곤의 비참은 밥의 장인이 전하는 구호 이상의 문제이며, 밥의 비참이 긴급한 데 비해 세계는 강고하게 모순적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세상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해 내는 성취일 것이다. 차를 잃고 난망해 하는 밥과 토미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함께 거리를 서성이는 펍의 이웃 같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세계에 표방하는 유일한 낙관일 것이다.

영화와 예술이 인간 세계를 향해 말을 거는 매혹적인 타자라고 할 때 우리는 흔히 그 매혹성에 집중하게 된다. 분명 어떤 작품은 발굴해야 할 미지의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다. 그러나 <레이닝 스톤>을 비롯한 켄 로치의 영화들은 그런 태도와 거리가 멀다. 숏과 숏 사이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그의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작업으로는 언제나 부족한 시도로 보인다. 그의 영화는 오히려 미적 존재감을 표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작품이 애쓰는 것은 지금 이 세계에 필요한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구체적 삶을 이해하고 구하기 위해 필요한 말을 꺼내고 있는가에 관심을 쏟는다는 점에서 켄 로치의 영화는 존재의 고유성을 다루는 예술의 세계에서 별나게 고유한 존재다. 켄 로치에게 영화적 순간은 미학적 고유성을 증명하는 순간이라기보다 사회적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오해가 없도록 덧붙인다면 절제된 미학이 사회적 진실과 만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레이닝 스톤>에서 콜린의 눈빛이 실업과 빈곤이 야기하는 메마른 상처의 실체를 드러내듯이 말이다. 그것이 놀랍고 존경스럽다고 지금껏 생각해 왔다. <레이닝 스톤>을 만난 이후부터 나는 줄곧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

<아사코>

아사코와 바쿠는 어떻게 사랑에 빠졌을까. 둘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사진 전시회를 보러 미술관을 들른 날 우연히 만난 아사코와 바쿠는 아이들의 콩알탄 놀이가 일으키는 소음 속에서 갑자기 입을 맞추며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아사코와 바쿠의 첫만남처럼 영화 <아사코>는 보는 이를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아사코>는 시종일관 감정의 결이나 인과의 구조물을 쌓아 올리지 않고 갑작스럽게 상황과 행위를 제시한다. 아사코와 바쿠가 갑자기 사랑에 빠지고 어느 날 바쿠가 갑자기 사라진다. 그리고 바쿠와 같은 얼굴을 한 료헤이가 갑자기 등장한다. 이 영화의 서사를 인과의 고리 안에서 납득하고 이해하기란 난망하기 때문에 계속 갑자기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설명하게 된다.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방문한 자리에서 료헤이의 친구 쿠시하시가 마야의 TV 연기를 본 후 갑자기 공격적으로 혹평을 하는 씬은 아직도 왜 이 상황이 필요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앞서 말한 콩알탄의 소음 속에서 아사코가 바쿠의 갑작스런 키스를 그대로 받아 들이며 연인이 되는 첫 시퀀스부터 아사코가 얼마나 수동적 여성 캐릭터의 전형을 보여 줄지 걱정이 앞서게 된다. 이 영화가 그저 통속적인 이야기 같다는 의구심이 꼬리를 물게 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실제로 그런 우려의 경계 위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 이후의 시간이 뜻밖에도 오랫동안 이 영화에 남는다. 무엇이 나를 이 영화에 머물게 하는 걸까.

영화 <아사코>의 세계는 말하자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세계다. 이유는 모르고 사태가 주어진다. 그런데 그 때문에, 이유를 미처 알지 못한 채 사태가 벌어지고, 그런 채로 사태 안에 자신이 남겨지기 때문에 무언가에 끊임 없이 붙들리는 세계다. 그 무언가가 벌어진 사태인지 그 사태의 이유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것이 벌어진 이후 홀린 듯이 무언가에 붙들려 있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아사코를 붙드는 것이 바쿠도 바쿠가 떠난 이유도 아니라 미결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태로서는 끝났지만 마음 속에서는 끝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 끝나지 않는 아사코의 마음 속 사태는 어쩌면 바쿠조차 끝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사코는 바쿠의 손을 붙잡고 홋카이도를 향하는 길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내 마음 속 사태는 이제 더 이상 바쿠로 인한 것이 아님을. 이윽고 바쿠를 돌려 보내고 홀로 제방을 오른 아사코에게 들리는 거친 파도 소리는 이런 깨달음을 드러내기도 하겠지만 여전히 아사코를 붙들어 흔드는 미결감의 혼란도 들려 주는 것만 같다.

이 영화에서 미결감의 정조를 눈치 채는 것은 사후적이다. 그보다 앞서 맞닥뜨리는 것은 다소 마술적이라 할 사건의 전개다. 다시 첫 시퀀스로 돌아가면 미술관을 연달아 나서는 바쿠와 아사코의 걸음 위로 깔리는, 음과 음 사이를 이상하게 움직이는 음악조차 주술적인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아사코는 바쿠를 만나기 전 미술관에서 어느 쌍둥이의 사진을 매료된 듯 한참 쳐다본다. 그 순간 바쿠를 만나 연인이 되고, 바쿠가 떠난 2년 후에는 바쿠를 그대로 닮은 료헤이를 만나 연인이 된다. 마치 사진 속 쌍둥이가 바쿠와 료헤이를 암시한 것처럼. 하루요가 아사코에게 “저 남자 너를 울릴 거야”라고 하고 나면 바쿠는 어느 날 구두를 사러 나가서 사라져 버린다. 바쿠가 아사코를 떠날 것이라는 예감은 빵을 사러 나서는 바쿠를 향해 손 흔드는 아사코를 멀어지듯 찍은 트랙 아웃 쇼트에서도 미리 제시된다. 영화가 앞서 제시한 것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풀어 가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예는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앞서 제시한 것을 재연하는 방식으로 풀어 가는 것도 찾을 수 있다. 바쿠가 아사코에게 그랬듯이 아사코는 료헤이에게서 갑자기 떠난다. 아사코가 바쿠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료헤이에게서 멀어지는 이 장면은 앞서 빵 사러 나서는 바쿠에게 손 흔드는 아사코를 담은 장면과 마찬가지로 트랙 아웃 쇼트로 찍혔다. 그리고 아사코가 바쿠를 돌려 보내고 료헤이의 오사카 집을 찾았을 때 아이들의 공놀이 사이에서 료헤이를 만나는 장면은 영화 첫 시퀀스의 콩알탄 장면을 반드시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도호쿠 지역에 자원 봉사를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고속도로에서 나왔어?”라고 묻는 대사는 바쿠와 홋카이도로 가는 길에서 똑같이 반복된다. 이처럼 앞선 것을 실현하거나 재연하면서 영화는 기시감이라는 정조를 만든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무심코 운명처럼 받아 들이게 만들고 뒤돌아 서면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어 당혹케 하는 기시감의 혼미함이 이 영화를 감싸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무언가 잔여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아사코의 말처럼 영화 속 모든 일이 뜻 모를 긴 꿈 속 같아서 깨어나서도 한동안 그 꿈에 더 머물고 싶어져서인지도 모른다.

솔직해져야겠다. 내가 이 영화에 사로잡힌 것이 사실 이처럼 묘하게 풍기는 정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실은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아사코가 결국 선택한 행위를 이해하고 싶어 한참 동안 머물러야 했다. 아사코가 주어진 것에 매료되고 그것에 충실히 매진하는 안전한 수동성의 패턴을 끊고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바쿠가 아니라 료헤이와의 관계를 복구하려고 단호해지는 것에 나는 놀랐다. 아사코는 그 때까지 어디까지나 타자의 부름에 충실히 반응하고 응답하는 인물이었고 바쿠로 인해 삶 전체가 어떤 상처에 지배당하는 인물이었다. 아사코가 다시 나타난 바쿠의 손을 잡고 료헤이에게서 떠나는 것은 아사코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영화가 아사코의 미결감을 동정한다면 기꺼이 그럴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 순간 아사코를 향하는 비난에는 억울함마저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료헤이 앞에서 날선 비난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동안 아사코의 미결감은 더 이상 보살펴야 할 것이 아니게 된다. 아사코는 이 순간 영화의 세계가 보이던 동정에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사코는 그 동안 이루어진 영화의 작동 법칙과 달리 영화보다 먼저 말을 뱉는다. “바쿠, 더 이상 안 되겠어. 돌아가야 해. 료헤이가 있는 곳으로. 더 이상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그리고 제방 너머 파도 소리가 들리고 아사코가 정면을 응시하며 이제는 상황이 변했음을 보여 준다.

이제 아사코가 영화를 규정한다. 영화적 사태가 아사코의 결심대로 따라가야 한다. 아사코가 일으킨 변화가 무엇인지 영화가 확인해야 한다. 아사코는 도호쿠 지역의 어부에게 힐난을 들으며 교통비를 빌려 료헤이를 찾고, 자신을 닮은 바쿠가 이제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며 분노를 쏟아 내는 료헤이의 날선 말을 묵묵히 듣는다. 아사코는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그것을 기꺼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카자키의 어머니 에이코는 젊은 시절 아침을 같이 하기 위해 도쿄까지 갔던 추억의 남자가 실은 남편이 아니라는 고백을 하는데, 이것은 아사코가 깨달은 바의 단초를 영화가 사후적으로 구성한 것에 가깝다. 에이코가 두고두고 회고하는 잊을 수 없는 사랑의 경험이 실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끊임 없는 사로잡힘이라는 것, 아사코 역시 어쩌면 그렇게 바쿠로부터 새겨진 미결감에 평생을 붙잡히며 살지도 모른다는 것, 미결의 미혹을 헤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의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풀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아사코는 미결감의 고통을 료헤이도 똑같이 겪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결심한 거라고 해야 할까. 아사코는 료헤이가 허락한다면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입힌 상처가 자신을 찌르는 송곳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감내하면서까지 료헤이와 함께 하려 한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지금 료헤이를 사랑한다는 인식이 오히려 또렷해진 것 같아 보인다. 나는 아사코의 이런 결심이 윤리적 선택에 가깝다고 계속 말하고 싶어진다. 아사코는 미결감과 기시감의 아릿한 착란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양보하지 않고, 그것이 야기할 일들에 대해 책임 지고, 끝내 그것을 완수하려 하지 않는가. 연이어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나는 왜 아사코처럼 하지 못하는가. 이런 생각들이 나를 이 영화에 붙들리게 하는 것이다.

<에이리언>

SF, Sci-Fi, Science Fiction을 공상 과학이라고 번안해 부르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과학적 가능성에 기반한 상상을 헛된 공상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다니. 과학적으로 구성된 대안 세계가 지닌 이름의 자리가 너무나도 초라한 것 아닐까 하는 억울한 마음마저 짐짓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과학적 허구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과학적 허구라는 장르가 다른 것보다 과학의 측면에서 더 공상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SF는 과학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세계를 넘어서는 것에 관심이 많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인류의 문명을 잉태시킨 미지의 존재 모노리스(Monolith)는 과학적으로 추론 가능한가.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총체적 덩어리로 인식하는 외계의 지적-영적 생명체란 과학적으로 존재 가능한가. 과학적 상상은 과학적 세계에 대해 성찰적이면서 동시에 반과학적이다. 과학적 허구는 과학의 위대한 진리를 제시하기보다 역설적으로 과학이 해 내지 못하는 것, 과학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열정과 신경증을 드러낸다. 어쩌면SF는 과학의 공백에 대한 인간의 불안, 과학 법칙에 대한 무의식 또는 환상의 반격 같은 것 아닐까.

<에이리언>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지의 치명적인 외계 생명체 에일리언은 인간의 전지전능한 과학적 세계에 대한 경고다. 인간 문명이 우주를 탐험하고 동면 장치로 생명의 시간을 조절하며 인간을 닮은 로봇, 안드로이드를 창조할 만큼 발달할지라도, 아니 어쩌면 그렇게 발달할수록 물리적 세계를 관장하는 전지전능함이 완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과 불안의 응집력은 커진다. 이 응축된 강박과 불안이 공포스러운 실체를 드러낸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것이 H. R. 기거가 상상해 낸 에일리언이다. 기거의 에일리언은 이물적(alien) 요소의 총합이다. 검고 윤기 나는 피부, 길쭉한 머리를 하고 곤충을 닮은 외형은 어쩌면 괴물을 묘사하는 익숙한 관습에 가깝다. 이 괴물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게 만드는 치명적 면모는 그 외의 것들이다. 이 괴물이 성체가 되기 전, 알에서 몇 단계의 유충으로 변태하기까지의 형상은 명백히 인간의 생식 기관을 닮았다. 정자, 난자, 인간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이것은 마치 과학과 지식의 세계를 침범하는 리비도, 충동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 같다. 한 방울만으로도 주변을 녹여 버리는 산성 피는 어떤가. 이 괴물은 신체 기관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부터 외부를 공격한다. 산성 피를 머금고도 녹아 내리지 않는 이 존재의 장기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리고, 그 입 속의 입. 이 괴물은 사람을 날카로운 금속성 이빨로 찢어 발기기보다 뜻밖에도 그 입 깊은 곳에서 튀어 나오는 또 하나의 입으로 인간의 육질을 관통한다. 인간의 몸에 기생하다가 인간의 몸을 뚫고 나온다는 것을 포함해서, 에일리언은 생애 과정부터 생물학적 특질까지 총체적으로 인간의 내부, 이면과 관련되어 있다. 에일리언은 상상하기도 힘든 치명적인 이물적 타자다. 그것도 인간의 심연에서 인간 자신이 잉태한 자신의 적대자다.

인간의 내면, 심연을 들여다 보게 되는 모티프는 에일리언과 사투를 벌이는 노스트로모호 내부의 폐쇄된 미로라는 공간에도, 우주의 깊은 암흑 속 미지의 LV-426 행성에도 새겨져 있다. 폐소공포증을 불러 일으키는 미로 같은 노스트로모호 내부의 통로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통로이고 LV-426 행성은 우주라는 심연의 밑바닥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노스트로모호의 인공지능 시스템 마더가 정체 불명의 신호를 포착하고 긴 동면에 빠진 승무원을 깨우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 동면 – 에일리언과의 사투 – 다시 동면으로 구성된 이야기 덕분에 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자꾸만 이것이 모두 꿈, 2등 항해사 리플리의 악몽에 불과하기를 바라게 된다. 인간의 정신 그 심연에 잠들어 있던 억압된 괴물이 노스트로모호라는 문명, 의식의 세계로 침입하려 하고 이를 리플리가 의식과 심연을 잇는 폐쇄된 통로에서 끝내 저지하는 중첩된 꿈에 대한 은유이기를 말이다. 이 바람이 간절한 것은 에일리언이 심연에서 튀어나온 형벌, 잠재된 것이 실현된 신적 폭력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에일리언의 점액질 분비물로 노스트로모호의 기계 금속에 녹아 붙어 버린 채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울부짖는 달라스 선장의 절규는 꿈에서나 그릴 만한 지옥도가 아닌가. 그것도 과학 문명을 극도로 위태롭게 느끼는 마음이 만들 만한 지옥도. 명심해야 할 것은 에일리언이 인간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에일리언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LV-426 행성이라는 심연에서 영겁의 시간 동안 잠자고 있던 에일리언을 인간이 찾아 깨웠다. 그래서 차라리 꿈에서 깨어 난 것은 리플리가 아니라 에일리언이라고 해야 이 영화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이다.

꿈을 암시하는 이야기 구조는 이 영화를 그토록 강렬하게 불길한 암시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그것을 견딜만한 고난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이후 다섯 편의 후속작이 만들어질 만큼 프렌차이즈가 되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리플리는 구원자의 면모를 확장해 갔다. 이주민의 유일한 생존자 아이를 구하는 여성 전사가 되고 추방된 죄수들을 위해 거룩한 종교적 희생을 감내하며 발달한 유전자 기술에 힘입어 200년 후에 부활해서는 인간을 냉소하는 구원자가 된다. 에일리언의 신적 폭력에 기술 문명이 아니라 순수한 투지와 집념으로 저항하는 구원자 리플리에게서 느끼는 신화적 매혹이 이 프렌차이즈를 이끌었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우주적 규모의 세계체제가 된 자본주의의 탐욕이 에일리언이라는 심연의 재앙을 자초하는 주범이 된다는 또 하나의 테마는 일련의 충격적이고 불길한 사건들을 사회적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또한 인간을 닮은 로봇 안드로이드를 통해 드러낸 창조자 인간의 자가당착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보다 인간적인 복제 생명체 레플리컨트의 고뇌를 빌어 대자적 존재의 존엄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쩌면 우리는 통제 불가능한 난폭한 존재 에일리언을 숭배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초발달한 미래의 세계에서도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를 만나고 싶은 어떤 충동으로써 말이다. 프렌차이즈의 시작이 된 <에이리언>은 이 모든 방향의 영감을 지닌 영화다.

<에이리언>을 만든 리들리 스콧은 에일리언이라는 존재에 매혹되는 지점에 관심이 깊었던 것 같다. 그는 <에이리언>의 프리퀄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 커버넌트>를 세상에 내 놓으면서 이 매혹에 대해 보충한다. 그가 보충한 상상은 지구의 인간을 창조한 외계의 지적 존재가 있고 이들이 에일리언을 배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에일리언이라는 존재를 리들리 스콧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리들리 스콧에게 에일리언은 인간의 인식 영역 바깥에 대해 품는 환상의 담보물이다. 과학적 인식 체계가 발전하더라도 언제나 남는 인식 바깥의 것들, 인간의 사고가 닿지 않는 것에 대해 품는 편집증적 환상이 우리에게는 늘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표식 말이다. 인간을 압도하는 산성피를 가진 외계의 생명체에 대한 상상은 인간을 창조한 또다른 존재가 있다는 상상과 다르지 않고, 이 세상이 프로그래밍된 매트릭스에 불과하다는 상상과 멀지 않다. 달이 하필이면 정확한 크기로 정확한 위치에서 지구를 돌면서 태양을 완벽히 가리는 이유부터 우주가 빅뱅으로 존재하게 된 이유까지 과학적 사고를 확장한다고 해도 사물과 존재에 대해 풀지 못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열쇠의 담지자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비켜 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과학은 체계적인 망상, 편집증에 대한 투쟁이지만 편집증은 언제나 과학의 심연에 존재한다. 리플리의 꿈 속 깊은 곳에서 에일리언이 기다린다는 상상은 과학이 자신의 심연에서 SF를 바라보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치 과학의 막다른 길에 공상과학의 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