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영화가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만 같다. 물론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비단 이 작품에 실사 인물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영화 역시 이미지를 포착하는 것뿐만 아니라 조작하고 만들어 내기도 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이미지의 운동과 변화가 이야기를 생성하는 핵심 원리를 공유하기 때문에 첫 문장이 단순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보는 내내 숨 쉴 틈이, 정확히 말하면 눈 감을 틈이 없다고 느끼는 이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의 변화무쌍한 이미지 변화를 거의 자동적, 직관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 작품을 견디기는 불가능할 테다. 다르게 말하면 이 작품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서사로 채우는 것이 더 이상 납득시켜야 할 과제가 아니라는 듯이 휘몰아친다. 촘촘하게 배열된 이미지의 전환 속도가 각 이미지의 분위기와 감정, 그리고 특유의 속성을 충분히 고찰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푸념을 늘어 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의 경향이 서사를 풍부하게 하거나 상상적 세계를 공고하게 구축하는 데 도움되지 않는다는 지적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예술이 관객을 압도할 정도로 배열과 전개에 속도감을 싣는 그 자신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프랜차이즈 상업 영화의 최전선이 드러내는 이 자신감은, 이제 영화가 언어와 같이 우리에게 내재된 자동적 의미 표상 체계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만든다.

멀티버스 세계관은 20세기 슈퍼 히어로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멀티버스는 이들 기성품 이야기에 정체성의 쟁점을 해결할 열쇠로 작동한다. 인종, 성, 계급부터 생애 환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체성이 허용 가능한 세계가 여기서 열린다. 그것이 갖는 함의의 긍정적 가능성을 얼마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첨예한 정체성 정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슈퍼 히어로에 대한 다채로운 시도를 반길 만하다.

그러나 그 시도가 창출하는 다양성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프랜차이즈 멀티버스는 슈퍼 히어로 정체성의 다양성을 옹호하면서 슈퍼 히어로 자체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있지는 않은가. 멀티버스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용어에 따르면, 이른바 ‘공식 설정 사건’을 연결점으로 하는 단일한 다중 우주다. 모든 변주가 가능하지만 단 하나,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 여부는 분기되지 않는 세계다. 물론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는 지구-1610 버전 마일스 모랄레스의 오류로 인해 스파이더맨이 존재하지 않는 지구-42 버전의 우주가 나오기는 하지만, 이 또한 지구-1610 마일스 모랄레스가 관여해야 하는 우주, 또는 아직 스파이더맨이 도래하지 않은 잠재형으로서 스파이더맨의 단일한 다중 우주에 포섭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가 바라는 것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가 영속하는 것이다. 피터 파커, 마일스 모랄레스, 그웬 스테이시, 제스 드류, 미겔 오하라, 또는 가능한 만인이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은 스파이더맨이 없는, 다른 존재가 가능한 세계를 차단한다.

나는 우리에게 깊이 새겨진 욕망 중 하나가 이야기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프랜차이즈 멀티버스의 단일한 다중 우주가 흥미롭게 이 욕망을 실현하고 있다. 이론물리학의 관점에서는 타당하지 않을 상상인, 무한 정체성을 장착한 단일한 슈퍼 히어로의 멀티버스는 이야기가 다양하게 변주되고 확장 가능하게 만드는, 현대화된 신화적 원리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기획이 우리로 하여금 이야기가 영속될 때 직면해야 할 위기를, 즉 다양한 변주로 간신히 지탱되지만 실은 단일한 신화의 반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또한 흥미롭게도 스스로 야기하는 그런 위기를 자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팟은 이름 자체로 이를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멀티버스의 단일한 다중 우주가 서로를 향해 뚫고 있는 무한의 포털 구멍은 우리가 스파이더맨 이야기의 영속을 지켜볼수록 마주하게 되는 얼룩, 즉 지루함이다. 지루함이 스파이더맨의 세계를 잠식하고 있음을 이렇게 자기반영적으로 표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스파이더맨이 이 스팟을 물리치고야 말 다음 편이야말로 프랜차이즈 멀티버스가 스스로 파국을 선언하게 되는 종착역이 될 것만 같다. 나는 앞의 말을 고쳐 다시 말하고 싶다. 우리는 한 이야기가 끝나면 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지속되기를 욕망한다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케이코의 일상을 묘사하는 방식은 <다음 소희>에서 혼자 춤 연습하는 소희를 바라볼 때 받은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다음 소희>의 그 장면에서 내가 소희의 춤을 거친 몸짓의 수준으로 느낀 것은 소희가 자신을 내맡긴 음악을 나는 모르며, 단지 내가 그 장면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소희의 몸놀림이 만드는 옷깃과 바닥의 소음 뿐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소희의 감각을 관객으로부터 격리함으로써 소희의 춤은 객관적인 관찰의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소희라는 인물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보였다. 케이코의 말 없음이 화면의 공간을 채우는 생활 소음과 타인의 목소리에 대비되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도 그런 격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두 영화의 감각적 격리는 반대로 작동한다. 소희의 감각이 관객으로부터 차단됨으로써 우리는 소희의 춤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는 케이코에게 주어지지 않은 소리 감각이 케이코에 대한 이해의 방해물이다. 케이코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이 영화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청각의 방해를 무릅쓰고 시각적 이미지에, 케이코의 몸짓과 얼굴에 집중하게 된다. 우리는 케이코가 감각하고 지각하는 방식을 모방하면서 이 영화 안으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케이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이야기를 창출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된다. 그런 과정을 잘 드러내는 오프닝 시퀀스는 어쩐지 사랑스럽다. 소리는 현장의 느낌을 생생하게 만들 뿐, 연속해서 제시되는 이미지가 인물과 시간, 공간을 열어 놓는다. 케이코, 눈이 흩날리는 겨울 밤, 낡은 세월의 복싱장, 관장과 코치, 화이트 보드의 글자로 주고 받는 대화, 권투 훈련, 훈련 일지, 샌드백. 어쩌면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잘 배치된 이미지가 이야기를 생성하고 있다고 직감하는 감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하나 같이 정갈하게 고안된 노스탤지어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어서, 이에 감응하는 사랑스러움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 영화가 케이코를 단지 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불러 낸 것은 아닐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이 영화가 노스탤지어 세계를 정합적으로 구성하려면 케이코가 필요하다. 곧 문을 닫는 도쿄에서 가장 오래 된 복싱장의 마지막 여성 프로 복서에 대한 이야기를, 16mm 필름의 입자로 그려내는, 고전적 이미지 서사의 영화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케이코를 도구적으로 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케이코가 노스탤지어 세계의 영화적 형식을 납득시키는 열쇠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케이코의 일상을 유심히 지켜보고, 상실에 응수하는 실존적 선택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케이코의 삶을 견디고 대리 경험하기 위해서도 영화의 노스탤지어 세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케이코가 낡은 복싱장에서 노쇠한 관장과 충직한 코치들과 함께 권투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맞는 것이 두려워진 슬럼프에도 불구하고 복싱장을 대표하는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자 하지 않았다면,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코로나 시대에 겪는 케이코의 곤란과 수어로 나누는 대화의 신비로운 침묵을 우리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

케이코는 영화에 대해, 영화는 케이코에 대해 정합적으로 필요하다. 이 점이 영화의 노스탤지어를 감상적 아름다움의 지옥으로만 치부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닫힌 세계다. 상대방 선수의 펀치에 고꾸라지는 케이코의 허우적거림이 너무 생동감 없어서 권투의 양식을 어설프게 흉내 내고 있다고 느낄 때, 이 세계가 그런 방식으로 구성된 환상임을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자기완결적인 세계의 윤리를 선한 타인들이 아니라 케이코가 지탱한다. 상실과 패배에 괴로워 하지만 거기에 멈춰 서지 않은 케이코의 작은 선택이 영화에 가능성의 출구를 열어 주기 때문이다. 그 선택이 설령 또 다른 낭만적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그것은 케이코가 영화의 환상을 떠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 같은 것은 아닐까. 어쨌든 예정되지 않은 현실의 불안이 그 뒤에 따라붙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은 믿음직스럽다. 달리 좋은 마지막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언더 더 스킨>

이 영화는 적절하게 단일한 이야기로 통합하는 데 필요한 이름들을 생략하고 있다. 엔딩 크레딧에서도 인물의 극중 이름은 찾을 수 없다. 극중 스칼렛 요한슨을 로라라고 지칭하는 글이 보일 때마다 나는 의아했다. 이들과 나는 다른 영화를 본 것일까. 장르적 관습에 기대어 그들을 외계인이라고 상정해 볼 수 있고, 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알려진 소설이 그들을 분명하게 인간 사냥 노동을 하는 외계인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렇게 인식하고 지켜볼 것이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인물의 이름도 알 수 없고 상황에 대한 정의도 없는 이 영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 외부의 참고점을 통해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필요하게 만드는 침묵이 이 영화에 대해 더 말해야 할 대상일 것이다.

나는 영화에 대해 말할 때 오로지 그 영화에 근거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만, 사실 이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저마다의 인식과 욕망, 감정과 감각의 맥락으로 영화의 내적 세계를 마주하기 때문에, 영화에만 근거한 경험이란 순수한 환상에 가깝다. 순수한 환상의 준칙을 지키면서 수행할 수 있는 의사소통은 영화에 대한 우리의 감각 정보를 논하는 것에서 더 나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해 감각에 대해서조차도 우리는 공통된 언어를 만들기 쉽지 않음을 생각하면, 영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영화에 대해 잉여적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존재가 우리의 과잉된 인식에 우선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의미가 허용되지만, 존재와 마주친 출발점을 기입하고 그곳을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는 영화에 대해 말하는 동안 의미의 복잡계 영역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영화로 돌아와서, 스칼렛 요한슨과 오토바이를 탄 남자는 누구인가. 그들을 외계인이라고 가정해도 다른 의문이 이어진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는 스칼렛 요한슨과 어떤 관계인가. 남자는 세간의 말처럼 스칼렛 요한슨의 상사인가. 초반에 시신으로 등장한 여자는 누구인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행위를 하나의 이름으로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여기에는 다른 반례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스칼렛 요한슨과 마찬가지로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일 수도 있다. 시신으로 등장하는 여자는 남자가 잡아 온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그들을 외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에도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에 나오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빛과 원의 형상은 지구로 침입하는 외계 존재의 시각화라기보다 세포의 생성, 생명의 탄생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가. 알 수 없는 단어를 나열하는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는 외계의 존재가 아니라 로봇의 언어 테스트 과정을 보여 주는 것 같다고 말할 수는 없는가. 그들을 로봇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러므로 이 영화를 어떤 명시적인 이름, 분명한 목적론의 체계 안에서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오류를 범하는 일일 것이다. 이를 경계하면서 이 영화에 대해 말하려 할 때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기호와 상징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일이 아닐까. 남성과 여성의 군상 이미지들로부터 성별 구분에 대한 사회 문화적 맥락을 떠올리고, 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섹슈얼리티에 반응하는 남성들로부터 여성 혐오의 다양한 양태를 논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 맥락 안에서 껍데기만 남은 남자, 껍데기를 벗고 검은 실체를 드러내는 여자는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의미를 내포한 이미지일 것이다. 유혹에 이끌리는 남자는 내부가 없다. 반면 강간 당하는 여자는 검은 심연이 파괴된 외부 표면을 목도한다. 이것은 물론 섹슈얼리티의 맥락 안에서 향락적 주체의 파괴적 성격을 상징할 것이다. 조금 더 생각을 이어 간다면, 나는 이 두 이미지가 남자와 여자의 상태를 드러내기보다 그 반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상인 그들의 내부 없음과 파괴된 표면, 그리고 검은 심연은 그 일을 저지른 주체를 반영하는 상징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 같은 기호적 가능성을 살피는 중에도 나는 여전히 스칼렛 요한슨의 정체에 대해 궁금하다. 나는 그가 다른 행성이라고 물리적으로 한정 지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타자라는 의미에서 외계인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존재가 처음부터 남자들과 완벽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면서 동시에 막간의 시간 동안은 전혀 감정 없는 것처럼 비어 있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잘 믿기지 않아서, 이것이 가능한 재현인지 나는 계속 질문하게 된다. 내게는 그가 인간 여성의 자아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숲속에서 도망치던 그의 얼굴에 가득차 보이는 표정은 인간의 두려움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표정과 행동에 대한 내 지각 체계가 일으키는 착각에 불과한 것일까. 이 영화에서 사건의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것, 안면기형 남자를 풀어 주는 그의 선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영화가 재현하는 그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영화 외부의 이름을 빌리고 싶은 유혹과 그럼에도 파악되지 않는 타자에 대한 의문을 혼란스럽게 견디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