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

<다음 소희>는 댄스 학원에서 홀로 춤을 연습하고 있는 소희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 씬에서 우리는 노래 없는 춤을 지켜 본다. 소리는 오직 소희의 거친 호흡, 스텝과 몸동작이 일으키는 격렬한 공명 뿐이다. 소희는 때로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춤을 이어 간다. 소희의 춤 실력이 본디 뛰어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지만, 음악이 소거된 채 홀로 추는 춤은 황량함과 고독, 그리고 어쩌면 처절함을 드러낼 뿐이다. 이 장면에서 음악은 소희만의 것이다. 그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 흘러 나오고 있을 음악이 어떤 분위기와 리듬감으로 춤을 감싸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소희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처럼 느껴진다. 소희의 얼굴은 언제부턴가 텅 빈 것처럼 보인다. 그 얼굴로부터 소희가 겪은 감정의 변화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어느 동네 구멍가게에서 슬리퍼에 걸쳐진 사선의 햇빛은 소희의 공허한 얼굴을 오히려 더욱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표정 없이 소희가 사라지고 나면 그것에 붙들려 자꾸 부질없는 상상을 거듭하게 된다.소희가 저수지에 뛰어들기 전 골든 타임이 있지 않았을까, 이 일을 돌이킬 어떤 순간을 거슬러 생각해 볼 따름이다. 직전에 남자 친구 태준이 전화를 받았다면, 그리고 태준이 소희를 잠시라도 위로해 줬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소희가 손목을 그었을 때 부모가 소희를 다르게 대했다면.

소희가 남기고 간 것은 무너진 마음과 그가 맞닥뜨린 세계의 면모다. 영화는 소희의 얼굴보다 그가 겪는 일을 통해 그것을 이해시키려 한다. 취업률 평가의 함정에서 학생을 실적의 도구로만 대하는 특성화고와 교육 제도의 문제. 현장 실습생 제도를 악용하여 취약한 노동 현장에서 학생을 이중적 착취의 제물로 삼는 노동 환경과 해지방어라는 기만적 활동을 제도화하는 부도덕한 기업의 문제. 가혹한 노동을 끊임없이 외주화하며 고통과 책임을 위계적으로 전가하는 자본주의의 문제. 자신이 야기하는 부조리를 책임 지지 않는 관료주의와 기능주의의 문제. 양육과 보살핌으로부터 소외와 단절의 문제. 콜센터 해지방어 팀에 현장 실습을 나가는 순간 소희가 대면한 것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들만큼 거대하고 복잡한 세계의 총체적 모순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각각의 모순이 서로 연결되고 구조화되어 있음을 후반부 오유진 형사의 수사를 통해 보여 준다. 오유진 형사를 경유하면서 우리는 소희의 개별적 경험을 구조적 차원에서 조망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소희의 텅 빈 얼굴이 끝내 하지 않고 놓아 버린 호소와 항변이 무엇인지, 또는 이 착취적이고 비윤리적인 노동의 비참 앞에서 소희가 필요로 한 위로가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또 욱하면 누구한테라도 말해. 나한테라도. 괜찮아. 경찰한테 말해도 돼.” 오유진 형사가 당부하는 이 말에 소희의 남자 친구 태준은 북받쳐 울먹거린다. 태준의 그 표정은 소희의 텅 빈 얼굴과 겹친다. 태준의 표정은 소희의 얼굴에 가로막힌 감정의 출구가 된다. 동시에 태준의 표정은 소희의 얼굴이 미처 드러내지 못한 것, 또는 그렇다고 믿고 싶은, 그리고 태준을 통해 돌려받는 우리 자신의 소희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다.

두 매개자를 통해 모순의 구조를 인식하고 소희를 연민하는 자리에 호명하는 이 영화에 나는 복잡한 마음이 든다. 어쩌면 소희의 죽음을 이해하고 대변하는 것이 오유진 형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경찰이 노동의 문제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나의 현실적 감각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워서임을 먼저 실토해야겠다. 그리고 다른 의문이 잇따른다. 소희의 죽음을 둘러싼 구조적 모순의 형상을 밝히고 따져 묻는 오유진 형사가 너무나 영웅적 개인으로 보여서, 영화가 현실을 환기한 후 이를 환상으로 봉합하려는 것은 아닌지, 이것이 소희의 죽음에 대한 영화의 무력감의 징후는 아닌지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참고하고 있는 실제 사건은 얽히고 은폐된 문제가 사회적 과정을 통해 밝혀졌다. 복수의 언론사 기자가 포기하지 않고 취재했고, 노동조합과 정당이 연대하면서 묻힐 뻔한 사건이 힘겹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실화의 사회적 연대가 영화의 영웅적 개인보다 실천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굳이 실화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런 질문을 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환상을 구성하기 위해서라면) (소희의 죽음에 대해) 개인의 연민과 노력만으로 과연 충분한가 하는.

<가가린>

<가가린>을 보면서 나는 왜 <타이드랜드>의 질라이자 로즈가 생각났을까. 아마 <가가린>의 유리가 지닌 망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영화는 그것이 드러내는 환상이 너무나도 망상적이어서, 왜 그것이 재현되는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다. 그런 맥락으로 만들어진 기억이 두 영화를 연결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타이드랜드>를 보고서야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영화가 끈질기게 드러내는 인물의 망상에 대해 의아한 감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 영화에서 바비 인형 머리를 손가락에 꽂고 쉼 없이 그들과 대화하며 광기에 가까운 면모를 드러내는 질라이자 로즈의 망상은 마약 중독자 부모에 의해 방치된 삶이라는 현실에서 그 까닭을 찾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자기 방어 또는 보호의 몸짓이라기보다 질라이자 로즈가 세계를 인식하는 체계, 온전하게 구축된 질서에 가까워 보였다. 질라이자 로즈의 마음에 대한 통약 불가능성을 나는 그의 현실적 비참을 빌어 모른 척하고 싶었을 따름일지도 모른다. 질라이자 로즈의 망상은 존재에 본질적이며 현실로부터 유추된 것 이상인 것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가가린>에서 유리의 망상은 보다 더 현실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망상은 현실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무기다. 유리는 아파트 철거를 거부한다. 유리에게 아파트는 너무나도 특별하다. 단지 떠난 어머니가 돌아와야 하는 곳이며 이웃과 친구가 공유하는 기억의 저장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아파트는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유리는 이 아파트가 우주인과 우주선의 상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다고 믿는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에서 느꼈던 것처럼, 상징에 대한 믿음은 본디 망상적이지 않을까.

유리의 그런 믿음이 아니라면 내가 이 철거 반대 투쟁을 아름다움의 한 양상으로 지켜보는 건 불가능한 것인지, 가가린 아파트를 지키고 싶다는 유리의 소망에 참여하는 것이 망상의 회로를 거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인지 물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리, 우삼, 디아나, 파리, 이주 노동자와 난민, 하층민의 삶에 환상의 층위를 부여하는 것은 망상적 방식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지 하는 질문. 나는 이에 대해 답하기 힘들다. 그것은 유일한 방법이 아닐 것이고, 허위적이거나 그들을 무시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다만 망상은 그 위험한 경계에서 우리를 빨아들이고, 때로는 타자에게 접속하는 지름길을 제공하기도 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 않을까.

십여 년 전 하월곡동 재개발 현장에 대한 사적인 기억을 떠올린다. 동네의 절반은 이미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나머지 절반은 철거가 진행 중이던 그때, 아파트 입주자로 보이는 누군가가 조깅을 하다 멈춰 서서 공가 표식이 즐비한 나머지 절반의 폐허를 조용히 내려 보는 광경은 내게 복잡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조깅 하던 사람을 보면서 나도 그 광경 앞에 선 감상자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허물어진 집을 다르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부터 눈앞에 제시되지 않은 어떤 것을 떠올려야 했다. 철거와 재개발은 혐오나 갈등을 은폐하고 약자에게 행해지는 조용한 추방이자 적대다. 그 존재한 적 없어 보이는 사건을 떠올리기 위해, 어느 집에 걸린 빨간 깃발이나 부서진 액자 속 가족 사진 같은 사소한 단서에서 알지 못할 어떤 사연을 망상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나의 망상은 비겁할 따름이지만 <가가린>의 그것은 추방자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파트가 우주선이 되어 이륙하는 망상의 시간 동안 추방자는 으스러지는 현실을 미루고 자신의 특별함을 주장한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퓨리오사의 전투 트럭과 뒤쫓는 임모탄 조 부하들의 차량이 작은 점으로 변하고, 거대한 모래폭풍이 스크린의 우측에서 몰려와 이들을 뒤덮는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심장 박동이 제멋대로 요동치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진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이 장면처럼 무언가를 집어삼킬 듯한 에너지와 위세를 보여 준다.

이 영화가 집어삼키는 것은 물론 우리의 환상이다. 우리는 영화가 쫓고 쫓기는 추격과 질주에 몰입해 온 긴 역사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운동하는 이미지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눈의 관계를 은유하기도 하고, 운동 이미지에 대해 우리가 투사하는 환상의 양태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가 앞으로 나가기를, 지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질주하는 이미지가 그 환상을 재현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퓨리오사의 전투 트럭이 달리는 동안 우리의 환상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추격과 질주가 아찔한 향락적 층위로 우리를 인도해 주리라는 기대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만큼 강렬하게 구현하는 영화는 찾아 보기 힘들다. 이는 단지 황량한 사막과 갈증을 불러 일으키는 건조한 공기, 그리고 모래 바람이나 거대하고 고독한 차량과 위태로운 속도 같은 물적 감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의 물적 속성은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우리의 환상을 구성하는 맥락 위에서 상상적으로 감각된다. 이 영화가 우리를 도로 위로 끌어 들여 절박하고 긴급한 추격을 감각하게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이 영화의 선악 대립에 연루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얽히게 되는 이 선악 감각을 무시하고 이 영화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의 전쟁이 야기한 황폐한 지구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반복하고 있는 극심한 착취와 폭력의 구조를 지켜본다. 지배자, 임모탄 조는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다. 식량, 물, 석유와 같은 자원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을 예속시켜 성적으로 착취하는 권력을 누리면서 신적 존재로 추앙받기까지 한다. 우리 현실을 잠식한 경제적, 사회적, 성적 착취의 폭력 구조가 이 가상의 세계에서 폭로되는 것 같다. 우리의 환상에 절박함을 불어넣고 질주의 욕망을 배가하는 질료가 이 닫힌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그렇게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질주의 환상을 이 영화의 미덕으로 얘기하는 것은 어딘가 부족하다. 정말 중요하다고 할 것은 다른 지점에 있다. 이 영화는 자기 자신의 전통을 비튼다. 아포칼립스의 세계에서 곤경에 처한 이들을 구하는 것은 맥스가 아니라 퓨리오사다. 맥스는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퓨리오사는 해방을 위해 투쟁한다. 맥스는 투쟁을 돕고 방향을 조언할 뿐, 퓨리오사가 승인하고 결행한다. 맥스는 혁명의 주체의 자리를 퓨리오사에게 양도하였다. 임모탄 조 체제에서 희생자의 총체적 모습을 띈 퓨리오사는 ‘당신이 기다리는 그 자는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혁명 주체의 원리를 구현한다. 진정한 혁명의 주체는 납치당한 자이고, 복종하고 노동을 착취당하는 자이며, 혐오와 객체화로 위협받는 여성인 것이다. 자신을 납치당한, 착취당하는 희생자 여성에서 혁명을 수행하는 자로 뒤집어 규정하는 순간, 이 영화는 이제 반대로 귀환하기 위해 질주한다. 약속의 땅 그린 랜드는 존재하지 않고 시타델에 두고 온 퓨리오사 자신의 역사를 해방하는 것이야말로 혁명의 실체라는 깨달음이 좌-우에서 우-좌로 뒤바뀐 귀환하는 질주 이미지로 표상된다. 그리고 이 여정은 다른 생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탈주는 해방과 희열을 약속하지만 우리는 막다른 곳에서 그린 랜드의 사막을 볼 뿐이라는 것, 그제서야 우리는 기겁하며 출발한 곳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

귀환의 질주가 완수되고 나서, 맥스는 결국 퓨리오사의 시타델을 떠난다. 맥스는 여전히 서부 영화의 영웅과 같은 운명이다. 그는 퓨리오사의 공동체에 속할 수 없다. 맥스가 왜 떠나는지 나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맥스는 퓨리오사가 새롭게 만들 시타델 체제, 그 역사 바깥에 있어야 이 시리즈의 질주하는 이야기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퓨리오사는 멈추었지만 맥스는 떠나야 질주의 향락적 상연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이 점에 유념해야 할지도 모른다. 혁명보다, 계속 즐기기를 욕망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