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의 그림자>

영화의 카메라에 있어 실내 장면은 답답하고 긴장되는 공간일 것이다. 공간의 제약은 카메라의 앵글과 움직임을 제한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프레임 외부의 공간마저 확정적으로 축소되어 있는 그곳에서, 역설적으로 카메라의 선택을 지켜보는 일은 흥미롭다. 그 때 우리는 카메라의 자유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유는 구조화되어 있는 세계의 목록과 주체의 욕망이 만나는 어떤 필연적 선택을 통해 드러난다. 다시 말해 자유는 주체가 운명적이라고 느끼는 선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방과 복도, 거실과 같은 공간의 구조에 대한 상상적 밑그림을 해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상 세계의 외부, 즉 촬영 현장의 너저분한 얼룩들을 숨겨야 하는 카메라의 선택은 불가피함 속에서 드러나는 자유의 증거가 아닌가.

생각해 보면 히치콕의 영화에는 유독 실내에서 촬영된 장면이 많다. 극단적으로 고정된 실내 장면만으로 이루어진 <로프>도 있지만, 많은 영화의 음모, 사건, 긴장이 실내에서 빚어진다.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필연적일지 모른다. 외화면의 확장된 가상 세계를 의식할 겨를이 없는 갇힌 공간, 인물의 신경증적 사건에 집중할 수 있는 세계가 거기에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사건의 객관적 사실을 보기보다 인물의 정신에 구속된다. <의혹의 그림자>에서 삼촌 찰리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은 결코 나오지 않지만, 우리는 조카 찰리의, 또는 영화의 기획된 정신 내부에 머물면서 삼촌 찰리가 범인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의혹의 그림자>에서 현관문을 통해 실내와 실외를 카메라가 관통하듯 움직이는 두 장면은 공간에 대한 영화적 기획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준다. 첫 번째는 정부 취재단으로 위장한 그레이엄과 사운더스 형사 일행이 뉴튼 가족의 집을 나서는 장면이다. 엠마 뉴튼과 대화를 나누던 그레이엄이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서 카메라는 실내에서 실외로 공간의 지평을 전환한다. 이 영화가 20세기 중반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랍기도 한 이 공간 전환은, 카메라가 인물과 함께 실내에 있다는 믿음을 일거에 깨뜨리고 줄곧 실외에서 현관문 창 사이로 촬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 물론 영화의 시선은 항상 인물 외부에 존재한다. — 그리고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던 공간, 실외로 인물들을 끄집어 내는데, 이를 그레이엄 형사가 인도하고 있다는 점도 상징적이다. 이 카메라의 자기 폭로적 움직임을 통해 영화는 뉴튼 가족이 형사 일행에게 이끌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이라는 내부의 평온한 일상으로부터 끄집혀 나왔다고 선언하는 듯하다.

두 번째는 삼촌 찰리가 현관문 밖에서 뉴튼 가족의 집 내부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삼촌 찰리는 방금 매형 조와 이웃 허브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 한 명이 도주 중 사망했다고 하는 대화를 듣고 얼굴에 화색이 돈다. 자신의 살인 혐의가 해소됐다는 기쁨에 현관문을 열고 2층 계단을 뛰어 오르는 삼촌 찰리를 따라 카메라가 이동한다. 그리고 갑자기 멈춰 서서 계단 위 삼촌 찰리를 앙각으로 올려다 본다. 이 장면이 불길하게 보이는 것은 삼촌 찰리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점이나 카메라의 앵글, 이후 영화의 묵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외에서 실내로 급격하게 침투하는 운동이 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삼촌 찰리가 계단 위에서 돌아서 내려볼 때 현관문 앞에는 조카 찰리가 실내로 그림자를 드리운 채 삼촌 찰리를 노려 보고 있다. 두 인물의 집 내부를 둘러싼 이 대치는 영화가 보여 주려는 것 그 자체이기도 하다. 내부에 대한 외부의, 주체에 대한 분열된 충동의, 중산층 가정에 대한 가부장제적 자본주의 모순의 침입.

이 두 장면은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무너뜨리면서 이세계를 내부로 침입시키고, 동시에 내부의 구조적 제한이 외부로 확장되는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이는 이후 벌어질 서사에 앞서는, 선험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영화는 이 때 비타협적으로 선택한 카메라의 움직임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앞서 말한 자유의 의미에서 보자면 이것은 영화가 취한 운명적 선택의 한 예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이 영화적 선택을 그렇게 받아들인다. 이것이 우리가 히치콕 영화를 경험하는 방식의 핵심이 아닐까. <의혹의 그림자>는 사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 영화다. 삼촌 찰리와 조카 찰리 사이에 조성되는 자기애적이며 동시에 근친상간적인 리비도의 분위기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오히려 그것은 명백하게 감지할 수 있는 암시다. — 조카 찰리가 흥얼거리는 왈츠풍의 노래나 오프닝으로 인서트된 무도회 장면을 온전하게 의미화하기는 어렵고, 조카 찰리와 잭 그레이엄 형사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비약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사람들이 이 영화가 어떤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를 운명적이라는 허황히 보이는 말에 기대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영화의 선택에 대해 부지불식간에 판단하고 있다. 그것이 영화가 결단한 자유의 영역에 속하는지, 가능성을 방기한 무기력에 속하는지, 아니면 불안에 내몰린 것인지.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향한 필연성이 단지 인과의 사슬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 준다. 필연성은 선택 그 자체에 있기도 하다. 어떤 선택은 필연성을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필연성을 창출하는 자유를 행사한다. 그런 선택, 영화의 자유로운 선택이 때로는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하얀 인화지 위에 나무 한 그루와 검게 발자국으로 그어진 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 대해 언젠가부터 나는 그의 사진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키아로스타미가 찍어 온 사진에서 사물은 어떤 시적 영감을 지닌 것처럼 여백 위에 도드라져 있다. 그의 사진에서 사물은 현실의 물질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가상의 세계로 진입해 버린, 상징화된 존재처럼 보인다. 나무, 길, 그리고 능선은 우리가 부여한 그들 이름의 층위부터 점과 선, 면이라는 기하학적 수준까지 다층적 기호와 상징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그의 사진에 놓인 사물은 상징화되어 우리에게 감흥을 일으킨다. 사진은 회화가 아니다. 사진은 대체로 피사체를 창조하거나 조작할 수 없다(는 믿음이 우리에게는 있다). 키아로스타미의 사진은 가장 조작하기 힘든 사물을 담지만, 그것을 가장 회화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여기서 키아로스타미의 사진에 대해 믿기 힘들다는 경이로움이 분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을 다시 본다. 눈밭 위의 한 그루 나무가 진짜 나무가 맞는지 더 가까이서 유심히 본다. 인화지의 은염 입자가 모여서 나무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조작되지 않은 진짜 나무가 맞는 듯하지만, 우리는 나무라는 사물을 은염 입자의 물적 조건 위에서 감각한다. 비약하자면 우리가 사물과 세계를 그 자체로 대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감각과 인식의 제한적 구조를 통해서만 우리는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사진의 경우 은염 입자를 통해 구현된 나무의 형상을 감각하는 한에서만 나무의 실재성을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영화로 돌아와 보면, 키아로스타미의 경이로움은 그것이 너무 진짜 같거나 너무 허구 같다는 의아함에 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선생님께 혼나며 잔뜩 겁먹은 네마자데의 울음과 그에게 공책을 돌려줘야 하는 아마드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 친척을 지진으로 잃었다는 어느 할머니의 눈물이 너무나도 진짜인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에, 코케와 포슈테를 잇는 작은 언덕에 난 길이나 주반과 코케를 잇는 가파르고 긴 자동차 도로의 지그재그 형상은 너무 상징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를 통해 알게 되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가 이란의 대지진이 있고 1년 후에 촬영되었다는, 다시 말해 지진 재난 현장의 모습들이 사후에 연출된 장면이라는 점은 믿기 쉽지 않은 사실이기도 하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 대해 그것의 현실성과 허구성을 모두 믿거나 의심하게 되는 것이 본질적인 반응이기는 하겠지만, 결국 그의 영화는 그 경계를 나누는 것에 무심해 보인다는 점을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대신, 예컨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지진이라는 재난 앞에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출연한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을 걱정하는 마음을 현실과 가상의 모든 세계로 전하고 싶어 한다. 감독 역을 맡은 배우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포스터를 들고 다니며 안위를 물을 때, 그 배우는 영화 속 감독 역이기도 하면서 키아로스타미 자신이기도 하며, 그 포스터의 아이는 영화 속 아마드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아마드 푸르이기도 하다. 키아로스타미가 재현한 재난의 현장은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재난의 희생자를 기억하고 기리기 위한 재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인용하고 <올리브 나무 사이로>가 앞선 두 영화를 다시 인용하면서 현실과 가상의 구분은 점점 혼미해진다. 상호 참조는 영화 사이에 국한되지 않고 현실로도 연결되어 있다. 이 세 영화에서 현실의 배우와 극중 인물이 혼동되고 대지진이라는 재난이 중첩된다. 나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이후 이란에 닥친 대지진이 이 가상 세계를 거기서 멈출 수 없게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세 영화, 순환적인 상호 참조의 세계는 재난 현실에 대한 가상의 응답을 위해 추동한 결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드 푸르를 애타게 찾는 마음, 호세인이 날 서게 말하는 불평등에 대한 저항심 같은 것을 영화와 현실 모두에 도달케 하는 것이 세 영화를 관통하는 욕망일 것이다.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다층적인 가상 세계는 현실을 공감각하게 만든다. 가상과 현실은 상호적이며 서로를 창조하는 순환 고리가 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마지막, 익스트림 롱 쇼트의 시선 안에서 인물과 차는 언덕 도로의 지그재그 형상이 만드는 도형에 속해 있을 것만 같지만, 그들이 서로를 도와 함께 길을 오르는 것을 응시하고 있으면 그들의 실존과 행위가 도형 내부에서 진정한 운동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도형의 상징이 존재를 집어삼키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존재가 이를 통해 현현하는 세계의 모습을 키아로스타미는 그렇게 알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생명이 탄생하기 적절하지 않은 버전의 우주, 어느 행성의 황량한 산 위에 돌이 놓여 있다. 이 풍경이 적막에 휩싸여 있는 동안 화면에는 문자가 새겨진다. “여기선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돌이 되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단지 어떤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화면에 표시되는 대화 지문을 통해 알게 된다. 산에 놓인 두 개의 돌은 에블린과 그의 딸 조이이다. 한낱 돌이 의인화된다. 나는 이 장면이 즐거웠다. 영화가 이 두 개의 돌 위에 대화 지문을 제시하고 쇼트와 역쇼트로 두 돌을 번갈아 보여 주면서 너무 능청스럽게 돌이 인물인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듯한데, 기꺼이 그 시치미를 믿고 싶지 않은가.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그 순간 우리는 시치미 떼는 듯한 연출을 믿도록 강요받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 불완전한 환상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다고 영화는 관객을 끌어 들인다. 관객이 참여해서 완성하는 환상의 효용성 때문에, 영화는 이렇게 환상의 불완전성을 즐길 만한 것으로 다루기도 한다. 그렇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돌을 음성과 시선을 지닌 인물로 지시하는 장면은 우리가 믿지 못할 환상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현실의 감각으로 돌아와서 보면 돌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돌, 사물은 감정도 이성도 욕망도 의지도 없다. 즉자적 존재의 수준으로 환원된 에블린과 조이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미동도 하지 않고 영겁의 시간을 산 위에 그저 놓여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에블린과 조이가 돌이 된 상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돌이 에블린과 조이로 치환된 상태를 보고 있다.

인물이 사물화한 것이 아니라 사물이 의인화된 것처럼, 조이의 베이글은 허무주의의 물화된 상징이 아니다. 나는 조이의 허무주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조이는 무기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이가 자신이 경험한 수많은 평행우주의 자아로부터 진정으로 무의미를 깨달았다면, 다른 평행우주 수많은 버전의 에블린을 찾아 헤매고 세계를 파괴해 대는 조부 투바키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이, 조부 투바키는 간절한 욕망을 지녔다. 이를 이해 받고 싶은 욕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이가 평행우주에서 발견한 것은 무의미가 아니라 무의미에 대한 불안의 중핵이다. 무한에 가까운 가능성의 어떤 현실태도 희열에 닿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는 불안, 그 감당하기 버거운 감정. 조이는 이런 심연의 불안을 이해해 주고 그 늪에서 자기를 구원해 줄 존재를 간절히 찾는 중이다. 그것도 자신에게 그런 곤경에 빠뜨린 어머니 에블린으로부터. 허무주의자는 어머니의 이해를 갈구하지 않을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베이글의 원은 허무주의보다, 그에 대한 불안과 공황 상태를 시각화한다. 이에 대한 에블린의 대답은 불안에 대항해 의지로 낙관하라는 것에 가깝다. 의지로 희열과 환상의 붕괴를 버티고 욕망하기를 멈추지 마라. 어쩌면 그것이 궁극적으로 직면할 허무와 불안의 끝에서도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최후의 조건일지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평행우주의 무한 가능성(그리고 동시에 무한의 무의미)을 한꺼번에 견디고 있는 에블린의 얼굴에는 그런 최후의 의지가 엿보인다. 치명적 무의미에 대한, 무지를 향한 의지. 나는 왠지 그 얼굴이야말로 진정한 허무주의자의 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