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소마>

스웨덴의 작은 마을 호르가에 도착한 이튿날 절벽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의식을 목격하고, 대니는 이곳을 떠나려 한다. 그날 밤 대니는 이상한 꿈을 꾼다. 숙소 건물을 몰래 나온 크리스티안과 친구들이 대니를 남겨 두고 호르가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목격하고 절규하는 대니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절벽 의식에서 목격한 처참하게 망가진 시신, 그리고 자살한 여동생과 부모의 시신이 대니의 꿈을 가득 채운다. 하루 아침에 가족을 잃고 남자 친구와 관계마저 불안한 상황에 놓인 대니를 지배하는, 누군가로부터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이 트라우마가 응축된 장면에 담겨 있다. 그런데 이 꿈은 대니의 심리와 반대다. 현실에서는 대니가 호르가를 떠나고 싶어 하는데 꿈에서는 남자 친구와 그의 친구들이 대니를 남겨 두고 떠난다. 대니가 직접 목격했을 것 같지 않은 동생과 부모의 죽은 모습이 꿈에 나타난다는 점이 의아하지만, 이 장면이 대니가 꾸는 꿈이 맞다고 한다면 이 꿈의 전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니가 당장 호르가를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 펠레가 찾아 와 대니를 설득하고 위로한다. 처음에는 이 전통을 이해해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펠레는 이 호르가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가족이고 힘들 때 붙잡아 주었다고, 크리스티안이 힘들어 하는 너를 잘 붙잡아 준다고 느끼는지 묻는다. 대니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니는 호르가를 떠나지 못한다. 나는 이 때 대니가 펠레에게 설득 당했기 때문에 호르가를 떠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대니는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하는 크리스티안을 버리고, 이 호르가에서 자신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니의 꿈은 그 기대, 욕망을 그것이 야기하는 죄책감과 두려움 안에서 뒤집힌 방식으로 상연하고 있다.

대니의 욕망이 실현되는 방식은 파국적이다. 크리스티안은 비겁하지만 대니는 파국적이다. 크리스티안은 선택과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려 하고 대니는 그것을 감당하면서까지 매달리려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대니가 갖게 되는 원망과 분노는 증폭된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취약한 주체 대니에 대해 가혹한 반응일지 모르지만, 대니의 이 감정이 펠레로부터 매개된 욕망과 만날 때, 그리고 더불어 호르가의 이교적 의식을 통해 드러날 때, 그것은 치명적으로 위험해진다. 불타는 희생양을 바라보며 희열에 찬 듯한 대니의 웃음에 동참하는 것이 어쩐지 나는 위험해 보인다.

호르가의 이교적 문화는 이 영화를 기괴하고 공포스럽게 만든다. 물론 동시에 농담처럼 만들기도 한다. 호르가는 서구 근대 주체의 타자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자기 자신에게 투사해 본 농담 같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농담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저렇지 않지”, “스웨덴에 실제 저런 문화는 없어”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스웨덴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폭소했다고 한다. 누구도 이 영화가 표현하는 세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이 영화는 단지 우리 안의 편견과 왜곡된 환상을 우리 안에서 전유해 보고 있을 뿐이다. 다만, 당신이 우리와 같은 주체라면.

그렇게 구성한 호르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타자성의 핵심은 주체가 소멸된 공동체라는 점에 있는 것 같다. 호르가의 사람들에게 개인의 삶은 모두 공동체의 종교적 의식을 수행하는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정해진 연령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기꺼이 희생 제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랑과 슬픔 같은 개인의 감정도 의례적 집단 행위 안에서 소거된다. 전근대 종교적 파시즘에 가까워 보이는 이것이 타자에 대한 서구 근대 주체의 왜곡된 환상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목가적 환상과 더불어 자기 지시적으로 유희한다는 것은 다소 혼란스러운 일이다.

이 영화의 공포는 호르가의 광기 어린 종교 의식에 대니의 감정과 욕망을 밀어 넣는 데서 야기된다. 그것은 정말로 공포스러운 일이다. 대니라는 취약한 주체가 이교적 타자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기만적으로 즐기기 위해 희생됐을 가능성을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주해야 하는 것은 유사 종교와 살인의 뒤섞인 향락 앞에서 무너진 대니의 정신이다. 영화는 왜 대니를 그렇게까지 만들어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마도 아리 애스터는 개의치 않겠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그 욕망이 불가해하고 공포스럽다.

<드라이브 마이 카>

가후쿠와 오토가 키스하는 장면이 나는 무척 이상했다. 그 장면에 달라 붙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 오기 때문이다. “나리타 9시 출발.” 분명 오토의 목소리이지만, 이 때 카메라는 오토의 입을 가후쿠의 얼굴로 가려 놓아서 오토가 실제로 내뱉은 말인지 확정할 수 없다. 그보다 둘이 입을 맞추고 있는 그 순간 오토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목소리는 어떻게 이 장면에 끼어 든 것일까.

이 말은 오토가 집을 나서는 가후쿠에게 비행기 탑승 일정을 상기시켜 주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장면 다음에, 가후쿠가 비행기에 탔어야 할 그 시각에 오토가 집에서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은 오토 스스로 가후쿠의 일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오토의 이 말은 가후쿠에게 전하는 오토의 육성과 오토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라는 두 가능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영화는 단순히 오토의 입을 가려 버림으로써 오토의 말을 어떤 것으로도 해석 가능한 텅 빈 말, 신체 없는 목소리로 만든다.

가후쿠는 다양한 언어로 이루어진 연극 공연을 만들어 간다. 연기하는 배우들은 현장에서 상대방의 육성을 알아 듣지 못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언어로 어떤 맥락과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깊이 이해하도록 훈련한다. 이것은 텅 빈 말로부터 인간의 정신적 신체를 발견하거나 부여하는 과정인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이에 대해 보여 주는 유려한 상징들, 즉 몇 가지 소리를 지운 것—육성을 지니지 못한 유나, 미사키의 고향을 향하는 도로 장면의 묵음—이나 앞서 키스 장면과 같이 소리의 실체를 불명확하게 만든 것도, 목소리의 담지자를 말소한 후 다시 의미의 고정점을 탐색하려는 시도인 것처럼 보인다.

가후쿠는 유나와 재니스의 연기 연습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 말하고, 다카츠키와의 대화에서 대본으로부터 그것을 만나 응답하라고 한다. 가후쿠가 말하는 그 무언가는 과연 무엇일까? 앞서 말한 의미의 고정점, 텅 빈 말로부터 각 주체가 타당하다고 확정하고 끝내 드러내게 되는 의미의 고정점은 아닐까? 또는 그 타당하게 열려 있는 가능성의 혼란과 고통을 견뎌 낸 흔적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가후쿠는 이를 위해 오토의 연극 대본 녹음본처럼, 또는 연극 공연 리딩 연습 방식처럼 감정이 소거된 로봇과 같은 목소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즉 주체의 자기 말소 이후에야 새로운 의미의 고정점을 탐색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가후쿠에게서는 실존적으로 드러난다. 오토가 방언처럼 내뱉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대로 오토에게 전달해 주는 일상이나 오토에게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또는 타인과의 대화에서 반응을 충분히 하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다른 의미에서 드라이버 미사키 역시 자기 자신을 무화하려는 인물이다. 미사키는 가후쿠의 자기 말소적 경향에 대해 미학적 태도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내와 어머니의 상실이라는 트라우마가 이들의 자아를 계속 흔들고 있다.

영화는 이들이 온전히 자아를 무화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한다. 이를 드러내는 이 영화의 반복적 투사가 흥미롭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의 대사가 여러 인물의 입을 통해 이 영화 곳곳에 반복적으로 기입되면서, 그 대사는 텅 빈 목소리로부터 인물의 내면과 일치하는 심상 같은 것으로 발전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진실은 그게 무엇이든 두렵지 않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이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와 같은 대사가 가후쿠와 미사키로 하여금 각자의 상처를 인식하고 직시하도록 방향성을 가리키거나 그런 도약의 징표가 된 것처럼 비추어질 때, 영화가 텅 빈 주체의 열린 가능성을 동시에 염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같은 염려가 영화로 하여금 유나, 윤수 집에서의 저녁 식사 장면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어떤 투사나 암시보다도,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가후쿠와 미사키라는 인물의 변화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사람들 사이 교류를 이상화한 장면이라고 할 법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필요로 하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이 두 인물이 구체적 관계를 경험함으로써 전환점을 찾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지니고 대면할 용기를 그들 자신의 관계 안에서 확인시키기 위해.

<파워 오브 도그>

이 영화에 흐르는 도도한 긴장을 언급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묘사력을 시험해야 한다. 브롱코 헨리의 이니셜이 박힌 천으로 온몸을 쓰다듬으며 심취한 필의 모습을 묘사하지 않고 필이라는 인물의 억압적, 공격적 성격 이면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필이 로즈를 적대시하고 그를 신경쇠약으로 몰아 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 역시 로즈의 피아노 연주를 조롱하는 듯한 필의 밴조 소리를 묘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인물의 말이 적은 대신에 움직임, 소리, 표정에 대한 감각을 좇아 가는 것으로도 벅찰 정도로 생동감 있게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달리 말하면 인물들의 긴장과 갈등을 이 영화는 언어적으로 가시화하기보다 감각적으로 암시하려 한다. 발화된 상황보다 암시적인 감각이 긴장과 갈등을 더 강렬하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가 영화가 전해 주는 감각을 불안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로 감각한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어쩌면 감각적 표면으로부터 내가 발견한 왜상을 말하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필이 매번 목장의 뒷산을 응시하면서, 능선과 빛의 움직임이 만드는 형상으로부터 짖는 개의 왜상을 확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레드 밀 식당에서 피터가 만든 종이 꽃을 짓이기는 필의 손가락 움직임으로부터 나는 왜 성적 암시를 받았을까. 또는 나는 왜 자꾸만 피터가 그의 친부 역시 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새아빠 조지 역시 안전하지 못할 거라는 암시를 곱씹고 있을까. 나는 이것이 왜상적 오인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에 강하게 이끌린다. 이 영화는 확증하지 않고 암시함으로써 왜상적 오인을 유도하는 단서를 남기는 것이 영화의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가 하는 일은 영화의 이미지로부터 저마다의 왜상을 만나는 일인 것만 같다.

영화적 왜상은 그저 허상일 뿐일까.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이야말로 나라는 자아 그 자체인 것처럼, 왜상적 환영이야말로 영화의 정체 그 자체는 아닐까. 우리가 발견한 왜상이야말로 영화가 던져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필이 뒷산의 형상에서 찾은 왜상의 정체를 피터가 알아차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왜상적 마주침을 밀어붙여 나와 영화의 교차점을 파악해 나가는 것 말고 달리 영화를 이해할 길은 없지 않을까. 어쩌면 이 영화의 묘사에 너무나도 사로잡혔기 때문에, 나는 이 같은 생각 언저리를 맴돌기만 한 것 같다.

그나마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이 영화에서 피터라는 인물이 필보다 더 관심이 갔다. 피터는 이 영화의 비밀과 암시 전체에 연루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어머니 로즈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병적인 집착을 보인다. 어머니의 히스테리에 피터가 말한다. “이럴 필요 없게 내가 정리할게.” 남성성에 대해 맹목적 애착을 보이는 필이 거의 반사적으로 로즈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피터는 운명적으로 필과 대결한다. 피터는 이 영화가 공들여 묘사하는, 필로 대변되는 남성성의 대척점에 선 남성성이다. 피터는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고, 필을 두려워 하며 순종하는 듯한 태도로 필에게 접근해서, 그의 욕망과 환상, 그리고 취약함을 간파하고 이용해 나간다. 피터는 연약한 외양을 한 포식자다. 어쩌면 로즈가 조지와 결혼할 때부터 피터는 이미 살인을 단계적으로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억압적 아버지-적대자를 기꺼이, 가차없이 살해하는 피터의 강박과 증오는 필의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뒤틀린 남성성을 드러낸다. 필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로즈와 조지를 창문 너머로 지켜보는 피터의 응시가 필의 나르시시즘보다 더 위험해 보인다. 이 때 피터의 옅은 웃음이 우리에게 일그러진 환상을 되돌려 주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