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해준이 한 말은 정말 서래를 사랑한다는 뜻이었을까. 서래는 그렇게 확신하고 해준은 이를 부인한다. 그 말은 해준이 서래 남편 사망 사건을 종결하고 나서 뒤늦게 서래의 혐의점을 발견하고 서래를 찾아와 한 말이었다. 해준은 자신이 서래에게 빠져 서래의 혐의를 지우는 일을 도와 수사를 망쳤고, 그로 인해 붕괴됐으며, 증거가 될 핸드폰은 바다 깊이 버리라고 한다. 해준은 이 때 수사를 망친 자신을 책망하고 한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래는 이 말이야말로 해준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의 통렬한 고백이라고 받아들인다. 해준 자신은 모르는, 자기 말에 담긴 의도 이상의 진실을 서래는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게 직업 윤리를 저버리고 수사를 망친 이 사태가 모두 서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사랑은 주체의 빈틈을 넓히고 붕괴시킨다는 깨달음까지, 서래는 해준의 말에서 은폐된 사랑의 층위를 발굴해 낸다.

그리고 서래는 해준의 그 억압된 본심에 모든 것을 건다. 나는 서래의 이 태도가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를 성립시킨다고 생각한다. 서래가 사랑에 대해 취하는 방식, 이를테면 해준의 말과 행동을 반영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들, 해준을 안심시키고 불안하게 만드는 전략, 그리고 서로를 결속시키기 위해 전부를 거는 선택 같은 것들이 이 영화의 결을 조건 짓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은 과잉되었고 동시에 숭고하다.

그러나 나는 서래로부터 분출되는 멜로적 세계의 숭고함에 충분히 빠져 들지 못하는 것 같다. 무언가로부터 방해받는 느낌이라고 해도 될까. 이에 대해 나는 충분히 말할 자신이 없다. 다만 영화가 서래와 해준을 둘러싼 세계에 침잠하도록 가만 두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는 스타일과 서사의 표층부터 심층까지 해석해야 할 정보가 과잉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서래와 해준의 감정에 집중할 수 없는 것이다. 정보가 차고 넘쳐서 감각 과부하 상태에 빠지는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지나 사운드를 겹치지 않고 플롯의 구획을 정돈하거나, 카메라-스크린의 망막적 층위를 가시화하는 것을 자제했으면 어땠을까. 또는 초점을 활용한 광학적 수사학이나 표현주의적 미술과 조명의 즐거움을 조금만 드러냈다면……등. 그러니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다른 영화를 상상하게 된다. 서래와 해준에게는 수사적 소거법이 적용된 영화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랬다면 박찬욱의 영화가 아닐 것이다.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각자 할 수 있는 최대의 수사를 발휘한다고 느끼는 충만감이 박찬욱 영화의 핵심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어떤 지점에서 말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부족한 설명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설명도 존재를 포섭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 너무도 충만하기 때문에 어떤 말도 더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라면. 나는 이 영화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서래와 해준의 사랑이 지닌 과잉된 숭고의 가능성이 이 영화의 공백 없는 충만한 세계에서는 영속하지 못할 것만 같아 푸념을 하는 중이다. 과소의 결핍된 세계에 그들의 자리가 있을 것만 같아서.

<미드소마>

스웨덴의 작은 마을 호르가에 도착한 이튿날 절벽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의식을 목격하고, 대니는 이곳을 떠나려 한다. 그날 밤 대니는 이상한 꿈을 꾼다. 숙소 건물을 몰래 나온 크리스티안과 친구들이 대니를 남겨 두고 호르가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목격하고 절규하는 대니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절벽 의식에서 목격한 처참하게 망가진 시신, 그리고 자살한 여동생과 부모의 시신이 대니의 꿈을 가득 채운다. 하루 아침에 가족을 잃고 남자 친구와 관계마저 불안한 상황에 놓인 대니를 지배하는, 누군가로부터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이 트라우마가 응축된 장면에 담겨 있다. 그런데 이 꿈은 대니의 심리와 반대다. 현실에서는 대니가 호르가를 떠나고 싶어 하는데 꿈에서는 남자 친구와 그의 친구들이 대니를 남겨 두고 떠난다. 대니가 직접 목격했을 것 같지 않은 동생과 부모의 죽은 모습이 꿈에 나타난다는 점이 의아하지만, 이 장면이 대니가 꾸는 꿈이 맞다고 한다면 이 꿈의 전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니가 당장 호르가를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 펠레가 찾아 와 대니를 설득하고 위로한다. 처음에는 이 전통을 이해해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펠레는 이 호르가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가족이고 힘들 때 붙잡아 주었다고, 크리스티안이 힘들어 하는 너를 잘 붙잡아 준다고 느끼는지 묻는다. 대니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니는 호르가를 떠나지 못한다. 나는 이 때 대니가 펠레에게 설득 당했기 때문에 호르가를 떠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대니는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하는 크리스티안을 버리고, 이 호르가에서 자신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니의 꿈은 그 기대, 욕망을 그것이 야기하는 죄책감과 두려움 안에서 뒤집힌 방식으로 상연하고 있다.

대니의 욕망이 실현되는 방식은 파국적이다. 크리스티안은 비겁하지만 대니는 파국적이다. 크리스티안은 선택과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려 하고 대니는 그것을 감당하면서까지 매달리려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대니가 갖게 되는 원망과 분노는 증폭된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취약한 주체 대니에 대해 가혹한 반응일지 모르지만, 대니의 이 감정이 펠레로부터 매개된 욕망과 만날 때, 그리고 더불어 호르가의 이교적 의식을 통해 드러날 때, 그것은 치명적으로 위험해진다. 불타는 희생양을 바라보며 희열에 찬 듯한 대니의 웃음에 동참하는 것이 어쩐지 나는 위험해 보인다.

호르가의 이교적 문화는 이 영화를 기괴하고 공포스럽게 만든다. 물론 동시에 농담처럼 만들기도 한다. 호르가는 서구 근대 주체의 타자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자기 자신에게 투사해 본 농담 같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농담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저렇지 않지”, “스웨덴에 실제 저런 문화는 없어”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스웨덴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폭소했다고 한다. 누구도 이 영화가 표현하는 세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이 영화는 단지 우리 안의 편견과 왜곡된 환상을 우리 안에서 전유해 보고 있을 뿐이다. 다만, 당신이 우리와 같은 주체라면.

그렇게 구성한 호르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타자성의 핵심은 주체가 소멸된 공동체라는 점에 있는 것 같다. 호르가의 사람들에게 개인의 삶은 모두 공동체의 종교적 의식을 수행하는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정해진 연령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기꺼이 희생 제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랑과 슬픔 같은 개인의 감정도 의례적 집단 행위 안에서 소거된다. 전근대 종교적 파시즘에 가까워 보이는 이것이 타자에 대한 서구 근대 주체의 왜곡된 환상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목가적 환상과 더불어 자기 지시적으로 유희한다는 것은 다소 혼란스러운 일이다.

이 영화의 공포는 호르가의 광기 어린 종교 의식에 대니의 감정과 욕망을 밀어 넣는 데서 야기된다. 그것은 정말로 공포스러운 일이다. 대니라는 취약한 주체가 이교적 타자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기만적으로 즐기기 위해 희생됐을 가능성을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주해야 하는 것은 유사 종교와 살인의 뒤섞인 향락 앞에서 무너진 대니의 정신이다. 영화는 왜 대니를 그렇게까지 만들어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마도 아리 애스터는 개의치 않겠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그 욕망이 불가해하고 공포스럽다.

<드라이브 마이 카>

가후쿠와 오토가 키스하는 장면이 나는 무척 이상했다. 그 장면에 달라 붙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 오기 때문이다. “나리타 9시 출발.” 분명 오토의 목소리이지만, 이 때 카메라는 오토의 입을 가후쿠의 얼굴로 가려 놓아서 오토가 실제로 내뱉은 말인지 확정할 수 없다. 그보다 둘이 입을 맞추고 있는 그 순간 오토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목소리는 어떻게 이 장면에 끼어 든 것일까.

이 말은 오토가 집을 나서는 가후쿠에게 비행기 탑승 일정을 상기시켜 주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장면 다음에, 가후쿠가 비행기에 탔어야 할 그 시각에 오토가 집에서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은 오토 스스로 가후쿠의 일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오토의 이 말은 가후쿠에게 전하는 오토의 육성과 오토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라는 두 가능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영화는 단순히 오토의 입을 가려 버림으로써 오토의 말을 어떤 것으로도 해석 가능한 텅 빈 말, 신체 없는 목소리로 만든다.

가후쿠는 다양한 언어로 이루어진 연극 공연을 만들어 간다. 연기하는 배우들은 현장에서 상대방의 육성을 알아 듣지 못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언어로 어떤 맥락과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깊이 이해하도록 훈련한다. 이것은 텅 빈 말로부터 인간의 정신적 신체를 발견하거나 부여하는 과정인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이에 대해 보여 주는 유려한 상징들, 즉 몇 가지 소리를 지운 것—육성을 지니지 못한 유나, 미사키의 고향을 향하는 도로 장면의 묵음—이나 앞서 키스 장면과 같이 소리의 실체를 불명확하게 만든 것도, 목소리의 담지자를 말소한 후 다시 의미의 고정점을 탐색하려는 시도인 것처럼 보인다.

가후쿠는 유나와 재니스의 연기 연습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 말하고, 다카츠키와의 대화에서 대본으로부터 그것을 만나 응답하라고 한다. 가후쿠가 말하는 그 무언가는 과연 무엇일까? 앞서 말한 의미의 고정점, 텅 빈 말로부터 각 주체가 타당하다고 확정하고 끝내 드러내게 되는 의미의 고정점은 아닐까? 또는 그 타당하게 열려 있는 가능성의 혼란과 고통을 견뎌 낸 흔적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가후쿠는 이를 위해 오토의 연극 대본 녹음본처럼, 또는 연극 공연 리딩 연습 방식처럼 감정이 소거된 로봇과 같은 목소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즉 주체의 자기 말소 이후에야 새로운 의미의 고정점을 탐색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가후쿠에게서는 실존적으로 드러난다. 오토가 방언처럼 내뱉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대로 오토에게 전달해 주는 일상이나 오토에게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또는 타인과의 대화에서 반응을 충분히 하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다른 의미에서 드라이버 미사키 역시 자기 자신을 무화하려는 인물이다. 미사키는 가후쿠의 자기 말소적 경향에 대해 미학적 태도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내와 어머니의 상실이라는 트라우마가 이들의 자아를 계속 흔들고 있다.

영화는 이들이 온전히 자아를 무화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한다. 이를 드러내는 이 영화의 반복적 투사가 흥미롭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의 대사가 여러 인물의 입을 통해 이 영화 곳곳에 반복적으로 기입되면서, 그 대사는 텅 빈 목소리로부터 인물의 내면과 일치하는 심상 같은 것으로 발전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진실은 그게 무엇이든 두렵지 않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이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와 같은 대사가 가후쿠와 미사키로 하여금 각자의 상처를 인식하고 직시하도록 방향성을 가리키거나 그런 도약의 징표가 된 것처럼 비추어질 때, 영화가 텅 빈 주체의 열린 가능성을 동시에 염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같은 염려가 영화로 하여금 유나, 윤수 집에서의 저녁 식사 장면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어떤 투사나 암시보다도,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가후쿠와 미사키라는 인물의 변화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사람들 사이 교류를 이상화한 장면이라고 할 법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필요로 하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이 두 인물이 구체적 관계를 경험함으로써 전환점을 찾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지니고 대면할 용기를 그들 자신의 관계 안에서 확인시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