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군>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군이었던 최진수씨는 1989년 2월 22일 28차 5·18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출석해 계엄군의 송암동 학살 사건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수십 명의 공수부대원이 시민군이 숨어든 집 앞마당으로 들이닥치는 순간을 말할 때 그는 차마 꺼내기 힘든 말인 듯 입이 막혔고 입술이 떨렸다. 1980년 5월 24일 광주 송암동에서 계엄군은 무작위로 시민군을 즉결처분했다. 최진수씨보다 한 발짝 먼저 툇마루를 넘었던 이름 모를 동료는 관자놀이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최진수씨는 그 순간 쓰러지는 동료의 눈을 아직도 떠올린다. 영화 <김군>은 30년이 지난 지금 그 증언을 최진수씨의 얼굴로 겹쳐 다시 잇는다. 이런 말을 덧붙이면서 : “그 친구 대신에 제가 산 거죠. 툇마루에서 먼저 발을 내딛었으면 제가 먼저 죽었을 텐데. 그 생각만 수십 년 동안 하고 있습니다.” 

영화 <김군>은 한국 현대사의 격랑을 상징하는 사진 이미지를 두고 벌이는 이야기의 투쟁을 그린다. 기관총을 탑재한 군용 트럭 위에서 방탄모를 눌러 쓰고 매서운 눈빛으로 뒤돌아 보는 어느 시민군의 사진에 일베와 지만원 뿐만 아니라 이 영화 역시 매혹되었다. 그 자체로 포토제닉하기도 한 이 사진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사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1980년 광주의 현장을 담은 사진은 모두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초석적 사건, 광주의 아픔과 독재에 대한 민중의 저항 등을 표상하는 상징적 힘을 지닌 매혹적 이미지다. 금남로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민 군중의 얼굴 하나하나는 수업을 파하고 온 학생 김 아무개, 세탁소 문을 닫고 나눠줄 주먹밥을 챙겨 온 이 아무개의 구체적 삶이 아니라 저항하는 민중의 현현으로 우리를 매혹시킨다. 이미지의 매혹적 면모는 종종 그것을 구성하는 구체적 이야기를 압도하거나 넘어선다. 그렇게 사진이 매혹적 이미지가 되어 가는 동안 점차 우리가 잊게 된 것이 무엇인지 이 영화는 깨닫게 해 준다. 구체적 삶 또는 이야기의 공백, 위에 서술한 최진수씨의 증언으로도 채울 수 없는 김군의 이름 같은 것 말이다. 그 공백이 이 영화가 일베와 지만원의 대체 역사와 싸우는 전장이다. 

영화 <김군>은 사진 이미지의 매혹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은 그것으로부터 구체적 개인의 삶을 구하려는 영화다. 그렇지 않다면 필름 아카이브에서 꺼낸 필름을 루페로 들여다보고 확대 사진의 은염 입자 속에서 매혹적 울림을 감상하는 것으로 그쳐도 충분했을 것이다. 대신 일베 및 지만원이 일으킨 소동을 영화로 다루기로 마음 먹었을 때, 소동이 일어난 사진의 주인공을 찾아 나설 때부터 목표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지만원의 주장이 넌센스에 불과하다는 것은 영화가 시작하고 5분도 지나지 않아 알 수 있다. 처음 만난 시민군 본인의 증언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영화는 이미지가 지운 시민군의 얼굴과 이름을 복원한다는 목표를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몰아붙인다. 세 명의 광주 시민군(이강갑, 최영철, 최진수) 극장 재회 장면은 이미지로부터 현실의 구체적 개인을 규명하고 개인이 자신의 상징화된 이미지를 성찰하게 하며 개인이 자신의 기억과 서로의 관계를 직시하도록 만드는 인위적 시공간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30여 년 간 서로를 찾지 않고 각자의 외상적 경험을 삭이며 살아 온 시민군, 특히 최진수씨의 삶을 영화가 침범하는 것은 아닐까 긴장하게 된다. 영화가 이들의 삶을 극적으로 이용하려는 것 같다는 느낌이 이 영화의 윤리적 태도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가 시민군의 구체적 삶 속으로 섣불리 침입한 것이 아니라 시민군이었던 이들이 이미지 뒤에서 훼손당한 이야기로부터 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해 영화의 세계를 필요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영화가 시민군의 기억을 추적하며 만난 수많은 광주의 주역들이 회고하고 증언하는 과정 속에서 사진에 대한 조롱의 이야기에 맞서기 위해 자신들만의 이야기 세계가 필요함을 자각하고 있었다면 말이다. 

덧붙여 시민군 사진에 대한 조롱이 지닌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베로부터 촉발되어 지만원이 공적 소동으로 만든 5·18 북한군 개입설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부정한다. 일베와 지만원은 광주의 상징적 사진 이미지를 조롱하고 그 이야기를 전복하여 대체 역사를 구성하려 한다. 물론 이는 망상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악의에 찬 조롱이 진짜로 원하는 바는 성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광주의 역사를 피해자의 기억으로, 민중의 주체적 저항을 타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두고 싶어 한다. 그들이 왜곡하고 조롱하는 사진이 광주에서 벌어진 피해의 기록이 아니라 무장하고 저항한 시민군에 대한 것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광주가 저항했다는 것을 지우고 싶은 것이다. 광주의 저 무장한 청년이 실은 남파한 북한군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확신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은 광주 시민이 체제에 저항하는 정치적 주체였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다는 욕망에 대해서만은 확신에 차 있을 것이다. 시민군이 북한군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시민군 역시 피해자였음을 상기해야 하리라. 시민군이 피해자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주체로 동일시하지 못하고 돕지 못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리라. 이처럼 파시즘이 죄의식을 전가하며 주체를 억압하는 전략이 여전히 이곳에서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영화 <김군>이 도착하는 진실 앞에서 되새겨 본다. 

몇 년 동안 깊은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상실감과 자책이 중첩되고 반복되면서 나를 갉아 먹었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지 말하기가 짐짓 부끄럽고 고통스럽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소진되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겠고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 그리고 불안만 남은 것 같았다.

이제 조금씩 폐허를 수습하고 있는 듯 하다. 내 얘기를 마음 열고 들어 줄 상담자를 찾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 감정을 진정시킨 후 한 일은 상담자의 조언에 따라 내가 할만한 활동을 찾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온라인 필사 수업을 들었다. 옮겨 적는 글에 이내 염증을 느끼고 나는 다시 영화를 찾았다. 영화 비평 읽기 강좌를 듣기 시작했고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다시 기억해 내려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화 리뷰 쓰기 모임도 찾았다. 글쓰기는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이고 내게 끝없는 고통의 과정이지만 “즐기지 못하는 일이라도 좋아할 수 있다”는 상담자의 조언이 옳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영화 리뷰 쓰기 모임 덕분에 오랜만에 본 영화를 생각하고 정리하게 되었다. 글과 생각은 언제나 모자라지만 오랜만에 블로그에 영화 보고 쓴 글을 남길 수 있어 좋다. 더욱 좋은 건 리뷰 쓰기 모임에서 한 해 동안 쓴 글을 책으로 엮어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일이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즐기지는 못하지만 나를 구해 주는 일이다.

서론이 지나치게 길었다. 영화 리뷰 쓰기 모임에 뒤늦게 합류해 쓴 영화 두 편에 대한 글을 블로그에도 기록으로 남겨 둔다.



사랑에서조차 자유로운 세계는 없다

– <더 랍스터>

영화 <더 랍스터>가 우화적 세계를 제시하는 방법은 인물들로부터 감정을 제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간으로서 시민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성 상대를 찾는 순간에도 인물들은 좀처럼 상대에게 웃음 짓지 않는다. 냉혹한 여인이 데이빗의 형을 죽였을 때에도 데이빗은 복수라는 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은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눈에 칼을 들이미는 동안에도 데이빗의 눈빛에는 두려움 하나 없다.

인물들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인물에 동일시하지 않고 신적인 관점에서 학문적으로 사건을 관찰할 수 있도록 채택한 연출 방법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 세계에서 억압 받고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영화 속 세계의 사람들은 감정을 나누는 법을 모른다. 사랑이라는 감정적 상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요함으로써 정작 감정적 상호작용과 자유의지는 마비된 사회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세계다.

감정적 동일시를 원천차단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고안된 내레이션을 통해 근시 여자는 데이빗이 “감정이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감추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전한다. 영화는 데이빗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억지로 만드는 데 실패하는 전반부와 사랑하는 감정을 감추는 데 실패하는 후반부로 나뉘는데, 수용소처럼 싱글들을 모아 놓고 짝짓기를 강제하는 호텔이나 이 커플 이데올로기 파시즘 체제에 저항하며 사랑을 금지하는 게릴라 조직 모두 공히 억압하는 것은 사랑을 둘러싼 감정의 자유의지와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이다.

감정을 표현하고 나누는 능력을 잃어버린 이 세계에서 사랑을 다루는 태도는 기괴하고 어리석다. 사랑할 상대를 찾거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외면적 동일성을 찾고 만드는 일이다. 근시 여인이 데이빗도 나처럼 근시인 것을 보고 사랑에 빠지거나 절름발이 남자가 코피 흘리는 여자와 커플이 되기 위해 벽에 얼굴을 처박아서라도 코피 흘리는 사람이 되려는 모습들. 감정 교환이 불구가 된 이 세계에서는 각자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무표정하게 각자의 춤을 추는 적막에 찬 장면처럼 모든 행위의 본질적 효과가 사라지고 우스운 몸짓만 남는다.

근시 여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데이빗이 근시 여인처럼 똑같이 눈 멀기 위해 자신의 눈을 칼로 찌르려는 마지막 시퀀스는 안타까운 촌극이다. 이 시퀀스는 눈 먼 채로 돌아올 데이빗을 기다리는 근시 여인이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이는 감정의 자유의지와 자기 존엄을 위한 투쟁에 각성하고 고군분투한 데이빗과 근시 여인조차 사랑에 대한 체제 이데올로기의 맹목적 열정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상기시킨다.

호텔과 게릴라 조직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에도 이 세계에서 그들이 사랑을 실천하고 증명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로 같아지는 것 말고는 없는 것이다. 감정을 표정과 목소리에 담는 법을 모르는 세계라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방법이 없고 사랑에서조차 그저 주어진 세계의 선택지에서 배회할 뿐, 자유로운 세계는 없다고 이 영화는 부조리하게 말한다.



<연애몽>의 빛나는 순간만을 기억하고 싶다

– <쓰리 타임즈>

영화 <쓰리 타임즈>의 원제는 최호적시광(最好的時光), 가장 좋았던 때의 빛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1966년, 1911년, 그리고 2005년 각 시대를 배경으로 연인으로 묶인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는 각 시대에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일까, 가장 빛나는 순간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품고 보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충분한 답을 내 놓지 않는다. 1966년을 다룬 첫 번째 챕터 <연애몽>만이 명료하게 떠올라 빛나고 있음을 인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에 반해 1911년을 다룬 두 번째 챕터 <자유몽>에서 기생(서기)과 개화파 시인(장첸)의 관계는 억압되어 침잠하고 있으며 2005년을 다룬 세 번째 챕터 <청춘몽>에서 진정(陳靖, 서기)과 아진(阿震, 장첸)은 정처 없이 부유하고 있다. 각 챕터의 부제목은 그것이 충만하여 빛나는 때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이 결핍된 시간을 말하는 것만 같다. 이들에게 빛나는 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같고 카메라는 이따금 그들의 감정을 가만히 지켜 볼 뿐이다. 무성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자유몽>에서 예외적으로 할애된 유성영화의 순간이 영화적으로 빛나는 것을 제외한다면 나는 1911년과 2005년의 이야기는 빛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이 영화가 가장 좋았던 때인 1966년의 빛나는 순간을 상기하며 1911년과 2005년을 반추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치가 순차적이지 않고 1966년 – 1911년 – 2005년인 것은 1966년이 참조점이 되어 그보다 과거와 그보다 미래를 바라본다는 의미가 아닐까. 1911년과 2005년에 대한 1966년의 대답 또는 그 반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에 대한 내 원경험이 오직 <연애몽>에서 서기, 슈메이의 놀란 웃음과 아프로디테 차일드의 노래 Rain and Tears를 둘러싼 간절하고 애틋한 감정의 응축으로 남은 것도 이 때문일까.

첫 번째 챕터 <연애몽>은 1966년 입대를 앞둔 한 청년(장첸)과 당구장에서 일하는 여인 슈메이(秀美, 서기)가 연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만 가오슝(高雄)의 한 당구장을 즐겨 찾는 청년은 본래 슈메이가 오기 직전 직원 하루코(春子)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고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 편지는 슈메이의 손에 넘어가서야 비로소 연애편지가 되었고, 군인이 된 청년은 휴가 중 다른 곳으로 떠난 슈메이를 애타게 찾고 결국 만나고 끝내 연인이 되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슈메이와 청년이 연인이 되기 직전 끝난다는 점에서 <자유몽>, <청춘몽>과 마찬가지로 <연애몽> 역시 연애가 부재하고 그것을 갈구하는 인물이 거기에 가 닿으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챕터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나서 청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가 시작하고 10분 동안 우리는 감정을 알아채기 힘든 인물들의 행위를 바라본다. 아마도 청년이 하루코에게 건네는 편지에서 감정의 단초를 알 수 있을텐데, 영화는 이 편지를 받은 하루코의 옅은 웃음 외에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편지의 내용은 하루코가 떠나고 새로 온 직원 슈메이가 읽는 동안 청년의 목소리 내레이션으로 설명된다. 영화는 하루코가 아니라 슈메이를 통해 청년의 마음을 들려 주고 싶은 것이다. 편지에는 청년의 상실과 실패,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담겨 있다. 청년은 얼마 전 어머니를 여의었고 두 번 대학 시험에 떨어졌으며 곧 군대에 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청년은 당신이 있는 당구장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고백한다. 그는 위로 받을 누군가가, 아무라도 필요하다고 구애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하루코와 슈메이는 청년이 품는 욕망의 대상이고, 영화는 청년의 욕망을 제 것으로 하여 따라간다.

그러나 <연애몽>은 (그 누구와도) 사랑 받고 싶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청년의 욕망과 감정을 청년을 통해 드러내지는 않는다. 대신 영화는 슈메이의 응답을 통해 욕망의 실현 가능성을 알려 준다. 뒤늦게 알게 되는, 슈메이가 청년의 편지에 답장을 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하루코의 편지를 전해 읽는 처음부터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슈메이의 표정과 얼굴을 통해서 말이다. 편지를 읽으며 웃음 지을 때, 자이(嘉義)로 떠나는 배 위에서 쓸쓸한 표정을 지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후웨이(虎尾)의 당구장에서 청년을 보고 놀라움의 웃음을 지을 때. 슈메이의 응답이 있을 때 영화는 감정을 고양시키고 이를 통해 청년의, 또는 이야기의 욕망은 정당성을 얻고 배가된다. 청년이 편지에 적은 노래 제목이 카메라가 슈메이의 표정을 가까이 지켜보는 순간 노래가 되어 흐르듯이 욕망은 슈메이의 응답을 통해 환상이라는 실체를 얻게 된다. 슈메이의 응답이 만드는 환상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응답 없는 하루코가 필요했을 것이리라. 청년이 가오슝에서 자이로, 그리고 후웨이로 슈메이를 찾아 헤매게 되는 동력 역시 숨겨진 슈메이의 응답이다.

카메라는 마지막 장면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조심스레 꼭 붙잡는 청년과 슈메이의 손을 클로즈업하기까지 이 둘만의 공간을 섣불리 할애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에는 당구대나 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침범해 들어온다. 후웨이의 당구장에서 재회한 청년과 슈메이가 벅찬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당구 치는 손님이 이들을 가리고 관객의 시선을 방해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야기가 품은 욕망과 달리 카메라는 청년과 슈메이를 타인 다루듯 한다. 마치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의 애틋한 사연을 힘겹게 찾아 내야 할 것처럼. 마치 사심 없이 바라보고 있는 어느 공간에서 우연히도 이 일이 벌어진 것처럼. 카메라는 이야기의 욕망과 힘겨루기를 벌이는 것이다. 이야기가 인물과 함께 욕망을 품고 나아가는 동안 카메라는 인내심을 가지고 거리를 둔 채 그들의 움직임만 지켜보는 듯한데, 이는 오히려 이야기가 지닌 욕망의 에너지를 응축, 강화한다. 두 남녀가 손을 꼭 움켜쥐는 마지막 클로즈업 쇼트는 카메라의 거리 두기가 더 이상 이야기의 욕망의 인력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이다. 카메라가 이야기의 욕망을 끝내 승인하고 그곳에 달라 붙어 버리는 영화적 희열의 순간이다.

<연애몽>은 희열에 도달하기 위해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영화적 대답 같다. 달리 말하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열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적 태도 같다. 욕망 – 사랑에 대한 열정을 끊임없이 돌이켜 보지만 끝내 긍정하고, 그것을 소비하기보다 정당한 방식으로 구축해 나가려는 노력처럼 느껴진다. 슈메이의 응답만이 영화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듯이, 욕망이 대상을 착취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 같다.

<연애몽>이 다루는 태도를 대척점에 놓고 <자유몽>과 <청춘몽>을 생각한다. <자유몽>에서 지주의 아들인 개화파 시인은 기생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착취한다. 시인과 기생 모두 신분 제도와 가부장제에 압도되어 자신들의 사랑을 추구하기를 두려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독히 비겁한 인물은 소위 개화파 시인이지만 말이다. 반면 <청춘몽>에서 진정과 아진의 눈빛은 서로를 갈망하는 순간에도 공허하다. <자유몽>과 달리 어떤 것도 허용되기 때문에 어떤 것에서도 희열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 <자유몽>과 어떤 것도 허용되는 <청춘몽>,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연애몽>. <연애몽>은 <자유몽>과 <청춘몽>의 중간 어딘가에 있다. 시공간적으로도 그렇다. <자유몽>의 유곽과 <연애몽>의 당구장, 그리고 <청춘몽>의 도로로 공간 범위는 점진적으로 확장된다.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시간 역시 <자유몽>은 몇 달, <연애몽>은 몇 일, 그리고 <청춘몽>은 몇 시간의 단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애몽>은 욕망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렇지만 구성된 시공간의 범위에서도 <자유몽>과 <청춘몽> 사이의 중용이며 그렇기 때문에 빛날 수 있다는 의미일까.

그래서 나는 첫 번째 챕터 <연애몽>이 다른 두 챕터를 안타까워 하며 반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차라리 <연애몽>은 반추할 대립자가 불필요하다면 어떨까. 허우샤오시엔은 시대의 관계를 구성하면서 자신의 역사의식을 반영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허우샤오시엔 개인의 역사와 노스탤지어가 스며들어 있을 터다. 그는 그것을 읽어 주기를 바랐는지 몰라도 이 이야기를 역사의식으로 치환하면 이야기도 역사의식도 얄팍해져 버리지 않을까. 1911년의 우창봉기나 1966년 대만의 징병제, 2005년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 각자가 지닌 순간의 역사적 다층성을 억압하거나 소진시키지 않고 이 영화를 선해하기 위해 <연애몽>의 빛나는 순간만을 기억하고 싶다.

아, 이렇게 착하고 질긴 시위대 봤나요
오늘도 촛불 사러 간다, 나 잡아 봐~라
[독자기고] “내가 오늘 어디에 있을지 나도 모른답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여중고생들이 든 촛불들이 과연 얼마나 강인하게 버텨줄지. 날마다 청계광장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리지만 청계광장 바깥의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함께 힘을 실어줄지. 처음 밝혀진 촛불은 그야말로 연약했다.

그런데 벌써 그렇게 한달이 흘렀다. 처음에는 스피커 시설도 갖추지 못해 앞에서 뒤로 ‘전달, 전달’하던 그런 촛불문화제가 드디어 지난 주말인 5월 31일 10만의 초에 불을 밝혔다. 그리고 5월 24일 이후로는 9~10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거리시위로 이어지고 있다.

아고라로 시작하는 하루의 기록

날마다 연행자와 부상자들도 속출하고 있다. 그런데 날마다 참가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촛불의 저항이 매일 매일 24시간 지속되기 시작했다.

   
▲ “미국 광우병 소 가져오지 말아라”라는 피켓을 만들어 시위에 참여한 익산의 어린이 (사진=네이버 카페 ‘김제할머니네집’)
 

이런 식이다. 매일 아침이면 다음 아고라를 시작해, 주요 사이트에는 ‘조중동 우아하게 끊는 법’과 <조선일보>에 광고를 실은 회사들의 홍보실 전화번호가 올라온다. 혹시 이미 받은 경품 자전거나 전화기 때문에 주저하는 소심한 독자들을 위해 경품 자체가 불법이므로 되돌려 주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영업소와 일일이 상대하지 말고 ‘우아하게 본사에 전화해서 해지하라’는 코치는 퍼질 만큼 퍼졌다.

요 며칠 네티즌들의 ‘오늘의 과제’는 일단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신네 회사가 오늘 아침 <조선일보>에 광고를 실었더라, 그렇다면 나는 당신네 회사가 광고를 철회할 때까지 항의할 것이며 안 되면 불매운동 조직할 것이다.” 요즘 <조선일보> 광고 개재 회사 홍보실은 폭주하는 전화로 골머리께나 앓는 중이다.

효과가 있느냐고? 네티즌들의 집중 포화를 받은 몇몇 기업에서는 광고 보류 혹은 광고 건에 대한 사과 공지를 올렸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네티즌들의 공세에 두 손을 든 제약회사인 명인제약이 있다. 보수언론에 광고를 싣지 않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일단 쎈 놈부터 패자”

아침이면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네티즌들도 안다. 이게 하루아침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서로 지치지 말고 일단 쎈 놈(조선일보)부터 패자고 격려한다.

그뿐 아니다. 연행자가 있는 경찰서마다 전화 걸어 항의를 하고 ‘칭찬합시다’ 게시판에 들어가서 국민 잡아 가두시는 경찰님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엿 많이 사드시라는 칭찬 글도 남긴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에 광고 하느라, 진보신당과 <오마이뉴스> 생중계 후원하느라, 강달프(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 응원하느라 여기저기 후원하고 성금 내느라 부지런히 인터넷뱅킹 창을 클릭한다.

심지어는 이런 경우도 있다.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이 온라인에서 ‘스마일 심’으로 활동하며 악플을 달아 온 증거를 찾아냈을 때 네티즌들의 센스는 상상을 뛰어넘었다. 알바비에 보태라며 18원을 후원금으로 보낸 것이다. 세액공제를 위한 영수증 처리는 등기우편으로 부탁한다며 다시 한번 ‘확인 사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비군 부대가 모일 때도, 유모차 부대가 등장할 때도 비슷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사이트에서 사이트로 아이디어를 퍼다 날랐고, 그러는 와중에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공지사항과 지침들이 만들어졌다. 누군가는 쥐 잡는 뿅망치를 들고 나오고자 했다. 평화시위를 염원하는 뜻에서 꽃을 들고 나온 이들도 있었다. 좀더 쌈박하고 신선하며 자극적인 피켓 문구를 만들어 사이트에 뿌리며 ‘불펌 환영’ 머리말을 달았다.

‘전화질’과 ‘클릭질’은 재빠르고 또 재치가 넘치며 뜨겁고 열정적이다. 그에 비해 거리에서는 엄청나게 느리고 또 피로하다. 인도에서 차도로 경계를 넘기는 했으나, 그 다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찰의 저지에 직면했을 때? 모두 다 알다시피 막히면 돌아가고, 돌아가다 또 막히면 열린 길을 찾아 에둘러 갈 뿐이다.

재치와 뜨거움 그리고 전화질과 클릭질

사람들은 열어줄 때까지 줄기차게 항의하고 구호를 외친다. 그리고 기다린다. 행렬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그게 설령 오래된 운동 단체라 할지라도 “그 쪽은 위험하다. 우린 안 간다. 광화문을 지킬 거다”고 제지당한다. 인터넷 용어로 말하자면, ‘닥치고 광화문!’ 혹은 ‘닥치고 행진!’이다.

하지 않는 건 딱 하나 있다. 포기하고 해산하는 것. 정해진 작전은 없지만 광화문에서 혹은 종로에서 그리고 지난 주말처럼 경복궁 부근에서 어찌됐든 만났다. 예정된 행로는 아니었다.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모이고 나서 자연스럽게 그런 흐름이 생긴 것일 뿐이다.

“어디로 간대요?” “오늘은 청와대 쪽으로 갈 것 같아요.” “일단 사람들 많은 쪽으로 붙어요.”
배후가 없으므로 해산을 명할 수도 없다. 해산하고 싶을 때 한다. 새벽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해산은 아니다. 내일 다시 나오기 위해서는 들어가야 할 뿐이다.

10만 명 이상이 운집한 지난 주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시청에서 서소문로와 서대문을 지나 경복궁 역에 이른 시민들은 더 이상 ‘고시철회, 협상무효’를 외치고 있지 않았다. ‘이명박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시위가 날이 갈수록 확산된 것처럼 그 사이 시위의 성격 역시 진화하고 확장된 것이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물 사유화를 비롯한 각종 민영화, 대운하, 교육정책 등 철회와 재고를 요구해야 할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은 촛불을 든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상식이 돼 있다.

5월 31일 토요일 밤 11시 반이 넘자 경복궁역 부근, 삼청동과 동십자각 일대에서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했다. 2중, 3중으로 바리케이드 쳐진 닭장차 앞에서 운집해 있는 사람들이 물대포를 피할 재간은 별로 없다. 물대포의 등장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잠시 뒤돌아 서 있는 선에서 그칠 줄 알았던 것은 지금까지는 물대포의 공격성과 위력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게 살수차야?”, “물이 어디서 나오는데?” 라며 시위대가 웅성거리는 사이, 취재 중인 숱한 카메라들을 향해서, 닭장차에 올라간 시민을 향해서, 그리고 ‘평화시위 보장하라’, ‘연행자를 석방하라’, ‘이명박은 물러나라’를 외치는 시위대들을 향해 물대포를 난사했다.

“제게 살수차야? 물은 어디서 나오는데?”

이에 대응한 구호는 ‘세탁비! 세탁비!’, ‘물 뿌려도 안 간다!’, ‘수도요금 올랐다. 아껴 써라 내 세금!’이었다. 물대포의 집중 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시민들을 경악했고, 비명을 질렀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다.

경찰들을 향해서는 저항의 구호를 스스로에게는 비폭력 평화시위를 연호했다. 길바닥은 장마가 끝난 직후처럼 흥건했다. 선두에 선 이들이 버티지 못하겠으면 뒤로 빠져나와 불을 쬐며 덜덜 떨리는 몸과 옷을 말렸다.

몸으로 맞서는 이들의 뒤에는 함성으로 맞서는 이들이 있고, 함성으로 맞서는 이들 뒤에는 이 시위의 기본적인 성격을 상징적으로 구현해 내는 이들이 있다. 닭장차와 직접적으로 맞서지 않는 후미는 또 완전히 다른 세상을 실현하고 있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어디선가 조달된 커피와 김밥을 나눠먹거나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노래도 박수도 구슬펐지만, 모두들 약간씩 지치고 피로했지만, 자리를 뜨는 이들은 많지 않다.

어떤 이들은 근처 카페 바깥에 놓인 벤치를 끌어와 길지만 무겁지 않은 토론을 지속하기도 했다. 처절한 긴장감과 아슬아슬한 평화, 그리고 알 수 없는 여유로움이 공존하고 있었지만, 이 이질적인 분위기의 묘한 조화를 모두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즐겼다.

새벽 세 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에 사복체포조가 삼청동 뒤쪽에서부터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 주변에 병력이 계속 보충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누군가 그럼 어떡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가능한 인도 쪽에 서 계세요.” 들려오는 대답이라곤 이게 전부다.

하나 대 여럿, 촛불 대 물대포, 비무장 대 무장

시위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대신 진압은 한 차원 진화한 시위를 쫓아오지 못했다. 곤봉을 휘둘렀고, 방패로 내리찍었으며, 군화발로 짓밟았다. 시민과 전경들은 하나 대 여럿으로 만났다. 촛불 대 물대포로 만났다. 비무장 대 무장으로 만났다. 비폭력 대 폭력으로 만났다.

   
▲ 경찰 폭력은 인터넷을 통해 낱낱이 폭로되고 있다. (사진=‘군화발 동영상’)
 

사실 시위가 절대로 끝나지 않는 이유, 24시간 계속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용량이 부족하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동 트는 새벽까지도 폭력적인 진압이 계속되는 상황은 인터넷 생중계를 타고 쉼 없이 보도됐다.

현장에서 가까스로 집으로 귀환한 이들은 이불 속에 숨어 벌벌 떨지 않는다. 다시 컴퓨터를 켜고 접속한다. 연행된 경찰서에 항의 전화를 한다. 현장 상황을 왜곡해 보도한 언론사에 정확한 취재와 보도를 요구하며 다이얼을 돌린다. 해외 언론 사이트에 제보할 사진과 유튜브에 올릴 동영상을 제작한다. 구호에 필요한 모금을 하고,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 내일 시위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연락한다.

그리고 다시 ‘출동’한다. 경찰이 시민을 에워싸고 폭력을 가할 수는 있지만, 시위 자체를 고립시킬 수 없는 이유다.

토요일 시위는 자연스럽게 일요일 밤, 월요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날 시위에 참석하지 못하고 아프리카(afreeca)와 오마이TV를 통해 접한 시위 현장은 지독히도 슬프고 아름다웠다. 경찰은 전날처럼 무차별 물대포 진압을 위해 기자들이 경찰차 위에서 내려갈 것을 종용했다.

순식간에 시민과 기자단 사이의 연대가 형성됐다. 기자들은 내려오지 않았고, 시민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비옷을 올려 주었다. ‘언론자유 보장하라’는 구호에서부터 ‘내려오면 조중동’이라는 재치 넘치는 구호도 등장했다.

기자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전경들이 경찰차 위로 올라섰을 때는 자정 무렵이었다. 시민들은 ‘취침점호 보장하라’고 연호했다. 학생들은 ‘기말고사 책임져라’고 외쳤다. 다행히 전날처럼 과격한 물대포 진압은 없었다. 언론까지 적으로 돌리는 것이 무모하다는 정도의 판단은 가능한 수준인가보다.

시위대의 깜찍스런 진화와 짜릿한 새벽

이날의 진압 상황이 전날만큼 끔찍했던 것은 당연하다. 정부와 경찰의 대응은 과거를 향한 폭주기관차를 연상하게 했고, 시위대는 깜찍스럽게 진화했다. 새벽 5시 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 아비규환에서도 많은 이들이 살아남았고 다시 평화의 촛불을 들었다.

무차별적 진압에 의해 인도로 몰려 있던 시민들은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자 ‘이명박 퇴진’을 외치며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촛불을 들고 도로를 점거하는 것이 불법이라면, 촛불을 들고 도로를 건너겠다는 것이다.

도로를 지나는 차량들도 응원의 박자를 맞춰 응원의 경적을 울린다. 이 와중에도 좌측통행이 이뤄졌다. 건너가는 이들과 건너오는 이들이 횡단보도 한 가운데서 엉키지 않았다. 짜릿한 새벽이었다. 빨간 불이 켜져 있는 동안에는 인도에 대기하면서 현장을 떠나는 경찰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이렇게 질기고 착한 시위대를 본 적이 없다. 오늘도 다시 촛불 사러 간다. 우비도 살 거다. 누구 돈으로 사는지 그게 못내 궁금한 모양인데, 내 돈으로 산다. 들리는 얘기로는 두께 20센티미터의 스티로폼도 효과적이란다. 피켓처럼 구호를 쓸 수도 있고, 깔고 앉을 수도 있고, 경찰의 곤봉과 물 대포 세례를 막을 수도 있단다.

내가 오늘 어느 횡단보도에 서 있을지는 안 가르쳐준다. 언제 어느 도로 위로 들어설지도 안 가르쳐준다. 나도 모르니까! 자, 어디, 나 잡아 봐라~!

2008년 06월 02일 (월) 17:45:49 조은영 / 독자 redian@redia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