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착역>

스냅 사진은 길을 헤매는 것으로부터 탄생한다. 스냅 사진은 발터 벤야민이 체현한 도시 산책자의 태도를 사진의 원리 안에서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헤맨다는 것은 목적지로 가는 길을 잃었거나 목적지 자체를 잃어버린 상태일 것이다. 그 순간 비로소 모든 것이 예기치 않게 낯설어지고 무심코 지나쳤던 사소한 사물과 시공간이 피사체가 될 자격을 얻는다. 스냅 사진에 실패란 없다. 벗어난 초점, 잘못된 노출, 망가진 구도, 무심한 피사체도 우리의 시각적 무의식을 열어 낸다. 카메라는 언제나 우리의 시선이 누락하는 세계를 무작위적 원리로 포착하고 있다.

<종착역>은 스냅 사진에 대한 영화적 고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네 아이가 찍은 사진이 영화 곳곳에 꾸준히 삽입되어 있다는 점에 연연한 말은 아니다. 물론 이것이 가장 직유적인 방식이기는 하다. 이 영화가 스냅 사진의 정지된 이미지에 시간을 할애하면서 우리는 운동 이미지의 영화적 세계 안에서 놓치기 쉬운 것을 경험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인물 자체의 시선을 경험한다. 설령 그것이 일회용 카메라의 렌즈를 경유한 상상적 시선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 이에 대해 우리는 영화에서 시선을 상상된 형태로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을 보태야 할 것이다 — 우리는 아이들이 찍은 스냅 사진을 통해 그들이 실제로 보았다고 믿을 법한 것을 경험한다. 이것은 영화가 일반적으로 구사하는 시점 쇼트의 방식보다 더 직접적인 시점 쇼트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영화에 삽입된 스냅 사진이 영화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불균질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진 자체가 통제되지 않은 방식으로 찍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카메라를, 의탁한 시선 장치를 통제하지 못한다. 지하철 노선도는 초점이 나갔고 동네 풍경 사진의 3분의 1은 손가락이 가려 버렸다. 스냅 사진의 즉흥적인 통제 불가능성이 오히려 그 시선의 주인을 상상하게 만드는 역설적 효과가 이 영화에서는 아이들의 미숙함과 조응한다. 정지된 스냅 사진 이미지를 응시하는 동안 우리는 통제되지 않은 세부와 실패한 시선을, 그리고 그 시선의 주인을 지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인물들의 연기나 플롯의 구성을 통제하지 않는 것을 원리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을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연기를 하기보다 현실에서 볼 법한 일상적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몸짓도 계획되지 않았고 어떤 발화도 정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인물의 대사를 정확히 알아 듣기 어려울 때도 있다. 강세도 리듬도 없고 다듬어지지 않은 온전한 구어적 대화에 아이들의 실생활 언어까지 보태면 아무리 훌륭한 녹음 환경을 갖춰 촬영했어도 이 영화에 담긴 대화가 온전하게 내러티브를 구성하기는 힘들 것이다. 플롯도 어떤 우연적 상황을 제시하는 것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소정이 핸드폰을 분실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구신창역에서도 떨어진 외딴 노인정을 찾게 되고 송희가 고양이를 만나는 바람에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놓쳐 버린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가능성에 몸을 맡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영화적 결을 구축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 이들의 영화다.

이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의 끝이라는 목적지를 잃고 헤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순간을 다룬다. 어떤 길도 초행인 그들에게 화면 바깥에서 갑자기 끼어 든 개 짖는 소리 같이 예견치 못한 놀라움이, 아이들이 노인정 안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고양이가 슬며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카메라의 프레임이 유례 없이 이동하는 우연한 영화적 선택이 그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가 아이들의 손에 일회용 카메라를 쥐어 주고 그들이 이미지를 만나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아이들이 자꾸만 낯선 길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미지의 이미지가 발생하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네 아이의 사진 여행은 자꾸만 산책하는 스냅 사진가의 태도를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헤매는 그 곳이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끝 지점이라는 것을 이 영화에 포개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낯선 길을 거니는 아이들이 만난 이미지가 포착한 것은 익숙한 것의 생경한 감각만은 아니다. 아이들의 사진에는 그 순간의 감정이 내재한다. 이를 전학 온 시연이가 연우, 소정, 송희와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분식집을 찾고, 여름 방학 사진 숙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지하철 1호선 종점을 가고, 함께 비를 맞고, 낯선 시골 노인정에서 같이 밤을 보내면서 네 아이가 모험심으로 친밀함을 키운 기억이 총 열 세 장의 스냅 사진 이미지 이면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스냅 사진을 전면에 두고 말하자면 이 영화를 네 아이의 사진에 담긴 맥락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때 나는 영화가 사진을, 사진이 영화를 보충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진과 영화가 각자 시선의 불가능한 지점을 보완하면서 피사체의 표면에 인물과 영화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채워 주고 있다고 말이다. 이 때 한낱 사물도 기억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제, 젖은 흙에 포개진 발자국이나 문앞에 널브러진 신발들이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것을 생각해 볼 시간이다.

<인 더 하우스>

<인 더 하우스>는 대체로 빛을 과장하지 않는다. 클로드가 라파 가족의 밤을 탐사하는 문제적인 장면에 들어 찬 빛과 어둠의 표현주의적 충동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는 빛은 부드럽고 그림자는 옅게 다루는 편이다. 자연광처럼 느껴지는 빛이 여러 각도에서 고르게 인물을 비추어 얼굴의 굴곡이 도드라질 겨를이 없는 야외 낮 장면을 보면 오히려 이 영화의 빛이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 와중에 빛과 어둠의 대조가 두드러진 장면이 나오면 이내 그 예외성 때문에 눈여겨 보게 된다.

광원이 화면 안에 놓여 인물과 사물에 깊은 그림자를 만드는 장면이 클로드와 제르망의 관음적 욕망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뻔한 독해일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가 조성해 가는 빛을 다루는 방식의 평균치를 갑자기 벗어나기 때문에 이루어 내는 효과는 크다. 화면 안에 자리한 광원은 시각을 성립시키는 빛의 존재를 뚜렷이 상기시킨다. 감각의 조건으로 머물지 않고 인물, 사물과 함께 화면을 구성하는 존재로 전면 등장할 때 빛은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는 영화적 진술이 된다. 라파 부부의 대화를 엿듣다 황급히 돌아선 클로드가 벽에 걸린 파울 클레의 그림을 보는 척하는 장면에서 건너편 벽의 조명 빛이 클로드가 은폐하려는 것을 동시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것처럼, 화면 속 광원은 그 자체로 말하는 제3의 존재다. 제르망 부부가 여전히 클로드의 소설 이야기에 여념이 없는 극장 속에서 영사기 빛이 시각화하는 거대한 열망의 크기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며 빛에 대한 생각을 촉발하는 것은 사실 화면 속 광원보다 극대화된 조도가 만드는 느낌이다. 클로드와 제르망이 클로드의 소설에 대해 논하고 이야기의 방향을 모색하는 교실 장면은 한쪽에 난 창문으로 쏟아지는 빛이 너무나도 밝아 교실 내부를 환히 비춘다. 그 밝기가 야외 낮 장면보다도 밝아 의아할 정도다. 빛이 측면에서 사선으로 들어오는데도 인물의 얼굴 그림자는 부드럽고 빛을 받은 실루엣이 때로는 밝게 번지기도 한다. 반사판으로 그림자를 조절하고 최대의 조도를 실내에 쏟은 이 장면이 교실 내부를 신전과 같이 만들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라파 가족의 일상을 두고 자신의 욕망을 투사해 소설을 만드는 클로드와 그 작업을 지도하는 제르망이 이 순간 어떤 신적 권능을 지닌 것처럼 심취해 있음을 극대화된 조도가 드러내고 있다고 느끼고 나면, 이 영화가 빛을 신전과 현실, 그리고 심연의 세 단계로 나누어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클로드와 제르망의 신적 권능이 현실과 재현의 세계를 뒤섞을 때 벌어지는 참상을 지켜 보면서 영화는 예술의 존재 의미를 냉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지닌 다양한 층위의 냉소가 향하는 것은 결국 착취하는 관계에 대한 것이다. 제르망이 아내 쟝과 클로드를 착취하듯이 클로드 역시 제르망과 자기 삶을 착취한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양자적 관계의 군상은 자기 결핍을 다른 것으로부터 보상 받으려 할 뿐 아니라 독점하고 침해하는 양상으로 점철되어 있다. 예술을 본받을 것 하나 없지만 미적 감각은 키워 주는 허영의 도구로 대하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클로드의 소설 작품 역시 현실에서 인간의 삶을 착취하여 완성된다.

현실을 착취하는 예술의 탐욕을 여실하게 보여 주는 마지막 장면은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이나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카메라의 응시가 관음증적 착취의 시선으로 이행하는 것은 그 렌즈가 누구의 눈으로 기능하는가 하는 문제에 달렸음을 상기시킨다. 이 장면은 이중으로 덧댄 눈에 가까울 것이다. 한 프레임을 가득 채운 아파트의 각 세대를 관음증적으로 바라보는 클로드의 시선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영화 자신의 시선, 그 중층적 시선의 결이 이 장면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테다.

그러나 이에 반하는 예를 들어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클로드가 몰래 집 구석구석을 도둑질 하듯 뒤져 보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숨죽이며 벽에 붙어 섰을 때, 카메라는 클로드가 불가능한 시야까지 움직여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에스더를 확인한다. 이 때 카메라는 전적으로 클로드의 확장된 눈이 되어 서스펜스를 만들어 낸다. 서스펜스의 법칙 아래 카메라는 오로지 훔쳐보는 자의 시선만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카메라 시선의 지위를 자기 냉소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사후적으로, 그것도 예외적으로만 가능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순간을 만나기 위해 이 영화는 위험한 질주를 해 본 것이다. 영화 안에서 신적 권능을 지닌 카메라 시선의 문제는 그 시선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

<좋은 친구들>

뉴욕의 뒷골목에서 잘 나가는 갱스터가 된 헨리는 캐런과 첫 데이트에서 고급 레스토랑의 특별한 통로로 캐런을 이끈다. 그 통로는 레스토랑 앞에 늘어선 인파의 긴 줄 옆에 숨은 지하로 향하는 작은 문이다. 문을 열고 좁은 복도를 지나면서 헨리에게 인사하는 사람들과 주방의 분주한 직원을 물리치고 나면 레스토랑 매니저가 헨리와 캐런을 챙겨 가장 좋은 자리에 테이블을 놓고 앉힌다. 이내 옆 테이블에서 선물한 와인을 받아 들고 나면, 헨리와 캐런 바로 앞에서 헤니 영맨의 스탠딩 코미디 쇼가 시작된다. 헨리만을 위해 준비된 레스토랑의 특혜 티켓 통로인 셈이다.

길거리에서 레스토랑 직원에게 자동차 열쇠를 맡기는 헨리의 손에서 시작해 헤니 영맨의 공연 무대까지 이어지는 이 3분짜리 쇼트는 앞선 30분의 러닝타임이 무엇을 향해 할애되었는지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헨리가 어릴 적부터 동경해 온 길 건너 갱스터 세계의 화려한 매력이 이 한 쇼트에 담겨 있다. 모두가 자신을 알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특별대우를 받는 잘 나가는 갱스터의 생활에 캐런과 관객이 한 번에 매료되도록 만들기 위해 스테디 캠의 유려한 움직임이 활용된다.

헨리와 캐런의 뒤를 따르는, 시간과 공간, 시선의 방향과 이동의 강약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이 눈의 운동은 그 자체로 선망의 대상이 되어 관객을 홀린다. 스탠리 큐브릭이나 브라이언 드 팔마가 그랬던 것처럼 마틴 스콜세지의 스테디 캠은 자신의 눈이 카메라 시선이 되기를 바라는 관객의 오래된 욕망의 목록에 유영하듯 부드럽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카메라의 운동성을 더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카메라가 바에 걸터앉은 갱스터 무리를 차례대로 비추며 소개하는 동안 그들이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을 거는 또다른 스테디 캠 쇼트는 이 양식이 관객을 영화 세계 안으로 호명하고 빠져들게 만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는 관객이 영화적 환상에 깊이 뛰어들도록 이끄는 고전주의적 면모를 띄지만 동시에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규칙을 거스르면서 이 허구적 세계를 성찰하게 만드는 예외적 순간을 담고 있기도 하다. 갱스터 헨리의 회고록인 <좋은 친구들>의 마지막이 헨리가 웃으며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장면인 것처럼 말이다. 이 웃음은 영화가 스스로를 비웃는 것 같아서, 갱스터를 현명한 사람(Wise Guy)이라 부르고 그들 서로를 좋은 친구들(Good Fellas)이라 칭하는 이 세계에 갑자기 균열을 일으킨다. 어쩌면 스콜세지의 영화를 특징 짓는 것은 이 성찰적 균열을 내포하고 있는 강고한 환상일 것이다. 파국적 진실과 반복적으로 부서지는 환상을 다루는 <셔터 아일랜드>를 보고 나면 이 생각은 확고해진다.

그가 평생을 뉴욕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바쳐 왔음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며 뉴욕과 미국의 역사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뉴욕, 미국, 그리고 어쩌면 인간을 관통하는 이면의 폭력이 관철되는 세계를 반성적으로 관조하고는 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화려한 갱스터의 삶이 한낱 이권과 배신, 그리고 마약으로 무너진 후 살해 위협의 공포에 떨며 평생 숨어 살아야 하는 헨리의 후일담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런 반성적 감상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찰을 좀더 확장해야 한다. 우리는 폭력을 타자화해서 관조하는 것에 머무르면 안 된다. <좋은 친구들>에서 그리는 가족애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마피아의 일원이 되는 의식을 치르러 가는 아들 토미를 기쁜 마음으로 안아 주는 어머니에게서, 또는 헨리와 캐런의 결혼식을 찾아 진심으로 축하하는 갱스터 패밀리에게서 감지하게 되는 폭력이 무화되는 가족애의 순간을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면, 세계가 품고 있는 구조적 폭력을 무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진공 상태가 평범한 우리의 일상적 삶을 지탱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 순간도 만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