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클레이터는 영화 속 인물들, 특히 메이슨의 불안과 상처가 가시화되기 직전 이듬해로 건너뛰고, 그때가 오기까지 인물들이 살아내야 했을 시간을 짐작 속에 묻어두거나 삭제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시간 조각을 잇는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이들에게 다음 해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기대하는 마음보다는 지금 이들을 감싸는 불안과 상처가 또 어떤 식으로 견뎌지고 망각되며 지나갈까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지만 자꾸만 과거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며 저 시간은 정말 지나간 것일까 묻게 만드는 것이다.

링클레이터는 그가 사춘기의 반항을 내지르는 단 한 장면에도 영화를 할애하지 않는다. 그런 시간을 보여주는 대신, 그는 성장했으나 변질되지 않았다는 믿음을 주는 순간들을 선택한다.

링클레이터가 “카메라 앞에서 커가는” 그의 변화를 감지하며 그 시간의 운동을 즐기는 동안, 메이슨은 그 운동에 빨려들어가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으며 순간을 정지시키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직 아무것도 잊지 못하고 아무것도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했는데, 그 감정들을 속으로 누르고 해소하지 못한 채 시간의 전환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신의 영화적 운명에 그는 그렇게 고요하게 저항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시간은 정말 안온하게 흘렀을까 – 남다은, 씨네21

[전영객잔] 크라이스트 세계의 그 텅 빈 공허! – 안시환, 씨네21

여전히 크라이스트의 세계는 전체를 알지 못한다. 그것이 세상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오만함을 뽐내면서도, 단 한명의 여성도 구원하지 못한 이유이자, 남성-크라이스트-이성의 궁극적 한계다. 궁극적으로 <안티크라이스트>가 단죄하는 것은 여성이 아닌, 자신의 무능(본성과 원죄까지도)에 눈감고 있는 크라이스트의 세계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듯 반항적이고 고집스런 눈매의 라방도 이제 머리가 벗겨지고 깊은 주름이 팬 장년이 되었다. 동년배인 그를 다시 맞은 카락스의 영화세상에서 어둠은 더 깊은 층위로 이동했다. 밤장면이 많다기보다 이것은 고스란히 밤의 몽상과도 같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밤은 천개의 눈을 가졌지만 낮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옛 시인의 말이 맞다면 <홀리모터스>는 밤의 외양(look)이 아니라 밤의 영혼을 담으려는 영화다.

 

그는 어떤 관객도 스크린을 바라보지 않는 혹은 모든 관객이 죽어버린 극장에서 늙은 개가 되어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곁을 누군가 떠나갔으며, 떠난 이가 여인인지 아이인지 알 수 없다. 사내는 꿈에서 깨어날 수 없고, 스크린을 벗어날 수 없다. 떠난 이를 떠올리며 그는 이렇게 죽은 관객의 극장에서 끝없이 긴 밤을 살아왔고 살아야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 외로운 감독의 중첩된 악몽과 마주하고 있으며, 이것이 <홀리모터스>라는 영화의 입구이다.

 

<홀리모터스>가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는 것은 ‘중간휴식’이다. 낡고 어두운 성당과 같은 공간에서 드니 라방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걸어온다. 기둥들의 뒤편에서 또 다른 아코디언 연주자들과 세션맨들이 하나씩 합류하면서 연주 퍼레이드가 벌어진다. 소리는 점점 커지고, 아쉽게 끝날 듯한 순간에 라방이 하나 둘 셋을 외치면 터져나오듯 모든 악기가 목청껏 노래한다. 확신컨대 여기엔 가면이 없다.

 

씨네21 : [신 전영객잔] 진실은 막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