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 : 예전 인터뷰에서 “내 인생의 반은 회고”라고 표현했던 게 기억나네요.

김병욱 : 사람을 만나 즐거운 일이 있으면 이것도 추억이 되어 가슴이 아릴 거라는 생각에 슬퍼요. 심할 때는 기쁜 순간이 오기 전부터 추억이 될 걸 염려해요. (웃음)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 순간도 온전히 즐겁지 않아요. 한 프로그램을 마칠 때도 비슷해요. 이것도 작은 우주이고 제 현실과 나란히 갔던 평행우주인데, 제 현실은 계속 달려가는 반면에 그쪽은 종영되는 순간부터 존재하지 않잖아요. 연기자가 없으니 그 이후로 그들이 어떻게 살았을지는 마음속에만 있어요. 추억과 비슷한 거죠. 예를 들어 과거에 갔던 장소에서도 저 없이 꾸준히 어떤 일이 일어날 텐데 나는 몰라요. 옛날에 크리스마스이브에 친구가 교회 가서 놀자고 했는데, 그게 설레고 좋았으면서도 결국 전 집에 그냥 누워 있었어요. 막연히 한곳에 속해 버리면 다른 걸 못 볼 거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웃기죠. 집에 누워 있어도 다른 걸 못 보는 건 마찬가지인데요. (웃음) 종교도 신앙은 좋지만 그로 인해 내가 다른 걸 못 볼까 두렵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추억도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다가 종말을 맞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김혜리 : 어쩌면 드라마를 연출하는 행위는 아름답거나 기억할 만한 순간을 만드는 동시에 모니터를 통해서 관찰하는 것이니까, 현실에서 추억을 회고하는 일과 같다고 볼 수 있겠네요.
김병욱 : 어떤 사건도 일어났을 때 즐기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즐겨요. 고향에 가면 옛날에 거닐었던 곳을 다시 걷는 게 좋아요. 현실을 잘 못 살고 관념 속에서 사는 것이죠.
씨네21 741호 (2010.02.09~02.23)
심히 공감 가는 이 인터뷰를 읽다가 든 생각.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하늘이 무너질까 염려하는 기우형 인간과 그들의 걱정 덕분에 맘 편하게 사는 배짱이형 인간.
나는 실제로는 전자에 속하는 편인데 그 걱정의 고통을 피하고자 대체로 모든 일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자 애쓰는 편이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모든 인류가 겪어 온 것인데 내가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지”라고 그 걱정들을 의식적으로 떨쳐내려는 것이다.
가끔 발현되는 내 쿨한 측면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이겨 내려는 허위의식의 소산이다.
그런데 그러고도 시간이 지나면 사소하게 치부했던 것들은 다시 회한과 함께 돌아온다.
그 순간을 충분히 감내하거나 즐기지 못했다는 자책과 함께 과거를 다시 정의하고 기억하려고 애쓴다.
이게 나라는 인간이 과거를 추억하는 한 방식이다.
현재는 미래에 발목 잡혀 있고 과거는 패배하는 현재의 찌꺼기가 되는 것이다.
기우형 인간에게 회고는 충실하지 못한 현재에 대한 후회의 감정이 아닐까.

박찬욱의 스타일은 수식이 많은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무뚝뚝하다. 이미 출간된 동명 소설을 읽어보면 현상현 신부와 태주의 관계, 그들이 흡혈귀와 팜므파탈로 만나 치정극의 얼개를 짜는 것이 그리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이 스토리가 영화로 옮겨지면 박찬욱은 이야기의 얼개를 짜는 것보다는 단속적이고 폭발적인 인상들에 훨씬 집중한다.
……
그중에서도 압권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상현의 본격적인 흡혈 행위를 보여줄 때다. 3분 넘게 지속되는 이 장면에서 상현 역의 송강호는 어떤 흡혈귀 영화에서도 보여주지 못한 격정적인 행동을 이어간다. 물리적인 표면의 극한까지 파고드는 이런 것이 박찬욱 연출의 진심이다. 슬프게 탐닉하는 행위, 짐승처럼 헐떡거리면서 상대의 육체를 남김없이 핥고 빨며 다시 수혈해주는 동류의 행위, 타락하면서 제어할 수 없지만 궁극에 파멸로 귀결될 것임을 아는 행위, 이런 장면의 물리적 직접성이 연출자에게는 캐릭터 묘사를 대치하는 것이다. 나는 불편하면서도 쾌락적인 이런 장면에 어떤 낭만적인, 또는 감상적인 윤기를 입히지 않은 것이 박찬욱 영화의 본령이라고 생각한다.

– 씨네21 <김영진의 점프컷 – 그게 박찬욱의 예술적 자유다> 중

박찬욱의 영화를 볼 때마다 과시적인 스타일이 이야기와 신화, 흥미로운 영감들을 갉아먹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바로 그 때문에 박찬욱의 영화를 본다. 박쥐는 절제와 이타심이 욕망과 이기심과 충돌하는 이미지를 격렬하게 표현한다. 박찬욱은 어쩌면 화가나 사진가의 욕심을 갖고 있는 감독인지도 모른다. 이미지로 서사를 종결짓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욕심을 나도 조금은 느끼는 걸까.

[외신기자클럽] 욕구불만의 다른 표현인가

사진·소설·만화·그림 등 다른 예술에 빠진 영화인들에 관하여

장선우 감독의 <이별에 대하여>, 팀 버튼 감독의 <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Big Jane> (왼쪽부터)

클로드 베리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와 급히 나눴던 사소한 대화 하나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피로로 거무스름해진 눈가에 핏기없는 잿빛 얼굴을 한 프랑스의 거부 베리는 담배를 입에 꼬나문 채 내가 내민 마이크에 규격화된 대답만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베리가 당시 라틴가에 소유하던 갤러리 얘기를 꺼냈다. 순간 베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일본 사진에 대해 갑자기 열정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때 나는 그 남자의 인생은 다른 곳에 있음을 알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수많은 영화감독들은 자신을 달리 표현하는 방법을 촬영지와 동떨어진 곳에서 모색했다. 모리스 피알라는 사랑의 도전으로 영화를 택했다. 그는 원래 미술을 사랑했다. 한데 그 배은망덕한 미술이라는 놈은 결코 피알라가 그를 사랑한 만큼 사랑을 돌려주지 않았다. 피알라는 훌륭한 화가가 되지 못했고, 그래도 가슴속 깊이 품고 있던 미술에 대한 찬양의 표현으로 <반 고흐>를 만들게 된다. 또 어떤 영화인에게는 영화가 아닌 다른 예술을 거치는 것이 일종의 과정, 그러니까 대규모의 기술과 자금을 필요로 하는 영화사업에 뛰어들기 전 요령과 기술을 익히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스탠리 큐브릭은 탁월한 사진가였고, 에릭 로메르나 이창동도 그런 경우다. 소설 형태의 에세이를 쓰는 단계를 거친 두 사람의 예술세계는 훗날 영화예술 속에서 성숙한 꽃을 피우게 된다.

정반대인 경우도 있다. 영화산업을 등지고 다른 데로 귀양가는 영화인들이 또 다른 새로운 사명을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 예로 장선우 감독은 시를, 마이클 치미노와 엘리아 카잔은 소설을, 장 자크 베넥스는 만화를 출간한다. 두편의 영화가 나오는 공백기에 조형예술에 몰두하는 감독들도 있다. 에이젠슈테인은 에로틱한 크로키를 즐겨했고, 그의 데생은 페데리코 펠리니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데생처럼 시중에 출판됐다. 데이비드 린치는 자신의 조형예술 작품을 갤러리와 미술관에 전시한 바 있으며, 팀 버튼도 직접 그림을 그려 넣은 재미나는 동화를 출판하기도 했다.

배우들이 하는 작업은 조금 더 비밀스럽다. 파리에서 줄리엣 비노쉬가 화집을 출간하는 동안 지난달 홍콩의 중앙도서관에서는 임달화가 사진을 전시했다. 턱을 꽉 죄어 물고 권총을 찬 경찰관이나 마피아 역을 주로 연기하는 배우 임달화를 우리는 두기봉 감독의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한데 그의 사진 작품은 평소 맡던 역과는 놀랄 만큼 대조적이다. 그의 사진은 추상적이고 섬세한 이미지, 둥글고 연약한 형태의 꽃이나 구름을 연상케 한다. 19세기 말 영국의 전설적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스크린에 남긴 배우가 바로 임달화다. 그러나 그의 사진전은 자궁 내부의 생에 관한 환상처럼 영화가 그에게 허락하지 못했던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어떤 배우는, 어느 날 갑자기 시골에 정착하는 상상을 하는 것처럼 아예 결정적으로 선을 넘어서길 꿈꾸기도 한다. 브래드 피트는 영화를 그만두고 건축에 몰두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게 언제라고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또 와킨 피닉스는 영화계를 떠나 음악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고, 아직 뚜렷한 결실은 없지만 줄리엣 루이스도 같은 선택을 했다.

우린 이런 배우들의 작품의 질을 논하기에 앞서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동기에 의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사실 영화가 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처음에 생각했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참작해보면 배우들의 비전을 작품이 제대로 반영해주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런 데서 오는 욕구불만을 다른 개인적인 방법을 통해 달리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하긴 제2의 직업을 통해 제대로 성공하는 스타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하여튼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사진 속에서 모자를 눌러쓰고 작은 카디건에 물이 살짝 빠진 청바지를 입은 채 어색하게 수줍은 미소를 짓는 인물로 돌변하는 임달화를 보고 있었다. 예술가 역을 연기하는 영화배우 임달화가 보였다.

글: 아드리앙 공보

번역=조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