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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층민의 냉혹한 묵시록, <우주전쟁>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 2005.07.20

<우주전쟁>이 전하는 어둠과 모호함의 정치학

<우주전쟁>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가장 어두운 영화다. 그의 초기 SF <미지와의 조우> <E.T.>에서의 우호적 외계인의 방문이 여기서 적대적 외계인의 침공으로 바뀌었다는 점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이 설정은 H. G. 웰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택했을 때, 그리고 오슨 웰스가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라디오극 대본을 스필버그가 입수했을 때 이미 주어진 것이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자 한 아버지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필사적으로 도주한다. 결국 외계인은 소멸되고 가족은 포옹한다. 이건 재난 장르와 미국식 가족드라마의 전형적인 결합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렇게 설명되고 광고되고 있다. 그러나 <우주전쟁>은 훨씬 더 풍부하고 복잡하며 모호하다.

<우주전쟁>의 주인공 페리어는 스필버그 영화의 주인공 가운데 가장 비루하며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물이다. 또한 재난영화의 주인공으로는 완전히 부적합한 인물이다. 웰스의 같은 소설을 각색한 바이런 해스킨의 <우주전쟁>(1953)에서부터 최근의 <인디펜던스 데이> <아마겟돈> <딥 임펙트> <투모로우>까지 SF/재난영화의 영웅은 한결같이 전문가(기술자 혹은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제도와 관료들을 대신해 재난의 정체를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이혼남인 페리어는 뉴저지의 무식한 부두노동자이고 동료애도 없으며 게으르고 서투르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며 어딘가 야비해 보인다. 여피의 윤기와 귀티가 넘쳐흐르는 톰 크루즈에게 이런 배역을 맡김으로써, 스필버그는 처음부터 관객의 기대를 비켜간다. 이 한심한 주인공은 자신에게 하룻동안 맡겨진 아들과 딸을 도피시키는 것 외엔 어떤 의지도 능력도 없다.

전쟁이 아닌 도피의 로드무비

<우주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피난의 영화이며 도피의 로드무비다. 외계인의 정체와 씨름하는 전문가와 정치 지도자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무력한 군인들만 피난민 대열을 스쳐간다. 영화의 대부분은 페리어 가족의 도피 여정이다. 우리가 만나는 건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이해되지도 않고 극복될 수도 없는 거대하고 잔혹한 힘, 절대 공포다.

<우주전쟁>의 뛰어난 이미지들은 도심 도로가 들끓다 폭발하고 거대한 다리가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초반 장면들이 아니라(이런 종류의 스펙터클은 <인디펜던스 데이>나 <아마겟돈>보다 특별히 나을 게 없다), 피난민 대열 앞을 미친 듯이 달려가는 불타는 기차, 허드슨 강을 가득 메우며 흘러가는 시체들, 피를 먹고 태어난 징그러운 식물들의 꿈틀거림, 눈보라처럼 쏟아지는 죽은 이들의 찢긴 옷조각들, 시체들의 피로 염색된 들판과 저녁놀 같은 초현실적인 공포의 이미지들이다.

가장 흥미로운 시퀀스도 페리어와 딸이 숨어든 정신이상자 오길비(팀 로빈스)의 지하실 장면이다. 아나콘다 모양의 기계 촉수와 문어처럼 생긴 외계인이 벌이는 수색과 내부의 정신이상자로부터의 위협 사이에서 페리어 가족은 기나긴 침묵의 공포에 휩싸인다. 여기서 페리어 가족이 직면한 것은 미지의 타자가 생산한 외적 재난을 넘어 내적 붕괴에 이른다. 오길비는 싸우겠다는 의지만 남고 판단력을 잃어버린 인간, 곧 전쟁광이다. 이런 광기는 생존을 위해 타인을 무한 살육하는 피난민들의 행태에서 예고된 것이며, 페리어의 아들에게도 전염된다.

<우주전쟁>이 전하는 건 재난의 스펙터클과 제어의 쾌감이 아니라, 재난을 확대재생산하는 인간들의 내면적 붕괴다. 그 재난의 서식지는 알 수 없는 타자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외계인들의 소멸은 지구의 미생물에 의한 것이라는 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으로 설명된다. 그 과정에 대한 어떤 묘사도 없이 갑작스레 제시되는 이 내레이션은 허탈감마저 안긴다.

그것은 웰스의 원작의 결말에 지나치게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재난이 페리어의 한바탕의 악몽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가 보스턴의 전처 집에 마침내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고 전혀 파손되지 않았다. 외계인과 싸우겠다고 달려간 아들도 어느새 그곳에 도착해 있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페리어의 동선 밖의 외계인은 전혀 영화에 나오지 않았다. 이 해피엔딩은 평온하지 않고 괴이하며, 페리어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그는 무엇을 겪은 걸까. <우주전쟁>을 하나의 장르에 포함시켜야 한다면 재난도 SF도 아닌 호러다. 이 영화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포스트 9·11 미디어에 관한 스필버그의 비평

<우주전쟁>의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재난의 스펙터클에 대한 영화감독의 자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계인의 전투기계가 묻힌 도심의 도로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경찰들의 거듭된 경고에도 사람들은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한다. 구경거리의 매혹은 저항하기 힘든 것이다(재난영화의 계율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만 보장되면 자기 장례식마저 보고 싶어한다’). 외계인이 처음 피격한 것은 자신들을 찍고 있던 카메라이며, 가까이서 구경한 사람일수록 빨리 징벌된다.

지하실 장면에서 오길비를 살해하기로 결심하며 페리어는 딸의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린다. 문을 닫고 살해할 것이므로 불필요한 행위다. 이건 봐서 안 되는 장면임을 서사 밖에서 일러주는 행위다. 당연히 관객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장면들은 살육의 스펙터클의 물신화가 얼마나 지독한 비윤리적 중독인지를 드러낸(동시에 5천여명의 육신이 찢긴 쌍둥이 빌딩 충돌 장면은 결코 물리지 않는 ‘장관’이었다) 포스트 9·11의 미디어에 관한 스필버그의 비평이다. 스필버그 자신은 면책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우주전쟁>에는 재난의 스펙터클로부터 거리두기의 안간힘이 있다.

<우주전쟁>의 모호하면서도 흥미로운 또 다른 요소는 가족주의와 계급/지역 정치학의 긴장이다. 페리어는 뉴저지의 부두노동자이며 그가 사는 곳은 다리 밑의 하층민 거주지다. 전처 부부와 아이들이 사는 곳은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한 보스턴이다. 뉴욕 양키스 모자를 쓰고 있는 페리어는 아들이 보스턴 레드삭스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화를 낸다. 그리고 그는 딸이 주문한 야채 음식을 먹지 못한다.

더 중요하게는 외계인은 뉴저지의 노동자들을 살육하며 등장했지만, 그렇게 멀지도 않은 보스턴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페리어는 거의 강박처럼 아이들을 보스턴에 데려가야 한다고 믿는다. 막상 그곳에 도착했을 때, 페리어는 웃지 못한다. 그곳은 자신이 통과한 지옥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쉬어갈 수 있겠지만 여기에 속할 수는 없다. 존 윌리엄스의 음악이 불길하게 엔딩신을 감싸고, 페리어의 불안한 얼굴은 프레임을 채운다. 이 장면을 해피엔딩이며 가족주의적 화해로 보기는 힘들다. 눈물 겨운 가족애도 메울 수 없는 계급/지역간의 심연이 거기에 있다.

<우주전쟁>의 재난은 페리어 개인의 악몽이 아니라 하층민의 악몽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악몽은 결국 해소되지 않는다. <우주전쟁>은 디스토피아의 낭만적 허무주의보다 훨씬 냉혹하며 다의적인 묵시록적 비전의 영화다. 스필버그는 전진한다.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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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생부를 무시하는가? <우주전쟁>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 2005.07.27

‘부권상실’의 거세 공포를 보여주는 <우주전쟁>

<우주전쟁>은 꽤 현실적인 재난영화다. 우선 <인디펜던스 데이>나 <딥 임팩트>에서 보이는 ‘재난상황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유지되는 공권력과 사회질서’가 없다. “만인은 만인에 대한 늑대”라는 말처럼, 재난이 터지면 2차적인 약탈과 무질서로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따라서 차를 뺏기는 위치에 섰던 주인공이 곧 배를 타기 위해 억지로 매달리던 장면이 대변하는 영화의 현실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미덕은 이뿐이다. 허문영이 언급한(511호) “포스트 9·11의 미디어에 관한 스필버그의 비평”이자, “재난의 스펙터클로부터 거리두기의 안간힘”으로 보기엔 공포의 스펙터클이 과하고, “가족주의와 계급/지역 정치학의 긴장”으로 갈음하기엔 ‘불안정한 아비의 위상’이 걸린다. 오히려 영화는 ‘포스트 9·11의 공포의 정치학’을 충실히 따른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며, 그보다 ‘생물학적 아비의 위상 제고론(提高論)’을 펼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포스트 9·11 피해의식을 강화하라

영화의 정치적 의미는 미국인들에게조차 전쟁의 명분이 희미해져가는 이때, 9·11 테러를 곱씹으며 ‘피해자-되기’를 성취하는 것이다. 즉 피해자로서의 알리바이를 붙잡기 위해 끊임없이 외상을 재활용(recycling)하는 것이다. 재난을 접한 영화 속 미국 아이는 먼저 “폭탄 테러냐?” “유럽에서 왔냐?”고 묻는다. 재난은 곧 테러이고, 테러는 곧 이국(異國)으로 자동 연상된다.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 반공교육의 상당 부분이 전쟁의 잔혹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곧바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로 각인되었기에, 연상도 자동이었다. “상기하자! 6·25” 구호처럼, <우주전쟁>이 재현하는 “외부자에 의한 미동부 지역 파괴”는 9·11 테러의 피해 경험을 감각적으로 일깨운다. 부당한 전쟁을 정당한 복수극으로 계속 믿게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선(先) 피해자 되기’, 즉 피해의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생부의 위상을 제고하라, 부계혈통은 유효하다

그는 ‘개털’이다. 이혼하고 자식들은 전처와 산다. 돈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자식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고, 번번이 계부와 비교된다. 전처가 잠깐 아이들을 맡긴 사이 큰일이 터졌다. 그는 일단 전처에게 아이들을 ‘배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아이들도 이를 안다). 그는 궁극적으로 아이들을 어떻게 책임질지 더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전처의 집을 거쳐 처가로 향하는 행로에 “왜 꼭 엄마에게 데려가야 하는가? 거긴들 안전할까? 전처는 무사한가?” 따위의 고민은 없다. 아이들은 전처에게 속하고, 전처는 새 남편에게 속하니, 그러한 걱정은 주제넘은 것이다. 그의 행로 곳곳에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외계인을 말함이 아니다. 가장 아찔한 장면은 딸을 다른 부부가 보호하겠다며 데려가려는 장면이다. 또 지하 홀아비가 “네 아버지가 죽으면 내가 보호해줄게”라 말하자, “내 딸!”이라 소리치고, 결국 그를 죽인다. 그는 결국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낸 딸을 전처에게 잘 ‘반납’한다. 그 이상의 가족화해는 없으며, 그도 더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설정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영화가 다루는 공포의 핵심은 외계인이 아니라, ‘무능한 생부가 유능한 계부, 양부들에게 자식을 빼앗기고, 아비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풀 몬티> <아이 엠 샘> <갓센드> <주먹이 운다>에 면면히 흐르는 주제는 ‘아비의 전전긍긍’이었다. 생물학적 아비면서도, 사회적 아비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사회적 ‘거세공포’가 깊이 깔려 있다. <우주전쟁>은 그러한 ‘부권상실’의 (거세) 공포를 “흡입하는 기계”에 빨려들어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아비를 통해 더 끔찍하게 재현한다.

애초 땅에 묻혀 있다 번개와 함께 솟는 괴물 역시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생물학적으로 자명한 모권에 비해 생물학적 근거가 불확실한 부권은 ‘모체의 점거’를 보증하는 사회적 조처(가부장제)를 필요로 하며, 가부장제의 약화는 부권을 근본부터 위협한다. 영화는 ‘부권상실’이라는 대재앙이 이미 ‘물적 근거가 취약한 부권’으로 잠복해 있다가, 현재의 이혼율 상승과 친모 양육권 인정 등의 사태로 발현된 것으로 본다(가부장제가 강한 일본은 괴물을 물리쳤다는 말도 있다). 또한 선조들의 죽음을 거쳐 DNA를 통해 유전되는 면역력이 지구인을 지켰다는 결론도 ‘혈통’을 강조하는 영화의 주제와 조응한다. 흡사 “누가 생부를 무시하는가?”라 외치는 영화는, ‘바바리맨’과 닮았다. SF라는 외투를 덮고 있지만, 짜잔∼ 보여주는 건 ‘남근에서 남근으로 이어져오는 부계혈통의 순수성’이다. 감독이 ‘할례’로 민족정체성을 삼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브라이언 드 팔마와 <팜므 파탈> [1] – 드 팔마에 관한 5가지 키워드 (1)

글 : 이종도 | 2004.11.23

Brian De Palma

“1962년 <쥴 앤 짐>의 개봉 때문에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기자들이 다음과 같은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알게 됐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은 왜 히치콕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가? 그는 돈도 많고 성공한 인물이지만, 그의 영화는 별것 아닌데.’”(프랑수아 트뤼포, <히치콕과의 대화> 개정판 서문)

브라이언 드 팔마에 대해, 아마 트뤼포의 이야기를 이렇게 고쳐쓸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안 그런데) <카이에 뒤 시네마>와 유럽의 비평가들은 왜 브라이언 드 팔마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가? 돈이 많은지 성공한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의 영화는 별것 아닌데.”

히치콕 못지않게 드 팔마에 대한 오해는 오랜 것이다. <팜므 파탈>은 드 팔마가 갱스터와 블록버스터 등 보편적인 소재로 시선을 뻗으면서도, 그리고 자신의 입지를 잊지 않으면서도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거장이 들려주는 원숙한 리듬은 귀에 익으면서도 낯선 것이다. 새로운 걸작을 반기며 여전히 그에 관해 궁금한 다섯 가지 질문을 추려보았다. 그와의 서면 인터뷰는 <팜므 파탈>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켜줄 것이다.

두통과 현기증을 안겨주는 영화 수사학의 대가 드 팔마가 오랜 경유로를 거쳐 뒤늦게 신작 <팜므 파탈>을 한국에 선보였다.

히치콕적인 유산이 여전히 눈에 띄지만 드 팔마의 한층 세련되고 현란해진 가공 솜씨가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늘 우울하게 드리워졌던 금발머리 여성에 대한 혐오를 이번엔 유쾌하게 뒤집었다. “드 팔마는 지금보다 더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로저 에버트)는 평가가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드 팔마는 동시대의 경쟁자인 스코시즈와 코폴라, 루카스, 스필버그에 비해 불우했다. “자신이 창조해낸 것은 아무것도 없이 모조품만 만들어냈다는 것에서 시작된다(그리고 결국 거기에서 끝이 난다)”는 평판은 그를 줄곧 괴롭혔다. 작고한 폴린 카엘이 은총을 하사한 것을 제외하면 미 평단은 이 말썽 많은 논쟁적 작가를 비평적으로 ‘망명’보내는 데 일찌감치 합의를 봤다. 그러나 드 팔마가 선구적으로 보였던 사지절단과 관음증 등 관객을 그로기 상태로 몰고 간 ‘악행’은 이제 후배들이 훨씬 앞질러가고 있다. 드 팔마는 갱스터와 블록버스터 등 보편적인 소재로 시선을 뻗으면서도 자신의 입지를 잊지 않으며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다. <팜므 파탈>은 드 팔마의 평가를 뒤바꿀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 새삼스러운 질문을 간추려 던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 주요 필모그라피
<그리팅>(1968)·<시스터즈>(1973)·<천국의 유령>(1974)·<강박관념>(1976)·<캐리>(1976)·<드레스드 투 킬>(1980)·<필사의 추적>(1981)·<스카페이스>(1983)·<침실의 표적>(1984)·<언터처블>(1987)·<전쟁의 사상자들>(1989)·<허영의 불꽃>(1990)·<칼리토>(1993)·<미션 임파서블>(1996)·<스네이크 아이즈>(1998)·<미션 투 마스>(2000)·<팜므 파탈>(2002)

<이창>

1. 그는 여전히 히치콕의 모방자인가

무엇이 그를 창조자로 만드는가

20대 시절 고다르 흉내를 내던 드 팔마는 이후 줄기차게 히치콕의 세계를 모방했다. 히치콕의 <싸이코> 샤워장면만 해도 <드레스드 투 킬>에서의 화려한 버전과 <필사의 추적>에서 폭소를 자아내는 샤워장면(그건 싸구려 영화 제작과정이다), <캐리>의 도입부 등 몇 가지 판본이 된다. <이창>의 훔쳐보기 모티브는 <시스터즈> <침실의 표적> <그리팅>. <현기증>의 분신 모티브는 <강박관념>과 <침실의 표적>을 거쳐 <팜므 파탈>까지 이어진다.

드 팔마가 히치콕에게서 빌려온 것은 이런 모티브뿐 아니라 관음증, 강박관념, 남성의 성적불안, 성의 모호성 그리고 내러티브 구조까지 방대한 목록을 이룬다. 심지어 음악을 쓸 때도 히치콕의 유산을 물려받는다. <싸이코> <현기증> 등의 음악을 맡았던 버나드 허먼에게 <강박관념>과 <시스터즈> 음악을 맡기기도 했다.

<현기증>

(아마도 배를 거쳐) 벽을 뚫고 나오는 피묻은 드릴이나(<침실의 표적>), 귀를 거슬리게 하는 전기톱(<스카페이스>)을 비추는 드 팔마의 카메라처럼 음악 또한 히치콕보다 더 직접적으로 주제에 관여한다. 끊어질 듯 끝날 듯하면서 반복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볼레로>풍 선율은 <팜므 파탈>의 반복과 데자뷰라는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는다. 드 팔마는 그의 전매특허가 된 다중영상으로 히치콕 이상의 충격을 안긴다. 분할의 미학이라 할 이 기교로 드 팔마는 한개의 숏과 대응 숏을 함께 보여주며 충돌의 미학을 선사한다.

<강박관념>

드 팔마가 코미디-호러-전쟁-갱스터-블록버스터-SF-필름누아르로 이동하면서 끊임없이 하이테크와 수사학을 변용할 때, 정신적 아버지인 히치콕보다 왕성하게 영화의 영토를 확장할 때 그는 모방자라기보다는 개척자로 보인다. 히치콕의 자장에서 그는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팜므 파탈>에서 <현기증>의 구조를 재발견할 수 있지만 이 구조는 드 팔마의 <강박관념>에서 찾는 게 더 온당하다. 1940년대 필름누아르의 구조가 차라리 <팜므 파탈>을 더 잘 이야기해준다.

2. 그는 그저 뛰어난 영화의 수사학자에 불과한가

<강박관념>

그의 정치적 급진주의 또는 비관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드 팔마는 혼없는 테크니션인가. 드 팔마는 어떤 소재나 주제든 어떻게 해야 관객을 경악과 충격으로 몰아넣는지를 잘 아는 장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쳤다면 정말 그는 재기넘치는 수사학자에 불과할 것이다. 로렌스 냅의 말처럼 그는 관객의 등을 떠밀어 ‘이데올로기적 경계’를 시험하는 상황과 충동에 직면하게끔 한다. <필사의 추적>은 말할 것도 없고 <강박관념>에서 시간(屍姦)과 근친상간의 나락까지 떨어진 미국 남부 부호에 대한 비판이나 <전쟁의 사상자들>에서 일개 말단 병사에게까지 스민 제국주의 등 정치적 주제 선율은 드 팔마의 44년에 가까운 영화 이력에서 한번도 끊긴 적이 없다. <필사의 추적>과 <스네이크 아이즈>의 음모론, <스카페이스>와 <칼리토>에서의 천박한 미국 자본주의 비판도 빼놓을 수 없다. 드 팔마의 스크린 뒤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짙은 냉소주의이며 1960년대 좌파의 실패가 안겨준 좌절이다. 케네디 살인(<그리팅>)과 베트남 전쟁은 드 팔마의 영화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다.

<필사의 추적>

허장성세로 덤벼드는 토니와 칼리토가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의 악행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은 왜일까. 드 팔마 영화에서 파국이 모두 정리되고도 우리가 안심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마지막에도 불쑥 지하에서 손을 뻗어오는 캐리의 엄마와 면도날을 휘두르는 성도착자의 악몽이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필사의 추적>에서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라. 샐리(낸시 앨런)가 죽을 때 울리는 자유의 종과 격렬한 불꽃놀이는 무엇인가. 잭 테리(존 트래볼타)가 절망적인 자책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싸구려 호러영화의 한순간을 위해 샐리의 마지막 죽음의 비명을 넣는 것이 전부다. “우리 문화권에 대한 절망감을 이보다 더 강력하게 끌어내는 영화는 달리 없었던 것 같다”는 로빈 우드의 말은 드 팔마의 영화를 읽을 때마다 되새김질할 만한 구절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와 <팜므 파탈> [2] – 드 팔마에 관한 5가지 키워드 (2)

글 : 이종도 | 2004.11.23

3. 그는 과연 여성혐오자인가

<필사의 추적>

왜 드 팔마는 어머니의 거세를 더 두려워하는가

드 팔마의 두려움은 그러나, 정치적 절망감이 아니라 거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그것도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로부터? <필사의 추적>에서 잭 테리를 보라. 그는 샐리에게 전혀 성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숲의 바람소리를 채집하려는 잭 테리의 마이크는 그가(또는 드 팔마가) 지키고자 하는 상징적인 남근일지도 모른다(이 마이크는 아마 아버지의 부정을 기록하기 위해 소년 드 팔마가 필요했었을 그런 마이크가 아니었을까. 어린 드 팔마는 녹음장비를 들고 며칠을 아빠의 부정의 흔적을 녹음하기 위해 쫓아다녔다).

드 팔마의 영화는 이처럼 남성 캐릭터의 남근성을 지키고 ‘남성’이 되려는 여성을 징벌하는 데 애를 쓰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도 있다. 라이언과 켈너는 <카메라 폴리티카>에서 드 팔마의 작품에서 여성은 일반적으로 섹시한 백치나 못난 희생자, 아니면 위협적인 마녀로 재현된다고 지적한다.

<스네이크 아이즈>

그러나 드 팔마는 이런 진단을 거부한다. “어두운 집 안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보다 네글리제 차림의 여자가 돌아다니는 게 더 좋다”(살롱닷컴과의 인터뷰)는 건 농담일지 모른다. <팜므 파탈>에 대해 드 팔마는 “나는 정치적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나를 분노하게 하기 때문이다”(<필름 코멘트>)라고 말했다. 사실 캐리 리키 같은 이의 지적처럼 “여자들이 소름끼치게 희생되기는 하지만 남자들보다 더 고통을 받는 적은 한번도 없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드 팔마의 남성 주인공은 삼류배우(<침실의 표적>), 연약하고 늙은 신병(<전쟁의 사상자들>), 삼류영화 오디오맨(<필사의 추적>), 신경질적인 고등학생(<드레스드 투 킬>), 깡패 푼돈이나 뺏는 형사(<스네이크 아이즈>), 파파라치(<팜므 파탈>) 등으로 충분히 사회에서 고통받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여성을 구하지 못하면서 더욱 고통받는다. <스네이크 아이즈>와 <팜므 파탈>에서 보듯, 여성에 대한 처벌은 이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의 성장이 그를 두렵게 하는 걸까.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드 팔마는 여성의 지위 변화가 그로 하여금 고통받는 여성이라는 낡은 클리셰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실토한 바 있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미션 투 마스>에 대해 표현한 “그의 유일한 주제는, 여성이다. 또는 어떻게 한 남자가 우주의 끝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여자를 다시 발견하는가이다”라는 구절이 농담은 아닐 것이다.

4. 그는 어째서 상반된 평가를 받는가

<드레스드 투 킬>

왜 프랑스는 그를 높이 평가하며 미 평단은 왜 그를 낮춰보는가

드 팔마의 스릴러와 공포영화는 매우 독창적으로 현대의 악몽을 재현한다. 그는 일상과 가정에 숨어든 악몽을 최대치까지 이끌어낸다. 그가 택한 흉기와 흉기를 다루는 방식을 보라. <캐리>에서는 부엌칼이 날아다니며 <드레스드 투 킬>에선 면도칼이 흉기로 쓰인다.

그가 재현하는 공포의 방식도 개성적이다. <스카페이스>에선 사람의 팔과 두개골을 전기톱으로 자르지만 직접 그 장면을 보여주는 대신 톱 돌아가는 소리와 튀기는 핏물로 신경을 자극한다. <침실의 표적>에서 드릴로 배를 공격하기 전에 한번 플러그가 빠지면서 공포는 더 확장된다.

<스카페이스>

이런 시각적 충격은, 비록 냉소적 방식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보수적 가치를 노골적으로 깎아내린다. 재평가되고 있는 드 팔마의 ‘서인도제도판 대부’인 <스카페이스>와 <칼리토>는 현란한 수사학(카메라 세 대로 온통 통유리로 내부를 뒤덮은 나이트클럽 내부의 총격전을 훑는 <스카페이스>를 보라)으로 참담한 파국을 그려낸다. 수사학과 정치학이 서로를 향해 스며드는 방식은 미국의 환부를 날카롭게 잡아내고 있다.

<칼리토>

왜 이러한 영화적 유산들이 미국에서는 냉대를, 유럽에서는 환대를 받고 있을까. “유럽에서 잘되는 것은 내 영화들이 대화 위주가 아니라 시각적이어서다. 자막이 별 달리 필요가 없다. 미국도 아주 충직한 숭배자들이 있다. 내 첫 성공은 <그리팅>이었는데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받았다. 유일한 대형 국제영화제 수상작이었다.” 동시대 작가인 코폴라나 스코시즈에 비해 저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 그는 드 팔마 웹사이트를 찾는 네티즌들에게 보상을 받는다.

5. 그는 왜 피와 구멍에 집착하는가

<시스터즈>

왜 그의 영화는 핏물이 흥건하고 성적 환상이 가득할까

정형외과 의사인 드 팔마의 아버지는 아들로 하여금 수술장면을 구경할 수 있게 했다. “아버지가 사람의 몸을 열고 절단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그래서 피를 많이 봐도 잘 참아낼 수 있는 것 같다.” 핏덩이와 혈액과 시체는 어린 소년의 꿈과 현실에 자주 들락거렸다. 드 팔마는 삼형제 가운데 막내였다. 어머니는 팔마의 형들만 아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젊은 여자만 쫓아다녔다. 가정에 홀로 던져진 그가 할 수 있는 건 과학과 기술 그리고 컴퓨터의 세계였다. 드 팔마는 고등학교 시절 대부분을 컴퓨터디자인과 과학경시전 참가로 보냈다. 전국과학경시대회에서 2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외로운 어린 시절은 <드레스드 투 킬>에서 앤지 디킨슨의 아들 키스 고든의 연기에서 엿볼 수 있다.

이 고등학생의 판타지는 옷을 갈아입는 여학생의 탈의실 내부를 훔쳐보는 것이었을까. 그게 바로 필터를 입히고 몸을 핥듯이 지나가는 <캐리> 도입부의 카메라로 실현되었던 것일까. 드 팔마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런 가설을 한번쯤 믿고 싶어진다.

<캐리>

그의 비평적 출세작인 <시스터즈>와 대중적 출세작인 <캐리>는 쌍둥이다. 그것도 몸이 붙어 있는 샴쌍둥이다. <시스터즈>가 더 복잡하고 음습한 그의 필모그래피의 축약이라면, <캐리>는 금발머리의 시체로 핏물이 흥건한 그의 대중적 공포영화의 축도다. <팜므 파탈>은 이 원류에서 헤모글로빈을 덜어내고 성적 환상을 더했다.

초기작 <그리팅>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여자의 옷을 하나둘 벗기며 사진을 찍던 카메라는 장구한 세월을 지나 안토니오 반데라스에게 건네졌다. 영화 자체가 훔쳐보기의 형식임을 늘 의식하는 이 달변의 수사학자는 여전히 하이테크와 미디어에 관해 우리를 놀라게 할 목록들을 숨기고 있다.

드 팔마 최고 작품은?

드 팔마 감독과 <필사의 추적> 주연배우들. 존 트라볼타가 주인공 잭역으로 열연했다.

네티즌과 타란티노는 <필사의 추적>을 최고로 꼽아

2002년 초, 파리 퐁피두 미술관에서 열린 브라이언 드 팔마 회고전에서 드 팔마는 왜 <필사의 추적>(Blow Out)을 개막작으로 골랐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자신의 영화 중 베스트로 <필사의 추적>이 뽑힌 걸 봤노라고 답했다. 이 사이트의 이름은 브라이언 드 팔마 홈페이지와 연결된 사이트인 ‘브라이언 드 팔마의 천국’(le paradis de Brian de Palma)이었다. 드 팔마의 팬사이트 가운데 하나인 ‘현대식 드팔마’는 아마도 드 팔마가 프랑스로 비평적 ‘망명’을 했을지는 몰라도 인터넷의 전세계 팬들이 드 팔마를 어느 때보다 더 보편적인 작가로 만들었다고 평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천국’에서 2002년 11월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총점 22.60(만점 25점)을 받은 <필사의 추적>이 1위다. <드레스드 투 킬> <캐리>가 뒤를 이었고 <칼리토>와 <팜므 파탈>이 4, 5위를 차지했다. 직전 조사에서도 <필사의 추적>이 1위였다. 졸작으로 평가받는 <전쟁의 사상자들>이 의외로 6위에 올라 있다. <스카페이스>(7위)나 <시스터즈>(11위)보다 인기가 높다. <미션 임파서블>과 <스네이크 아이즈> <미션 투 마스>가 하위권인 15∼17위를 기록했고 <허영의 불꽃>은 최하위권인 21위다. 드 팔마의 팬들이 좋아하는 영화로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히치콕의 <현기증>이 1위로 손꼽혔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추종자이며 <캐리>의 존 트래볼타를 눈여겨본 뒤 <펄프 픽션>에 쓰기도 했던 쿠엔틴 타란티노도 <필사의 추적> 예찬자다. “가장 위대한 세편의 영화는 <리오 브라보> <택시 드라이버> <필사의 추적>이다.” (타란티노와 드 팔마의 인터뷰 가운데서)

<뉴욕타임스>의 리처드 제임슨처럼 <천국의 유령>을 꼽는 이도 있고 <가디언>의 앤드루 풀버나 정성일처럼 <칼리토>를 걸작으로 꼽는 이도 적지 않다. 로저 에버트는 <스카페이스>와 더불어 <팜므 파탈>을 최고작으로 골랐다.

브라이언 드 팔마와 <팜므 파탈> [3] – 드 팔마 감독 인터뷰 (1)

글 : 정한석 | 2004.11.23

<팜므파탈>의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인터뷰

“난 하나의 시스템에 머물지 않는 감독이다”

이 인터뷰는 2003년 7월 서면으로 이루어졌다. <씨네21>은 <팜므 파탈>이 곧 개봉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1년도 넘은 지금에 와서야 영화는 개봉했고, 더불어 브라이언 드 팔마와 주고받았던 이 인터뷰도 무슨 밀서나 되는 듯이 이제야 봉함을 열었다. 여기에는 그의 장르에 대한 생각과 히치콕에 대한 애증과 영화의 구조에 관한 접근로와 그를 둘러싼 영화 바깥의 이야기들까지 있다. 그의 영화가 창고에서 잠을 자는 동안 같이 동면에 들어갔던 이 인터뷰를 늦게라도 깨우게 되어 반가울 따름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팜므 파탈>에 관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성실한 대답이 실려 있는 인터뷰라는 사실이다.

-<팜므파탈>은 최근 당신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예를 들어, <스네이크 아이> <미션 임파서블>) 특정한 형식의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한다. 마치 장편 안에 단편이 있는 듯한, 또는 큰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작은 이야기를 먼저 보여주는 식. 이런 오프닝 시퀀스로 영화를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형식이 갖고 있는 기능과 의미는 무엇인가.

=영화에서 오프닝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떠다니는 헬리콥터나 질주하는 자동차를 비추고 따라가면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관객을 자신의 영화 세계로 안내할 때에는 독특하면서도 신중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영화의 오프닝의 공간과 사람에 대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한다. <팜므파탈>은 고전적인 누아르 필름으로 영화가 시작되는데, 이는 그 영화 전체가 일종의 필름누아르 꿈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당신의 영화를 말할 때 더이상 히치콕을 빗대어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동감한다. 그러나, <팜므파탈>에는 이런 상상이 엿보인다. 말하자면, ‘<현기증>의 마들렌/주디가 필름누아르의 로르/릴리로 바뀌어 있는 것 같은 구조’. 무엇보다 필름누아르의 팜므파탈이 치명적인 이유는 그 유혹의 주체가 ‘그녀’ 단 한명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팜므파탈>에는 그 역할이 두 인격체로 나뉘어져 있다. 이것이 필름누아르 영화들과 히치콕으로부터 시작한 당신 영화의 차이가 아닐까? 이 점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한다.

=나는 <팜므파탈>과 <현기증> 사이에는 별로 연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히치콕의 <현기증>은 영화사적인 관점에서 매우 영향력 있고 중요한 영화로 자신의 로맨틱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한 남자를 다루고 있다. 반면에 <팜므파탈>은 계속 쫓김을 당하던 여자가 피신 중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만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둘은 전혀 다른 아이디어로부터 출발됐고 비슷한 점이 있다면 모두 금발이라는 것 정도 아닐까? 사람들은 히치콕과 나와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팜므파탈>보다는 오히려 <씨스터즈>나 <강박관념> 또는 <침실의 표적>처럼 <현기증>에 나오는 사이코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팜므파탈>은 추리를 요구하기보다 어떤 철학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의 중요한 요소, 즉, 데자뷰, 공간, 시간에 대해 당신이 설정한 개념을 들려달라. 그 세 가지 요소를 영화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당신이 가장 고심한 것은 어떤 부분인가.

=<팜므파탈>의 많은 부분은 꿈으로 이루어져 있고, 두번의 욕실장면으로 전개되는 이 꿈만으로도 관객은 충분히 영화를 어렵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 대해 평론가의 반 이상은 꿈 이야기 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도 않았었다. 영화를 더 모호하고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에 여러 가지 요소들을 쓰고 설정을 했지만,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맞추기보다는 그것들을 이용해 꿈의 형태 안에서 필름누아르를 표현하는 데 더 많은 초점을 두었다.

-<팜므파탈>을 보고나서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연계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이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팜므파탈>을 연결짓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나.

=그 이유는 두 영화가 많은 점에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두 영화 모두 꿈 시퀀스를 이용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대부분은 실제 꿈이지만, <팜므파탈> 의 꿈은 여주인공이 욕실에서 잠들었을 때부터 시작된다. 또 다른 차이가 있다면,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의 꿈적인 요소는 영화 곳곳에 숨겨져 있어서 퍼즐을 맞추듯 영화 곳곳의 꿈들을 맞춰나가야 한다면, <팜므파탈>의 꿈적인 요소는 영화의 한 부분에만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시계들이 항상 같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꿈일 거라는 것을 알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관객에게 미리 일러주는 것과 동시에) 앞뒤를 맞춘다는 논리적 의미에서였는가, 아니면 영화적으로 말하고 싶은 좀더 큰 다른 생각이 있었는가.

=꿈꾸는 사람은, 꿈속에서 시간이 더이상 흐르지 않기를 원한다. 욕조에서 바라본 시계가 같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나, 꿈속에서 보이는 그 이외의 다른 여러 상징적인 표시들은 관객에게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꿈에서는 여러 이미지들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 속에서의 꿈 또한 그러하다. 나는 사람이 꿈을 꿀 때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을 표현하고 싶었고, 꿈이라는 것은 대개 유혹적이고 자극적이면서도 혼란스럽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은 프리츠 랑의 영화 <진열장 안의 여자>가 <팜므파탈>의 형식에 도움을 주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 진열장 안 여자는 박사의 대상이다. 하지만 <팜므파탈>에서 여인은 주체이다. 필름누아르 장르와 <팜므파탈>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그 둘은 많은 점에서 유사하지만 다르기도 하다. <진열장 안의 여자>에서의 주인공은 꿈을 꾸고 그 꿈이 실제 자기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꿈에서의 상황이 실제와 전혀 연관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팜므파탈>에서의 로라는 꿈을 꾼 뒤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미래를 바꾸기로 결심한다. 이는 주인공이 매우 주체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이 점이 아마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한다.

-왜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니콜라스 바르도 역에 맞다고 생각했나? 그의 직업이 사진기자인 이유는 무엇인가.

=극중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일종의 예술가로, 마치 영화의 감독과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한 공간을 두고 큰 몽타주를 작성하면서 심미학적으로 그것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조각을 찾아간다. 영화 전체는 그 마지막 한 부분의 심미적인 부분을 완성시키겠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영화 속에서 계속 사진을 찍고, 그것들로 퍼즐 조각을 이리저리 맞춘다. 영화에서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역할은 거의 조연급이고, 그의 예술적 역량을 감안한다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역할일 수 있었는데도 그는 기꺼이 나와 함께 작업에 응했고 잘 따라준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브라이언 드 팔마와 <팜므 파탈> [4] – 드 팔마 감독 인터뷰 (2)

글 : 정한석 | 2004.11.23

-물론 당신의 예전 영화들도 그런 경향이 있었지만 최근 영화들에서 더욱더 형식을 변주하는 데 깊은 관심을 드러내는 것 같다. 어떤 평론가는 이런 변화에 대해 드 팔마는 여전히 베끼기만 하고 오리지널한 것은 없다고 불평하지만 반대편에선 당신의 영화가 형식에 집착하면서 또 다른 오리지널리티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특히 <스네이크 아이즈> <미션 투 마스> <팜므파탈> 등 최근 영화들이 상당수 미국 평론가들로부터 외면받고 프랑스 평론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특이한 일이다. 이런 상반된 평가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느끼나.

=그러한 반응들을 보면서 늘 당혹해 하곤 한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나만의 색깔을 가지려 한다. 영화의 사실적인 측면을 중요시하는 비평가들은 내 영화들을 보면서 그 흐름을 따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 영화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 중에는 대부분 극장에 들어서기 전 자신이 무엇을 보게 될지 어느 정도 결정을 하고 보는 사람들이다. 내 영화들은 어떤 이미지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새롭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내 영화를 외면하는 이들은 내 영화가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것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고, 또한 좋게 평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점들을 높이 사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당신은 마틴 스코시즈, 스티븐 스필버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조지 루카스 등과 더불어 60년대 할리우드를 바꾸어놓은 감독들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스필버그, 코폴라, 루카스 등이 주류영화계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나 스코시즈가 영화제를 통해 거장으로 인정받은 것에 비해 당신이 걸어온 길은 특이하다. 주류영화에 한발 딛고 있으면서 다른 한발은 빼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물론 <미션 임파서블> 같은 블록버스터도 있었지만 대체로 제3의 길을 택한 듯 보인다. 어느 정도 의도한 결과라고 봐야 할까.

=꼭 의도한 결과라기보다는 자연적으로 상황들이 그렇게 흐르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의 경력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개됐고, 그 이유는 각자의 성격이 다르고 각기 독창적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는 영화에서 어떤 시스템을 드나드는 걸 좋아하는데 내 삶 자체가 하나의 방식에 매여 있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이렇게 하나의 시스템을 드나드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도 이전처럼 동일하게 나의 경력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당신의 경력은 언제나 오르락내리락했다. 걸작을 찍으면 다음 영화는 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식으로. <미션 임파서블>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감독으로 안착하나 했더니 <스네이크 아이즈>와 <미션 투 마스>를 보면 좀더 개인적인 영화로 선회한 듯한 인상이다. 당신의 경력이 이처럼 오르락내리락한 것은 어느 정도 의도한 것인가? 돈버는 영화를 찍었으니 다음 영화는 내가 해보고 싶은 걸 하겠어, 하는 식으로.

=영화란 상업적인 측면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이따금씩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상업적인 성공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 다음 작품을 하기가 매우 힘들거나, 다음 작품을 만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런 점에서 블록버스터와 개인적인 영화들을 오간 것은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라 하겠다.

-60년대, 그러니까 20대에 감독으로 데뷔해서 40년 가까이 연출을 했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한국의 임권택 감독은 “영화도 감독의 나이만큼 나이를 먹는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60대 감독으로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예전과 다르다고 느끼는지 궁금하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혹은 여전히 똑같다면 어떤 면에서 같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내가 아는 유일한 한국 감독은
김기덕 감독이다). 나이가 들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나 소재 선택이 변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 경력을 이어나가다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의도와는 상관없이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고 이전에 사용했던 소재를 되풀이해 다시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80대나 90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창의적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천재 감독들도 있지만, 나 같은 경우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으면서, 또 미국의 적대적인 시스템과 싸우면서 일해야 할 때가 많다. 그야말로 전력을 다해 매진해야만 하는 것인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것이 점점 버거워지는 게 사실이다.

드 팔마 어록

“나는 에로틱하지만 히치콕은 그렇지 않다”

팜프 파탈

관객에 대해 l “정말 미스터리다. 영화를 볼 땐 분명히 푹 빠져서 본 사람들이 영화가 끝나면 내가 본 최악의 영화였다든가 이 작자는 끌어내 총살을 해야 된다는 따위의 글을 설문지에 적는다.”(쿠엔틴 타란티노와의 인터뷰, 1994)“<침실의 표적>이 나왔을 때 나보다 더 상처를 받은 사람은 없을 거다. 얼마나 언론에서 닦달을 당했는지 차마 말로 할 수 없다. <스카페이스> 개봉일 파티 때는 사람들이 화가 나 복도를 뛰어다녔고 난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는 줄 알았다.”(<프리미어>, 1998)

공포에 대해 l “사람들을 무섭게 해야 한다는 건 장르의 일부다. 그러나 그게 가장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바로 무엇인가 일어날 듯한 것에 대한 기대다. 공포, 바로 거기에서 예술적 효과가 개입하는 것이다.”(<뉴욕타임스>, 1987)

히치콕에 대해 l “나는 초현실주의적으로 에로틱하게 이미지를 다룬다. 히치콕은 이런 쪽으로 너무 많이 들어간 적이 없다.”(<롤링스톤>, 1980)

폭력에 대해 l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폭력을 따라한다는 논리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축구경기를 보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 (그렇다고) 야구 방망이를 들어 누군가의 머리를 때리는 일은 없다.”(쿠엔틴 타란티노와의 인터뷰, 1994)

패스티시에 대해 l “나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내가 앉아서 영화들을 보다가 그 영화를 끌어들이거나 재구성해 다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내 영화 대부분은 내 경험의 산물이다.”(<필름 코멘트>, 2002 11/12??)

인터넷 팬과 프랑스 언론에 대해 l “내 팬들은 사인이나 받으려 날뛰는 미친 녀석들이 아니라 지적인 이들이다. 웹 포럼에 쓴 글을 보면 정말 와우. 이건 프랑스 비평가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들은 정말 공부를 한다. 그들의 통찰력은 생각하게끔 만든다. 미국 프레스 정킷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www.briandepalma.net, 2000)

정치관에 대해 l “나는 1960년대적 (진보적 기운이 일었던) 우상파괴주의자이다. 나는 기성체제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나는 미디어 전체를 이번주엔 뭘 팔 것인가의 문제로 본다.”(<프리미어>, 1998)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article_id=47311&mm=005003005

씨네21 남동철 편집장처럼 나도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하나 그리고 둘만 봤다.
하지만 그가 이 영화 하나만으로도 세상에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얼마 전 세상을 떴다 한다.
그는 물리적으로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길고 긴 인간의 시간을 보내고 갔을 것이다.
머지않아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