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오브 도그>

이 영화에 흐르는 도도한 긴장을 언급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묘사력을 시험해야 한다. 브롱코 헨리의 이니셜이 박힌 천으로 온몸을 쓰다듬으며 심취한 필의 모습을 묘사하지 않고 필이라는 인물의 억압적, 공격적 성격 이면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필이 로즈를 적대시하고 그를 신경쇠약으로 몰아 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 역시 로즈의 피아노 연주를 조롱하는 듯한 필의 밴조 소리를 묘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인물의 말이 적은 대신에 움직임, 소리, 표정에 대한 감각을 좇아 가는 것으로도 벅찰 정도로 생동감 있게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달리 말하면 인물들의 긴장과 갈등을 이 영화는 언어적으로 가시화하기보다 감각적으로 암시하려 한다. 발화된 상황보다 암시적인 감각이 긴장과 갈등을 더 강렬하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가 영화가 전해 주는 감각을 불안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로 감각한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어쩌면 감각적 표면으로부터 내가 발견한 왜상을 말하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필이 매번 목장의 뒷산을 응시하면서, 능선과 빛의 움직임이 만드는 형상으로부터 짖는 개의 왜상을 확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레드 밀 식당에서 피터가 만든 종이 꽃을 짓이기는 필의 손가락 움직임으로부터 나는 왜 성적 암시를 받았을까. 또는 나는 왜 자꾸만 피터가 그의 친부 역시 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새아빠 조지 역시 안전하지 못할 거라는 암시를 곱씹고 있을까. 나는 이것이 왜상적 오인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에 강하게 이끌린다. 이 영화는 확증하지 않고 암시함으로써 왜상적 오인을 유도하는 단서를 남기는 것이 영화의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가 하는 일은 영화의 이미지로부터 저마다의 왜상을 만나는 일인 것만 같다.

영화적 왜상은 그저 허상일 뿐일까.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이야말로 나라는 자아 그 자체인 것처럼, 왜상적 환영이야말로 영화의 정체 그 자체는 아닐까. 우리가 발견한 왜상이야말로 영화가 던져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필이 뒷산의 형상에서 찾은 왜상의 정체를 피터가 알아차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왜상적 마주침을 밀어붙여 나와 영화의 교차점을 파악해 나가는 것 말고 달리 영화를 이해할 길은 없지 않을까. 어쩌면 이 영화의 묘사에 너무나도 사로잡혔기 때문에, 나는 이 같은 생각 언저리를 맴돌기만 한 것 같다.

그나마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이 영화에서 피터라는 인물이 필보다 더 관심이 갔다. 피터는 이 영화의 비밀과 암시 전체에 연루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어머니 로즈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병적인 집착을 보인다. 어머니의 히스테리에 피터가 말한다. “이럴 필요 없게 내가 정리할게.” 남성성에 대해 맹목적 애착을 보이는 필이 거의 반사적으로 로즈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피터는 운명적으로 필과 대결한다. 피터는 이 영화가 공들여 묘사하는, 필로 대변되는 남성성의 대척점에 선 남성성이다. 피터는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고, 필을 두려워 하며 순종하는 듯한 태도로 필에게 접근해서, 그의 욕망과 환상, 그리고 취약함을 간파하고 이용해 나간다. 피터는 연약한 외양을 한 포식자다. 어쩌면 로즈가 조지와 결혼할 때부터 피터는 이미 살인을 단계적으로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억압적 아버지-적대자를 기꺼이, 가차없이 살해하는 피터의 강박과 증오는 필의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뒤틀린 남성성을 드러낸다. 필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로즈와 조지를 창문 너머로 지켜보는 피터의 응시가 필의 나르시시즘보다 더 위험해 보인다. 이 때 피터의 옅은 웃음이 우리에게 일그러진 환상을 되돌려 주고 있지 않은가.

<아사코>

아사코와 바쿠는 어떻게 사랑에 빠졌을까. 둘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사진 전시회를 보러 미술관을 들른 날 우연히 만난 아사코와 바쿠는 아이들의 콩알탄 놀이가 일으키는 소음 속에서 갑자기 입을 맞추며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아사코와 바쿠의 첫만남처럼 영화 <아사코>는 보는 이를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아사코>는 시종일관 감정의 결이나 인과의 구조물을 쌓아 올리지 않고 갑작스럽게 상황과 행위를 제시한다. 아사코와 바쿠가 갑자기 사랑에 빠지고 어느 날 바쿠가 갑자기 사라진다. 그리고 바쿠와 같은 얼굴을 한 료헤이가 갑자기 등장한다. 이 영화의 서사를 인과의 고리 안에서 납득하고 이해하기란 난망하기 때문에 계속 갑자기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설명하게 된다.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방문한 자리에서 료헤이의 친구 쿠시하시가 마야의 TV 연기를 본 후 갑자기 공격적으로 혹평을 하는 씬은 아직도 왜 이 상황이 필요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앞서 말한 콩알탄의 소음 속에서 아사코가 바쿠의 갑작스런 키스를 그대로 받아 들이며 연인이 되는 첫 시퀀스부터 아사코가 얼마나 수동적 여성 캐릭터의 전형을 보여 줄지 걱정이 앞서게 된다. 이 영화가 그저 통속적인 이야기 같다는 의구심이 꼬리를 물게 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실제로 그런 우려의 경계 위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 이후의 시간이 뜻밖에도 오랫동안 이 영화에 남는다. 무엇이 나를 이 영화에 머물게 하는 걸까.

영화 <아사코>의 세계는 말하자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세계다. 이유는 모르고 사태가 주어진다. 그런데 그 때문에, 이유를 미처 알지 못한 채 사태가 벌어지고, 그런 채로 사태 안에 자신이 남겨지기 때문에 무언가에 끊임 없이 붙들리는 세계다. 그 무언가가 벌어진 사태인지 그 사태의 이유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것이 벌어진 이후 홀린 듯이 무언가에 붙들려 있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아사코를 붙드는 것이 바쿠도 바쿠가 떠난 이유도 아니라 미결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태로서는 끝났지만 마음 속에서는 끝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 끝나지 않는 아사코의 마음 속 사태는 어쩌면 바쿠조차 끝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사코는 바쿠의 손을 붙잡고 홋카이도를 향하는 길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내 마음 속 사태는 이제 더 이상 바쿠로 인한 것이 아님을. 이윽고 바쿠를 돌려 보내고 홀로 제방을 오른 아사코에게 들리는 거친 파도 소리는 이런 깨달음을 드러내기도 하겠지만 여전히 아사코를 붙들어 흔드는 미결감의 혼란도 들려 주는 것만 같다.

이 영화에서 미결감의 정조를 눈치 채는 것은 사후적이다. 그보다 앞서 맞닥뜨리는 것은 다소 마술적이라 할 사건의 전개다. 다시 첫 시퀀스로 돌아가면 미술관을 연달아 나서는 바쿠와 아사코의 걸음 위로 깔리는, 음과 음 사이를 이상하게 움직이는 음악조차 주술적인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아사코는 바쿠를 만나기 전 미술관에서 어느 쌍둥이의 사진을 매료된 듯 한참 쳐다본다. 그 순간 바쿠를 만나 연인이 되고, 바쿠가 떠난 2년 후에는 바쿠를 그대로 닮은 료헤이를 만나 연인이 된다. 마치 사진 속 쌍둥이가 바쿠와 료헤이를 암시한 것처럼. 하루요가 아사코에게 “저 남자 너를 울릴 거야”라고 하고 나면 바쿠는 어느 날 구두를 사러 나가서 사라져 버린다. 바쿠가 아사코를 떠날 것이라는 예감은 빵을 사러 나서는 바쿠를 향해 손 흔드는 아사코를 멀어지듯 찍은 트랙 아웃 쇼트에서도 미리 제시된다. 영화가 앞서 제시한 것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풀어 가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예는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앞서 제시한 것을 재연하는 방식으로 풀어 가는 것도 찾을 수 있다. 바쿠가 아사코에게 그랬듯이 아사코는 료헤이에게서 갑자기 떠난다. 아사코가 바쿠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료헤이에게서 멀어지는 이 장면은 앞서 빵 사러 나서는 바쿠에게 손 흔드는 아사코를 담은 장면과 마찬가지로 트랙 아웃 쇼트로 찍혔다. 그리고 아사코가 바쿠를 돌려 보내고 료헤이의 오사카 집을 찾았을 때 아이들의 공놀이 사이에서 료헤이를 만나는 장면은 영화 첫 시퀀스의 콩알탄 장면을 반드시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도호쿠 지역에 자원 봉사를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고속도로에서 나왔어?”라고 묻는 대사는 바쿠와 홋카이도로 가는 길에서 똑같이 반복된다. 이처럼 앞선 것을 실현하거나 재연하면서 영화는 기시감이라는 정조를 만든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무심코 운명처럼 받아 들이게 만들고 뒤돌아 서면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어 당혹케 하는 기시감의 혼미함이 이 영화를 감싸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무언가 잔여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아사코의 말처럼 영화 속 모든 일이 뜻 모를 긴 꿈 속 같아서 깨어나서도 한동안 그 꿈에 더 머물고 싶어져서인지도 모른다.

솔직해져야겠다. 내가 이 영화에 사로잡힌 것이 사실 이처럼 묘하게 풍기는 정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실은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아사코가 결국 선택한 행위를 이해하고 싶어 한참 동안 머물러야 했다. 아사코가 주어진 것에 매료되고 그것에 충실히 매진하는 안전한 수동성의 패턴을 끊고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바쿠가 아니라 료헤이와의 관계를 복구하려고 단호해지는 것에 나는 놀랐다. 아사코는 그 때까지 어디까지나 타자의 부름에 충실히 반응하고 응답하는 인물이었고 바쿠로 인해 삶 전체가 어떤 상처에 지배당하는 인물이었다. 아사코가 다시 나타난 바쿠의 손을 잡고 료헤이에게서 떠나는 것은 아사코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영화가 아사코의 미결감을 동정한다면 기꺼이 그럴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 순간 아사코를 향하는 비난에는 억울함마저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료헤이 앞에서 날선 비난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동안 아사코의 미결감은 더 이상 보살펴야 할 것이 아니게 된다. 아사코는 이 순간 영화의 세계가 보이던 동정에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사코는 그 동안 이루어진 영화의 작동 법칙과 달리 영화보다 먼저 말을 뱉는다. “바쿠, 더 이상 안 되겠어. 돌아가야 해. 료헤이가 있는 곳으로. 더 이상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그리고 제방 너머 파도 소리가 들리고 아사코가 정면을 응시하며 이제는 상황이 변했음을 보여 준다.

이제 아사코가 영화를 규정한다. 영화적 사태가 아사코의 결심대로 따라가야 한다. 아사코가 일으킨 변화가 무엇인지 영화가 확인해야 한다. 아사코는 도호쿠 지역의 어부에게 힐난을 들으며 교통비를 빌려 료헤이를 찾고, 자신을 닮은 바쿠가 이제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며 분노를 쏟아 내는 료헤이의 날선 말을 묵묵히 듣는다. 아사코는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그것을 기꺼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카자키의 어머니 에이코는 젊은 시절 아침을 같이 하기 위해 도쿄까지 갔던 추억의 남자가 실은 남편이 아니라는 고백을 하는데, 이것은 아사코가 깨달은 바의 단초를 영화가 사후적으로 구성한 것에 가깝다. 에이코가 두고두고 회고하는 잊을 수 없는 사랑의 경험이 실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끊임 없는 사로잡힘이라는 것, 아사코 역시 어쩌면 그렇게 바쿠로부터 새겨진 미결감에 평생을 붙잡히며 살지도 모른다는 것, 미결의 미혹을 헤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의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풀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아사코는 미결감의 고통을 료헤이도 똑같이 겪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결심한 거라고 해야 할까. 아사코는 료헤이가 허락한다면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입힌 상처가 자신을 찌르는 송곳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감내하면서까지 료헤이와 함께 하려 한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지금 료헤이를 사랑한다는 인식이 오히려 또렷해진 것 같아 보인다. 나는 아사코의 이런 결심이 윤리적 선택에 가깝다고 계속 말하고 싶어진다. 아사코는 미결감과 기시감의 아릿한 착란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양보하지 않고, 그것이 야기할 일들에 대해 책임 지고, 끝내 그것을 완수하려 하지 않는가. 연이어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나는 왜 아사코처럼 하지 못하는가. 이런 생각들이 나를 이 영화에 붙들리게 하는 것이다.

<에이리언>

SF, Sci-Fi, Science Fiction을 공상 과학이라고 번안해 부르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과학적 가능성에 기반한 상상을 헛된 공상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다니. 과학적으로 구성된 대안 세계가 지닌 이름의 자리가 너무나도 초라한 것 아닐까 하는 억울한 마음마저 짐짓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과학적 허구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과학적 허구라는 장르가 다른 것보다 과학의 측면에서 더 공상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SF는 과학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세계를 넘어서는 것에 관심이 많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인류의 문명을 잉태시킨 미지의 존재 모노리스(Monolith)는 과학적으로 추론 가능한가.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총체적 덩어리로 인식하는 외계의 지적-영적 생명체란 과학적으로 존재 가능한가. 과학적 상상은 과학적 세계에 대해 성찰적이면서 동시에 반과학적이다. 과학적 허구는 과학의 위대한 진리를 제시하기보다 역설적으로 과학이 해 내지 못하는 것, 과학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열정과 신경증을 드러낸다. 어쩌면SF는 과학의 공백에 대한 인간의 불안, 과학 법칙에 대한 무의식 또는 환상의 반격 같은 것 아닐까.

<에이리언>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지의 치명적인 외계 생명체 에일리언은 인간의 전지전능한 과학적 세계에 대한 경고다. 인간 문명이 우주를 탐험하고 동면 장치로 생명의 시간을 조절하며 인간을 닮은 로봇, 안드로이드를 창조할 만큼 발달할지라도, 아니 어쩌면 그렇게 발달할수록 물리적 세계를 관장하는 전지전능함이 완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과 불안의 응집력은 커진다. 이 응축된 강박과 불안이 공포스러운 실체를 드러낸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것이 H. R. 기거가 상상해 낸 에일리언이다. 기거의 에일리언은 이물적(alien) 요소의 총합이다. 검고 윤기 나는 피부, 길쭉한 머리를 하고 곤충을 닮은 외형은 어쩌면 괴물을 묘사하는 익숙한 관습에 가깝다. 이 괴물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게 만드는 치명적 면모는 그 외의 것들이다. 이 괴물이 성체가 되기 전, 알에서 몇 단계의 유충으로 변태하기까지의 형상은 명백히 인간의 생식 기관을 닮았다. 정자, 난자, 인간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이것은 마치 과학과 지식의 세계를 침범하는 리비도, 충동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 같다. 한 방울만으로도 주변을 녹여 버리는 산성 피는 어떤가. 이 괴물은 신체 기관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부터 외부를 공격한다. 산성 피를 머금고도 녹아 내리지 않는 이 존재의 장기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리고, 그 입 속의 입. 이 괴물은 사람을 날카로운 금속성 이빨로 찢어 발기기보다 뜻밖에도 그 입 깊은 곳에서 튀어 나오는 또 하나의 입으로 인간의 육질을 관통한다. 인간의 몸에 기생하다가 인간의 몸을 뚫고 나온다는 것을 포함해서, 에일리언은 생애 과정부터 생물학적 특질까지 총체적으로 인간의 내부, 이면과 관련되어 있다. 에일리언은 상상하기도 힘든 치명적인 이물적 타자다. 그것도 인간의 심연에서 인간 자신이 잉태한 자신의 적대자다.

인간의 내면, 심연을 들여다 보게 되는 모티프는 에일리언과 사투를 벌이는 노스트로모호 내부의 폐쇄된 미로라는 공간에도, 우주의 깊은 암흑 속 미지의 LV-426 행성에도 새겨져 있다. 폐소공포증을 불러 일으키는 미로 같은 노스트로모호 내부의 통로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통로이고 LV-426 행성은 우주라는 심연의 밑바닥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노스트로모호의 인공지능 시스템 마더가 정체 불명의 신호를 포착하고 긴 동면에 빠진 승무원을 깨우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 동면 – 에일리언과의 사투 – 다시 동면으로 구성된 이야기 덕분에 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자꾸만 이것이 모두 꿈, 2등 항해사 리플리의 악몽에 불과하기를 바라게 된다. 인간의 정신 그 심연에 잠들어 있던 억압된 괴물이 노스트로모호라는 문명, 의식의 세계로 침입하려 하고 이를 리플리가 의식과 심연을 잇는 폐쇄된 통로에서 끝내 저지하는 중첩된 꿈에 대한 은유이기를 말이다. 이 바람이 간절한 것은 에일리언이 심연에서 튀어나온 형벌, 잠재된 것이 실현된 신적 폭력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에일리언의 점액질 분비물로 노스트로모호의 기계 금속에 녹아 붙어 버린 채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울부짖는 달라스 선장의 절규는 꿈에서나 그릴 만한 지옥도가 아닌가. 그것도 과학 문명을 극도로 위태롭게 느끼는 마음이 만들 만한 지옥도. 명심해야 할 것은 에일리언이 인간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에일리언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LV-426 행성이라는 심연에서 영겁의 시간 동안 잠자고 있던 에일리언을 인간이 찾아 깨웠다. 그래서 차라리 꿈에서 깨어 난 것은 리플리가 아니라 에일리언이라고 해야 이 영화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이다.

꿈을 암시하는 이야기 구조는 이 영화를 그토록 강렬하게 불길한 암시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그것을 견딜만한 고난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이후 다섯 편의 후속작이 만들어질 만큼 프렌차이즈가 되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리플리는 구원자의 면모를 확장해 갔다. 이주민의 유일한 생존자 아이를 구하는 여성 전사가 되고 추방된 죄수들을 위해 거룩한 종교적 희생을 감내하며 발달한 유전자 기술에 힘입어 200년 후에 부활해서는 인간을 냉소하는 구원자가 된다. 에일리언의 신적 폭력에 기술 문명이 아니라 순수한 투지와 집념으로 저항하는 구원자 리플리에게서 느끼는 신화적 매혹이 이 프렌차이즈를 이끌었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우주적 규모의 세계체제가 된 자본주의의 탐욕이 에일리언이라는 심연의 재앙을 자초하는 주범이 된다는 또 하나의 테마는 일련의 충격적이고 불길한 사건들을 사회적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또한 인간을 닮은 로봇 안드로이드를 통해 드러낸 창조자 인간의 자가당착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보다 인간적인 복제 생명체 레플리컨트의 고뇌를 빌어 대자적 존재의 존엄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쩌면 우리는 통제 불가능한 난폭한 존재 에일리언을 숭배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초발달한 미래의 세계에서도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를 만나고 싶은 어떤 충동으로써 말이다. 프렌차이즈의 시작이 된 <에이리언>은 이 모든 방향의 영감을 지닌 영화다.

<에이리언>을 만든 리들리 스콧은 에일리언이라는 존재에 매혹되는 지점에 관심이 깊었던 것 같다. 그는 <에이리언>의 프리퀄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 커버넌트>를 세상에 내 놓으면서 이 매혹에 대해 보충한다. 그가 보충한 상상은 지구의 인간을 창조한 외계의 지적 존재가 있고 이들이 에일리언을 배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에일리언이라는 존재를 리들리 스콧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리들리 스콧에게 에일리언은 인간의 인식 영역 바깥에 대해 품는 환상의 담보물이다. 과학적 인식 체계가 발전하더라도 언제나 남는 인식 바깥의 것들, 인간의 사고가 닿지 않는 것에 대해 품는 편집증적 환상이 우리에게는 늘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표식 말이다. 인간을 압도하는 산성피를 가진 외계의 생명체에 대한 상상은 인간을 창조한 또다른 존재가 있다는 상상과 다르지 않고, 이 세상이 프로그래밍된 매트릭스에 불과하다는 상상과 멀지 않다. 달이 하필이면 정확한 크기로 정확한 위치에서 지구를 돌면서 태양을 완벽히 가리는 이유부터 우주가 빅뱅으로 존재하게 된 이유까지 과학적 사고를 확장한다고 해도 사물과 존재에 대해 풀지 못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열쇠의 담지자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비켜 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과학은 체계적인 망상, 편집증에 대한 투쟁이지만 편집증은 언제나 과학의 심연에 존재한다. 리플리의 꿈 속 깊은 곳에서 에일리언이 기다린다는 상상은 과학이 자신의 심연에서 SF를 바라보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치 과학의 막다른 길에 공상과학의 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