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는 사나이>

나는 서부영화에 대해, 또는 존 포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물론 그의 영화가 영화사적으로, 미학적으로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의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이것이 나는 조금은 부끄럽기도 한데, 존 포드의 영화에 대해 마땅히 잘 알아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다는 자격지심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부지불식간에 시네필의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알면서도 말이다.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흔히 서부영화에서 보게 되는, 그들이 인디언이라 부르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일그러진 전형성이 나는 내심 못마땅해서 고전의 반열에 두고 바라보기가 싫었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원주민들이 공동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서부영화의 세계는 얼마나 중대한 착각에 기반하고 있는가. 진실은, 공동체의 평화를 지키려는 자와 그것을 무너뜨리려는 치명적 타자의 관계를 뒤집어야 드러날텐데 말이다. 이를테면 서부영화는 진짜 진실에 대해 눈감아야 신화적 진실과 대면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일 것이다.

<말없는 사나이>는 존 포드가 연출한 영화이지만 서부영화가 아니다. 그래서 앞의 문장들은 이 영화에 대해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 포드가 연출하고 존 웨인이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존 포드의 영화를 잘 모르는 나조차도 서부영화의 중력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존 웨인이 분한 션 손튼은 너무나도 서부영화 속 존 웨인의 후일담에 나올 법한 인물 같지 않은가. 결투를 직업으로 했던 남자, 결투에서 이겼지만 떠나야 하는 남자,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공동체에 속할 수 없지만 공동체의 평화와 안녕을 바라기 때문에 기꺼이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는 남자라는 점에서 션 손튼은 서부영화의 존 웨인과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션 손튼이 미국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떠나오는 것은 마치 마을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진 서부영화의 영웅에 대해 상상하고 싶은 그 다음의 삶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가.

션 손튼은 말이 많다. 미국식 유머와 자신감,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갖게 된 것 같은 희망이 캐릭터에서 느껴지고 그만큼 말이 많다. 그럼에도 영화의 제목이 <말없는 사나이>인 것은 아마도 션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플레이페어 목사를 제외하고는 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니스프리 마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저 고향으로 돌아온 양키일 뿐이다. 션은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이니스프리 마을에서 말 그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션 손튼이 이니스프리에 속한 사람이 되는 과정이라고 할 이 영화는 마을을 수없이 떠났을 서부영화의 존 웨인에게 돌려주는 일종의 보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진실에 한번 눈을 돌려 볼 필요도 있다. <말없는 사나이>와 서부영화라는 허구적 세계 사이의 상호 참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보상은 존 포드의 영화를 관통하는 이데올로기의 면모를 감지할 수 있게 한다. 고향 마을에서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는 가정을 꾸리고 사는 션의 삶이 마을을 떠나야 하는 서부영화의 존 웨인이 희구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말이다. 션은 이니스프리 마을의 지참금 문화에 대해 무의미한 악습이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젠더와 가정에 대한 관념이 마을의 관습에서 더 나아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내 매리의 엉덩이를 치거나 짐짝처럼 끌고 가는 장면만으로도 션은 적어도 미국식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체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이 영화는 이상화된 미국식 가부장제와 이상화된 이니스프리 마을의 가부장제가 화해하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매리라는 인물은 조금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그는 션이 이니스프리의 사회에 통합되도록 이끄는 인물이다. 매리는 관습과 규범을 완고하게 고집함으로써 이를 수행한다. 그는 자기 몫의 지참금을 가족으로부터 받아 내지 못하면 결혼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다. 매리는 마을의 가부장제적 규범을 충실히 따르는 인물이며, 남편 션도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나 매리는 단지 순종적이기만 한 여성이 아니다. 그는 자기 몫을 분명히 주장하고 마을의 규범을 관철하기 위해 션을 마지막까지 몰아붙이는 인물이다. 매리는 지젝이 말하는 소위 안티고네적 주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 매리는 (특정한 상징적 질서에) 타협하지 않고 (다른 차원의 상징적 질서를) 고집하는 방식으로 대타자의 균열을 드러내는 윤리적 주체는 아니다. 매리는 자기 몫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션이 자신의 (살인이라는) 트라우마를 대면하고 재현하도록 만드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션이 온전히 마을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매리는 미국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션에 대항해 이니스프리 마을의 상징적 질서를 고집함으로써, 트라우마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방인 션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다시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를 이니스프리 마을의 상징적 질서에 통합되는 다른 차원의 경험으로 전치시키고 봉합해 버린다.

매리는 오빠 윌이 몰려 온 마을 사람들 이목을 이기지 못하고 지참금을 션에게 건네자, 그 돈을 태워 버리도록 아궁이의 문을 힘차게 열어 젖힌다. 조금 전까지 순순히 션에게 짐짝처럼 붙들려 끌려 와 내팽개쳐지던 모습은 단지 연극에 불과했다는 듯이. 지금까지 지참금 문화의 굴레를 벗어내는 순간을 위해 그 문화에 순종하는 것처럼 연기했다는 듯이. 이 때 매리는 단지 션이 트라우마의 봉합과 이니스프리 마을로의 통합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객체 이상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 순간 매리는 지참금 문화라는 상징적 질서가 허구적으로 가장한 동조에 간신히 붙들려 유지되고 있음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매리가 바라는 것은 션을 봉합하는 것이지 지참금 문화를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지만 말이다.

<말없는 사나이>에서 션이 서부영화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인물이라면 매리는 모순적이라 할 만큼 충돌하는 면모를 동시에 지닌 인물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추방을 운명으로 하는 영웅에게 건네는 (공동체로의 복귀라는) 퇴행적 환상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부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은연 중에 내포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인물들이 부르는 노래와 배경 음악이 수시로 겹치고 이어지는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니스프리는 실제로 아일랜드에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런 평가만으로는 무언가 잔여감이 든다.

션이 고향 집을 사들이고 처음 그 집을 들어가면서 매리와 실랑이를 벌이는 시퀀스처럼, 이 영화는 전체를 관통하는 의미로 잡아 두기가 어렵다. 그 시퀀스는 개별 쇼트들이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뒤죽박죽이다. 션이 괴성을 지르며 창문에 돌을 던지거나, 그 때 매리가 뒤돌아서다 거울의 자신을 보고 놀라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또는 뛰쳐나가는 매리를 붙잡은 션이 느닷없이 매리에게 키스하자 키스를 받아들이는 것 같아 보이던 매리가 션의 뺨을 때리는 것처럼, 시퀀스는 파편적 쇼트의 연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파편들이 모인 시퀀스가 이상하게 총체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는 의미화하기 이전에 감각되는 것이기 때문에? 감각이 의미에 선험적이라는 생각에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둘은 동시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감각은 의미를, 의미는 감각을 서로 필요로 하여 구성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는 영화는 어떤 쇼트의 조합도 가능성의 차원에서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 안에서 실현된 조합이 반드시 총체성을 이끌어 내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션의 괴성과 매리의 비명의 청각적 호응 관계는 단지 감각이 아니라 의미이기도 하다. 쇼트들은 소리 사이의 호응을 인지하는 순간 서로 연결된다. 매리의 충동적 반응과 의식적 반응의 충돌 또는 시간차는 시퀀스의 파편적 구성 그 자체를 통해 짧은 순간에 직관적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이 시퀀스는 영화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싶은 어떤 속성을 상기시킨다. 쇼트들의 충돌과 종합이라는 영화의 내적 원리부터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의 개별성과 사회성의 동시적 발현이라는 외적 현상까지, 영화는 파편화된 채로 총체를 이루는 예술이다. 이 영화에서 그 파편적 총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내적 모순의 동력으로 션에게 대응하는 매리라는 점을 곱씹어 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마지막 시퀀스는 충격적이고 어리둥절한 의문에 휩싸이게 만든다. 내가 지금 무엇을 본 것일까. 플롯은 느슨하게 구성되어 있고 카메라는 인물의 행위나 산촌의 풍경을 명상하듯 가만히 지켜보는 쪽에 가까웠던 영화가 갑자기 인과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개념화하기 힘든 방식의 이미지 배치를 우리에게 던진다. 하나가 바라보던, 어느새 사라져 버린 사슴은 무엇인가. 그 사슴의 몸에 난 총상흔과 흐르는 피, 그리고 쓰러진 하나가 흘리는 코피는 어떤 유사성을 떠올리도록 유도하는 것일까. 타쿠미는 왜 느닷없이 타카하시를 해치는가. 타카하시는 죽은 것이 맞는가.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과 당혹감은 정당하다. 이미지, 그리고 숏과 숏의 배치는 보는 우리로 하여금 개념과 이야기를 생산하도록 만든다. 이는 단지 독립적인 하나의 이미지나 앞뒤 숏의 연속적 배열에 한정되지 않고, 영화의 러닝타임 전체, 또는 이보다도 확장된 시공간에서 우리가 본 것과 보지 못한 것까지 아우르는 활동이다. 그런데 마지막 시퀀스는 이 영화에 대한 기억과 느낌에 균열을 내고 의미의 배열에 혼란을 야기한다.

이를테면, 이 시퀀스에서 사슴은 이전에 숲속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어슴푸레 보이던 그 사슴과 다르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그러진 얼굴의 사슴은 하나의 시선의 대상 사물로서 사슴이 아니다. 마지막 시퀀스의 사슴은, 말하자면 그 시선에 대해 되돌려 주는 타자의 응시는 아닐까 하는 느낌을 자아낸다. 나는 이 영화에서 이전에 사물의 응시를 가시화한 장면이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인물의 시선을 따르는 장면도 별로 보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 사슴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 인과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국면을 열어 놓는다.

나는 이 마지막 시퀀스에 대해 어떤 해석의 버전을 내놓기가 망설여진다. 해석의 정확성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다, 해석하면 진부해질 것 같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지막 시퀀스를 스스로 의미화를 포기하듯이 던져 놓았고, 이런 갑작스러운 질적 전환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언어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항, 환상과 유령, 꿈의 해석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식상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언어로 제시할 만한 해석의 가능성이 많지 않다고 느낀다. 나는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방법론이 타당한지 살피기 전에, 이 영화가 이런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게 온당한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서 나는 어떤 인물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경험을 종종 한다. 류스케는 인물이 왜 그러한지를 이해시키기보다 그러한 인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 영화에서 내게 이해되지 않는 인물은 타쿠미였다. 타인에게 친절하지 않거나 절대 존댓말을 하지 않는 것 같은 점보다, 왜 매번 하나를 집에 데려오는 일을 잊어버리는 인물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마지막 시퀀스의 느닷없는 질적 전환의 원인, 그러니까 하나의 실종은 타쿠미의 그 건망증 때문이다. 타쿠미는 매번 계곡물을 길러 오는 일을 타인과 함께 하다가, 반복적으로 하나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야 하는데 잊어버린 걸 불현듯 깨닫는다. (매번 그 연기는 어색하다.) 타쿠미에게 하나는 왜 종종 망각하는 존재인 것일까. 그리고 그런 타쿠미로 인해 촉발된 마지막 시퀀스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의미화의 곤경은 타쿠미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곤란함을 나는 앞으로도 계속 느낄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하마구치 류스케는 어떤 인물을 사건 그 자체로 두고 영화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수께끼 인물을 의미화하고 싶은 유혹은 하마구치 류스케가 노리고 파 놓은 의미의 텅 빈 함정에 무턱대고 뛰어드는 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이 영화에 대해서는 그 함정에 뛰어들기가 망설여진다.

서사의 입체성을 억누르며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구현한 것은 ‘악의 평범성’이 아닌 ‘악의 평면성’이다. 영화는 나치 가족을 이미지로 전면화하면서도 그들과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서 있는 곳은 이 가족의 구체적인 세부가 보이지 않는(실은 보지 않아도 되는) 위치, 담장 건너의 무수한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안위에 몰두하는 이들의 풍경만 피상적으로 스케치되는 지점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동요 없는 중립지대, 객관적 목격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허락한다. 감독은 이 가족에게 중심을 맞춘 이유로 “우리에게 내재된 가해자와의 유사성을 보는 시도”라고 말하지만, 정작 영화는 가해자의 서사와 분리된 곳에서 피를 묻히지도, 벌벌 떨지도 않는 기계적인 눈으로 그 세계를 그저 쳐다본다. 이 영화는 비인간성을 현시한다는 미명으로, 자신이 빚은 인간의 개별성을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가해자의 서사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서 서사 자체를 무력화한다. 그 태도는 비겁하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구역질의 만용, 가장된 악몽’

2주 전 숭례문학당 영화 토론과 비평 읽기 수업에서 남다은의 글을 읽다가 나는 그 자리에서 박수를 칠 뻔 했다. 남다은의 통렬한 비판을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국한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인용할 때 우리는 악을 평면적으로만 다루는 어리석은 비겁을 흔히들 반복한다. 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악이나 폭력 같은 것에 대해 보이는 평면적 적대감은 아주 간단하게 자신을 그 적대자들에게 연루되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게 만든다. 관념적으로는 그것을 주체의 대립자로 설정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우리는 악이나 폭력을 생산하는 구조 안에 연루된, 그런 조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주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