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

가후쿠와 오토가 키스하는 장면이 나는 무척 이상했다. 그 장면에 달라 붙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 오기 때문이다. “나리타 9시 출발.” 분명 오토의 목소리이지만, 이 때 카메라는 오토의 입을 가후쿠의 얼굴로 가려 놓아서 오토가 실제로 내뱉은 말인지 확정할 수 없다. 그보다 둘이 입을 맞추고 있는 그 순간 오토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목소리는 어떻게 이 장면에 끼어 든 것일까.

이 말은 오토가 집을 나서는 가후쿠에게 비행기 탑승 일정을 상기시켜 주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장면 다음에, 가후쿠가 비행기에 탔어야 할 그 시각에 오토가 집에서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은 오토 스스로 가후쿠의 일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오토의 이 말은 가후쿠에게 전하는 오토의 육성과 오토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라는 두 가능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영화는 단순히 오토의 입을 가려 버림으로써 오토의 말을 어떤 것으로도 해석 가능한 텅 빈 말, 신체 없는 목소리로 만든다.

가후쿠는 다양한 언어로 이루어진 연극 공연을 만들어 간다. 연기하는 배우들은 현장에서 상대방의 육성을 알아 듣지 못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언어로 어떤 맥락과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깊이 이해하도록 훈련한다. 이것은 텅 빈 말로부터 인간의 정신적 신체를 발견하거나 부여하는 과정인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이에 대해 보여 주는 유려한 상징들, 즉 몇 가지 소리를 지운 것—육성을 지니지 못한 유나, 미사키의 고향을 향하는 도로 장면의 묵음—이나 앞서 키스 장면과 같이 소리의 실체를 불명확하게 만든 것도, 목소리의 담지자를 말소한 후 다시 의미의 고정점을 탐색하려는 시도인 것처럼 보인다.

가후쿠는 유나와 재니스의 연기 연습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 말하고, 다카츠키와의 대화에서 대본으로부터 그것을 만나 응답하라고 한다. 가후쿠가 말하는 그 무언가는 과연 무엇일까? 앞서 말한 의미의 고정점, 텅 빈 말로부터 각 주체가 타당하다고 확정하고 끝내 드러내게 되는 의미의 고정점은 아닐까? 또는 그 타당하게 열려 있는 가능성의 혼란과 고통을 견뎌 낸 흔적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가후쿠는 이를 위해 오토의 연극 대본 녹음본처럼, 또는 연극 공연 리딩 연습 방식처럼 감정이 소거된 로봇과 같은 목소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즉 주체의 자기 말소 이후에야 새로운 의미의 고정점을 탐색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가후쿠에게서는 실존적으로 드러난다. 오토가 방언처럼 내뱉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대로 오토에게 전달해 주는 일상이나 오토에게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또는 타인과의 대화에서 반응을 충분히 하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다른 의미에서 드라이버 미사키 역시 자기 자신을 무화하려는 인물이다. 미사키는 가후쿠의 자기 말소적 경향에 대해 미학적 태도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내와 어머니의 상실이라는 트라우마가 이들의 자아를 계속 흔들고 있다.

영화는 이들이 온전히 자아를 무화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한다. 이를 드러내는 이 영화의 반복적 투사가 흥미롭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의 대사가 여러 인물의 입을 통해 이 영화 곳곳에 반복적으로 기입되면서, 그 대사는 텅 빈 목소리로부터 인물의 내면과 일치하는 심상 같은 것으로 발전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진실은 그게 무엇이든 두렵지 않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이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와 같은 대사가 가후쿠와 미사키로 하여금 각자의 상처를 인식하고 직시하도록 방향성을 가리키거나 그런 도약의 징표가 된 것처럼 비추어질 때, 영화가 텅 빈 주체의 열린 가능성을 동시에 염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같은 염려가 영화로 하여금 유나, 윤수 집에서의 저녁 식사 장면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어떤 투사나 암시보다도,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가후쿠와 미사키라는 인물의 변화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사람들 사이 교류를 이상화한 장면이라고 할 법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필요로 하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이 두 인물이 구체적 관계를 경험함으로써 전환점을 찾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지니고 대면할 용기를 그들 자신의 관계 안에서 확인시키기 위해.

<파워 오브 도그>

이 영화에 흐르는 도도한 긴장을 언급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묘사력을 시험해야 한다. 브롱코 헨리의 이니셜이 박힌 천으로 온몸을 쓰다듬으며 심취한 필의 모습을 묘사하지 않고 필이라는 인물의 억압적, 공격적 성격 이면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필이 로즈를 적대시하고 그를 신경쇠약으로 몰아 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 역시 로즈의 피아노 연주를 조롱하는 듯한 필의 밴조 소리를 묘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인물의 말이 적은 대신에 움직임, 소리, 표정에 대한 감각을 좇아 가는 것으로도 벅찰 정도로 생동감 있게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달리 말하면 인물들의 긴장과 갈등을 이 영화는 언어적으로 가시화하기보다 감각적으로 암시하려 한다. 발화된 상황보다 암시적인 감각이 긴장과 갈등을 더 강렬하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가 영화가 전해 주는 감각을 불안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로 감각한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어쩌면 감각적 표면으로부터 내가 발견한 왜상을 말하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필이 매번 목장의 뒷산을 응시하면서, 능선과 빛의 움직임이 만드는 형상으로부터 짖는 개의 왜상을 확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레드 밀 식당에서 피터가 만든 종이 꽃을 짓이기는 필의 손가락 움직임으로부터 나는 왜 성적 암시를 받았을까. 또는 나는 왜 자꾸만 피터가 그의 친부 역시 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새아빠 조지 역시 안전하지 못할 거라는 암시를 곱씹고 있을까. 나는 이것이 왜상적 오인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에 강하게 이끌린다. 이 영화는 확증하지 않고 암시함으로써 왜상적 오인을 유도하는 단서를 남기는 것이 영화의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가 하는 일은 영화의 이미지로부터 저마다의 왜상을 만나는 일인 것만 같다.

영화적 왜상은 그저 허상일 뿐일까.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이야말로 나라는 자아 그 자체인 것처럼, 왜상적 환영이야말로 영화의 정체 그 자체는 아닐까. 우리가 발견한 왜상이야말로 영화가 던져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필이 뒷산의 형상에서 찾은 왜상의 정체를 피터가 알아차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왜상적 마주침을 밀어붙여 나와 영화의 교차점을 파악해 나가는 것 말고 달리 영화를 이해할 길은 없지 않을까. 어쩌면 이 영화의 묘사에 너무나도 사로잡혔기 때문에, 나는 이 같은 생각 언저리를 맴돌기만 한 것 같다.

그나마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이 영화에서 피터라는 인물이 필보다 더 관심이 갔다. 피터는 이 영화의 비밀과 암시 전체에 연루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어머니 로즈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병적인 집착을 보인다. 어머니의 히스테리에 피터가 말한다. “이럴 필요 없게 내가 정리할게.” 남성성에 대해 맹목적 애착을 보이는 필이 거의 반사적으로 로즈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피터는 운명적으로 필과 대결한다. 피터는 이 영화가 공들여 묘사하는, 필로 대변되는 남성성의 대척점에 선 남성성이다. 피터는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고, 필을 두려워 하며 순종하는 듯한 태도로 필에게 접근해서, 그의 욕망과 환상, 그리고 취약함을 간파하고 이용해 나간다. 피터는 연약한 외양을 한 포식자다. 어쩌면 로즈가 조지와 결혼할 때부터 피터는 이미 살인을 단계적으로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억압적 아버지-적대자를 기꺼이, 가차없이 살해하는 피터의 강박과 증오는 필의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뒤틀린 남성성을 드러낸다. 필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로즈와 조지를 창문 너머로 지켜보는 피터의 응시가 필의 나르시시즘보다 더 위험해 보인다. 이 때 피터의 옅은 웃음이 우리에게 일그러진 환상을 되돌려 주고 있지 않은가.

<아네트>

<아네트>는 영화가 그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원리에도 불구하고, 내밀한 사적 세계를 들여다 보는 예술이기도 함을 보여 주는 한 예다. 주어진 시간 동안 우리가 카메라라는 유일한 시선에 사로잡혀 그 시선의 망막 앞 또는 뒤를 공개적이지만 은밀하게 체험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시선의 진짜 주인이 존재한다고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허구적 세계를 믿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감독 레오스 카락스와 그의 딸 나스티야가 직접 등장해 영화의 시작을 알리고 나면, 표현주의적 모험 같은 이 영화의 낯설고 익숙한 모든 면모에 대해 레오스 카락스의 자의식과 욕망을 연결하고 싶어지는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이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레오스 카락스와 나스티야임을 알아 채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 영화가 감독 개인에 붙들려 있다고, 감독의 고백을 대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형성하는 것이, 어딘가 익숙한 원형적 이야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영화적 선택을 견디는 한 방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어떤 환상에도 관대할 수 있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것이 레오스 카락스가 온전히 사적인 환상을 자유롭게 표출하게 위한 선택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 볼 수도 있다. 안의 죽음부터 헨리의 자기 혐오적 불안과 도취적 충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낯설게 침입하는 인서트 쇼트부터 여과 없이 밀어 붙이는 무대 장면의 맹목성까지. 이 영화를 독해하는 것이 대개 레오스 카락스의 취향과 감정, 욕망과 성찰을 탐색하는 길로 향하는 것은 관객인 우리에게 피하기 힘든 여정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숨막히게 내밀해 보인다.

영화가 레오스 카락스의 욕망-상징 체계에 포섭되어 있는 것 같은 이 작가주의적 질식 상태를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네트의 존재가 아닐까. 정확히 말하면 인형 아네트에서 인간 아네트로 변신을 감행하는 순간 말이다. 아네트가 인간의 육체로 등장하는 순간은 영화의 내밀한 환상을 실현하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그 실현이 환상을 무너뜨리는 순간이 된다. 인간 아네트는 아버지가 사랑할 것은 더 남아 있지 않다면서 아버지, 심지어 어머니로부터도 착취 당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 선언은 어쩌면 영화의 내적 진실 또한 폭로하는 것 같다. 나는 이 말이 영화가 인형 아네트를 착취했다는 것도 동시에 암시한다고 느낀다. 영화 내부의 환상에 예속된 존재로서, 인형 아네트는 영화가 재현하는 살인의 안전한 목격자, 착취적 상황의 무해한 대리자이지 않았는가. 아네트는 이제 영화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표정을 짓지 않는다. 말하고 노래하는 인간 아네트는 긴장과 어색함 같은 통제되지 않은 진짜 얼굴의 잉여를 품고 있다. 인간 아네트는 헨리에게뿐만 아니라 영화 자신에 대해서도 거부의 몸짓으로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헨리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짐짓 인형 아네트를 진짜인 것처럼 재현하는 영화의 환상을 전복하는 적대자로 나타난 인간 아네트. 그는 헨리의 소위 심연이라는 환상으로 향하는 영화의 움직임을 중지시킨다. 이 때 영화가 진실을 직시할 유일한 가능성이 열린다. 그것은 레오스 카락스를 경유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성립되는 영화적 경험, 자폐적 환상을 종식시키고도 지속 가능한 이야기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어떤 시간을 거쳤더라도 마지막에는 결국 인간 아네트를 선택했다는 것이 우리가 이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미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