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카우>

영화의 시작에 나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처럼 이 영화는 정말 우정에 대한 이야기일까. 이런 질문을 먼저 하는 이유는 <퍼스트 카우>가 다루는 피고위츠와 킹 루의 우정이 기대한 것만큼 깊고 자세하지는 않아서인 것 같다. 차라리 영화는 이 둘의 이야기를 빌어 미국 초기의 시대상을 살펴 보려 하는 것 같다. 변방을 지키는 군대가 오가고,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 백인 이주민과 원주민이 섞여 살며, 수렵과 채집이 흔해 보이고, 허름한 움막 같은 것이 듬성듬성 자리잡은 시장이 가장 번화한 곳이라 해도 될 정도로 척박하게 묘사되는 미국 서부 오리건주 틸리컴이라는 마을은 현대 미국의 정치경제적 삶이 시작된 지점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이끌어 낸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영화는 꾸준히 미국의 역사를 의식하고 있다.

미국은 킹 루의 말대로 역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기회의 땅이다. 체제가 공고해지기 전에, 누구든 그 기회를 잡아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런 희망, 또는 욕망에 이끌린 자들이 미국을 만들었다. 어쩌면 그 기회에 대한 믿음과 성공에 대한 욕망이 미국을 번성하게 하는 원동력일지 모르지만, 불행히도 성공은 극소수의 몫일 뿐이다. 이를테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팩터 대장과 빵장수나 비버 사냥꾼 또는 금광을 찾아 헤매는 서부 개척자 사이에 성공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비교 불가능하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이를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고찰로까지 밀고 가지는 않지만 이 영화에는 이런 생각을 촉발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 있다. 화폐와 암소. 피고위츠와 킹 루가 맛있는 빵으로 거둘 수 있는 교환 가치가 당시 암소 자체의 교환 가치를 초과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피고위츠의 빵이 팩터 대장의 암소로부터 훔친 우유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더욱. “우유 한 컵이면 빵이 열 두 개, 그럼 최소한 은화 60개는 벌어”라며 성공을 꿈꾸는 킹 루의 구상이 팩터 대장이 쥐고 있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소박해서 안타까워진다. 게다가 이 같은 킹 루의 사업 아이디어가 팩터 대장이 데려 온 암소 한 마리를 보고 떠오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피고위츠와 킹 루의 이야기는 허용치를 넘어 선 모방 욕망에 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희생양적 징벌을 다룬 우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두 남자가 사업 성공의 꿈을 좇는 과정을 차분하게 대한다. 그 꿈이 위법한 경계에 걸쳐진,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예정한 것처럼. 그리고 이 영화는 두 남자의 우정에 대해서도, 언제나 그렇듯이, 관계의 표면 이상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영화를 보고 나면 그래도 피고위츠와 킹 루는 이 세상에서 서로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두 남자의 개별적 우정의 감정에 대해서보다 우정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 더 생각해 보게 만든다. 불평등한 세계가 조건 지은 도처의 착취적 위험 속에서 인간이 기거할 안식처는 선의와 믿음에 기반한 우정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맞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는 개별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구축하기보다 그것의 공백을 만들고 그 공백을 구성하는 태도에 관심을 둔다. 서사의 결 바깥, 또는 그 위에 진짜 재현하고 싶은 것이 놓여 있다고 해도 될까.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서사의 부피가 커 보이는 <퍼스트 카우>에서도 공백은 중요하다. 피고위츠와 킹 루의 대화 사이에 재현되는 온갖 종류의 노동, 질퍽한 시장 바닥 곳곳에서 물건을 팔고 음식을 짓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 사이를 돌아 다니는 개 한 마리나 팩터 대장의 저택에서 대화가 오가는 동안 이를 듣고 있는 원주민의 표정 등이 서사에 통합되지 않은 채 영화의 물리적 시간을 채운다. 나는 이것이 앞서 말한 미국의 역사성에 대한 구체적 재현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 역시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에 속할테지만, 미국적 신화를 희구하는 역사의 변방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환경의 척박함과 생존의 양태, 그리고 분명히 존재하지만 생략된 타자를 드러냄으로써 비로소 미국의 역사성을 구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다고 이 영화는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켈리 라이카트에게 구체적 경험이란 곧 타자를 감각하는 일이 아닐까.

나는 타자들 중에서도 아메리카 원주민을 드러내는 방식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 나는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영화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은 언제나 특별하게 시선을 끈다고 생각한다 — 플롯이 분절된 지점에는 반드시 원주민이 나타나 그 사이를 이어 주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피고위츠와 킹 루의 첫 만남이 끝나고 암소가 오리건주에 처음 발을 디딜 때, 이 전환을 처음 맞이하는 것은 원주민의 시선이다. 틸리컴을 찾은 피고위츠가 홀린 듯 따라 가 당도한 선술집에서 킹 루를 재회하게 이끄는 것 역시 붉은 옷을 입은 원주민 소녀다. 두 남자가 빵을 만들어 첫 장사를 시작할 때에도 붉은 옷의 소녀가 동행한다. 우유를 훔치는 범행이 적발되는 순간도, 피고위츠와 킹 루의 도주 도입부에도 원주민이라는 존재가 분기점처럼 등장한다. 켈리 라이카트의 다른 영화에서 쉽게 찾기 힘들 법한 이런 규칙성이 이 영화에서 원주민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활용되는 것을 유념해 봐야 하지 않을까.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에 어울리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원주민이라는 타자가 영화의 서사가 구획되는 순간에 환상의 형태로 개입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원주민이 서사에 환영 같이 직접 들어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팩터 대장 일행으로부터 도주하던 피고위츠가 머리를 다치고 어느 원주민 노부부의 집에서 회복하는 장면은 인물 주변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처리하여 시야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진행된다. 이 장면이 정말 이상해 보이는 것은 정신을 차린 피고위츠가 집을 나설 때에는 노부부의 집이 폐가처럼 변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원주민 노부부는 온데간데 없고 창에 쳐진 커튼도 부인이 앉아 있던 의자도 사라졌다. 집 주변은 어쩐지 정돈되지 않은 수풀이 무성해 보인다. 이 장면을 영화의 현실 내에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피고위츠가 위중한 상황에서 그를 구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것 말고는. 물론 이를 필요로 하는 것은 서사일 것이다. 그 때 영화는 이전보다 더 과감한 방식으로 원주민을 환영화한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타자를 감각하기 위해 환상이 개입할지언정 이처럼 명징한 환영 자체로 경험하게 한 예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중심 서사 자체가 환상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시대적으로 현재로 보이는 때부터 시작한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어느 여인이 강가로 보이는 어딘가에서 유골을 발견한다. 여인이 옅은 미소를 띠고 올려다보면 앙상한 나무를 오가는 새들이 화면에 담긴다. 그리고 나란히 누워 있는 두 유골의 형체가 화면에 제시된다. 이윽고 피고위츠와 킹 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인이 발견한 유골이 피고위츠와 킹 루의 것인지는 영화가 확증해 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이야기가 이 유골이 촉발시킨 옛날 옛적 있었을 법한 어떤 것이라 가정해 볼 근거가 된다. 피고위츠와 킹 루의 이야기를 이렇게 유골이라는 기호가 중계한다는 점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죽어 사라진 것, 그 흔적으로부터 이야기가 생산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은 없다. 최소한 발굴한 여인이 상상해 낸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는 여인의 마지막 시선을 유골에 두지 않는다. 유골을 응시하는 것은 차라리 여인이 바라 보는 나무 위 새일 것이다. 영화가 그렇게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고위츠와 킹 루의 이야기는 인간의, 기록된 역사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또는 생략된 타자의 응시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렇게 생각할 때 피고위츠와 킹 루의 중심 서사는 차라리 착시에 가깝고 숲속의 뒤집어진 도마뱀부터 강가를 따라 걷는 어느 아메리카 원주민까지 이 영화가 포착하는 무심한 존재의 양태야말로 유골로부터 떠올리는 과거에 대한 재현의 실질적 대상이 되지 않을까. 이제 피고위츠가 젖을 짜며 암소에게 건네는 선량한 대화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기록된 자를 향해 자신도 아우르는 우정을 지녀 달라는 타자의 바람이 아닐까.

<종착역>

스냅 사진은 길을 헤매는 것으로부터 탄생한다. 스냅 사진은 발터 벤야민이 체현한 도시 산책자의 태도를 사진의 원리 안에서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헤맨다는 것은 목적지로 가는 길을 잃었거나 목적지 자체를 잃어버린 상태일 것이다. 그 순간 비로소 모든 것이 예기치 않게 낯설어지고 무심코 지나쳤던 사소한 사물과 시공간이 피사체가 될 자격을 얻는다. 스냅 사진에 실패란 없다. 벗어난 초점, 잘못된 노출, 망가진 구도, 무심한 피사체도 우리의 시각적 무의식을 열어 낸다. 카메라는 언제나 우리의 시선이 누락하는 세계를 무작위적 원리로 포착하고 있다.

<종착역>은 스냅 사진에 대한 영화적 고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네 아이가 찍은 사진이 영화 곳곳에 꾸준히 삽입되어 있다는 점에 연연한 말은 아니다. 물론 이것이 가장 직유적인 방식이기는 하다. 이 영화가 스냅 사진의 정지된 이미지에 시간을 할애하면서 우리는 운동 이미지의 영화적 세계 안에서 놓치기 쉬운 것을 경험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인물 자체의 시선을 경험한다. 설령 그것이 일회용 카메라의 렌즈를 경유한 상상적 시선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 이에 대해 우리는 영화에서 시선을 상상된 형태로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을 보태야 할 것이다 — 우리는 아이들이 찍은 스냅 사진을 통해 그들이 실제로 보았다고 믿을 법한 것을 경험한다. 이것은 영화가 일반적으로 구사하는 시점 쇼트의 방식보다 더 직접적인 시점 쇼트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영화에 삽입된 스냅 사진이 영화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불균질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진 자체가 통제되지 않은 방식으로 찍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카메라를, 의탁한 시선 장치를 통제하지 못한다. 지하철 노선도는 초점이 나갔고 동네 풍경 사진의 3분의 1은 손가락이 가려 버렸다. 스냅 사진의 즉흥적인 통제 불가능성이 오히려 그 시선의 주인을 상상하게 만드는 역설적 효과가 이 영화에서는 아이들의 미숙함과 조응한다. 정지된 스냅 사진 이미지를 응시하는 동안 우리는 통제되지 않은 세부와 실패한 시선을, 그리고 그 시선의 주인을 지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인물들의 연기나 플롯의 구성을 통제하지 않는 것을 원리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을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연기를 하기보다 현실에서 볼 법한 일상적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몸짓도 계획되지 않았고 어떤 발화도 정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인물의 대사를 정확히 알아 듣기 어려울 때도 있다. 강세도 리듬도 없고 다듬어지지 않은 온전한 구어적 대화에 아이들의 실생활 언어까지 보태면 아무리 훌륭한 녹음 환경을 갖춰 촬영했어도 이 영화에 담긴 대화가 온전하게 내러티브를 구성하기는 힘들 것이다. 플롯도 어떤 우연적 상황을 제시하는 것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소정이 핸드폰을 분실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구신창역에서도 떨어진 외딴 노인정을 찾게 되고 송희가 고양이를 만나는 바람에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놓쳐 버린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가능성에 몸을 맡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영화적 결을 구축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 이들의 영화다.

이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의 끝이라는 목적지를 잃고 헤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순간을 다룬다. 어떤 길도 초행인 그들에게 화면 바깥에서 갑자기 끼어 든 개 짖는 소리 같이 예견치 못한 놀라움이, 아이들이 노인정 안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고양이가 슬며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카메라의 프레임이 유례 없이 이동하는 우연한 영화적 선택이 그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가 아이들의 손에 일회용 카메라를 쥐어 주고 그들이 이미지를 만나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아이들이 자꾸만 낯선 길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미지의 이미지가 발생하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네 아이의 사진 여행은 자꾸만 산책하는 스냅 사진가의 태도를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헤매는 그 곳이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끝 지점이라는 것을 이 영화에 포개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낯선 길을 거니는 아이들이 만난 이미지가 포착한 것은 익숙한 것의 생경한 감각만은 아니다. 아이들의 사진에는 그 순간의 감정이 내재한다. 이를 전학 온 시연이가 연우, 소정, 송희와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분식집을 찾고, 여름 방학 사진 숙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지하철 1호선 종점을 가고, 함께 비를 맞고, 낯선 시골 노인정에서 같이 밤을 보내면서 네 아이가 모험심으로 친밀함을 키운 기억이 총 열 세 장의 스냅 사진 이미지 이면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스냅 사진을 전면에 두고 말하자면 이 영화를 네 아이의 사진에 담긴 맥락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때 나는 영화가 사진을, 사진이 영화를 보충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진과 영화가 각자 시선의 불가능한 지점을 보완하면서 피사체의 표면에 인물과 영화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채워 주고 있다고 말이다. 이 때 한낱 사물도 기억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제, 젖은 흙에 포개진 발자국이나 문앞에 널브러진 신발들이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것을 생각해 볼 시간이다.

<듄>

<듄>은 아득히 먼 미래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달라 붙은 과거이자 현재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상상이 인간의 신화적 세계와 연결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이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해방할수록, 그 해방의 단계마다 인간은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하기 위해 신화를 써야 한다. 또는 과학기술의 전지전능함이 어떤 수준에 이르더라도 완전함에 닿을 수 없기 때문에, 그 권능의 바깥에 대한 불안을 망각하기 위해 인간은 신화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어떤 과학적 상상도 신화적 에너지를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듄>의 상상은 우회하는 신화라기보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알레고리에 가깝다. 우주 항해를 가능케 하는 핵심 물질인 스파이스가 석유, 마약, 향신료의 알레고리라는 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황제와 명문 귀족 가문이 각 행성을 통치하며 종교 집단의 영향력이 강하게 개입하는 세계라는 시대착오적 상상 역시 유럽의 중세 정치 체제를 직접적으로 가리킨다. 더욱이 이 영화는 소설 원작이 지닌 직접적 알레고리의 면모를 영화의 형상화 전략을 통해 더욱 노골화한다. 예컨대 아트레이데스 가문이 아라키스 행성에 발을 디딜 때 의식의 하나로 백파이프 연주가 이루어지는 장면은 유럽 제국의 문화적 인장을 연상시키도록 만들고, 프레멘 민간인의 복식과 사막의 풍광은 아랍 문명 세계를 뚜렷하게 떠올리도록 유도한다.

나는 스파이스를 둘러싼 이 착취와 폭력의 가상 세계와 인민을 구원할 메시아의 성장 서사는 궁금하지 않지만 원작의 역사적 알레고리를 영화는 왜 더욱 노골화하는 선택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하다. 실제 역사와 너무나도 닮은 미래 또한 ‘Uncanny Valley’의 기괴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 <듄>이 너무나도 유럽의 역사적 알레고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로부터 분출되어야 할 신화적 에너지를 가로막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영화가 거대한 서사적 규모에도 불구하고 왜 인물로부터 감정의 격동을 느끼기 힘든가를 나는 이에 비추어 생각해 보기도 했다. 우리는 역사적 알레고리의 형상을 통해 이 이야기를 역사의 한 사례로 상상해 보면서 이 영화로부터 감정보다 사실을 확인하게 유도되는 것은 아닐까.

아라키스 대공세를 마친 하코넨 남작이 아들과 아내는 이미 죽었다고 말할 때 레토 아트레이데스의 눈물은 너무나도 메말라 있다. 눈물 한 방울을 힘을 다해 짜 내는 것 말고는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이는 레토의 마비된 신체가 이 영화가 표현하는 인물 감정의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제국, 문명, 가족이 단 한 번의 배신으로 무력하게 무너지는 만큼 이 영화가 레토에게 허락하는 감정적 시간은 미약하다. 하코넨 군대의 위협으로부터 가까스로 살아 남은 레토의 아내 제시카와 아들 폴에게서도 신경쇠약적 긴장과 두려움은 충분치 않아 보인다. 이들은 레토를 잃은 깊은 슬픔과 분노에 빠질 겨를도 없이 탈출하고 도피하며 사막의 프레멘을 찾아 간다. 이 모자의 여정을 지배하는 이미지는 레토의 죽음보다 폴이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계시적 환영이다. 또는 변화의 판관이 제시카와 폴 모자의 여정을 돕기까지 심정의 변화도, 황제의 계략임을 알아 챈 던컨의 분노도 이 영화는 다루지 않는다. 말하자면 <듄>의 인물들은 운명을 수행할 뿐, 운명에 절규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것이 장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번안하면서 벌어진 시간적 여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1984년작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듄>이야말로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 영화가 취한 선택에 가깝다는 생각으로 기운다.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확인하고, 거기 기록된 운명 수행자의 여정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이 영화가 폴의 환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생각이 이어진다. 1984년작 <듄>이 폴의 환영을 잠자리에서 목격하는 암시적 예지몽으로 다루었다면, 이 영화에서 그것은 폴의 생생한 현재 의식에 침입하는 미래의 이미지로 다루어진다. 폴의 여정 중 영화는 챠니의 얼굴과 사막 위 전투, 거대한 전쟁 같은 당도하지 않은 시간의 이미지를 병치시킨다. 미래의 이미지가 현재에 동시에 현현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어쩔 수 없이 시제의 동시적 현현을 다룬 또다른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를 떠올리게 된다. <컨택트>에서 언어학자 루이스는 외계 존재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면서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적으로 인식하는 그들의 방식을 습득한다. <컨택트>는 이를 시제가 혼재된 편집과 예측할 수 없이 인서트되는 루이스의 미래에 대한 환영으로 표현한다. 이를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기 위한 영화적 시도의 한 버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를 한 덩어리로 경험해 보기.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한 덩어리로서의 시간이 인간에게는 결국 운명적 세계라는 환상을 통해서만 수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결코 헵타포드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운명이라는 가정된 희열로써만 이를 마주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운명이라는 환상 안에서 우리는 폴의 환영 이미지처럼 미래를 현재로 체험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더 나아가 현재를 과거처럼 체험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질문을 비약하는 것은 <컨택트>에서 느꼈지만 <듄>에서 그러지 못한 감정의 정체가 ‘그리움’인 것 같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해석하고 지구적 파국을 막는 자신의 운명을 수행한 뒤 이안을 안으며 “당신 품이 이렇게 따뜻한 걸 잊고 있었어”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미래에 이안과 이별을 예정해 두고 있다. 지금, 처음으로 이안을 안는 순간 미래의 감정을 품은 루이스의 이 말이 운명 수행자의 핵심 감정을 드러낸다. 운명 수행자 루이스에게 시제는 동시적이지 않다. 현재는 미래가 바라보는 과거다. 현재를 과거형으로 경험하는 운명 수행자를 지배하는 것은 회고적 감정일 것이다.

나는 드니 빌뇌브의 영화에서 인물의 메마른 표정 뒤에 언제나 운명 수행자적 정서가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 왔다. <듄> 역시 그러한 빌뇌브의 태도로 다루어질 법한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듄>에서는 그런 특유의 정서를 만나기 힘들어 의아했다. 어쩌면 이 영화가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은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완성되지 않은 운명 앞에서 운명 수행자는 현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할 것 같기 때문이다.


2021년 책을 내면서 영화 리뷰 쓰기 모임이 이름을 얻었다. ‘아워—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