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동안 깊은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상실감과 자책이 중첩되고 반복되면서 나를 갉아 먹었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지 말하기가 짐짓 부끄럽고 고통스럽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소진되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겠고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 그리고 불안만 남은 것 같았다.

이제 조금씩 폐허를 수습하고 있는 듯 하다. 내 얘기를 마음 열고 들어 줄 상담자를 찾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 감정을 진정시킨 후 한 일은 상담자의 조언에 따라 내가 할만한 활동을 찾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온라인 필사 수업을 들었다. 옮겨 적는 글에 이내 염증을 느끼고 나는 다시 영화를 찾았다. 영화 비평 읽기 강좌를 듣기 시작했고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다시 기억해 내려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화 리뷰 쓰기 모임도 찾았다. 글쓰기는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이고 내게 끝없는 고통의 과정이지만 “즐기지 못하는 일이라도 좋아할 수 있다”는 상담자의 조언이 옳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영화 리뷰 쓰기 모임 덕분에 오랜만에 본 영화를 생각하고 정리하게 되었다. 글과 생각은 언제나 모자라지만 오랜만에 블로그에 영화 보고 쓴 글을 남길 수 있어 좋다. 더욱 좋은 건 리뷰 쓰기 모임에서 한 해 동안 쓴 글을 책으로 엮어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일이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즐기지는 못하지만 나를 구해 주는 일이다.

서론이 지나치게 길었다. 영화 리뷰 쓰기 모임에 뒤늦게 합류해 쓴 영화 두 편에 대한 글을 블로그에도 기록으로 남겨 둔다.



사랑에서조차 자유로운 세계는 없다

– <더 랍스터>

영화 <더 랍스터>가 우화적 세계를 제시하는 방법은 인물들로부터 감정을 제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간으로서 시민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성 상대를 찾는 순간에도 인물들은 좀처럼 상대에게 웃음 짓지 않는다. 냉혹한 여인이 데이빗의 형을 죽였을 때에도 데이빗은 복수라는 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은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눈에 칼을 들이미는 동안에도 데이빗의 눈빛에는 두려움 하나 없다.

인물들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인물에 동일시하지 않고 신적인 관점에서 학문적으로 사건을 관찰할 수 있도록 채택한 연출 방법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 세계에서 억압 받고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영화 속 세계의 사람들은 감정을 나누는 법을 모른다. 사랑이라는 감정적 상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요함으로써 정작 감정적 상호작용과 자유의지는 마비된 사회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세계다.

감정적 동일시를 원천차단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고안된 내레이션을 통해 근시 여자는 데이빗이 “감정이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감추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전한다. 영화는 데이빗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억지로 만드는 데 실패하는 전반부와 사랑하는 감정을 감추는 데 실패하는 후반부로 나뉘는데, 수용소처럼 싱글들을 모아 놓고 짝짓기를 강제하는 호텔이나 이 커플 이데올로기 파시즘 체제에 저항하며 사랑을 금지하는 게릴라 조직 모두 공히 억압하는 것은 사랑을 둘러싼 감정의 자유의지와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이다.

감정을 표현하고 나누는 능력을 잃어버린 이 세계에서 사랑을 다루는 태도는 기괴하고 어리석다. 사랑할 상대를 찾거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외면적 동일성을 찾고 만드는 일이다. 근시 여인이 데이빗도 나처럼 근시인 것을 보고 사랑에 빠지거나 절름발이 남자가 코피 흘리는 여자와 커플이 되기 위해 벽에 얼굴을 처박아서라도 코피 흘리는 사람이 되려는 모습들. 감정 교환이 불구가 된 이 세계에서는 각자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무표정하게 각자의 춤을 추는 적막에 찬 장면처럼 모든 행위의 본질적 효과가 사라지고 우스운 몸짓만 남는다.

근시 여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데이빗이 근시 여인처럼 똑같이 눈 멀기 위해 자신의 눈을 칼로 찌르려는 마지막 시퀀스는 안타까운 촌극이다. 이 시퀀스는 눈 먼 채로 돌아올 데이빗을 기다리는 근시 여인이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이는 감정의 자유의지와 자기 존엄을 위한 투쟁에 각성하고 고군분투한 데이빗과 근시 여인조차 사랑에 대한 체제 이데올로기의 맹목적 열정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상기시킨다.

호텔과 게릴라 조직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에도 이 세계에서 그들이 사랑을 실천하고 증명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로 같아지는 것 말고는 없는 것이다. 감정을 표정과 목소리에 담는 법을 모르는 세계라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방법이 없고 사랑에서조차 그저 주어진 세계의 선택지에서 배회할 뿐, 자유로운 세계는 없다고 이 영화는 부조리하게 말한다.



<연애몽>의 빛나는 순간만을 기억하고 싶다

– <쓰리 타임즈>

영화 <쓰리 타임즈>의 원제는 최호적시광(最好的時光), 가장 좋았던 때의 빛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1966년, 1911년, 그리고 2005년 각 시대를 배경으로 연인으로 묶인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는 각 시대에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일까, 가장 빛나는 순간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품고 보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충분한 답을 내 놓지 않는다. 1966년을 다룬 첫 번째 챕터 <연애몽>만이 명료하게 떠올라 빛나고 있음을 인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에 반해 1911년을 다룬 두 번째 챕터 <자유몽>에서 기생(서기)과 개화파 시인(장첸)의 관계는 억압되어 침잠하고 있으며 2005년을 다룬 세 번째 챕터 <청춘몽>에서 진정(陳靖, 서기)과 아진(阿震, 장첸)은 정처 없이 부유하고 있다. 각 챕터의 부제목은 그것이 충만하여 빛나는 때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이 결핍된 시간을 말하는 것만 같다. 이들에게 빛나는 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같고 카메라는 이따금 그들의 감정을 가만히 지켜 볼 뿐이다. 무성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자유몽>에서 예외적으로 할애된 유성영화의 순간이 영화적으로 빛나는 것을 제외한다면 나는 1911년과 2005년의 이야기는 빛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이 영화가 가장 좋았던 때인 1966년의 빛나는 순간을 상기하며 1911년과 2005년을 반추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치가 순차적이지 않고 1966년 – 1911년 – 2005년인 것은 1966년이 참조점이 되어 그보다 과거와 그보다 미래를 바라본다는 의미가 아닐까. 1911년과 2005년에 대한 1966년의 대답 또는 그 반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에 대한 내 원경험이 오직 <연애몽>에서 서기, 슈메이의 놀란 웃음과 아프로디테 차일드의 노래 Rain and Tears를 둘러싼 간절하고 애틋한 감정의 응축으로 남은 것도 이 때문일까.

첫 번째 챕터 <연애몽>은 1966년 입대를 앞둔 한 청년(장첸)과 당구장에서 일하는 여인 슈메이(秀美, 서기)가 연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만 가오슝(高雄)의 한 당구장을 즐겨 찾는 청년은 본래 슈메이가 오기 직전 직원 하루코(春子)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고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 편지는 슈메이의 손에 넘어가서야 비로소 연애편지가 되었고, 군인이 된 청년은 휴가 중 다른 곳으로 떠난 슈메이를 애타게 찾고 결국 만나고 끝내 연인이 되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슈메이와 청년이 연인이 되기 직전 끝난다는 점에서 <자유몽>, <청춘몽>과 마찬가지로 <연애몽> 역시 연애가 부재하고 그것을 갈구하는 인물이 거기에 가 닿으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챕터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나서 청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가 시작하고 10분 동안 우리는 감정을 알아채기 힘든 인물들의 행위를 바라본다. 아마도 청년이 하루코에게 건네는 편지에서 감정의 단초를 알 수 있을텐데, 영화는 이 편지를 받은 하루코의 옅은 웃음 외에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편지의 내용은 하루코가 떠나고 새로 온 직원 슈메이가 읽는 동안 청년의 목소리 내레이션으로 설명된다. 영화는 하루코가 아니라 슈메이를 통해 청년의 마음을 들려 주고 싶은 것이다. 편지에는 청년의 상실과 실패,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담겨 있다. 청년은 얼마 전 어머니를 여의었고 두 번 대학 시험에 떨어졌으며 곧 군대에 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청년은 당신이 있는 당구장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고백한다. 그는 위로 받을 누군가가, 아무라도 필요하다고 구애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하루코와 슈메이는 청년이 품는 욕망의 대상이고, 영화는 청년의 욕망을 제 것으로 하여 따라간다.

그러나 <연애몽>은 (그 누구와도) 사랑 받고 싶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청년의 욕망과 감정을 청년을 통해 드러내지는 않는다. 대신 영화는 슈메이의 응답을 통해 욕망의 실현 가능성을 알려 준다. 뒤늦게 알게 되는, 슈메이가 청년의 편지에 답장을 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하루코의 편지를 전해 읽는 처음부터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슈메이의 표정과 얼굴을 통해서 말이다. 편지를 읽으며 웃음 지을 때, 자이(嘉義)로 떠나는 배 위에서 쓸쓸한 표정을 지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후웨이(虎尾)의 당구장에서 청년을 보고 놀라움의 웃음을 지을 때. 슈메이의 응답이 있을 때 영화는 감정을 고양시키고 이를 통해 청년의, 또는 이야기의 욕망은 정당성을 얻고 배가된다. 청년이 편지에 적은 노래 제목이 카메라가 슈메이의 표정을 가까이 지켜보는 순간 노래가 되어 흐르듯이 욕망은 슈메이의 응답을 통해 환상이라는 실체를 얻게 된다. 슈메이의 응답이 만드는 환상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응답 없는 하루코가 필요했을 것이리라. 청년이 가오슝에서 자이로, 그리고 후웨이로 슈메이를 찾아 헤매게 되는 동력 역시 숨겨진 슈메이의 응답이다.

카메라는 마지막 장면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조심스레 꼭 붙잡는 청년과 슈메이의 손을 클로즈업하기까지 이 둘만의 공간을 섣불리 할애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에는 당구대나 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침범해 들어온다. 후웨이의 당구장에서 재회한 청년과 슈메이가 벅찬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당구 치는 손님이 이들을 가리고 관객의 시선을 방해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야기가 품은 욕망과 달리 카메라는 청년과 슈메이를 타인 다루듯 한다. 마치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의 애틋한 사연을 힘겹게 찾아 내야 할 것처럼. 마치 사심 없이 바라보고 있는 어느 공간에서 우연히도 이 일이 벌어진 것처럼. 카메라는 이야기의 욕망과 힘겨루기를 벌이는 것이다. 이야기가 인물과 함께 욕망을 품고 나아가는 동안 카메라는 인내심을 가지고 거리를 둔 채 그들의 움직임만 지켜보는 듯한데, 이는 오히려 이야기가 지닌 욕망의 에너지를 응축, 강화한다. 두 남녀가 손을 꼭 움켜쥐는 마지막 클로즈업 쇼트는 카메라의 거리 두기가 더 이상 이야기의 욕망의 인력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이다. 카메라가 이야기의 욕망을 끝내 승인하고 그곳에 달라 붙어 버리는 영화적 희열의 순간이다.

<연애몽>은 희열에 도달하기 위해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영화적 대답 같다. 달리 말하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열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적 태도 같다. 욕망 – 사랑에 대한 열정을 끊임없이 돌이켜 보지만 끝내 긍정하고, 그것을 소비하기보다 정당한 방식으로 구축해 나가려는 노력처럼 느껴진다. 슈메이의 응답만이 영화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듯이, 욕망이 대상을 착취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 같다.

<연애몽>이 다루는 태도를 대척점에 놓고 <자유몽>과 <청춘몽>을 생각한다. <자유몽>에서 지주의 아들인 개화파 시인은 기생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착취한다. 시인과 기생 모두 신분 제도와 가부장제에 압도되어 자신들의 사랑을 추구하기를 두려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독히 비겁한 인물은 소위 개화파 시인이지만 말이다. 반면 <청춘몽>에서 진정과 아진의 눈빛은 서로를 갈망하는 순간에도 공허하다. <자유몽>과 달리 어떤 것도 허용되기 때문에 어떤 것에서도 희열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 <자유몽>과 어떤 것도 허용되는 <청춘몽>,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연애몽>. <연애몽>은 <자유몽>과 <청춘몽>의 중간 어딘가에 있다. 시공간적으로도 그렇다. <자유몽>의 유곽과 <연애몽>의 당구장, 그리고 <청춘몽>의 도로로 공간 범위는 점진적으로 확장된다.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시간 역시 <자유몽>은 몇 달, <연애몽>은 몇 일, 그리고 <청춘몽>은 몇 시간의 단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애몽>은 욕망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렇지만 구성된 시공간의 범위에서도 <자유몽>과 <청춘몽> 사이의 중용이며 그렇기 때문에 빛날 수 있다는 의미일까.

그래서 나는 첫 번째 챕터 <연애몽>이 다른 두 챕터를 안타까워 하며 반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차라리 <연애몽>은 반추할 대립자가 불필요하다면 어떨까. 허우샤오시엔은 시대의 관계를 구성하면서 자신의 역사의식을 반영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허우샤오시엔 개인의 역사와 노스탤지어가 스며들어 있을 터다. 그는 그것을 읽어 주기를 바랐는지 몰라도 이 이야기를 역사의식으로 치환하면 이야기도 역사의식도 얄팍해져 버리지 않을까. 1911년의 우창봉기나 1966년 대만의 징병제, 2005년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 각자가 지닌 순간의 역사적 다층성을 억압하거나 소진시키지 않고 이 영화를 선해하기 위해 <연애몽>의 빛나는 순간만을 기억하고 싶다.

만약 내게 지금껏 생각지도 못했던 일란성 쌍둥이가 있어 만나게 된다면 나는 <트윈스터즈>의 샘과 아나이스처럼 기뻐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건 두 가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내가 이들만큼 나 자신을 긍정하지 못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입양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적어도 한 가지는 같다. 나는 내 인생에 비로소 새로운 이야기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몇 가지 생각:

  • 샘과 아나이스는 몇 달 동안 자신을 보살핀 위탁모를 만나고 그들의 변함 없이 깊은 애정을 확인한 후 결핍의 해소를 느낀다. 자신에게 있어 보살핀 사랑이 생모의 부재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데에는 양부모의 사랑보다 위탁모의 사랑이 필요했다.
  • 아나이스는 “최선이 좋은 것을 망친다”고 말한다. 큰 욕심이 지금 좋은 것마저 망친다는 것이다. 불안의 본질을 이렇게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나 싶으면서도 반문하게 된다. 그래서 그 좋음으로 충분한가, 좋은 것이 최선을 망치고 있지는 않을까…
  • 자신을 긍정하는 사람은 얼마나 너그럽고 현명하고 귀여운가. 내게는 불가능한 본성이다. 부럽고 사랑스러워 죽겠다.

노보에 실었던 글을 기록으로 남겨 둔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가 흥행 돌풍을 이어 가고 있는 현재, 조용히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가 있다. 대형 할인 마트의 파업 일대기를 그린 <카트>가 그것이다. 카트는 7기 노동조합이 추진하는 작은 영화관 문화 사업의 첫 번째 선정작이기도 하다.

 

실제 벌어진 일

알려진 바와 같이 영화 <카트>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이랜드 홈에버 비정규직의 파업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이다. 당시 홈에버는 마트 계산원을 비롯한 상당수의 비정규직을 외주화하기 위해 일방적인 대량 해고를 추진했고, 홈에버 비정규직들은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하여 파업으로 이에 맞섰다. 파업이 시작된 날은 2007년 6월 30일로, 소위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되는 7월 1일을 염두에 두고 결행했다고 한다. 당시 이미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문제, 즉 외주화와 비정규직 양산, 고용의 불안, 더 나아가 삶 자체의 불안을 국가가 법적으로 용인한 바로 그 날 말이다.

이 파업은 회사가 고용한 용역 깡패의 집회 방해와 경찰의 폭력 진압을 500 여 일 동안 버티다가 12명의 집행부가 복직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나머지 직원이 복직하는 미결의 승리로 끝났다. 홈에버 파업은 어떻게 보면 파업의 주체, 시점, 국가의 대응 모두가 이후의 파국적 상황에 대한 암시와도 같았으니, 이들의 파업이 끝난 다음 해인 2009년에는 쌍용차 사태가 벌어졌고, 2014년 오늘날 우리는 한 여성 비정규직과 경비 노동자의 죽음을 대면하고 있다.

 

늦었지만 절박하게 찾아 온 영화

대다수의 사람이 상시적인 생계의 불안을 감당해야 하는 지금 <카트>가 개봉한 것은 뒤늦게 찾아 와서 더 절박한 느낌이다. 이 영화는 앞서 얘기한 홈에버 사태의 경과를 각색하여 회고하되, 당위를 강요하지도 무겁지도 않게 피부에 와 닿는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마침내 공유해야 할 어떤 통찰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돕고 있다.

이 영화에서 계산원 역시 반찬값이 아니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한다는 항변은 교활한 사측 협상 위원의 언사에 국한되지 않고, 이 차별적 구조에 익숙해진 우리의 잔인한 의식을 향한다. 상대적 우위에 안도하고 우월감에 젖어 있는 한, 이 상대적 우위의 달콤함을 누리는 이들은 줄어들고 고난과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은 늘어날 것이다. 차별이 심해질수록 불안은 가중되는 것이다. 계산원의 항변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처한 생계의 곤란함을 함께 걱정해 달라는 호소로 들린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비로소 마트 계산원과 청소 노동자가 눈에 들어오고 궁금해지더라는 어떤 이의 반응과 같이, <카트>의 미덕은 바로 우리 자신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투명인간과도 같았던 절대적 다수의 불안정 노동자에 대해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카트>는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는 감정은 ‘억울함’이라고 말한다. 파업을 하면서 비로소 각성하게 된 한선희(염정아 분)는 편의점 알바를 하고도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한 아들을 도와 편의점 사장으로부터 돈을 받아 낸다. 이 때 한선희의 아들이 하는 말이 이를 보여 준다: “억울해서 잠을 못 잤어. 알바 한 돈 못 받아서. 엄마가 내 억울함을 풀어 줬어.” 약자의 억울함을 하나씩 풀어 가는 과정이 바로 사회의 진보인 것이다. 이용 당하고 천대 받고 내팽겨 쳐지는 억울함, 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파업의 권리를 국가가 짓밟는 억울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양심의 버튼을 누르는 영화 <카트>

<카트>는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은 영화다. 실화가 된 홈에버 사태에 관해서나 이 영화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에 대해, 또는 더 나아가 외주화 및 비정규직 문제와 노동조합 활동, 그리고 파업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이 억울함을 잠식하고 있는 시대에 이 영화는 우리 각자의 마음 한 켠에 간직한 양심의 버튼을 누른다. 버튼이 눌리고 나면 일상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어떤 것이 새롭게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 지면에서 못다 한 얘기를 우리 각자의 버튼을 켜고 나눠 보고 싶다.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서 싸우는 게 정말 어려운 거죠. 직장은 생계가 달려 있는 곳 아닙니까. 집회에서는 대통령도 욕할 수 있지만 직장에서 과장 욕 할 수 있나요? 진검승부는 거리가 아니라 직장에서 하는 거예요. 그 싸움을 치열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자신이 일하는 직장을 바꿔야 해요.”

“기다린다고 해서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그런데 비정규직 노동자가 직접 나서기는 정말 어렵죠. 정규직 노동자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해요. 비정규직 문제를 방치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인지 말입니다.”

“직장 내에서 싸우지 않으면 자신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하고, 노조가 회사와 대등한 관계에서 협상을 할 수 있을 때, 그게 진정한 민주주의죠. 직장 바깥의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이뤄진 것 같아요. 그러나 직장 내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어요.”

 

– 김경욱 전 이랜드노조위원장, 2008년 11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