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연의 영화음악에서 이상용이 재미있는 얘기를 해 줬다. 영화 초기 필름을 영사해서 단체 관람을 가능케 한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래프가 산업의 기반이 되었는데, 현대에는 움직이는 영상을 혼자 즐기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다시 각광 받고 있다는.

암실에서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영상을 즐기는 경험의 황홀함을 영화의 본령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이 변화는 영화의 본질을 훼손하는 흐름으로 받아들여질지도.

영화의 집단성은 집단 관람이라는 행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테다. (당연히 창작의 과정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영화 관람의 집단성은 매체의 무한한 복제 가능성에 기반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영화를 함께 관람하고 있다.

기술은 점점 더 우리의 관람 행위를 파편화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사회적이라 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영화는 파편화된 채 총체를 이루는 예술이라는 거다.

 

영화 파수꾼은 10대 소년을 마치 칼 끝처럼 날이 서서 작은 말 한 마디에도 쉽게 상처 받고, 또 그만큼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기도 하는 위태로운 존재로 묘사한다. 소년들은 세상이 매순간 자신을 쿡쿡 찌르는 것처럼 곤두선 채 고통스러워 한다. 돌이켜 보건대 나 역시 자칫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를 어떤 예민함에 사로잡혀 보낸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 예민함은 이 영화에서처럼 가학적인 방식으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그 예민한 감각이 타인을 배려하고 세계를 지각하고 다른 것을 상상하기 위한 자질의 기초가 된다. 나는 갈수록 모든 것에 무뎌지고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 쳐진다.

최근에 켄 로치의 DVD를 이것 저것 사 모았다. 못 본 영화들을 숙제처럼 안고 지내다 밀린 숙제를 조금이라도 풀어볼 작은 동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만만한 것이 봤던 영화 또 보는 거라, 지난 번에는 레이닝 스톤을, 이번에는 티켓을 다시 보는 것으로 워밍업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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