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의외로 88만원 세대의 특수성을 깊이 다루지 않는다. 두 주인공에게서 88만원 세대의 슬픔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구홍실은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어머니의 죽음이 고난과 슬픔의 조건이 되고 있고 천지웅은 실업 백수의 암울함을 대책 없는 천진난만한 캐릭터가 윤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고난에 놓인 인물이 서로를 동정하는 감정을 사랑의 한 형태로 그린다는 점에서 88만원 세대의 로맨스라는 마케팅 문구의 절반은 성취하고 있다. 내가 영화 말미에 작은 울림을 받은 건 이 점이다: 동정하는 연인은 현대적인 사랑 이야기의 소재가 아니지만 오래 된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가 아닌가.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동정의 감정을 배제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네가 불쌍해서 너를 사랑해’는 지금 시대에는 차마 당신에게 말할 수 없어 숨기고 있어야 하는 사랑의 신학적 태도다.

나 부산영화제 갔다 온 것을 알아 챈 회사에서 사보 좀 쓰라 해서 아주 귀찮아 하며 끄적였다. 써 놓고 보니 영화 관련 간단 소개 글 정도는 될 것 같아서 블로그에도 옮겨 놓는다. 별 내용은 없다.

10월 6일부터 14일까지 9일 동안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다. 매번 각국의 영화 스타와 거장들이 찾아 화제가 되는 부산영화제에 대해 내 관심은 오로지 어떤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예매 경쟁이 치열해 원치 않은 영화를 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가열찬 예매 경쟁을 뚫고 힘겹게 본 몇 편의 영화에 대한 짧은 소감을 적는 것으로 나의 부산영화제 참관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질서와 도덕 포스터

1.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질서와 도덕>: 1980년대 프랑스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식민지 뉴칼레도니아의 독립 운동 단체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진압을 그린 영화다. 특공대 소속 주인공은 독립 운동 단체와 평화적인 협상을 시도하지만 선거 기간에 돌입한 프랑스 정부는 정치적 성과를 목적으로 이 단체를 유혈 진압한다. 프랑스에는 정치, 문화, 사회적으로 성숙한 시민들이 있지만 제국주의적 국가 시스템은 시민의 의식과는 별개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한다.

자전거 타는 소년 포스터

2.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타는 소년>: 아빠가 양육을 포기하자 상처 입고 방황하는 시릴이라는 소년이 주말 보모 사만다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시릴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대신 사만다의 사랑을 받으며, 자전거를 잃었다 되찾으며, 방황 속에서 사람을 때리고 앙갚음을 당한다. 이렇게 영화는 한 소년의 어떤 시기를 다루면서 소년의 상처와 잘못에 대해 공평하게 되돌려 받는 시점에서 무심하게 끝난다. 정의로운 결말에도불구하고 나는 슬프고 소년 시릴은 여전히 아플 테다. 상처에 대한 공평한 보상은 그것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직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코누르 포스터

3. 바이트 헬머 감독의 <바이코누르>: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 이 근처 초원에는 우주선 발사 후 하늘에서 떨어지는 추진체 같은 잔해를 주워 고철 판매상에게 팔면서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가가린이라는 청년은 우주비행사 줄리를 흠모하고 있는데 바로 이 줄리가 지구 귀환 중 불시착으로 기억을 잃고, 가가린은 줄리가 자신의 아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이후 몇 가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전반적인 내용 구조는 선녀와 나무꾼의 다른 판본에 가까운데 결국은 우주와 첨단 기술을 흠모하던 가가린이 별빛과 초원의 마을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초원과 별빛이 간직한 상상력의 세계를 현대 문명이 훼손하는 것에 대한 귀여운 풍자가 담겨 있다.

멜랑콜리아 포스터

4.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 나는 사실 이 영화를 고대하며 부산영화제를 찾았다. 우울과 비관과 절망으로 가득 찬 지구의 마지막 순간을 선체험하는 것이니 결코 신나는 일은 아니지만, 위기 앞에서 지구를 구해 내는 그 흔한 헐리웃 영웅들이 은폐하고 있는 파국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의 행성이 지구를 향해 오고 있다. 하늘에는 파란 색 행성이 달처럼 떠 있고, 이 달은 점점 가까이 커다랗게 하늘을 채운다. 결혼식을 망친 한 여자와 그의 언니 가족은 불안 속에서 멜랑콜리아 행성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조우를 준비한다. 우울한 정서를 물질화한 거대하고 파란 별 멜랑콜리아는 공포보다 무력감의 이미지로 각인된다. 새로운 시작을 기약하지 않는 마지막을 예정해 놓고 곧장 달려 한 치의 희망도 없이 끝내 버린 이 영화는 한 동안 나를 앓게 할지도 모르겠다.

<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을 보는 내내 나는 이 영화가 < 혹성탈출>의 프리퀄이 아니라<12몽키즈>의 다른 판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2몽키즈>에서 제임스 콜이 인류 파멸의 원인을 오인한 지점, 그러니까 ’12몽키즈’라는 공상적 동물 보호단체의 동물 해방 퍼포먼스는 이 영화에서 침팬지 시저가 인간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 기대했던 부분과 정확히 겹친다. 그리고 <12몽키즈>와 마찬가지로 이는 오인에 지나지 않았다.

<12몽키즈>의 결말 부분과 마찬가지로 <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 역시 인간의 파멸은 공항에서 암시된다. 이는 심증을 굳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오자마자 검색해 본 결과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12몽키즈>에 대한 기시감 속에서 봤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말하기 싫어졌는데,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영화는 원숭이의 인간에 대한 혁명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 정도다.

시저는 인간의 손에 길러졌고 그에 대한 애정을 여전히 갖고 있다. 시저의 목표는 삼나무 숲이라는 원숭이의 해방 공간을 만드는 것, 그의 각성한 동료들과 함께 자치구를 형성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원숭이와 인간의 대립 양상은 그러한 원숭이 자치구를 위한 투쟁으로 요약된다.

어쨌든 이 영화에서 인간은 원숭이에게 대립되는 타자로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원숭이는 인간과 공존할 수 없다는 최종적인 각성에 ‘아직’ 들지 않았고,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 약품 ALZ113의 확산은 ‘일찍’ 암시되고 있다. 요컨대 원숭이의 해방구는 만들어졌지만 혁명은 임박하지 않았고, (이게 가능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이라는 대립물의 파멸은 일찍 찾아올 것 같은 암시. 이것이 이 영화의 원숭이 혁명에 대한 적절한 타협점이다. 작가는 각성한 타자의 혁명보다는 차라리 인간 자신의 과오에 의한 멸망이 더 받아들이기 쉽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아무튼 이 영화가 원숭이들의 ‘혁명의 시작’이 아니라 ‘진화의 시작’이라는 이야기. (원제는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원제가 오히려 정직하지 못한 경우다.) 그리고 오랜만에 12몽키즈를 떠올려 반가웠다는 이야기.

내일부터 여름휴가가 시작이고 제주도를 갈 계획인데 아직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아 이렇게 밍기적거리고 있는 중. 설레지 않는 여행이라니…하지만 대부분의 내 여행은 그랬고 이게 내 방식이겠지.

추신1: 이 영화에서 시저가 처음으로 하게 되는 인간의 말은 ‘No’다. 시저는 인간에게 통제 받는 운명을 거부함으로써 각성한 주체가 된다. 주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부하는 용기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일상의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조종당하는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

추신2: 이 기회에 12몽키즈를 한 번 보시라. 아마 테리 길리엄의 영화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울 것이고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발견할 것이며 덤으로 브래드 피트의 놀라운 연기력과 매들린 스토의 매력에 빠질지도 모른다. 아, 브루스 윌리스 형님은 이 영화에서도 대머리니까 기대하지는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