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을 보는 내내 나는 이 영화가 < 혹성탈출>의 프리퀄이 아니라<12몽키즈>의 다른 판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2몽키즈>에서 제임스 콜이 인류 파멸의 원인을 오인한 지점, 그러니까 ’12몽키즈’라는 공상적 동물 보호단체의 동물 해방 퍼포먼스는 이 영화에서 침팬지 시저가 인간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 기대했던 부분과 정확히 겹친다. 그리고 <12몽키즈>와 마찬가지로 이는 오인에 지나지 않았다.

<12몽키즈>의 결말 부분과 마찬가지로 <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 역시 인간의 파멸은 공항에서 암시된다. 이는 심증을 굳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오자마자 검색해 본 결과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12몽키즈>에 대한 기시감 속에서 봤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말하기 싫어졌는데,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영화는 원숭이의 인간에 대한 혁명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 정도다.

시저는 인간의 손에 길러졌고 그에 대한 애정을 여전히 갖고 있다. 시저의 목표는 삼나무 숲이라는 원숭이의 해방 공간을 만드는 것, 그의 각성한 동료들과 함께 자치구를 형성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원숭이와 인간의 대립 양상은 그러한 원숭이 자치구를 위한 투쟁으로 요약된다.

어쨌든 이 영화에서 인간은 원숭이에게 대립되는 타자로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원숭이는 인간과 공존할 수 없다는 최종적인 각성에 ‘아직’ 들지 않았고,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 약품 ALZ113의 확산은 ‘일찍’ 암시되고 있다. 요컨대 원숭이의 해방구는 만들어졌지만 혁명은 임박하지 않았고, (이게 가능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이라는 대립물의 파멸은 일찍 찾아올 것 같은 암시. 이것이 이 영화의 원숭이 혁명에 대한 적절한 타협점이다. 작가는 각성한 타자의 혁명보다는 차라리 인간 자신의 과오에 의한 멸망이 더 받아들이기 쉽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아무튼 이 영화가 원숭이들의 ‘혁명의 시작’이 아니라 ‘진화의 시작’이라는 이야기. (원제는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원제가 오히려 정직하지 못한 경우다.) 그리고 오랜만에 12몽키즈를 떠올려 반가웠다는 이야기.

내일부터 여름휴가가 시작이고 제주도를 갈 계획인데 아직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아 이렇게 밍기적거리고 있는 중. 설레지 않는 여행이라니…하지만 대부분의 내 여행은 그랬고 이게 내 방식이겠지.

추신1: 이 영화에서 시저가 처음으로 하게 되는 인간의 말은 ‘No’다. 시저는 인간에게 통제 받는 운명을 거부함으로써 각성한 주체가 된다. 주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부하는 용기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일상의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조종당하는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

추신2: 이 기회에 12몽키즈를 한 번 보시라. 아마 테리 길리엄의 영화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울 것이고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발견할 것이며 덤으로 브래드 피트의 놀라운 연기력과 매들린 스토의 매력에 빠질지도 모른다. 아, 브루스 윌리스 형님은 이 영화에서도 대머리니까 기대하지는 말고.

아, 정말 오랜만에 블로그에 포스팅해 본다.
힘도 없고 의욕도 없는 생활이 계속되니 트위터로 배설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블로그가 죽어 가는 것이 안타깝다.

어제 밤에 본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 대한 몇 가지 메모.

  •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장철수 감독을 찾아 보니 일본 유학 중 영화 ‘섬’을 보고는 바로 김기덕 감독을 찾아가 영화에 입문했다 한다. 디테일과 정합성이 아니라 상징화, 의미화된 표상으로 제시되는 인물과 플롯들, 거칠고 불균질한 축약과 단도직입적인 전개 같은 면모는 김기덕의 영화와 닮은 점이다. 김기덕의 영화는 문법보다는 의미의 전개를 위한 경제학에 충실하다. 인물의 입체적 성격이나 사건의 인과성보다는 행위의 의미, 그리고 그 의미 사이의 충돌에 집중하는 영화.
  • 영화에는 도시와 시골, 남성과 여성, 억압과 복수, 희생자와 목격자 같은 대립항들이 존재한다. 어떤 대립항을 영화의 축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할 얘기도 다양할 것 같지만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대립항이 중심 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앞의 두 대립항으로는 할 얘기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1]씨네21 771호에 실린 황진미의 글을 보면 여성주의 관점에서도 이 영화는 할 말이 충분히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 해원은 모든 사건의 전말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다. 그녀는 여성 폭행 사건의 범인을 증언하기 거부하고 전세금 때문에 대출 문제로 찾아 온 독거노인의 딱한 사정을 애써 외면한다. 눈 앞의 부조리도 모른 척 하고 싶은 NIMBY 소시민의 무관심이 그녀의 한 속성이다. 해원의 외가 무도에 사는 어릴 적 친구 김복남은 그런 면에서 해원이 직면하는 부조리한 상황의 최고점에 있는 희생자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신은 침묵하고 있겠는가 묻는 것 같은 극단적 예인 것이다. 노동 착취, 인격적 모독, 강간 등 김복남이 겪고 있는 억압적 상황은 금기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억압과 폭력, 착취 같은 눈 앞의 문제를 모른 척하는 한 중산층 여성이 자신의 무관심을 질책당하고 사죄하는 과정이다.
  • 무도라는 가상의 공간은 특이한데, 섬에서 귀한 남자들을 지키기 위해 마을 사람 모두가 억압 질서에 동참한다.(마을 사람들이라고 해 봤자 할머니들밖에 없다. 악한 질서에 대한 노파들의 광기어린 동조는 무엇을 뜻하는가?) 순박하고 무지 무고한 복남에게 벌어지는 악행의 진실은 은폐되고 폐륜은 묵인된다. 무도는 김기영의 ‘이어도’보다 섬뜩한 범죄 공모의 실험대다.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을 떠올리는 건 어떨까?)
  • 이 섬에 살기 위해서는 악인이 되거나 악한 바보가 되거나, 굴종하는 바보가 되는 수밖에 없다. 씹으면 사람이 맹꽁이처럼 바보가 된다는 맹꽁이풀은 외상적 경험 또는 진실을 외면하고자 하는 무도 사람들의 욕망을 은유한다. 무도 사람들은 섬의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맹꽁이풀을 씹으며 적극적으로 바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 김복남은 영화 중반 이후 복수의 살인마로 변하고 무도 사람들을 무참히 죽인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살 이유도 없는 시점에 억압된 희생양은 원귀가 되어 돌아온다. 특이한 것은 김복남이 해원마저도 죽이려 든다는 것이다.
  • 이 영화는 해원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해원이 중반부쯤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시종일관 해원의 시선이 숨어 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숨은 목격자로 기능한다.
  • 김복남은 샘터에서 철종을 죽인다. 그리고 이 현장을 보고 놀란 해원 옆에는 김복남이 낫을 들고 서 있다. 해원은 공포에 질려 달아나지만, 내가 보기에 김복남은 해원을 해칠 의도가 없어 보였다. 이후에도 김복남은 해원에게 직접적인 위협의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해원이 낫을 든 김복남을 다시 대면하는 순간도 해원은 무도를 오가는 배 선주 득수(그도 어렸을 때 해원과 김복남을 괴롭힌 무리의 하나로 보인다)와 함께 있었고 김복남은 득수를 처치할 참이었다.
  • 해원은 득수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뭍으로 간신히 왔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휴식을 취하다 잠이 들었다. 이후 갑자기 복남의 딸이 만종의 발길질에 죽던 바로 그 상황, 해원이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복남이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눈빛으로 해원을 바라보는 장면이 삽입된다. 복남의 핍박이 전개되던 영화 중반부에 숨어 있던 목격자의 시선이 폭로되는 순간.
  • 그래서 나는 김복남이 경찰서에서 해원을 죽이려 하는 장면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위의 인서트컷 이후 해원은 놀란듯이 잠에서 깨고, 옆에는 김복남이 해머를 들고 있다. 복남은 마치 해원이 깨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제서야 해원을 해치려 든다. 나는 이 때부터가 해원의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경찰서 실내에서의 장면이라고는 하지만 해원이 잠에서 깨고 난 다음의 조명 톤은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어차피 복남은 무도를 떠나 뭍으로 왔고 그토록 바라던 서울로 가 볼 희망도 생겼다. (그토록 처절한 억압과 분노, 살인 후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할까 싶지만.) 게다가 복남이 해원을 죽여야 할 이유가 무도 사람들만큼 크지도 않지 않은가. (뭍에서 온 경찰에게 해원은 다시 한 번 증언하기를 거부했다. 이것이 복남의 살해 동기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래서 나는 복남이 해원을 죽이려 드는 경찰서 신은 해원의 침묵과 외면에 대한 죄의식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닐까 가정해 본다. 착취와 모독, 그리고 살인을 목격한 충격에서 벗어날 때쯤 해원의 죄의식이 김복남이라는 원귀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영화는 해원이 부조리의 피해자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양가적인 감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해원이 억압 당하는 이들에 대해 갖고 있는 일말의 동정심과 성가시니 외면하고 싶다는 무관심, 그리고 저들의 잠재된 분노의 폭발성에 대한 어떤 공포심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진부한 해석인가…)
  • 복남이 해원에게 ‘넌 너무 불친절해’라고 하는 말은 ‘난 10여 년 동안 나를 도와 달라고 너에게 편지를 보냈어. 그리고 넌 무도에서 내가 어떻게 당하는지 똑똑히 지켜봤어. 하지만 넌 애써 모른 척 하려고 했지. 해원, 네가 나를 살인자로 만든 거야’라는 말로 풀 수 있을 것이다.

추가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남다은의 글을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2010.11.08)

각주

각주
1 씨네21 771호에 실린 황진미의 글을 보면 여성주의 관점에서도 이 영화는 할 말이 충분히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죄와 화해하지 않는 시대…
죄책감을 거세당한 시대,
자신의 죄를 돌아보지 않는 인간.
이창동은 지금껏 우리의 죄에 천착해 왔나 보다.
먹여 살리고 먹고 살기 위해 짓밟고 배신하는 생존형 죄,
군대가 시민을 학살하는 국가적 죄,
편견이 진심을 망가뜨리는 사회적 죄,
유괴하고 성폭행하는 범죄,
그리고 신이 자신을 용서했다고 여기는 오만한 죄…
백발의 젤 소미나 양미자는 이 죄들에 대해 몸을 한껏 낮추고 정중히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시의 시작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