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기자클럽] 욕구불만의 다른 표현인가

사진·소설·만화·그림 등 다른 예술에 빠진 영화인들에 관하여

장선우 감독의 <이별에 대하여>, 팀 버튼 감독의 <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Big Jane> (왼쪽부터)

클로드 베리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와 급히 나눴던 사소한 대화 하나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피로로 거무스름해진 눈가에 핏기없는 잿빛 얼굴을 한 프랑스의 거부 베리는 담배를 입에 꼬나문 채 내가 내민 마이크에 규격화된 대답만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베리가 당시 라틴가에 소유하던 갤러리 얘기를 꺼냈다. 순간 베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일본 사진에 대해 갑자기 열정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때 나는 그 남자의 인생은 다른 곳에 있음을 알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수많은 영화감독들은 자신을 달리 표현하는 방법을 촬영지와 동떨어진 곳에서 모색했다. 모리스 피알라는 사랑의 도전으로 영화를 택했다. 그는 원래 미술을 사랑했다. 한데 그 배은망덕한 미술이라는 놈은 결코 피알라가 그를 사랑한 만큼 사랑을 돌려주지 않았다. 피알라는 훌륭한 화가가 되지 못했고, 그래도 가슴속 깊이 품고 있던 미술에 대한 찬양의 표현으로 <반 고흐>를 만들게 된다. 또 어떤 영화인에게는 영화가 아닌 다른 예술을 거치는 것이 일종의 과정, 그러니까 대규모의 기술과 자금을 필요로 하는 영화사업에 뛰어들기 전 요령과 기술을 익히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스탠리 큐브릭은 탁월한 사진가였고, 에릭 로메르나 이창동도 그런 경우다. 소설 형태의 에세이를 쓰는 단계를 거친 두 사람의 예술세계는 훗날 영화예술 속에서 성숙한 꽃을 피우게 된다.

정반대인 경우도 있다. 영화산업을 등지고 다른 데로 귀양가는 영화인들이 또 다른 새로운 사명을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 예로 장선우 감독은 시를, 마이클 치미노와 엘리아 카잔은 소설을, 장 자크 베넥스는 만화를 출간한다. 두편의 영화가 나오는 공백기에 조형예술에 몰두하는 감독들도 있다. 에이젠슈테인은 에로틱한 크로키를 즐겨했고, 그의 데생은 페데리코 펠리니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데생처럼 시중에 출판됐다. 데이비드 린치는 자신의 조형예술 작품을 갤러리와 미술관에 전시한 바 있으며, 팀 버튼도 직접 그림을 그려 넣은 재미나는 동화를 출판하기도 했다.

배우들이 하는 작업은 조금 더 비밀스럽다. 파리에서 줄리엣 비노쉬가 화집을 출간하는 동안 지난달 홍콩의 중앙도서관에서는 임달화가 사진을 전시했다. 턱을 꽉 죄어 물고 권총을 찬 경찰관이나 마피아 역을 주로 연기하는 배우 임달화를 우리는 두기봉 감독의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한데 그의 사진 작품은 평소 맡던 역과는 놀랄 만큼 대조적이다. 그의 사진은 추상적이고 섬세한 이미지, 둥글고 연약한 형태의 꽃이나 구름을 연상케 한다. 19세기 말 영국의 전설적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스크린에 남긴 배우가 바로 임달화다. 그러나 그의 사진전은 자궁 내부의 생에 관한 환상처럼 영화가 그에게 허락하지 못했던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어떤 배우는, 어느 날 갑자기 시골에 정착하는 상상을 하는 것처럼 아예 결정적으로 선을 넘어서길 꿈꾸기도 한다. 브래드 피트는 영화를 그만두고 건축에 몰두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게 언제라고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또 와킨 피닉스는 영화계를 떠나 음악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고, 아직 뚜렷한 결실은 없지만 줄리엣 루이스도 같은 선택을 했다.

우린 이런 배우들의 작품의 질을 논하기에 앞서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동기에 의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사실 영화가 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처음에 생각했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참작해보면 배우들의 비전을 작품이 제대로 반영해주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런 데서 오는 욕구불만을 다른 개인적인 방법을 통해 달리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하긴 제2의 직업을 통해 제대로 성공하는 스타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하여튼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사진 속에서 모자를 눌러쓰고 작은 카디건에 물이 살짝 빠진 청바지를 입은 채 어색하게 수줍은 미소를 짓는 인물로 돌변하는 임달화를 보고 있었다. 예술가 역을 연기하는 영화배우 임달화가 보였다.

글: 아드리앙 공보

번역=조수미

요즘 나는 침체기다. 심신이 모두 피로하고 생활에 대한 회의가 밀려온다. 멀리 떠나거나 취하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온다. 내가 원하는 변화를 맞고 싶지만 그러지 못함에 답답하다. 이 상황에서 별 위로도 없는 토요일을 타이드랜드와 마무리한다. 테리 길리엄은 여전한 망상의 감독이다. 타이드랜드에 대해 잔혹한 어른들의 세계에 빠진 소녀의 망상 같이 설명하는 것은 진부해 보인다. 테리 길리엄의 망상은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마약중독 부모에게 방치된 소녀가 고립과 기아 사이에서 허덕이다 정상적인 보살핌의 기회를 얻게 되는 이야기로만 보기에는 마지막 전환이 느닷없는 수습처럼 보일 뿐더러 영화가 끝난 후에는 질라이자 로즈의 망상만이 아련하다. 테리 길리엄의 주체할 수 없는 망상과 환영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는 근본적으로 인간 질서에 대해 불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테리 길리엄의 영화에 나오는 광기들은 그 영화가 제시하는 구체적 현실에 대한 도피나 풍자 그 이상이다. 브라질의 망상은 빅 브라더 사회에 대한 도피 이상이고 피셔 킹의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잊기 위한 것 이상, 12 몽키즈의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공포 이상이었다. 길리엄의 광기 내지 망상은 현실이 원인이 될지언정 그것의 결과에 머물지 않고 압도한다. 상처의 치유와 구원의 여지는 남겨둘 지언정 망상과 광기는 선명하다. 그래서 길리엄의 망상은 팀 버튼의 경쾌한 흑마술의 망상과 구분된다. 질라이자 로즈의 슬프고 숭고한 망상을 위해 건배.

질라이자 로즈 - 조델 펄랜드
질라이자 로즈 - 조델 펄랜드

내가 본 몇 되지 않는 2008년 한국 영화 중 ‘멋진 하루’는 가장 나았다.
팍팍한 사회적 상황에 대해 거의 언급을 하지 않지만 몇 안 되는 대사와 인물의 개인사에서 그 상처를 느낄 수 있었고 ‘여자 정혜’처럼 그 상처를 오롯이 꺼내 놓지 않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유추하여 인물을 이해하게 하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고 카메라와 연기의 디테일도 훌륭했다.
마지막 장면은 ‘마이클 클레이튼’의 느낌을 상기시키기도 했지만 인물과 서사에 대한 어떤 미련도 없이 돌아서는 카메라가 이 영화를 더 빛나게 했다.
더 말하기에는 요즘 생각의 여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