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EO>

이 영화가 당나귀를 선택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물론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나귀 EO>는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밤 깊은 산 속에서 총성에 휩싸이는 당나귀의 모습은 특히 그렇다. 그러나 두 영화가 다르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발타자르의 얼굴이 마리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응시하는 타자의 것이라면, 이오는 오히려 인간이 조성하는 이야기의 층을 희박하게 만들고 당나귀의 시선을 재현하기 위해 애쓴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당나귀 EO>가 <당나귀 발타자르>를 연상시키는 것은 단지 세계 속 당나귀라는 존재가 담긴 이야기라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둘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나귀 EO>는 영화의 역사를 연상시키는 인용일 법한 장면들이 분명 존재한다. 다른 예로 말 재활 공간의 한 장면에서는 마이브릿지의 말 연속 사진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영화사적 이미지를 간접적으로 인용하면서 영화 자체를 떠올리고 반추하게 이끄는 힘이 있다. 그런 인상은 나아가 당나귀의 시선을 재현하려 애쓰는 이 영화의 노력을 카메라 시선에 대한 성찰의 맥락에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초광각, 일그러진 초점, 접사, 과장된 색과 대비가 어우러진 이미지를 통해 영화는 인간의 것이 아닌 시각을 재현하면서, 이것을 당나귀의 시선으로 상상하기를 바란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감각을 수용하는 일일 것이다.

당나귀의 감각을 상상적으로 경험한다고 느끼는 비약을 나는 단지 인간 시선의 확장된 신체로 작동하는 카메라의 권능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카메라가 인간 신체의 확장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만드는 감각을 순수한 타자의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메라의 감각이 너무나도 익숙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은 기계 도구를 통해 감각과 인식을 확장해 온 존재이며 그것이 일으키는 낯섦이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것이 비기계적 타자의 영역에 속하는 낯섦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당나귀가 사람 같이 운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린다. 당나귀는 애처롭게 절규하고 흐느끼듯이 운다. 그 안타까운 울음 소리, 말보다 왜소한 체격과 큰 귀가 만드는 연약한 느낌, 인간으로부터 착취당해 온 역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재갈, 그리고 무언가 익살스러워 보이는 정면 얼굴의 모습까지, 당나귀라는 존재의 특질에 대해 내가 즉각적으로 인지하는 표상적 속성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반응이, 카메라의 기계 감각을 당나귀의 것으로 상상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통로는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이 영화가 당나귀를 선택한 이유는 아닐까. 어쩌면 순수한 타자적 감각이란 인간의 표상적 인지 체계의 필터를 거쳐 만들어지는 착각은 아닐까.

표상 인식의 필터를 통해 기계의 감각과 시선을 당나귀의 것으로 상상하고 나면, 어쩌면 진정한 낯섦의 층위라고 할 만한 질문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당나귀 이오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인간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피상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오의 운명에는 왜 그렇게 결정적으로 작동하는가. 이는 인간의 동물 학대, 자연 착취에 대한 성찰적 질문에만 머물지 않는다. 카산드라의 이오에 대한 사랑이나 이오를 살라미 재료 취급하는 트럭 운전사의 탐욕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반향이 이오에게서는 그저 미끄러져 스쳐가는 것만 같고, 이오가 전개하는 불가해한, 어쩌면 충동적 선택에 따른 일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여정의 전환들은 왜 죽음을 연상시키는 일들의 반복으로 재현되는가. 달리 말해 이 영화에서 인간의 이야기는 왜 피상적 표면만으로도 타자에게 치명적인가. 또는, 카메라는 피사체의 표면을 포착하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그것을 치명적 운명에 빠뜨리는가. 이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발걸음으로 도축장의 어둠 깊이 사라지고 나면 풀기 힘든 질문들의 잔상이 떠나지 않는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영화가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만 같다. 물론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비단 이 작품에 실사 인물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영화 역시 이미지를 포착하는 것뿐만 아니라 조작하고 만들어 내기도 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이미지의 운동과 변화가 이야기를 생성하는 핵심 원리를 공유하기 때문에 첫 문장이 단순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보는 내내 숨 쉴 틈이, 정확히 말하면 눈 감을 틈이 없다고 느끼는 이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의 변화무쌍한 이미지 변화를 거의 자동적, 직관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 작품을 견디기는 불가능할 테다. 다르게 말하면 이 작품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서사로 채우는 것이 더 이상 납득시켜야 할 과제가 아니라는 듯이 휘몰아친다. 촘촘하게 배열된 이미지의 전환 속도가 각 이미지의 분위기와 감정, 그리고 특유의 속성을 충분히 고찰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푸념을 늘어 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의 경향이 서사를 풍부하게 하거나 상상적 세계를 공고하게 구축하는 데 도움되지 않는다는 지적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예술이 관객을 압도할 정도로 배열과 전개에 속도감을 싣는 그 자신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프랜차이즈 상업 영화의 최전선이 드러내는 이 자신감은, 이제 영화가 언어와 같이 우리에게 내재된 자동적 의미 표상 체계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만든다.

멀티버스 세계관은 20세기 슈퍼 히어로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멀티버스는 이들 기성품 이야기에 정체성의 쟁점을 해결할 열쇠로 작동한다. 인종, 성, 계급부터 생애 환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체성이 허용 가능한 세계가 여기서 열린다. 그것이 갖는 함의의 긍정적 가능성을 얼마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첨예한 정체성 정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슈퍼 히어로에 대한 다채로운 시도를 반길 만하다.

그러나 그 시도가 창출하는 다양성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프랜차이즈 멀티버스는 슈퍼 히어로 정체성의 다양성을 옹호하면서 슈퍼 히어로 자체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있지는 않은가. 멀티버스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용어에 따르면, 이른바 ‘공식 설정 사건’을 연결점으로 하는 단일한 다중 우주다. 모든 변주가 가능하지만 단 하나,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 여부는 분기되지 않는 세계다. 물론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는 지구-1610 버전 마일스 모랄레스의 오류로 인해 스파이더맨이 존재하지 않는 지구-42 버전의 우주가 나오기는 하지만, 이 또한 지구-1610 마일스 모랄레스가 관여해야 하는 우주, 또는 아직 스파이더맨이 도래하지 않은 잠재형으로서 스파이더맨의 단일한 다중 우주에 포섭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가 바라는 것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가 영속하는 것이다. 피터 파커, 마일스 모랄레스, 그웬 스테이시, 제스 드류, 미겔 오하라, 또는 가능한 만인이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은 스파이더맨이 없는, 다른 존재가 가능한 세계를 차단한다.

나는 우리에게 깊이 새겨진 욕망 중 하나가 이야기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프랜차이즈 멀티버스의 단일한 다중 우주가 흥미롭게 이 욕망을 실현하고 있다. 이론물리학의 관점에서는 타당하지 않을 상상인, 무한 정체성을 장착한 단일한 슈퍼 히어로의 멀티버스는 이야기가 다양하게 변주되고 확장 가능하게 만드는, 현대화된 신화적 원리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기획이 우리로 하여금 이야기가 영속될 때 직면해야 할 위기를, 즉 다양한 변주로 간신히 지탱되지만 실은 단일한 신화의 반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또한 흥미롭게도 스스로 야기하는 그런 위기를 자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팟은 이름 자체로 이를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멀티버스의 단일한 다중 우주가 서로를 향해 뚫고 있는 무한의 포털 구멍은 우리가 스파이더맨 이야기의 영속을 지켜볼수록 마주하게 되는 얼룩, 즉 지루함이다. 지루함이 스파이더맨의 세계를 잠식하고 있음을 이렇게 자기반영적으로 표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스파이더맨이 이 스팟을 물리치고야 말 다음 편이야말로 프랜차이즈 멀티버스가 스스로 파국을 선언하게 되는 종착역이 될 것만 같다. 나는 앞의 말을 고쳐 다시 말하고 싶다. 우리는 한 이야기가 끝나면 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지속되기를 욕망한다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케이코의 일상을 묘사하는 방식은 <다음 소희>에서 혼자 춤 연습하는 소희를 바라볼 때 받은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다음 소희>의 그 장면에서 내가 소희의 춤을 거친 몸짓의 수준으로 느낀 것은 소희가 자신을 내맡긴 음악을 나는 모르며, 단지 내가 그 장면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소희의 몸놀림이 만드는 옷깃과 바닥의 소음 뿐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소희의 감각을 관객으로부터 격리함으로써 소희의 춤은 객관적인 관찰의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소희라는 인물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보였다. 케이코의 말 없음이 화면의 공간을 채우는 생활 소음과 타인의 목소리에 대비되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도 그런 격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두 영화의 감각적 격리는 반대로 작동한다. 소희의 감각이 관객으로부터 차단됨으로써 우리는 소희의 춤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는 케이코에게 주어지지 않은 소리 감각이 케이코에 대한 이해의 방해물이다. 케이코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이 영화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청각의 방해를 무릅쓰고 시각적 이미지에, 케이코의 몸짓과 얼굴에 집중하게 된다. 우리는 케이코가 감각하고 지각하는 방식을 모방하면서 이 영화 안으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케이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이야기를 창출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된다. 그런 과정을 잘 드러내는 오프닝 시퀀스는 어쩐지 사랑스럽다. 소리는 현장의 느낌을 생생하게 만들 뿐, 연속해서 제시되는 이미지가 인물과 시간, 공간을 열어 놓는다. 케이코, 눈이 흩날리는 겨울 밤, 낡은 세월의 복싱장, 관장과 코치, 화이트 보드의 글자로 주고 받는 대화, 권투 훈련, 훈련 일지, 샌드백. 어쩌면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잘 배치된 이미지가 이야기를 생성하고 있다고 직감하는 감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하나 같이 정갈하게 고안된 노스탤지어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어서, 이에 감응하는 사랑스러움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 영화가 케이코를 단지 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불러 낸 것은 아닐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이 영화가 노스탤지어 세계를 정합적으로 구성하려면 케이코가 필요하다. 곧 문을 닫는 도쿄에서 가장 오래 된 복싱장의 마지막 여성 프로 복서에 대한 이야기를, 16mm 필름의 입자로 그려내는, 고전적 이미지 서사의 영화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케이코를 도구적으로 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케이코가 노스탤지어 세계의 영화적 형식을 납득시키는 열쇠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케이코의 일상을 유심히 지켜보고, 상실에 응수하는 실존적 선택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케이코의 삶을 견디고 대리 경험하기 위해서도 영화의 노스탤지어 세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케이코가 낡은 복싱장에서 노쇠한 관장과 충직한 코치들과 함께 권투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맞는 것이 두려워진 슬럼프에도 불구하고 복싱장을 대표하는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자 하지 않았다면,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코로나 시대에 겪는 케이코의 곤란과 수어로 나누는 대화의 신비로운 침묵을 우리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

케이코는 영화에 대해, 영화는 케이코에 대해 정합적으로 필요하다. 이 점이 영화의 노스탤지어를 감상적 아름다움의 지옥으로만 치부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닫힌 세계다. 상대방 선수의 펀치에 고꾸라지는 케이코의 허우적거림이 너무 생동감 없어서 권투의 양식을 어설프게 흉내 내고 있다고 느낄 때, 이 세계가 그런 방식으로 구성된 환상임을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자기완결적인 세계의 윤리를 선한 타인들이 아니라 케이코가 지탱한다. 상실과 패배에 괴로워 하지만 거기에 멈춰 서지 않은 케이코의 작은 선택이 영화에 가능성의 출구를 열어 주기 때문이다. 그 선택이 설령 또 다른 낭만적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그것은 케이코가 영화의 환상을 떠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 같은 것은 아닐까. 어쨌든 예정되지 않은 현실의 불안이 그 뒤에 따라붙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은 믿음직스럽다. 달리 좋은 마지막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