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인>

영화 <괴인>의 초반부는 공사 현장을 생활인의 감각으로 묘사한다. 불규칙하게 울리는 타카 소리,계단으로 피아노를 들어올리는 힘겨운 과정, 수고에 대한 답례일지도 모를 피아노 연주를 덤덤하게 응시하는 인부의 얼굴이 생활 세계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 중에서 기홍이 테이블쏘에 합판을 올리고 무심한 듯, 그러나 완벽하게 능숙하지는 않은 듯 맹렬한 전기톱에 밀어넣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이 나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직업과 생활 세계에 내재한 치명적 위험을 드러내면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피아노 교습소의 공사 현장을 묘사하는 첫 시퀀스만 본다면 이 영화는 목수와 공사 인부의 노동에 대한 생활 감각적 고찰이라고 해도 될 법하다.

그러나 이후 이 영화는 추측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영화는 눈 앞에 펼쳐지는 사태를 인지할 수는 있으나 사태들을 모아 총체적으로 의미화하는 것은 곤란한 부류의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보고 난 후 이상하게 이 영화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면, 그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정리하기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런 혼란을 느끼는 것은 이 영화가 자신을 <괴인>이라는 제목으로 명명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제목에 이끌려 누가 ‘괴인’인가 하는 질문을 품고 영화를 보면 처음에는 당연히 목수 기홍이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기홍은 아무에게나 반말을 일삼고 이상하게 무례한 인물인데, 옥상에서 건넛집 남녀를 훔쳐보는 순간 앞으로 기홍의 기괴한 욕망과 인격을 묘사할 이 영화의 미래를 예감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후 기홍의 집주인 남편 정환이 기홍의 차 지붕이 찌그러진 사건에 대해 과도한 관심으로 기홍의 세계를 침범하면서, 그 다음에는 보호종료 아동 하나가 그 사건의 범인으로 이들 사이에 등장하면서, 또 그 다음에는 집주인 아내 현정이 술을 들고 남편 몰래 기홍의 방을 찾으면서 ‘괴인’의 용의자는 연쇄적으로 확대된다. 마치 모든 인물이 일견 ‘괴인’의 면모를 지닌 것처럼 전개되는 이 영화는 영화의 제목이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각 인물의 이상한 면모를 관통하는 통합적 의미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들 인물의 기괴한 면모가 직업 또는 계급적 특징의 한 측면과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뿐이다. 기홍은 목수 반장이라는 직업 세계의 성격을, 정환과 현정은 유한 계급의 권력과 허영을, 하나는 보호종료 아동의 취약함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것은 위험을 내재한 정치적 환유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영화의 제목은 단지 맥거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각 인물을 정말 ‘괴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까지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각 인물은 ‘괴인’의 개념에 부합하는 수준까지 가기 전에 멈춘다. 예컨대 기홍은 옆집을 훔쳐 보고 여성에게 아슬아슬한 플러팅을 하기도 하지만 마트에서 임산부에게 계산 순서를 양보하기도 하며, 더욱이 같이 일하던 친구 경준이 고향으로 내려가고 현정의 친구가 의뢰한 인테리어 공사가 기약 없이 미루어지자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면서 ‘괴인’의 용의선상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기홍이 유력한 용의자에서 멀어지는 것은 정환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마찬가지로 하나가 등장하면서 정환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의심은 하나에게 옮겨 간다. 특히 현정이 기홍과 함께 사라진 다음 날 아침에 벽에 기대 선 채 고개를 떨군 정환은 그저 측은한 인물이 된다.

앞서 이 영화가 계급적 특질에 따른 인간의 괴인적 면모 고찰로 이 영화를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언급했지만, ‘괴인’의 용의선상에서 인물들이 조금씩 이탈하는 방식은 계급적 위상 관계에 따른 개념적, 인과적 이행이라기보다 단지 새로운 다음 인물이 등장하면서 관심 대상이 전환됐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때 ‘괴인’으로 보였던 이전의 인물은 생활 세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인물로 달리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다른 인물들이 계급 적대의 환유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동안 보호종료 아동 하나는 정환의 집에 몸을 의탁하는 데서 끝나는 이 영화는 내게 묘한 미결감을 남긴다.

‘괴인’이 누구인지 한 인물로 확정하지 못하고 다른 인물로 계속 미끄러져 가기만 하는 난감함은 기홍이 정환의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기홍이 정환의 집으로 이사 가는 공간 전환의 과정이 영화에는 담겨 있지 않다는 점이다. 기홍이 다세대 주택 옥상에서 옆집을 훔쳐보다 핸드폰을 벽 사이로 떨어뜨리고 난 다음 장면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기홍은 이미 이사한 새 집 자랑을 하고 있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기홍이 집주인 정환과 첫 대화를 하는 장면까지 기다려야 한다. 국면이 전환되고 본격적인 인물 사이의 미끄러짐이 시작된다는 징표를 영화는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밤길을 지나는 자전거 탄 두 남녀 장면은 반대로 무엇을 위해 공백 같은 표지판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의미의 단서를 던져 놓고 그것에 머무르는 것에는 저항하는 듯한 모순적 욕망을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는 난감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당나귀 EO>

이 영화가 당나귀를 선택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물론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나귀 EO>는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밤 깊은 산 속에서 총성에 휩싸이는 당나귀의 모습은 특히 그렇다. 그러나 두 영화가 다르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발타자르의 얼굴이 마리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응시하는 타자의 것이라면, 이오는 오히려 인간이 조성하는 이야기의 층을 희박하게 만들고 당나귀의 시선을 재현하기 위해 애쓴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당나귀 EO>가 <당나귀 발타자르>를 연상시키는 것은 단지 세계 속 당나귀라는 존재가 담긴 이야기라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둘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나귀 EO>는 영화의 역사를 연상시키는 인용일 법한 장면들이 분명 존재한다. 다른 예로 말 재활 공간의 한 장면에서는 마이브릿지의 말 연속 사진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영화사적 이미지를 간접적으로 인용하면서 영화 자체를 떠올리고 반추하게 이끄는 힘이 있다. 그런 인상은 나아가 당나귀의 시선을 재현하려 애쓰는 이 영화의 노력을 카메라 시선에 대한 성찰의 맥락에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초광각, 일그러진 초점, 접사, 과장된 색과 대비가 어우러진 이미지를 통해 영화는 인간의 것이 아닌 시각을 재현하면서, 이것을 당나귀의 시선으로 상상하기를 바란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감각을 수용하는 일일 것이다.

당나귀의 감각을 상상적으로 경험한다고 느끼는 비약을 나는 단지 인간 시선의 확장된 신체로 작동하는 카메라의 권능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카메라가 인간 신체의 확장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만드는 감각을 순수한 타자의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메라의 감각이 너무나도 익숙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은 기계 도구를 통해 감각과 인식을 확장해 온 존재이며 그것이 일으키는 낯섦이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것이 비기계적 타자의 영역에 속하는 낯섦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당나귀가 사람 같이 운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린다. 당나귀는 애처롭게 절규하고 흐느끼듯이 운다. 그 안타까운 울음 소리, 말보다 왜소한 체격과 큰 귀가 만드는 연약한 느낌, 인간으로부터 착취당해 온 역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재갈, 그리고 무언가 익살스러워 보이는 정면 얼굴의 모습까지, 당나귀라는 존재의 특질에 대해 내가 즉각적으로 인지하는 표상적 속성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반응이, 카메라의 기계 감각을 당나귀의 것으로 상상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통로는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이 영화가 당나귀를 선택한 이유는 아닐까. 어쩌면 순수한 타자적 감각이란 인간의 표상적 인지 체계의 필터를 거쳐 만들어지는 착각은 아닐까.

표상 인식의 필터를 통해 기계의 감각과 시선을 당나귀의 것으로 상상하고 나면, 어쩌면 진정한 낯섦의 층위라고 할 만한 질문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당나귀 이오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인간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피상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오의 운명에는 왜 그렇게 결정적으로 작동하는가. 이는 인간의 동물 학대, 자연 착취에 대한 성찰적 질문에만 머물지 않는다. 카산드라의 이오에 대한 사랑이나 이오를 살라미 재료 취급하는 트럭 운전사의 탐욕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반향이 이오에게서는 그저 미끄러져 스쳐가는 것만 같고, 이오가 전개하는 불가해한, 어쩌면 충동적 선택에 따른 일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여정의 전환들은 왜 죽음을 연상시키는 일들의 반복으로 재현되는가. 달리 말해 이 영화에서 인간의 이야기는 왜 피상적 표면만으로도 타자에게 치명적인가. 또는, 카메라는 피사체의 표면을 포착하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그것을 치명적 운명에 빠뜨리는가. 이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발걸음으로 도축장의 어둠 깊이 사라지고 나면 풀기 힘든 질문들의 잔상이 떠나지 않는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영화가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만 같다. 물론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비단 이 작품에 실사 인물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영화 역시 이미지를 포착하는 것뿐만 아니라 조작하고 만들어 내기도 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이미지의 운동과 변화가 이야기를 생성하는 핵심 원리를 공유하기 때문에 첫 문장이 단순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보는 내내 숨 쉴 틈이, 정확히 말하면 눈 감을 틈이 없다고 느끼는 이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의 변화무쌍한 이미지 변화를 거의 자동적, 직관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 작품을 견디기는 불가능할 테다. 다르게 말하면 이 작품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서사로 채우는 것이 더 이상 납득시켜야 할 과제가 아니라는 듯이 휘몰아친다. 촘촘하게 배열된 이미지의 전환 속도가 각 이미지의 분위기와 감정, 그리고 특유의 속성을 충분히 고찰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푸념을 늘어 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의 경향이 서사를 풍부하게 하거나 상상적 세계를 공고하게 구축하는 데 도움되지 않는다는 지적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예술이 관객을 압도할 정도로 배열과 전개에 속도감을 싣는 그 자신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프랜차이즈 상업 영화의 최전선이 드러내는 이 자신감은, 이제 영화가 언어와 같이 우리에게 내재된 자동적 의미 표상 체계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만든다.

멀티버스 세계관은 20세기 슈퍼 히어로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멀티버스는 이들 기성품 이야기에 정체성의 쟁점을 해결할 열쇠로 작동한다. 인종, 성, 계급부터 생애 환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체성이 허용 가능한 세계가 여기서 열린다. 그것이 갖는 함의의 긍정적 가능성을 얼마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첨예한 정체성 정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슈퍼 히어로에 대한 다채로운 시도를 반길 만하다.

그러나 그 시도가 창출하는 다양성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프랜차이즈 멀티버스는 슈퍼 히어로 정체성의 다양성을 옹호하면서 슈퍼 히어로 자체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있지는 않은가. 멀티버스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용어에 따르면, 이른바 ‘공식 설정 사건’을 연결점으로 하는 단일한 다중 우주다. 모든 변주가 가능하지만 단 하나,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 여부는 분기되지 않는 세계다. 물론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는 지구-1610 버전 마일스 모랄레스의 오류로 인해 스파이더맨이 존재하지 않는 지구-42 버전의 우주가 나오기는 하지만, 이 또한 지구-1610 마일스 모랄레스가 관여해야 하는 우주, 또는 아직 스파이더맨이 도래하지 않은 잠재형으로서 스파이더맨의 단일한 다중 우주에 포섭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가 바라는 것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가 영속하는 것이다. 피터 파커, 마일스 모랄레스, 그웬 스테이시, 제스 드류, 미겔 오하라, 또는 가능한 만인이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은 스파이더맨이 없는, 다른 존재가 가능한 세계를 차단한다.

나는 우리에게 깊이 새겨진 욕망 중 하나가 이야기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프랜차이즈 멀티버스의 단일한 다중 우주가 흥미롭게 이 욕망을 실현하고 있다. 이론물리학의 관점에서는 타당하지 않을 상상인, 무한 정체성을 장착한 단일한 슈퍼 히어로의 멀티버스는 이야기가 다양하게 변주되고 확장 가능하게 만드는, 현대화된 신화적 원리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기획이 우리로 하여금 이야기가 영속될 때 직면해야 할 위기를, 즉 다양한 변주로 간신히 지탱되지만 실은 단일한 신화의 반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또한 흥미롭게도 스스로 야기하는 그런 위기를 자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팟은 이름 자체로 이를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멀티버스의 단일한 다중 우주가 서로를 향해 뚫고 있는 무한의 포털 구멍은 우리가 스파이더맨 이야기의 영속을 지켜볼수록 마주하게 되는 얼룩, 즉 지루함이다. 지루함이 스파이더맨의 세계를 잠식하고 있음을 이렇게 자기반영적으로 표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스파이더맨이 이 스팟을 물리치고야 말 다음 편이야말로 프랜차이즈 멀티버스가 스스로 파국을 선언하게 되는 종착역이 될 것만 같다. 나는 앞의 말을 고쳐 다시 말하고 싶다. 우리는 한 이야기가 끝나면 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지속되기를 욕망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