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노’를 봤다.
씨네21에서 아주 좋게들 말하고 있는 그 ‘주노’ 말이다.
평범한 10대 미혼모가 출산을 선택함으로써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 가족제도(성인과 미성년이라는 구분을 포함해서)의 한계와 문제, 새엄마나 입양 예정 부부 등을 통해 묘사되는 소박한 문제의식과 대안적 자세, 취향을 나누는 사랑스러운 소통의 형태 등등…
애정을 갖게 하는 인물들과 이야기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물들이 마주하는 문제에 나를 깊이 인도하지는 않는다.
10대가 임신을 해서 아기를 낳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이야기의 추동력이 강해서인지 영화는 다른 ‘사건’을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한 것 같다.
아기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의 시작 이후 입양자에게 전해지는 마지막까지 사건은 더 커지지 못하고 평행선으로 진행된다.
어쩌면 최초의 충격이 갈수록 약해진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각 인물들이 10대의 임신이라는 주어진 운명에 부딪치면서 문제를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운명의 충격을 각자의 방식으로 줄여 가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까?
(그렇다고 씨네21의 기사에서 언급된 것처럼 마크와 주노가 덜컥 제대로 엮여 버리는 것 같은 사건을 기대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건 문제를 증폭시키는 게 아니라 애초의 문제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문제를 곱씹는 즐거움이 아니라 문제 안에서 그래도 잃지 않는 인물들의 건강함을 지켜보는 즐거움이다.
물론 모든 영화들이 문제의 심연으로 관객을 이끌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스럽게 가만히 지켜볼 수 있게 해 주는 그 만큼으로 충분히 제 몫의 가치를 얻을 수 있다.
그래도 이런 영화들은 각자의 영화 목록 안에 애정어린 소품, 그 이상의 자리에 가 있을 법하지는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정당한 자리가 있고 그 온당한 자리를 찾고 발굴하는 것이 비평 저널의 한 역할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지지하는 취향에 대해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최근 씨네21의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좀 과한 것 같다.
(최근에는 ‘원스’나 ‘카모메 식당’ 같은 영화들이 그랬던 것 같다.)
한국영화에 대해서도 씨네21이 제 몫 이상의 평가를 전략적으로 해 줬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비슷하게 ‘건강하고 착하지만 작은’ 영화에 대해 그러는 것 같다.
소박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따르는 것 같은 이 작은 영화들이 비판받을 이유는 전혀 없지만 최근 씨네21은 이런 소품 취향에 대한 애정을 다소 과도하게 드러내면서, 하지만 이를 미학적으로 입증하지는 못하면서 지면을 소비하고 있는 것 같다.
작은 영화를 지지하는 극장들이 죽어 가니, 어쩌면 씨네21은 산업에 대항하는 ‘예술의 정치화’ 방식으로 이 영화들을 대하는 것 같다.
이해는 가지만 이런 경향이 과연 작은 영화들의 (미학적) 제 자리를 찾아주는 데에도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태그:] 영화
원스 Once
원스는 참 예쁜 영화다. 너무 예뻐서 욕할 수도 없고 칭찬할 수도 없다. 그런 영화가 있다. 정치적으로 또는 미학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해서 오히려 할 말이 없는.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말하고 싶은 것이 생기는 영화는 사실 전혀 바람직하지 않거나(그런데도 바람직한 것처럼 허세 부리거나) 바람직함을 넘어서 그것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영화다.(사실 후자의 경우는 무언가 북받쳐 오르는데 감당해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당한 비판보다 정당한 칭찬이 더 어려운 법이다.)
나는 이 영화를 아주 흐뭇하게 봤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는 영화였다고 생각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 영화가 뮤직비디오의 가장 솔직한 형태가 아닐까 하는 것 정도였다. 그러면서 생각은 다른 곳으로 가지를 치더라.
이미지만으로 구성된 내러티브는 분석적이다. 숏과 숏 사이의 틈을 메워야 하기 떄문이다. 이 틈을 메우는 것은 우리를 추동하는 서사의 욕망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카메라가 주관적 시선의 자리에 있을 때조차 우리는 이 시선을 서사의 욕망 안에서 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 카메라가 어두운 구석에서 저쪽에 있는 한 사람을 지켜보는 숏이 있다고 치자. 이 다음에 또는 이 전에 그 구석에 있는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를 말해 주는 숏이 통상적으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거나 무언가 뒤바껴 있다면, 그 시선은 지젝식으로 말하면 ‘히치콕적’일 것이다.) 그러니까 카메라의 시선은 완전히 관객 자신의 시선이 될 수는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관객에게 카메라의 시선은 서사의 인증 하에서 승인되는 타자의 시선이다. 관객에게 카메라의 시선은 어떤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관객과 카메라는 느슨하게 붙어있다. 그런데 음악은 카메라의 객관성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랑 노래가 깔린다면 이 노래를 부르는 연인을 객관적으로 잡은 숏이 있다 해도 이 숏은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으로 가득차 있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음악은 이미지를 주도한다. 음악이 이미지를 자신의 서사 안으로 잡아당긴다. 예를 들어 요즘 유행하는 UCC 뮤직비디오의 조잡한 그림들은 노래 가사를 문자적으로 재현한다.(‘Tell Me’라는 가사를 ‘태음인’ 또는 ‘태릉인’이라는 글자로 표시하는 것은 UCC 뮤직비디오의 일반적인 방식이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노래와는 상관없는 스토리를 가진 영상의 뮤직비디오라 해도 음악의 정서와 서사를 (가사와는 상관 없더라도) 시각적으로 설명해 준다.(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은 매우 싫어한다. 내게는 조성모의 To Heaven 뮤직비디오가 그 첫 기억인데, 이런 뮤직비디오에서 음악의 서사와 이미지의 서사는 서로 매우 신경질적으로 달라붙는 것 같다. 마치 더이상 새로운 서사를 제시하지 못하는 음악이 이미지를 먹어치워 스스로 폭발지경에 이른 것 같은 느낌이다. 음악이 갑자기 멈추고 영상만이 흐르는 따분한 순간은 이미지가 얼마나 신경질적으로 음악에 복종하고 있는지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음악과 이미지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도 이미지는 음악의 실현에 불과하다는 것. 말씀이 먼저 있고 나서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신화와 같다. 그렇다면 소리는 시각의 객관성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힘과 같은 것이 아닐까?
가지를 너무 오래 쳤는데, 영화 원스는 음악이 서사를 구축한다. 원스 OST에 수록된 곡은 총 약 43분여다. 한 곡이 여러 번 반복돼서 나온 것을 감안하면 이 영화의 전체 러닝 타임 86분 중에 음악은 반 이상을 흘렀다. 남자의 옛사랑에 대한 추억과 상처, 여자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원망스러움은 노래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호감을 느끼는 것도 노래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되려는 꿈 역시 마찬가지다.(물론 음악은 아주 멋지고 적절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호응을 얻을 수밖에 없다.) 이미지와 대사는 음악 사이의 인서트이거나 음악의 실현이다.(악기 가게에서 남과 여가 노래하고 연주하면 가게 주인은 웃음을 짓는다, 녹음실에서 프로듀서는 처음에는 무시하며 건들거리다가 음악을 듣고는 그들을 존중하고 녹음작업에 심혈을 기울인다 등등.) 그러나 그들이 현실원칙으로 돌아오는 것은 음악을 빌릴 수가 없다.(함께 하자는 남자의 제안에 여자가 거절할 때 음악은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환상과 현실의 교환관계에서 이 영화는 기존의 뮤지컬 영화와 오히려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은 ‘어둠 속의 댄서’와 비교해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지도 모른다. ‘어둠 속의 댄서’는 정반대의 경우, 즉 비참한 현실의 고통과 충격을 어떻게든 환상으로 치환해야만 버틸 수 있을 때 음악이 쓰이기 때문이다.
드레스 투 킬에 대한 내 착각
같이 일하는 경록씨한테 드레스 투 킬 DVD를 구해서 다시 보게 됐다.
약 10년 전에 이걸 보면서 혼자 아주 열광했던 기억이 있고, 지금도 누누이 침을 튀기며 언급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건 완전히 내 잘못된 기억, 착각이었다.
그건 그 유명한 박물관 시퀀스다.
중반부에 살해당하는 케이트 밀러 부인의 성적 욕망을 이 장면이 압축하고 상징하고 설명한다.
아들이 밤을 새고 난 뒤라 혼자 박물관에 가게 된 밀러 부인은 품위 있는 중년 부인의 모습으로 박물관의 작품들과 그걸 감상하는 사람들의 군상을 조용히 지켜본다.
한 가족의 어머니, 아내의 위치에서 잠시 벗어난 밀러 부인은 이 박물관에서 한 중년 남자에게 순간 끌리게 된다.
(이 남자는 갑자기 밀러 부인 옆자리에 와서 앉고 밀러 부인과 미묘한 눈빛을 주고 받는다. 밀러 부인의 욕망에는 둘 다 책임이 있어 보인다.)
발을 꼬고 탁탁 바닥을 치며 잠시 고민하다 그 남자에게 접근하려 하지만 이내 남자는 자리를 뜨고, 밀러 부인은 급히 그 남자의 뒤를 쫓는다.
(이 남자는 뒤를 힐긋힐긋 보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나 잡아 봐라 하는 것처럼. 결국 마지막에 이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이건 밀러 부인과 중년 남자의 쫓고 쫓기는 자동차 추격신이다.
그리고 이 장면을 더욱 흥미롭게 하는 것은 밀러 부인이 떨어뜨린 장갑이다.
장갑은 밀러 부인이 흘려 놓은 욕망의 물적 단서다.
밀러 부인은 한 번은 욕망의 대상을 따라 추격신을 벌였다면, 다른 한 번은 자신의 욕망을 다시 누르고 자신이 흘린 욕망의 단서를 회수하기 위해 추격신을 벌인다.
그러나 이 단서는 정확히 전해져야 할 사람에게 도착한다.
하나는 그 중년 남자에게, 다른 하나는 (밀러 부인의 욕망을 단죄할) 살인마에게.
달리 말하면 하나는 밀러 부인의 성적 욕망에, 다른 하나는 사건이 벌어지고 앞으로 달려가야 하는 영화의 서사의 욕망에.
그러니까 박물관 시퀀스는 밀러 부인의 다른 한 쪽 장갑을 살인마에게 전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어쨌든 이 박물관 장면은 중후한 음악과 매끄럽고 치밀한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거의 완벽하게 표현됐다.
그런데 이 장면에 대한 어이없는 내 착각은…
이 장면이 한 숏으로 구성돼 있다고 생각해 왔다는 것이다.
그건 브라이언 드 팔마에 대한 나의 기술적 완성도의 표지 같은 믿음이었는데 이게 내 기억의 속임수였던 것이다.
나는 그 때 스태디 캠의 매끄러운 움직임에 매료됐고, 그 완벽한 움직임에 대한 내 환상 같은 것이 이 장면의 여러 숏들을 물리적으로 이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시퀀스는 영화적 환상을 보여주는 어떤 정점에 있다고 말할 만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