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영은 자신을 바수밀다로 불러달라고 한다. 매춘으로 남자들을 불교에 귀의하게 했다는 바수밀다처럼 그녀도 자신이 하는 일을 어떤 종교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롤리타 컴플렉스에 빠진 남자들의 죄의식을 달래 주는 종교적 실천. 재영은 그래서 남자들에게 진짜 웃음과 사랑을 준다.
하지만 늙은 아비들은 이중적이다. 욕망은 밑에서 흐르고 있지만 위에서는 없는 채 한다. 누구에게나 그 욕망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든 없어야만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재영의 종교적 실천은 이 남자들에게 몇 시간의 안식은 될지언정 애초부터 없었던 일로 있어야 한다. 재영과 잔 남자들은 그 순간만큼은 안식을 찾고 그녀를 위해 기도하겠다 한다. 그러나 죽어가는 순간 재영이 찾은 그 오빠, 음악하는 남자는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볼 생각이 전혀 없다. 재영의 자발적, 종교적 실천은 몇 시간의 기적을 보인 후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남자들이 보기에 재영의 웃음은 젤 소미나의 그것이고 재영이 한 일은 매춘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 사마리아인, 타자는 아버지의 욕망을 알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죽은 재영을 (존재론적으로) 모방하게 된 여진이 만난 한 남자는 그녀의 웃음에 화를 낸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진이 그 남자를 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 다음 숏은 건너편 여관의 어느 방 침대에 있는 한 여자의 시체다. 이 남자가 여진에게 ‘들켜버린 것’에 대한 상징적 응징인 것이다. (사실 이것은 바로 다음 이어지는 여진이 아버지의 사적인 복수에 대한 표지이기도 하다. 여진의 아버지는 이 혐오스러운 욕망으로 자신의 딸이 이렇게 해꼬지 당했다고 생각하고, 고스란히 그것을 되갚는다.)
재영과 친구 이상의 끈으로 연결돼 있는 것 같은 여진은 재영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 (여진은 재영이 남자를 만나고 나면 항상 목욕탕에서 씻겨준다. 여진이 이 아름다운 몸을 더러운 남자들에게 보여주기 싫다고 한다. 재영은 웃음을 지으며 여진에게 입을 맞춘다. 재영의 섹스는 구속되지 않는다.) 재영이 섹스를 나눈 남자들을 찾아가 같이 자고 돈을 돌려준다. 여진은 성적 희열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댓가, 돈에 새겨진 죄의식 때문에 남자들이 재영을 지우려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남자들이 건내 준 죄의식의 물적 증거마저도 돌려주고, 여진은 재영의 행위를 온전히 돌려놓고자 한다. (어차피 남자들은 감당하지 못하겠지만.) 지젝은 이것을 (유일한) 윤리적인 행위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진의 아버지는 여진의 행위를 가로막는다. 여진의 아버지는 여진이 하고 있는 일을 알게 됐지만 사실은 진짜로 알지는 못한다. 여진의 아버지는 여진이 젤 소미나처럼, 아니 여진이 하고 있는 일을 처음 목격하게 된 여관방의 여자 시체처럼 더러운 남자들에게 상처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법적 처벌을 철저하게 진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그는 형사다) 그는 사적 처벌을 감행한다. 남자들이 여진과 자는 것을 매번 훼방 놓던 아버지는 결국 살인까지 저지른다.
김기덕은 매춘과 롤리타에 대한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고 난 다음 반대편에서 그것에 대한 혐오를 또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한쪽은 아버지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법이 용인하지 않는) 극단적인 선택, 다른 한쪽은 아버지의 질서가 숨기고 있는 것을 꺼내놓기 위한 (법이 용인하지 않는) 극단적인 선택. 여진의 아버지는 법의 처벌을 받기 위해 범인으로서 경찰차에 올라탔고 여진은 처음 운전대를 잡고 애타게 아버지를 쫓아가 본다. 여진의 소나타는 얼마 못 가 멈춰야 했지만 카메라는 마지막까지 멈춰 선 소나타를 지켜본다. 끝까지 남은 것은 여진의 소나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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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속으로
이 영화는 환상과 현실을 넘나든다. 그런데 환상과 현실을 가르는 것은 사람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 자리함으로써 환상이 성립된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에서 어떤 인물은 시간과 공간을 은유한다. (나는 최근–에서야- 베리만의 ‘산딸기’에서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환상에 진입하는 것을 봤다) 그리고 그 인물은 삐삐소녀다.
수영에게 모든 것은 1979년 6월 대학교, 삐삐소녀에게서 시작됐다. 그녀는 자신보다 두 살 많은 76학번이었지만 첫 여인이었고 관념적인 독일 시에서 눈물을 찾아내 보여주는 영감이었다(그리고 삐삐소녀는 성악과 학생이다). 수영이 그녀를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확성기와 전단지를 들고 학교 건물 위로 올라갔고, 거기서 뛰어내렸다.
영화는 삐삐소녀를 추모하기 위해 수영에게 나비의 꿈을 꾸게 한다. 기다리던 영어 수학 과외, 수지라는 이름의 여고생과 그 오빠 수영을 만나고 오빠 수영을 통해 삐삐소녀를 다시 만난다. 수지는 어느새 대학생 수영을 좋아하고 수지 오빠 수영과 삐삐소녀는 꼭 달라붙어 있다. 그런데 삐삐소녀는 첫사랑이 고교 시절 자신에게 영어 수학 과외를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수영은 삐삐소녀의 첫사랑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첫 문장은 수정해야겠다. 수영은 삐삐소녀를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삐삐소녀와 다시한번 대면하기 위해 나비의 꿈을 꾼 것이다. 어쨌든 꿈은 대학생 수영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는 순간 끝난다. 삐삐소녀는 이미 죽었고 돌이킬 수 없다. 그런데 현실은 여전히 삐삐소녀의 현존으로 어른거린다. (대학생 수영의 꿈 속) 그녀의 첫사랑 수영은 서울에서 벌어진 군사작전의 무고한 민간 희생자가 됐고 그 여동생 수지는 삐삐소녀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으로서 대학생 수영에게 남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수영은 수지를 자신과 삐삐소녀 사이 운명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풀리지 않던 시를 쓰게 됐다.
나는 이것이 수영이, 감독이 지금 80년대를 견뎌내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감성적인 삐삐소녀가 79년 투신자살을 한 것은 (수영에게) 치명적인 80년대의 징후다. 그렇다면 삐삐소녀의 감수성은 상실한 70년대의 유산이라고 봐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수영에게 잃어버린 70년대의 그 무엇이라기보다 어떤 시원적 형태, 갖기도 전에 상실한 것으로 남는다고 본다. 수영은 2학년인 1979년, 70년대를 인지하기도 전에 80년대의 징후를 먼저 목도했다. 모든 것은 삐삐소녀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영은 삐삐소녀를 추억하기보다 환상으로 그녀를 현존시킨다. 이것이 바로 현대에도 80년대를 살아남게 하는 수영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녀를 연장하고 (수영에게 수지는 삐삐소녀의 운명적인 연장이다. 수지 오빠 수영이 실제 삐삐소녀의 첫사랑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에게는 지금 그 적당한 자리가 필요하다.) 시를 쓰는 것은 80년대의 유령을 계속 노래 부르고 달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다면 수영은 삐삐소녀 이후에야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굳이 수업 없는 일요일에 있어서는 안될 학생들 앞에서 그 기억을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하는 우리에게 그럼에도 끄집어 내야 하는 이야기가, 항상 우리 곁에 있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워라 – 현경과 영애
密陽
영화 내내 이신애는 자신의 불가해하기까지 한 고통에 대한 신의 보이지 않는 응답을 바라는 듯했다.
이신애는 제도적 교회가 용인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 경계를 잔혹하게 오고갔다.
전도연은 정말 경계 끝까지 가려는 것 같았다.
가슴이 턱 막혀 쥐어짜는 울음소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녀는 어린 양과 목자, 그리고 악마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물론 이 중에서도 갈대밭 가운데 유부남 아래 누워서 하늘을 향해 ‘잘 지켜보고 있어?’라고 나즈막히 읆조리는, 상하가 뒤집혀 기괴하기까지 한 악마같은 얼굴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 독을 품은 사악한 질문은 고통받는 인간이 구원이라는 동일한 질문에 대해 얻은 다른 한 측면의 대답 같은 것이다.
그리고 끝내 이신애는 구원받지 못했다.
비밀스런 햇볕은 이신애의 실질적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그 햇볕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텅 비어있는 응시, 2시간 20분 동안 완전히 지쳐버린 이신애가 앞마당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동안 뒷켠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조차 미동도 않고 있는 바로 그 말없는 응답뿐이다.
‘잘 지켜보고 있어?’라고 다시한번 묻는 것일 수도 있고 ‘여전히 너는 말이 없구나’라고 확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신애는 거울을 들고 앞마당으로 나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려 하는데 쫓아온 노총각 김사장은 그 거울을 들고 이신애를 비춰주며 원치 않는 친절함을 보이고, 이신애는 말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른다.
그리고 카메라는 컷을 하지 않고 뒷켠으로 물러나 말없는 햇볕만 비춘다.
이 시선의 이동을 컷으로 나누는 것을 생각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신애가 머리 자르는 숏과 아무것도 아닌 햇볕 숏을 커팅해 병치해 버리면 이신애의 지금까지의 고통은 갑자기 의미없는 햇볕의 완전한 객관적 응시로 대체돼 버린다.
반대로 커팅을 하지 않고 두 숏을 한 숏으로 만들면 햇볕의 응시가 이신애의 주관적 고통의 세계로 빨려들어간다.
그래서 주체가 일종의 신과 같은 대타자에게 던지는 원망과 질문 같은 것을 이 마지막 숏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