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사 초기, 영화 기호학이 활발히 연구되던 러시아에서 한 실험이 있었다.
당시 한 유명한 중년 남자 연극배우의 무표정한 얼굴 쇼트를 각기 다른 쇼트와 연결시켜 의미 생성과정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소박한 음식 쇼트를 앞에 두고 그 배우의 무표정한 얼굴 쇼트를 붙였을 때, 단촐한 음식이 차려져 있고 한 노동자가 허기진 모습으로 그 음식을 간절히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장례식 쇼트를 앞에 두고 연극배우의 얼굴 쇼트를 배치했을 때에는 엄숙한 장례식이 치뤄지고 있고 한 남자가 망자에 대한 깊은 슬픔과 애도의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놀이 쇼트를 배치한 후 그 쇼트를 두어보니 이번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고, 이를 한 남자가 행복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시 말해 연극배우의 무표정한 얼굴 쇼트를 A라 할 때, 각기 다른 쇼트를 앞에 배치함에 따라 이 A 쇼트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번에는 두 쇼트의 순서를 바꾸어 보니 주어와 서술어, 즉 지시하는 것과 지시받는 것의 관계가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배우의 얼굴 쇼트 다음에 음식 쇼트를 배치하면 한 남자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다음 쇼트를 통해 바라보고 있는 대상은 음식인 것으로 판명된다)
이는 영화의 각 쇼트가 각기 독립적인 의미를 갖추고 있는 최소단위로 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다.
각 쇼트는 서로 전혀 이질적인 파편에 지나지 않고, 이 이질적인 파편이 어떻게 맞춰지느냐에 따라 의미는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두 쇼트 A, B 사이에 의미의 연관성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쇼트를 연달아 본 관객은 둘 사이에 명확한 (시간적, 공간적, 개념적)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개별 쇼트는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 다른 맥락으로 촬영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비약은 기계인형 뒤에 숨은 난장이, 다른 말로 보이지 않는 손이 담보하고 있다.
파편들의 혼돈을 종식시키고 안정된 하나의 질서를 구축하려는 서사의 자기 완결성에 대한 욕망이 그것이다.
서사에의 욕망은 파편들의 이질성을 무화시키고 마치 항상-이미 그러했던 것처럼 균질화함으로써 스스로의 질서를 완성한다.
다시 말해 이질적인 쇼트들이 서로의 의미를 보충, 보완할 뿐만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으로도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환상이야말로 영화를 그 안에서 움직이게 하는 힘인 것이다.
그리고 이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영화는 ‘존재할’ 수 있고 관객은 영화를 ‘볼’ 수 있다.
따라서 파편들에 대한 환상 메커니즘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때로는 의심하면서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 환상열차에 올라타기 위해 어떤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지, 이 환상열차는 나를 어디로 인도할 것인지 등에 대해.
[태그:] 영화
기시감
기시감은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속박과도 같은 굴레를 암시한다.
시간 속에서 내가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의 미묘한 교차점, 회기점.
결국은 다시 돌아와야 하는 시원이자 종말에 대한 환상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한바퀴 돌아와서 마주하는 것은 운명과 우연이 동일해지는 환상, 그동안 지각해 왔던 사물의 차이가 무화되는 환상, 충만한 의미가 무화되는 환상, 이 공포스러운 암시는 아닐까.
헤매다 보니 돌아왔고, 이 무의미한 정박지에서 무심코 다시 출발해야 하는 속박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 ‘시간’을 보다 마지막 순간 스치는 생각…
(그러나 ‘시간’은 기시감을 보여주지 않는다. 말 그대로 완벽한 ‘반복’을 보여준다. 이 반복은 이 영화가 그리는 운명이 영화 내적 환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명백한 운명 자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몽상가들
오늘 일하다 말고 느닷없이 영화 ‘몽상가들’이 생각났다.
느닷없는 이유는 이 영화를 봤을 때 말 그대로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없었고 급격히 잊혀진 후로 내 머리를 뚫고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정말 아무런 개연성 없이 머리 속을 뚫고 나온 ‘몽상가들’은 68 혁명이 얼마나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과도 같은 소동이었던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생각은 정말 간단한 키워드를 통해 스쳐지나가는 도식적인 연상작용에 불과하다.
– 이 영화는 한 남매가 그들의 부모가 휴가로 집을 비운 사이 벌이는 소동이다.
– 이 남매는 남몰래 서로에게 근친상간적 애정을 느끼고 있다.
– 남매는 헐리웃 영화에 대한 자아도취적인 시네필인데, 동경해 마지않는 헐리웃의 고향에서 온 꽃미남이 등장하자 그를 쟁취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애정에 균열이 생긴다. 근친상간과 동성애가 혼재한다.
– 남매의 갈등은 여자가 미국인과 성교하면서 마무리된다. 이 미숙아 남매는 부모가 부재한 상황에서 미국인 꽃미남을 통해 이성애, 이종교배의 질서를 회복한다.
– 그들은 헐리웃 영화에 대한 시네필적 열정으로 결속돼 있고, 이 미시적 세계 안으로 침잠하면서 거시적 세계의 변화에 대해 무감하다.
– 그들의 한바탕 소동이 마무리될 무렵 부모는 휴가에서 돌아온다. 그리고 이즈음 발생한 프랑스의 68 혁명은 그들에게 미시적세계에서의 근친상간적, 동성애적 욕망의 좌절을 보상받기 위한 한풀이의 장이며, 동시에 그들이 그 상처를 안고 기존의 질서로안전하게 복귀하기 위한 장이다.
– 결국 68 혁명은 미숙아가 뒤늦게 ‘철이 들게 하는’ 길이었고 세계는 바뀌지 않았다…?
폴란스키 감독은 왜 이토록 68년을 비웃고 있는가…라고 생각할 즈음 옆에서 베르톨루치 감독 작품이라고 귀띔해 준다.
그렇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연상작용이었던 것이다. 개연성 없이.
어쨌든 문득 나는 68년이 혁명에의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줬고 이후 많은 이들은 혁명이라는 단어와 이 말이 지니는 상상력을 잃었으며, 68년은 시대를 단절시킨 것이 아니라 가속화한 시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음?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
…
…
차치하고 생각해 보면 이런 도식은 누구든 끼워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공상이다.
그리고 평소 68 혁명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바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퍼즐 끼워 맞추기를 왜 즐기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