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그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참 무의미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건 내가 그 영화에 합당한 글을 써 낼 그릇 만큼의 세계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나는 부족한 영화에 대해 어줍짢은 말을 늘어놓는 데 더 익숙한 것이다).
‘하나 그리고 둘’이 그런 영화가 아닐까.
나는 이 영화를 너무 늦게 봐 버렸다.
그것도 TV를 통해 우연히 말이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영화가 인간에게 해 줄 수 있는 종교적 위안과 성찰을 이 영화가 제시하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영화는 양양이 말하듯 ‘남이 모르는 일을 알려주고 못 보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이 영화가 그런 일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그들의 뒷통수를 찍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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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빈치 코드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가 항상 따라 다닌다.
물론 소설과 영화의 러닝타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론 하워드 감독은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미스테리적 서사라는 폭주기관차를 선택하고 기호학적 상상과 추리를 포기했다.
또한 폭주기관차의 긴박한 움직임 속은 각 인물들의 진면목을 지워 버렸다.
소니에르와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랭던과 소피를 곤경에 빠뜨렸던 우직한 신사 베르네는 단순하고 무지한 조연이 되었고, 자신을 유령에서 천사로 거듭나게 해 준 아링가로사 주교와 그의 주를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비운의 알비노 사일래스는 광기 어린 악한의 충복에 가깝게 그려진다 – 사일래스의 과거에 대한 설명 신은 이 중요한 인물을 진정성 있게 묘사하기에는 부족했다.
티빙은 성배에 대한 순수한 학문적 열정을 가진 익살 넘치는 영국 노신사의 디테일을 잃어버렸다.
성배를 중심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는 이들과 은폐된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이 공히 절박한 자신의 신념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은 이로써 평면적인 선악 구도로 바뀌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우리는 자크 소니에르와 소피 느뵈의 애틋한 관계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소니에르의 풍부한 상징적 수수께끼의 세계를 잃었다.
이는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소설은 소니에르의 수수께끼를 빌어 성배라는 정체 불명의 환상에 기댄 중세 유럽의 여신에 대한 다양한 은유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나는 여신의 세계를 재조명하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며 부정확한 설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의 악덕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소니에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랭던과 소피가 2천년의 역사를 넘나드는 심리적 시간을 1분도 채 안되는 물리적 시간으로 대체해 버렸다 – 론 하워드는 서사의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여느 종교적 음모론의 흥미 외에는 다른 매력을 잃어버렸다.
영화에서 소피 느뵈는 많은 시온 수도회 멤버들의 호위 속에서 소설보다 더 화려한 여신이 되었지만, 풍부한 상징의 언어들이 생략되어 속 빈 강정이 되어 버렸다 – 또한 소피는 소니에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데 기여한 바가 없는 나약한 여성으로만 묘사된다. 어릴 때부터 소니에르로부터 여신의 상징과 그 비밀을 풀어가는 훈련을 받았던 소피의 ‘성배를 찾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소피는 폐쇄된 공간에서 초조해 하고 있는 랭던의 얼굴을 감싸면서 심리적 안정을 줬을 뿐이다.
나는 내심 소설의 서사를 포기하고 중세 유럽의 어둠 속에 있던 다양한 여신의 흔적들과 성경에 실리지 못한 다른 복음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구원해 내는 영화를 기대했다.
물론 론 하워드에게서는 아니었다.
헐리웃은 정말 대중들이 이 소설에 대해 음모론에만 탐닉하고 있다고 믿는 것일까?
나는 이 영화를 개막작으로 선택한 칸 영화제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고 있다.
p.s. 소설의 저자 댄 브라운은 여기 등장하는 비밀결사를 포함한 다양한 요소들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관련 다큐멘터리를 참고할 때 성배 자체도 중세 어느 작가에 의해 처음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시온 수도회라는 단체도 허구이다. 시온 수도회의 역대 그랜드 마스터 명단을 포함한 이 내용은 1950년경 프랑스의 플랑타르라는 자에 의해 날조된 것임이 드러났다(관련 다큐멘터리는 미국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작했으며 ebs에서 방영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광식이 동생 광태
광식은 윤경이라는 한 여자를 8년 동안 짝사랑하면서도 변변한 내색 없이 속앓이만 한다.
그리고 결국은 그 사랑을 놓친다.
광식은 윤경의 결혼식에서야 비로소 절절한 노래로 순애보를 전달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는 써 놓은 편지를 뒤늦게 보내는 일이 없을 거라 다짐한다.
광태는 반대다.
광태는 수신인(이어야 할) 경재에 도착해 있지만 정작 편지는 없다.
12번의 도장을 찍으면서, 그리고 경재가 자신을 찬 후에 느끼게 되는 공허함은 바로 그 편지의 부재 때문이라고 깨닫는다.
그래서 둘은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앞으로는 편지를 손에 움켜쥐고 적재적소에 그것을 배달하고야 말겠다는 다짐 말이다.
요컨대 편지는 반드시 지참해야 하며 동시에 반드시 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두가지를 수행해야 사랑이라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단다.
그러니 정갈한 편지 한 장 준비됐으면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야 할 일이다.
그런데, 보낼 주소가 여러 군데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