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각본 : 장 피에르 주네

출연 : 오드리 토투, 마티유 카소비츠, 도미니크 피뇽

‘아멜리에’는 인간의 자폐성을 확대하여 판타지를 만들고 인간의 엉뚱함과 설레임을 확대하여 소통과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주네의 세계에서 자폐성이 비정상적이지 않은 만큼 –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은 현실의 우리에게도 차라리 ‘당연한’ 상황이다 – 아멜리의 요상한 ‘작전’은 전혀 회괴하지 않다.

온갖 우연은 필연이 되며 개별 인간들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음이 판타지라는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다루어진다.

이 영화를 통해 주네의 이해되지 못할 판타지는 대중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그의 메세지가 이제 긍정성을 띄는 만큼 우리가 그에게 바라는 달콤한 사탕의 개수는 늘어날 것이다.

아멜리가 사랑스럽다고 느낄 때 그녀에 대해 더 사랑스러운 행동들을 기대하듯이.

주네의 세계가 이제 납득이 간다는 듯이 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 달라는 요구를 해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네의 세계는 아직도 우리의 일그러진 어두움이 고스란히 베어 나오는 공간이다.

(나는 이 어두움이 간직된 아멜리를 단지 비범한 개성으로만 파악해 버릴 것이 걱정된다)

더욱더 어두운 공간으로 침잠할 수 없을지라도 그의 감성이 이 암흑을 간직한다면, 뭇 사람들의 요구로 쉽게 밝은 빛을 말해 버리지만 않는다면…

만인에게 드러난 아멜리를 아직은 사랑스럽게 지켜볼 수밖에…


감독 : 곽경택

사람에게 맹세는 덧없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하리라 다짐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만 영원할 따름. 조오련과 바다거북이를 두고 일없는 내기를 걸던 꼬마 사총사 일당의 든든한 한울타리도 영원할 수 없다. 도대체 우정은 무엇이며 친구는 무엇인지, 그 단어에서 떠오르는 알 수 없는 든든함을 허무는 것은 무엇인지 이 영화는 말해 보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 같다. 준석과 동수를 축으로 그들과 다른 세상에서 관망하는 아니 그보다는 그들의 삶에 조금은 발을 담근 상택의 나레이션으로 풀어내는 친구 단상은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찡하지도 않았고 공허감마저 느껴진다. 사시미 담그는 소리에 소름 돋는 움찔함의 감각만이 남는다.

우선 든든한 울타리를 허무는 것은 그들을 제압하는 현실인 것 같다. 아버지를 부정하려 하나 끝까지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릎꿇은 삶을 사는 준석과 동수는 아버지로부터 태생적으로 부여받은 결핍과 억압의 굴레를 고스란히 안고 서로 갈등한다. 그들의 우정이 무너지는 것은 이러한 아버지의 윤리가 우스꽝스러운 작태로 나타나는 깡패 세계의 일원이 되면서부터이며 지배 피지배의 관계를 습득하면서부터이다. 부정의 의지는 있으나 끝내 이겨낼 수 없는 대상, 그것에 굴복한 나약함을 애써 감추려는 것이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깡패 친구들의 강인한 외면이다.(상택에게서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이나 두려움의 징후를 찾을 수 없다. 차라리 그는 잘 길들여진 순종적인 아들이다. 준석이 상택의 삶을 동경함이 아버지가 가리키는 길로 군말없이 잘 따라가는 천성이나 순종할 수 있는 아버지를 갖추고 있음에 있다면 상택이 그들의 삶에 대한 화자가 되는 것은 탐탁치 못할 뿐더러 가능치도 않은 얘기이다) 이것과는 별개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을 한 남자들의 세계의 이 무뚝뚝하고 짜세잡힌 면면에서 무언가 뜨거운 친근감을 이끌어낼 이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럼 든든한 울타리를 엮어 내는 질료는 무엇인가. 그들 사총사의 우정은 어떤 내용인가. 나는 그것의 정체를 찾을 수 없는 모호함을 느낀다. 어릴 적 몸으로 부대끼며 느끼던 육질의 정감 말고 그들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 그것만이 시원이자 기반으로 내세워질 뿐 서로간의 소통에서는 실패한 사이가 아닌가. 어머니의 자궁 같은 저 먼 기억의 푸근함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도 현재의 너와 나 사이에서 그것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우리 친구 아이가’, ‘친구야’ 따위의 대사는 일상 언어에서 가장 닭살돋는 말 중의 하나이다. 그 말은 나와 너 사이의 관계를 영원불멸하게 친구로서 고정시켜 버리는 악수이다. 이 고정된 상태에서 더이상 친구가 되기 위한 노력은 없다) 상택에 대한 준석의, 준석에 대한 동수의 일방향적인 컴플렉스가 극복될 기회를 놓쳐 버린 이들 사총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애석함 뿐이다. 이 애석함을 곱씹을 겨를 없이 교복과 사투리, 흑백 사진 같은 70년대로 치장해 버리고는 곧바로 사시미질을 해대는 통에 이 영화에서 제목의 의미를 드러내 줄 주제어가 희미해져 버린 것이다.

화해는 나 자신의 수줍은 노력에서 시작되듯이 우정은 나 자신의 힘겹지만 진지한 대화의 노력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대화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나와 너 사이의 변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언제나 친구가 되기 위한 노력 중에 있어야 친구이며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지금 여기서 나와 충돌하고 있는 사람이다…뭔소리 하는 거여…졸려서 원…흐미…

더 셀

테크놀로지에 잠식 당한 정신. 정신분열과 꿈, 대화, 어린이, 상처받음과 상처입힘 등을 가지고 엮어낸 설정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았으리라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스타일의 과잉에 밀려난 상상력. 그 음침한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는 필은 없다. 그 정도 기술에 내놓는 쓰레기 블록버스터들보다야 할 말은 있는 듯하지만, 그 할 말이 안 녹아나고 나오려다 다시 들어가 버린다. 기술이 예술과 조화되지 못하고 예술을 먹어 삼킨 꼴이라는 표현 말고는 더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아쉽다.

엑소시스트

올해 수정 개봉했지만 분명 결말부만으로 따진다면 예전 것이 훨씬 나을 것.(진정한 엑소시스트 메린 신부마저 죽고 고뇌하는 카라스 신부가 그의 몸에 악마를 가두고 자살하는 엔딩이 악마를 물리쳐 내는 엔딩보다 더한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70년대 미국 중산층의 욕망을 자극적으로 잘 건드린 공포영화. 남편과 헤어졌지만 영화 배우로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받으며 딸과 행복하게 살고 있는 맥린 부인. 중산층의 가치를 대변하는 그녀를 위협하는 악령. 그 악령은 단순히 보기에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그녀의 딸에 스며들어 그들의 삶에 침범하면서 그들의 삶 전체를 공중분해시키는 존재. 이 위협적인 타자를 어떤 부류로 상정하고 바라볼지는 자유. 우리는 맥린 부인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단란한 가정이 악령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지기를 바라면서 카라스 신부와 메린 신부의 악령 퇴치 작전의 엄숙함에 깊숙히 몰입한다. 남편 없이도 꿋꿋이 살아나가는 맥린 부인이 유일한 낙이라 할 수 있는 딸마저 잃어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위기의식을 공유하면서 그 두려운 존재의 정체는 그들에게(좁혀 말한다면 경제적으로 당당히 독립한 커리어 우먼에게)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DVD는 기본 영화 외에도 다양한 메뉴가 추가되어 있고 그것을 골라볼 수 있는 재미가 쏠쏠하다. 엑소시스트는 그 타이틀 하나 가지고 무려 다섯 시간을 우려 먹었다. 당시 TV 광고들, 극장 예고편, 감독, 배우 및 각종 스탭들 인터뷰와 비사, 콘티들 등등…리모콘 가지고 깨작거리는 것이 즐겁다. 하지만 구형 TV에서 보면 비디오나 큰 차이 없다. 컴포넌트 단자는 커녕, 둥그런 컴포짓 단자 하나 딸랑 있는 데다 스피커 하나에서 구질구질한 소리가 나오는 TV란…ㅠ.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없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하지만, 쓸모 없어 처리를 요하는 AV 장비가 있는 분은 급히 연락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