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임순례

출연 : 이얼, 박원상, 황정민, 오광록, 오지혜, 류승범

별볼일 없는 인생이 있다. 사실 몇 퍼센트의 삶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별볼일 없는 삶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몇 개 안되지만 그것을 따려고 달려드는 사람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와이키키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삼류 밴드원들의 삶은 특히 별과는 수억광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영화에서 별볼일 있어 보이는 인생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비루하고 지저분함을 강요당하는, 세상 앞에서 발가벗기를 획책당하는 이들 뿐이다. 우리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멤버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모든 인물들의 볕뜰 날 없는 일상에 질식당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잘 나가던 한때가 있었다. 화려한 일류 밴드를 꿈꾸지는 못할 망정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슴에 담을 수 있었던 시절. 강요당한 발가벗음이 아닌, 순수의 발가벗음이 마냥신났던 시절. 룸싸롱에서 만취한 사장 놈들이 성우를 발가벗길 때 그 시절 발가벗고 해변을 뛰어놀던 충고 보이스, 아니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모습이 TV 화면을 통해 오버랩 될 때면 성우의 현실은 더할나위 없는 넝마주이의 모습 그대로다.

‘너 지금 행복하니? 우리 중에 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놈 너밖에 없잖아. 그렇게 하고 싶어하던 음악 하고 사니까 행복하냐구…’ 왕년의 고교 밴드 멤버였던 수철 놈이 실직하고는 찾아와 술자리에서 성우에게 던지는 이 질문에 성우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수철과 인기는 건축회사 사원과 환경 운동가가 되어 괴로운 대립을 해야만 하고, 그렇게 세상은 고교시절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산산이 갈라지게 하고 피폐케 한다.
현재 성우와 함께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꾸려가는 드러머 강수와 키보드 정석, 그 녀석들은 더하다. 강수는 정석에게 자신이 점찍은 여자를 뺏기고는 약물에 취해 버리고 정석은 꼬신 여자 기둥서방의 칼에 맞는다. 강수는 결국 나이트 클럽에서 쫓겨나 버스 운전을 하고 정석은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해체되자 여수로 떠 버린다.
이런 식이다. 임순례 감독은 세상의 가장자리 구석에 놓여 그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는 이들의 출구 없음을 지속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세친구’에서도 그러했다. 세상의 시스템이 옥죄어올 때 그냥 힘없이 질식해 버리는 인물이 그의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 입대를 앞둔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한숨과 함께 줄담배를 필 수밖에 없었다 – 꿈은 현실이 아니고 현실은 꿈이 아니다. 그 누구도 현실에서 희열을 느끼지 못하는 질식 상태. 그러나 이 영화는 조금 다르다. 트로트에서 락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음악들이 영화 내내 울리면서 우리 힘없는 인생들을 응원한다. 그들은 무력하지만 절망하지는 않는다. 아니, 절망의 늪에 빠진 발을 애써 빼내려 한다. 그들은 영원히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지 못할 것이나 다만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지겹도록 늪에 쳐박히는 발을 힘겹게 힘겹게 빼내면서. 음악이, 추억이, 희망이 어리석게도 그 발을 계속 빼도록 만들 것이다.

성우와 그의 첫사랑 인희, 그 외 모든 이들의 물러설 데 없는 삶은 근근이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또 그러해야 함을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마음 속으로 공감하게 된다. 재결성된 와이키키 브라더스, 인희가 성우를 따라 삼류 밴드의 일원이 되었을 때, 남편 잃고 배추 장사하던 그녀는 반짝이 드레스를 입고 ‘사랑밖에 난 몰라’를 감질맛 나게 부르면서 – 그러나 비루함의 한줌도 덜어내지 못할 – 새로운 인생을 맞이한다. 이들의 앞에 놓인 것은 희망과 행복의 성이 아님을 누구나 알지만 이들을 향해 눈물과 웃음으로 ‘계속 나아가라’고 하는 마음 속 기원을 보냄은 누구나 떨쳐낼 수 없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응원이면서 동시에 현실에 힘빠져 자살하기 일보직전인 우리들 자신에게 보내는 응원이다. 그런 식으로 이 영화는 우리를 감싸안는다. 간만에 느끼는 푸근함이다.

성우의 기타 스승이 예나 지금이나 피토하도록 소주 마셔 대며 부르던 그 지긋지긋한 노래가 아직도 귓가에 울린다. 봄비를 맞으며 충무로를 걸으면…

episode 1 : 대구 촌놈이 아트선제 센터 찾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공짜 영화 보기가 이렇게 힘든 거다.

episode 2 : 룸메이트 재학이 녀석이랑 같이 영화를 보고 있는데 왼쪽 편에 어떤 아저씨가 와서 앉았다. 재학이 녀석이 영화 다 보고 나서 옆에서 계속 킁킁 거려서 신경 쓰이더라 하고 있는데 그 사람 얼굴 보니 문성근이었다. 얼른 그 양반한테 사인 받아놨다. 으허…

p.s : 앞으로도 긴 시간동안 시사회 순례를 하고서 10월에 개봉한다고 하니, 시사회를 적극 참여해 보심이 어떨지. 최대 관객 대상 시사회라고 함.(2만명)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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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주세페 토르나토레

출연 : 주세페 술파로, 모니카 벨루치

모니카 벨루치는 분명 매혹적이다. 그녀가 나를 응시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녀의 눈에 빠져들어버린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릴 겨를 없이 그 외모에 눈이 멀어 버린다. 인간이기에 알아볼 인간 신체의 아름다움을 그녀는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타고난 운명일지니.

영화 속 말레나도 마찬가지다. 외모 자체로 그녀는 욕망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 벨루치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본주의가 생산해내는 욕망과 이윤의 놀이 속에 내던져져 있다. – 시실리 마을의 모든 남자들을 매혹시키는 미모는 마을 남자들에게도, 그들의 아내들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하도록 만든다. 2차대전의 비참이 마을을 휩싸는 가운데 놓여진 말레나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이중의 비참을 맛본다.

영화는 내내 말레나를 훔쳐보게 한다. 그녀의 다리, 가슴, 엉덩이, 얼굴을 쉬지 않고 훑으며 욕망을 부추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시실리 마을의 남정네들과, 또는 그들의 아내들과 비슷한 욕구와 시기를 느낀다. 어쩔 수 없다. 그녀는 그녀 안으로 뛰어들 필요도 없이 겉모습만만으로 욕망을 일으키므로.

그러나 그들의, 우리의 욕망은 일그러진 욕망이다. 내 정신이 어떻게 할 수 없도록 솟구치는 물질적 반응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과 우리는 그 욕망을 소유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충족시키려 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렇게 해서 우리의 욕망은 채워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욕망은 내가 느끼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내 욕망은, 실은 다른 사람의 욕망이며 그것의 반영일 뿐이다. 이 욕망의 복제품들은 쉬지 않고 서로를 헐뜯고 싸우도록 만든다. 그러다 지치면, 또는 그 이전에 그것의 위험성을 느낄 때 우리의 해결 방식은 욕망의 대상을 제물로 바쳐 버리는 것 뿐이다. 철학 강의 시간에 들은 바가 있어 하는 얘기지만, 이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원시부족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희생양 제도나 시실리 마을 사람들의 말레나에 대한 폭력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아주 단순하게 욕망하고 그 욕망의 충족이 쉽고 단순하게 성취될 수 없을 때 욕망의 대상을 제거해 버리는 것으로 해결해 버린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며 얼마나 슬픈 운명들인가.

그러나 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레나에게 지니는 욕망은 단지 그녀를 나의 것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육체를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다. – 그것이 남자의 욕구든 여자의 시기든 – 그것은 말레나가 나를 욕망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이 철저히 우리의 입장에서 행해지고 충족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는 그녀가 완전히 내 것이 되었다고, 나와 동화되었다고 믿는다. – 우리는 은연중에 타자와 동화되려는, 나와 다른 존재와의 근원적 단절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는 것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이다. 과연 우리는 말레나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인가. 설령 말레나와 섹스를 함으로써 정복을 과시하며, 말레나를 쥐어뜯고 깔아뭉개며 머리카락을 뽑아 내고는 승리감에 도취한다 하여도 그것은 우리의 욕망을 실현해 낸 것일까.

그래서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의 충족 방식 또는 욕망 자체의 방식이 된다. 타자를 – 즉 말레나를 – 우리의 (욕망의) 자리에다 앉힘으로써 그녀가 내 자리에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내가 그녀의 자리에 가 앉기 위한 노력에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의 욕망을 부정해야 하며 내 욕망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내 욕망을 의식해야 한다. 자연스러울지도 모르는 욕망의 솟구침과 충돌하는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또는 우리의 욕망의 방식은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타자로서의 말레나를 몰래 훔쳐보다가 언젠가 기회를 포착하여 그녀를 포획하여 삶아먹을 생각만 하고 있다. 우리의 욕망은 일그러져 있으며 그 일그러진 욕망을 표상하는 것이 2차 대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다. 자본주의가, 타자를 나의 모습과 동일하게 만들도록 폭압적 교정을 하고 인간과 정신과 온갖 타자들을 돈이라는 물질적 척도로 환원시켜 그것으로 소유 아닌 허위 소유를 가르치고 부추기며 부르주아의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며 생존을 위해 타자를 짓누를 수밖에 없게 하는 자본주의가 결과하는 추악한 본성의 극적인 공연.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잔혹한 파시즘.

사춘기 소년 레나토는 시실리 마을 어른들의 욕망이 일궈내는 한 여인의 비극을 지켜본다. 그의 시선은 관음증적이지만 심하게 일그러져 있지는 않다. 그는 말레나를 사랑하지만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그가 사랑하는 방식은 시실리 사람들의 방식과는 다르다. 그는 말레나를 자신의 자리에 두려 하지 않고 자신이 그녀의 자리에 가 닿으려 한다. 마음에 드는 성자상(이게 맞는 용어인지)에 가 그녀의 행복을 기원하지만 ‘나에게 오면 잘 해 주지’라는 식으로 그녀를 동화시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일면 두려운 타자이기도 한 말레나에게 레나토는 애틋하고 수줍게 다가선다. 말레나에 대한 사랑은 판타지로까지 이어지지만 그가 정신으로 원하는 것은 그녀에게 가 닿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시선은 레나토에 가 닿아야 한다. 그것은 이상도 아니고 단지 보통내기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 뿐이다. 토르나토레는 친절하게도 이 레나토를 우리네 시선의 안내자로 삼고 있지만 우리는 쉽게도 시실리 마을 사람들의 시선으로 영화를 본다. 이 영화에는 관음증이 시종일관 관통하지만 관음증을 즐기라고 내놓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관음증의 유혹 속에서 최소한 레나토 정도로라도 말레나를 수줍게 바라보고, 우리의 관음증적 욕망을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영화의 관음증은 위험한 줄타기인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관음증만 신나게 즐기신 분들에게 이 영화는 몇 천원 내고 1시간 32분간 즐긴 상품일 뿐이다.

감독 : 정지영

출연 : 독고영재, 최민수

 현실이라는 대척점을 벗으로 삼지 않은 이상 속에서 한 인간이 파멸하는 과정은 끔찍하지만 슬프다.

 명길과 현숙이 병석을 떠나지 못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는 현실의 반대편을 병석은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병석이 악마인 이유는 병석이 현실과 가상이라는 두 축 사이의 균형을 너무나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강한 빛은 강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듯이 참혹한 현실은 더욱더 찬란한 이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빛이 꺼져 버리면 그림자도 소멸하듯이 이상은 현실에서 발을 땔 때 자연히 소멸한다.

 그것은 죄악일 것이나 나약한 인간의 슬픈 운명일 수도 있다.

 비참의 한가운데서 영화가 선물하는 가상의 상찬에 메달리는 병석을 쉽게 비난할 수 없듯이. 악마임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듯이.

 그나저나 나는 시네필이 아님이 분명하다.

 나는 병석 일당만큼도 영화를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