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출연 : 말론 브란도, 로버트 듀발, 마틴 쉰

간만에 나타난 과 친구 녀석이 영화 한 편 때리잔다. 무언가 육중한 걸로. 온갖 육중한 영화를 고르고 고르다 결국 다 대여된 것에 실망하면서 선택한 영화는 ‘지옥의 묵시록’. 제목부터 묵직하다. 말론 브란도라는 이름도 꽤나 그 무게를 더하고 있다. 베트남의 열대숲을 비추는 화면으로 서서히 빠져들어간다. 그 육중함을 짊어지고.

베트남전 영화를 볼 때 항상 유념하는 것이 있다. 보통 전쟁 영화가 그러하듯 전쟁의 참상을 담아내고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 본성의 경계를 암묵적으로 설파하지만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는 그 전쟁의 특성상 피해자와 가해자, 특히 가해자임에도 일종의 허무함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미국인들의 입장이 요주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대개의 베트남전 영화는 양키들의 허무함과 죄의식으로 겉 포장을 한 것 같지만 실제 잘 씹다보면 뭔가 캥기는 게 나오기 쉽상이다. 물론 내가 그렇게 인지하면서 영화를 봐 온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베트남전 영화를 만든다는 그 사실 자체가 가해자의 눈으로 보는 입지의 취약성을 항상 담지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이 영화도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태생적으로 가해자의 눈이란 자신의 입장에 대한 변명이나 반성 말고, 진정으로 피해자인 타자의 입장이 되어 볼 수는 없는 아닌가. 그러나 이유없이, 정말 이유없이 민간인을 죽이는 장면이나 전장에서 사치스런 서핑을 즐기려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장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들의 오만방자하고 광기같은 잔인성에 대해 애둘러 사죄하는 듯 하다. 또 하나 철학적인 전쟁 영화라면 빠질 수 없는 전쟁을 통한 인간 본성의 성찰. 그것에 대한 심각하고 진지한 표현이 빠진다면 전쟁 영화는 골 텅 빈 스펙터클의 광기 말고 무엇이 남겠는가. 이 영화에서 군이라는 Fucking할 곳의 기계적 위계질서 속에서 명령에 죽이고 명령에 죽으며 명령에 사는, 개인의 자유의지는 망가지고 짓밟히며 산산조각 나는 참상(모든 조직은 그 올가미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 할지도 모를 일이다)을 검은 그림자 속의 한 인간을 통해 드러내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뛰어난 능력을 소지한 군인이었지만 이중 스파이 베트남인 3명을 살인하고 군 계통의 명령 체계를 무시하고 단독 작전을 감행한 커츠 대령을 제거해야 하는 임무를 띄고 기나긴 지옥의 여정을 시작하는 마틴 쉰이 거쳐가는 지옥의 뒤안길에서, 수많은 질문을 낳고 공감을 하고 이해를 하게 되는 커츠라는 인물은 서서히 검은 그림자에서 얼굴을 드러낸다.

그는 군인이었고, 명령에 사람을 죽였지만 그 살인이 가져다 주는 개인에 대한 떨쳐낼 수 없는 죄의식마저 군이, 국가가 대신할 수 없었고 남을 죽이는 것만큼의 자기학대를 할 수밖에 없었음이 마틴 쉰이 처한 현실과 맞닿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60년대 베트남이라는 공간에 있었던 젊은이들이 함께 고스란히 안고 가야 할 지옥이었다. 결국 지옥이란 내가 나일 수 없고 사람이 의식을 위해 제단에 오른, 무참히 살이 잘려 나가는 소만도 못한 그 순간의 자신에 대한 공포인 것이다. 나는 왜, 무슨 이유로 이 지옥 속에 떨어져 스스로를 죽여가고 있는가.

이같은 육중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 완벽하게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욕구불만의 분노를 느낀다. 자유민주 진영 수호라는 광기의 다른 이름을 한 구호 아래 저질러 놓은 전쟁을 놓고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타자의 눈에서 본 그들의 몰골은 없는가. 양키 자신이 비루하고 잔인한 야수임을 왜 직접화법으로 고백하지 않는가. 자유의지의 상실과 그 지옥의 순례를 통한 회복의 노력을 하는 공간에는 왜 아메리칸만이 존재하고 베트남인은 존재하지 않는가. 왜 아직도 양키 새끼들은 스스로를 세계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국가로 자임하며 세계를 주무르고 있으며 우리는 찍소리도 못하고 있어야 하는가. 운운…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가 볼 수 있는 베트남전 영화는 양키들이 만든 것뿐인 작은 미국의 한 주에서 살고 있는 것을. 베트남에서 만든 베트남전 영화는 없는가. 그 영화들에서 묘사할 잔인한 괴수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

레이닝 스톤

감독 : 켄 로치

출연 : 브루스 존스, 줄리 브라운

간만에 세진이가 영화를 보자고 한다. 장예모의 영화를 부르던 그 녀석에게 떫더름한 반응을 보이자 불쑥 켄 로치의 영화를 들고 나선다. 빌리 앨리엇을 보고 켄 로치로 넘어가 보자고 생각하던 나는 환영이었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하숙방에 보기 싫게 자리하고 있는 중고 TV의 14인치로 시선을 두게 되었다.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의미로 가득찬 이미지로 장식되지도 않는 영화가 가끔 사람의 마음을 울릴 때가 있다. 그 동인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때때로 나와 교감 가능한 사실성,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픽션 속에 현실성이 담겨 있는 경우가 그 중 하나이다. 아마도 레이닝 스톤은 그러한 경로로 나에게 감동을 안겨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사실적이라는 말, 특히 영화 속에서 그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영화 속의 사실성이란 결국 어떤 꾸밈 – 조명이나 미장센, 배우의 연기 등등 작위적 장치 모든 것 – 을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 다큐멘터리처럼 찍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형식적인 사실성이란 달음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벼랑 앞에 서게 된다. 아무리 피사체를 꾸밈 없이 고스란히 카메라 안에 담았다 하여도 그것은 카메라를 통해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담기는 순간 이미 현실과 동떨어진 의미를 지니게 되고 현실이 아닌 프레임 안의 그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편집이 작위적이라는 의미에서 영화가 시작하고부터 끝날 때까지 컷 하나 없이 이어놓는다 하여도 그것 역시 무편집으로 편집되어 버린다. 결국은 형식에 있어서의 사실성이란 내용에 있어서의 사실성이 없이는 그 본연의 역할을 상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발딛고 살고 있는 이곳을 재인식시켜줄 수 있는 내용이 바로 영화의 사실성을 결정짓는 열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너무나도 사실적이다. 우리가 지지고 볶고 싸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를 절망적이면서도 노골적으로 까발린다. 실직 노동자 토미와 밥이 소수를 택하고 다수를 버린 자본주의에 대해 궐기하듯 이리뛰고 저리뛰며 보여준다. 아직 빵과 포도주가 왜 예수의 몸과 피가 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딸의 성찬식 드레스조차 사 주기 힘들어 노심초사하는 밥, 그에게 종교적 신념은 돈 앞에서 너무나도 철없는 고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빚진 밥의 집에 쳐들어와 그의 아내와 어여쁜 딸을 위협하며 횡패를 부리는 고리대금업자의 작태를 보고 있노라면 돈이 없으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과 존중마저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바로 이곳을 그대로 체감하게 된다. 노동자의 일주일은, 더구나 실직한 그들의 일주일은 쉬지 않고 하늘에서 돌이 떨어지는 것처럼 절망적인 삶일 뿐이다.
고리대금업자 탠지에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짓밟힌 밥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범죄자의 대열에 끼어든다. 한계선상에 와 있는 인생 앞에서 밥 뿐만 아니라 토미의 딸도 이웃 사람들도 점점 범죄, 술, 마약으로 망가져만 간다. 누가 범죄자이고 누가 선한 시민인가.
왜 현실이 이러한가. 왜 우리는 이같은 땅 위에서 비루하게 남을 짓밟지 않으면 짓밟혀야 하는 척박한 생을 이어가야 하는가. 캔 로치가 보여주는 이 비루고 팍팍한 주인공의 몇 일간은 끊임없이 그 질문만을 되뇌이게 만든다. 그리고는 밥의 장인어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제도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제도를 바꿀 수는 있을 것이다.’ 돈 앞에서 사람이 사람일 수 없음을 여실히 확인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환기하고 있을 때 이 말을 듣노라면 아직도 소심하고 싱거운 나까지도 기꺼이 그의 진영에 서서 힘이 되어주고 싶다.

자신의 몸을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나눠 준 예수의 삶은, 그 숭고한 정신은 과연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없단 말인가. 성찬식에서 예수의 몸을 나눠주는 신부와 엄숙하고도 처연하게 그것을 받는 밥의 마지막 장면은 그 말을 수없이 되뇌이게 한다.

켄 로치는 신부가 되어 밥의 삶을 쓰다듬고 있었다…

감독 : 오시이 마모루
제작 : 반다이 비쥬얼, 미디어 팩토리, 미디어 팩토리, 덴츠, 일본 헤럴드 영화
각본 : 이토 가즈노리
촬영 : 구제고시 겐젤스키
음악 : 카와이 켄지
주연 : 마우고쟈타 포렘난크, 마우고쟈타 포렘난크, 디스와후 코르스키, 이에지 그데이코

오시이 마모루라는 이름을 잡지나 TV에서나 보아 왔던 나로서는 이 ‘아바론’이 그와의 첫만남이었다. 사실 작가로서 추앙받는 이들의 작품을 실제로 본 것이 별로 없다. 그만큼 나는 박제화된 지식만 가지고 있고 게으르며 빈 깡통이 요란한 그런 놈이다.

아바론은 아더왕의 전설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어릴 적 극장에서 보았고 그 이미지의 잔상만을 간직한 채 최근에 다시 보게 된 존 부어맨의 ‘엑스칼리버’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저주받은 아들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죽음에 이른 아더왕이 호수의 여신들이 호위하는 배에 태워져 유유히 사라져 간 그 곳, 아더왕이 최후의 순간 다다른 섬의 이름이 아바론이라 한다. 그래서 위대한 영웅의 공간, 그곳을 아바론이라 부르며(실은 아발론이 정확한 발음이리라. Avalon이니까.) 가상 게임의 세계에서 영웅들이 잠드는 곳, 그곳을 아바론, 그리하여 이 영화가 다루는 가상의 세계를 아바론이라는 이름의 게임으로 설정한 것이다.

몇몇 잡지 기사나  TV 프로에서 소개하며 밝혔듯이 그 현란한 디지털 화면에 현혹되어 스팩터클을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보겠다면 큰 오산이리라. 현대 테크놀로지의 총아인 디지털의 스팩터클이 대부분 그 자체로 관객을 압도하고 눈을 즐겁게 하는 데에 충실하다면 아바론의 그것은 현실보다 현실적인 가상 공간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이며 – 아니 오히려 가상보다 더 가상적인 현실 공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기 위한 의도가 매우 다분한 화면이었다 – 눈요깃감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그 화면 질감이 비현실적인 관계로 오히려 눈을 불편하게 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한 만큼 영화 속 공간의 국적도 매우 모호하다. 말은 폴란드 말인데 아더왕의 전설과 9 여신에 대한 자료를 구하기 위하 찾은 도서관에서 내놓는 책들은 다 일본어로 되어 있다. 헷갈린다. 그러니 어느 것 하나 규정하고 볼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미래. 어느 지역. 인간 문명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일반인들의 끼니는 알 수 없는 개죽같은 것으로 충당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을 잊으려는 듯 가상 게임에 몰입한다. 아바론이라는 게임은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장악하는 게임 같으며 게임 안에서의 레벨과 스코어 등은 실제 화폐와 같이 유통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게임이 일상생활이자 생계 수단인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그 중 애슈라는 이름의 여자는 우리나라 게임계에서 흔히들 ‘길드’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개념인 파티를 이루어 게임을 진행해 가는 이들과 달리 개인 행동을 하는 ‘파이터’로서 대단한 고수이다. 그녀는 자신이 속해 있었던 위저드 파티가 어느 순간 해체된 과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중 한 멤버였던 머피의 로스트(게임에서 길을 잃고 영혼이 귀환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 듯함)를 일종의 짐이자 의문으로 안고 있다.
그 의문을 풀고자 애슈는 아바론의 최고 경지인 클래스 SA(Special A)에 도전하고 그곳의 관문인 고스트를 잡아내고 만다. 그리고 다다른 클래스 SA, 일명 리얼 클래스. 여기서 화면은 이전의 조작된 화질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실제같은 질감의 공간이 나타난다. 무슨 의미일까. 리얼 클래스에서 그리는 가상 공간을 더욱 현실감 있게 그리려 했던 의도는. 우선 영화 속 인물들이 바라는 세계가 리얼 클래스라는 가상 공간의 세계와 닮아 있음을 의미할 것이고 현실과 가상의 느낌을 뒤바꿔 놓음으로써 이 영화 속에서 현실과 가상을 구분지으려 들지 말라는 마모루의 당부도 숨어 있을 것이며 그 속에서 발견한 머피의 말과 같이 황폐하고 추악한 현실에서 더럽게 살기보다 현실에서는 식물인간일지언정 이 가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매우 어려운 질문이 던져져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현실이라 추정되는 세계의 모습은 황폐하고 비루하게 묘사된다. 그 먹기조차 거북하게 보이는 음식들은 물론이며 애슈에게 접근한 옛 위저드 파티의 동료가 간만에 먹는 ‘진짜’ 계란 후라이, 햄 등을 우걱우걱 먹어대는 것이나…심지어 마모루는 개를 중간중간 등장시켜 인간의 삶을 개와 병치시키고는 한다. 개에게 ‘진짜’ 음식을 먹이면서까지. 이런!

애슈는 자신의 짐이었던 머피의 무사귀환을 목적으로,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사명을 짊어지고 리얼 클래스에 도전했겠지만 리얼 클래스 속의 머피와 맞닥뜨리는 순간 더욱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어렵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이 현실인가 가상인가는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은 듯 하다. 오히려 현실을 부정하는 듯도 하다. 이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리 친절한 내러티브를 가지지도 그리 흥미로운 사건을 준비하지도 않은 이 영화를 현란한 스팩터클에 대한 기대감으로 달려든 이들이 어찌 감당할 수 있을지…보는 내내 나는 불편했고 후덥지근했으며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나 역시 현란한 스팩터클에 일정 정도 기대감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에.
모 영화 잡지에 실린 정성일 인터뷰에서 그가 말한 것과 같이 요즘 주목받는 아시아 영화의 일종의 연대된 듯한 주제의식이 ‘그래도 살아라’라는 전언은 이 영화에도 정확하게 꽂히는 것이었다. 가상이든 현실이든, 추악한 현실이든 간에 그대는 그 속에서 ‘존재’하라. 그 공간을 벗어던지고 부재하기보다는 존재하라. 그 땅 위에 발딛고 서라. 버티고 극복하라. 뭐 그런 말이 이 영화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내가 이 영화를 어떻게 참아내며 보았을까 하는 일종의 경이감마저 든다. 나같이 깃털처럼 가벼운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