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흥식
출연 : 전도연, 설경구, 진희경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그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질문이 너무 거창한가? 누구는 그 목적이 있고 그것을 향해 돌진하는 게 삶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현재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이다라고도 말 할지도 모른다. 그 알지 못할 존재의 의미에 대해 제각기 해답을 찾으려 하고 예술도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의 열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멜로 영화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목적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이성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이루고 지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세상 존재의 모든 의미는 남주인공과 여주인공 두 인물의 포커스 주변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기도 슬프게 하기도 하고 동시에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대변해 주기도 한다.
멜로 영화는 사랑이라는 애매하고 광범위한 말의 유효지대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으로 축소해 놓고 이 두 남녀가 어떤 고난과 갈등을 극복하고 사랑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돌진하여 골인하는지에 모든 관심이 곤두서 있다. 이 안에서 모든 것은 그들의 사랑을 축복해 주기 위해, 또는 저주하기 위해 기능한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 영화에 대해서 소개하는 글들을 읽어보면 우리가 쉽게 지나치고 잊어버리는 일상의 세세한 묘사로 그 일상의 아름다움을 잘 포착해 낸 것을 이 영화의 미덕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더라.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진정 일상으로 보였는지를 심각하게 의심하게 되었다.
그리 신날 일도 없고 매일 반복되는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 속에서 설경구의 그 무기력해진 표정은 일정 정도 아…그게 일상이구나라는 느낌을 가질 정도의 공감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학교도 아니고 보습학원에서 말썽꾸러기 철없는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로 있는 전도연이 그렇게 매일 웃는 모습으로 즐거워 하고 작은 일들에서 환희를 느끼는 것 같은 그 낭만적으로 낙천적인 표정은 ‘자, 봐라. 일상은 전도연의 저 환한 표정처럼 지겨운 것이면서도 일면 경이로운 것들이다’라는 것을 과장광고하기 위한 오버액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매일매일 모아두었던 동전을 예금하기 위해 한 움큼 들고 온 전도연이 동전을 은행 바닥에 어지러이 떨어뜨릴 때 벌어지는 해프닝이나 나뭇잎이나 꽃잎을 하나씩 뜯으면서 ‘기다, 아니다’를 점치는 것이나 요구르트를 입을 따서 먹는 게 아니라 꽁무니를 뜯어 구멍을 내서 먹는, 일상적이면서도 비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생수를 사서 마시다가 남은 물을 꼭 화분에다 붓는 전도연의 습관에 대한 묘사 등은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의 단면이라기 보다는 지루한 일상 속에 일어나는 작은 사건의 소묘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영화의 컨셉은 ‘일상의 세밀한 묘사’가 아니라 ‘일상 속의 비일상에 대한 새로운 관찰’이 아닐까. 일상의 지루함에 활기를 주는 것은 이러한 작은 비일상적 행위와 사건들이고 결국 이 영화가 노리는 것도 지루한 일상의 거듭을 보여주는 화면에 따분해 할 관객들에게 적재 적소에 비일상적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무딘 일상의 화면에 활기를 불어넣게 하고 – 그것도 보통 사람들이 완벽히 ‘저건 나도 그런데’라는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소사건들로 – 동시에 전도연과 설경구의 사랑이라는 목적지까지 가는 따분한 여정이 실제로는 이렇게 작은 재미와 활력으로 힘을 얻는다는 것이 아닐까.
설경구가 CATV로 녹화된 테입들을 들여다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돈을 찾거나 입금하기 위해 찾는 은행, 전혀 새로울 것 없는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그 공간에서 유독 기행(?)을 일삼는 사람들의 모습만 스크린에 담아주는 것 말이다. 또한 설경구가 마술을 배워 쇼를 보여주고 장래에 나타날 자신의 아내에게 미리 보내는 영상 편지를 찍어 두는 것도 그렇게 일상의 지루함에서 비일상의 특별한 느낌을 보상받기 위한 강한 욕구 아닌가.
어릴 적 아버지를 잃어버린 전도연이나 어머니를 여읜 설경구라는 인물 설정도 무언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결핍되어 있어 일상의 세밀한 포착이라는 컨셉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일상이라는 것은 그렇게 무언가의 결핍과 비슷한 속성의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면야…쩝)

어쨌든 이렇게 일상이라 하지만 실은 전혀 비일상적인 것들로 아름드리 채워진 이 영화의 곳곳은 과연 전도연과 설경구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과 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도 – 사실 이제 전도연이라는 배우 자체의 인지도나 미모(?)만으로도 그녀는 평범한 학원 강사 여성으로 볼 수가 없다. 아무리 안경을 씌운다 해도 –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사랑 이야기도 특별한 인물들의 판타스틱한 사랑만큼이나 아름다울 수 있을까를 보여주기 위해 부던히 애를 쓴다.
진희경의 느닷없는 등장과 소멸(?) 역시 이 둘의 사랑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이루기 위한 소도구이다.(개연성 없이 나타나 개연성 없이 사라지는 진희경의 설정은 일면 당황스럽다)

장마진 여름날 한 시내 보도를 지나가는 우산들의 행렬 속의 초라한 한 남자 설경구의 우산을 수직 각도에서 내리 찍은 장면으로 시작된 이 영화는 두 사람이 오봇하고 다정스레 붙어 있을 단 하나의 우산을 찍은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이 개똥 철학 같은 내 영화 감상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이 두 장면의 연관성을 내 나름의 억지 관점으로 해석하자면 이렇다. 우선 비내리는 날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행인들을 찍는 카메라의 각도.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바라보는 눈의 위치에서의 각도가 절대 아니다. 일상적 시선이 아니라 비일상적 시선이다. 우리의 눈의 위치에서 그 우산 쓴 행인들의 행렬들은 다분히 어지럽고 방만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수직 각도라는 비일상적 시선에서 그것은 가지각색의 – 노란 색 등 원색 계통의 우산을 주로 사용한 것 같다 –  원들이 스크린 한 쪽 끝에서 한 쪽 끝으로 이동하는 예쁜 모양이 된다. 여기서 이 영화 속의 미화되고 가공된 일상의 단면을 낚아챌 수 있다. 또 하나, 첫 장면은 무수히 많은 행인들의 어지러운 발걸음들, 우산의 어지러운 움직임, 그 안의 한 남자 설경구.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그 어지러운 움직임의 우산들은 사라지고 비로소 평화로이 움직이는 하나의 원, 우산. 그 안에 있을 설경구와 전도연. 무수히 많은 일상적 사람들 사이에서 낚아 챈 한 남자의 특별한 사랑. 그리고 사랑할 여자를 찾던 외로운 솔로 남자가 드디어 제 짝을 찾았다는 선언! 설경구의 빈자리를 메워 준 전도연.(여성 관객들…좀 씁쓸하지 않은가…)

결국 남는 생각은 이 영화가 일상을 충실히 담았다는 것은 광고를 위한 거짓말이며, 대중 상업 영화에서 지리한 일상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너무 악담만 한다고? 사실 그렇게 일상 속의 비일상을 낚아챈 표현들은 징그럽지 않다. 귀엽고 피식 웃음을 유발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에서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영원한 멜로의 테마를 로맨틱 코메디처럼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 그것은 보는 이에 따라 미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일상의 특별함에 대한 세세한 묘사…라고 하는 것은 교묘한 오버의 판타지에 너무 몰입한 건 아닌가 하는 나만의 허황된 의구심이 든다는 말이다. 일상이 그렇게 지루하고 변화 없이 하품 나오고 자살하고 싶을 만큼이나 따분하지만은 않을 만큼 적당하게 비일상의 요소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다시 한번 발견하는 것이 어떻냐,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도 그렇게 비일상의 요소와 같은 특별한 경험, 아니 그 이상일 수 있다…는 말…그냥 그렇다. 씨네21에서 오은하 아줌마의, 전혀 아름답지 못한 일상이라는 푸념처럼 말이다. 쓰다 보니 헷갈리는군. 일상 속의 비일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그럼 그건 일상의 묘사가 되나 비일상의 묘사가 되나…

감독 : 피터 위어
출연 : 로빈 윌리암스, 에단 호크, 로버트 숀 레오나드

‘나는 신중하게 살기 위해 숲속에 들어갔다. 나는 삶의 골수를 깊이 음미하며 살고 싶었다.’

이 바닥, 남조선의 초,중,고,대…소위 ‘꿈나무’라 하고 미래를 짊어지고 있다고 일컫는 우리네 ‘애들’ – 범생님들과 양아치님들 모두를 포함하여 – , 그리고 소위 교사라 칭하는 이들에게 권할 만한 ‘교육영화’.

영화 속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악덕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미덕을 덮을 수는 없다. ‘교육’이란 나 자신을 위해 생각하는 요령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키팅의 신념을 뼈속깊이 새기고 교육에 임하는 교사들이 과연 몇이나 있으며 노예가 아닌 지배자로서 살아가려는 ‘애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를 반추해 보시기 바란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 우엽이라는 녀석이 있다. 같이 소위 엘리트 써클에서 정열을 불태웠고 공부도 그런대로 했던 그 녀석은 만화와 미술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상상력, 광기와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는 녀석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100년 가까운 역사의 전통을 지닌 명문 고등학교라 자칭하면서 고교 평준화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특설반이라는 것을 운영하면서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해 명문대, 특히 서울대 진학률의 수직향상을 도모하고 있다. 그 녀석도 특설반이라는 데에 있었다. 충분히 똑똑하고 충분히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있는 그 녀석은 고3이 되어서도 미술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집안 사정도 그리 넉넉치 않았던 그 녀석은 부담없는 국립대면 좋겠지만 어떻게든 미대를 가고자 하는 꿈을 키웠었다. 어느 날 의례적으로 진행되던 진학 상담 때였던가, 아무튼 담임 선생과의 면담을 하러 갔던 우엽이가 한 쪽 얼굴이 퉁퉁 부은 모습으로 교실을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모두들 그 모습을 보고 웃어 댔다. (우리는 너와 ‘함께’ 웃는 것이지 너를 ‘대상으로’ 웃는 것이 아니다라던 영화 속 대사가 이 글의 맥락과 전혀 상관없이 떠오르는군) 그 녀석이 미대에 가겠다고 우기다가 담임 선생에게 교무실 입구에서 반대편 벽쪽까지 몰려가며 따귀를 맞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설프게 반항한 그 녀석에 대해 더한 웃음이 쏟아졌다. 그 녀석은 결국 영어교육과를 들어가 낭창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우리네 애들 대부분이 낭창한 삶의 행로를 향해 나가고 있지 않은감) 여전히 그리는 일에 대한 열정을 식히지 못하고 있다.
나도 만화가에 대한 몽상을 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그 녀석만큼 반항하지 못했다. 공주전문대 만화예술과를 반드시 가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어 대던 내가 조금씩 내 재능에 대해 의심하던 때에 고모부까지 찾아와 몰아붙히는 설득의 공세는 나를 여지없이 무릎꿇게 했었다.
그런 기억들이 있어서일까. 나에게 닐의 자살은 이 영화에 더욱더 몰입하게 만든다. 남일 같지가 않고 10대, 특히 고교 시절을 지나고 있는 이 바닥의 ‘애들’ 모두의 앞에 놓여져 있는 절망적인 벽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그리고 피해자를 그 늪에서 꺼내려던 이가 가해자가 되게 만드는 현실 논리가 이제 ‘나’를 찾아가는 애들마저 스스로를 기만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은 도무지 감정적으로 억제가 되지 않는다. ‘Captain! Oh, My Captain!’이라 외치며 책상 위에 올라서는 토드를 보고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인생의 골수를 음미하며 살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나도 완강하다. 내 목소리는 하찮고 가볍디 가벼운 깃털이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빈자리에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논리가 빛과 어둠을 교묘히 동반하여 자리잡는다. 우수한 성적을 위해 우리는 내가 ‘내’가 되는 것을 포기한다. 우수한 성적 확보에 성공한 범생이 애들은 명문대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으리으리한 간판으로 대부분 낭창하게 살아간다. 성적 개떡 같이 받은 양아치 애들은 아둔하고 어리석으며 능력없는 패배자로 간주되며 또 나름의 낭창한 삶을 이어간다. 어중간한 애들도 낭창한 생이 계속되기는 마찬가지다.

키팅은 그 낭창함의 늪에서 애들을 끄집어내려 안간힘인 것 같다.(그 사람의 교육방식이나 그 사람의 사상에 대해 딴죽 걸 생각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학생들이 그들 ‘자신’이 되어 살아갈 것을 종용하는 그 노력 자체이다.) 시로써 대화하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고 획일성의 위험성을 가르치며 다른 것을 인정하도록 가르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것을 가르친다.(조PD 1집의 어느 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좆같은 게 좆같은 거지…’) 그러나 그것은 명문 학교의 운영자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키팅이 가치 없다고 찢어 버린 교과서 시의 이해 서문에 기술된, 시를 이해하기 위한 양축과 그것으로 그려낸 그래프가 그들에게는 더 중요하다. 외워야 한다. 그게 옳은지 그른지의 판단은 학생들에게 없다.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인가 아닌가에 대한 회의는 학생들에게 죄악이다. 스스로 시를 짓고 큰소리로 읊으며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학생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다. 키팅이 찢어버린 교과서의 종이 쪼가리들이 우리 머리 속으로 들어온다. 그 빈자리 속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할 수가 없다. 학교가 강요하고 부모가 강요하며 사회가 강요하니까. 그렇게 나는 또 그 종이 쪼가리들을 머리 속 깊이 간직한 채 또 하나의 부모가 되고 사회의 일원이 된다. 제기랄. 씨발 좆같네.

아, 이 영화의 악덕? 낭만성이라는 한 단어로 말하면 될까? 키팅이 낭만주의자로 묘사되고 ‘죽은 시인의 사회’ 클럽의 멤버들이 낭만주의자로 묘사되며 내러티브가 낭만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나름의 악덕이라고 하면 될까? 가슴이 뜨겁고 행동이 먼저 하며 일단 부딪쳐 보는 것이 가능한 10대들의 이야기라는 것이 이 악덕의 방어막이 될 것이다. 이 영화가 피터 위어 감독의 휴머니즘적 낭만성이 고도로 응축된 영화라는 단서를 어렴풋이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고도로 응축되어 있어 볼 때마다 가슴을 울컥거리게 하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감독 리들리 스코트
음악 한스 짐머, 리사 제랄드
출연 러셀 크로우, 조와킨 피닉스, 코니 닐슨, 리차드 해리스, 자이몬 혼수

글라디에이터

영화 좀 좋아한다는 이들은 다 봤을 글라디에이터를 이제서야 보다. 스펙터클은 스크린으로 즐기는 것이 제격임을 아는대도 우습지만 스펙터클은 극장에서 잘 보지 않는 나로서는 비디오로 출시되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수순.

이 영화를 본 느낌? 역사와 권력에 대한 서사시적 우화. 너무 거창한 것 같으나 느낀 바는 이것이었다.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절대 권력을 쥐고 있지만 권력의 무상함을 체득한, 그러나 이미 늙어버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권력에 대한 거의 본능적이라 할 정도의 탐욕을 지녔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네가지 덕목 그 어느 것도 지니지 못한 그의 아들 코모두스, 그 둘은 너무나도 다르다. 아우렐리우스가 절대 왕정을 접고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막시무스 장군을 적임자로 선택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그런데 막시무스는 로맨티스트이자 휴머니스트이다. 또한 일면 자유주의자의 모습을 띄는 것도 같다.(나의 자의적인 판단이다.) 그는 권력에 대한 욕구를 눈꼽만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다만 철학자이자 성군인 듯한 아우렐리우스에 대해 신의에 바탕한 충성을 바칠 뿐. 그러나 그것이 코모두스에겐 달갑지가 않다. 그의 누이이자 유일한 사랑인(근친상간은 고대 비극에서도 나오는 것 아닌가) 루실라마저 막시무스의 몫이니 코모두스에게 막시무스는 그의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트라우마이자 컴플렉스이다. 이 두 인물 사이의 갈등관계, 고대 비극에서 볼 수 있는 설정 아닌가…(아님 말고)

이 두 인물을 통해 과연 리들리 스콧이 말하려 했던 것은? 아마도 역사의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인 듯 하다.(과연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예술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내가 보기에는)  로마의 황제라면 영화 서두에 나오는 자막과 같이 당시 세계 인구의 25%가 속해 있었을 정도로 거대한 로마 제국의 최고 권력자. 그 최고 권력에 앉고 싶은 욕망이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집중된 권력은 가진 자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고 그것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핍박당할 수밖에 없게 한다. 공화정이 성립되어 권력이 한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은 인류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자연한 수순.
막시무스는 그 자연적 수순의 역사적 흐름을 이끄는 영웅이다. 물론 인류 역사의 전개라는 것이 변혁이 이루어지려면 고난이 있게 마련. 막시무스는 로마 제국의 대장군에서 노예로 전락하여 비참한 삶을 산다. 그러나 역사는 그 고난을 딛고 새로운 변혁의 기치를 드높이는 법. 콜로세움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군중의 지지를 확보한 막시무스는 끝내 코모두스의 폭정을 그의 손으로 단죄하고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역사의 법칙을 영웅적 삶으로 증명해 낸 막시무스는 죽음의 문을 열고 가족의 품으로 가지만 남은 사람은 역사의 흐름을 계속 꾸려나가야만 한다. ‘이제 평온의 세계로 갔군. 그러나 나는 아직 갈 수 없어.’ 살아 있는 우리는 이 역사를 어디론가로 계속 꾸려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흐른다.
리들리 스콧은 이런 것을 말하려 한 듯 하다.

사실 영화 첫 전투장면은 그 처참한 살육 광경과 웅장함이 일면 충격을 안겨준다고 하여 기대하였지만, 나에겐 내 눈을 휘감고 뒷통수를 치면서 짜릿하게 할만한 충격은 오지 않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현대 화기의 무서운 위력을(맞으면 그냥 사지가 터져 나가는) 본 터라 고대 병기, 칼과 방패, 투척기, 불화살 등은 그저 고전적 웅장함의 느낌만을 던져줄 정도였다 – 스콧의 스펙터클한 표현을 백번 인정한다 하더라도. 아무튼 서구인의 무의식에 담겨 있을 로마 시대에 대한 향수의 욕구는 이렇게 웅장하고 고전적이며 영웅적인 서사시를 통해 채워진다.

그런데 이 영화의 함정도 생각해야 할 듯하다. 과연 역사는 영웅이 만들어 가는 것인가. 역사는 위대한 개개인에 의해 변혁을 이루고 발전 – 이 영화는 역사의 발전을 믿는 듯하다 – 하여 왔는가. 아니라고 믿는다. 역사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들을 수호하려던 사람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죽게 했는가. 아니라고 믿는다. 역사는 그 시대를 산 모든 사람들의 의지에 의해 이끌려 왔으며 그 시대가 지향하는 가치를 수호하려던 사람들을 끊임없이 배반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권력은 그들 위에 있어 왔으며 역사는 그들에게 주물린다. 막시무스도 뜻은 이루었으나 권력자 코모두스의 손에 같이 죽음을 맞는다. 권력은 무서운 거다.(그리고 더러운 거다) 아, 그러나 권력도 역사의 흐름은 막지 못한다. 막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그 길을 가고야 만다.
이 영웅 서사시는 단지 이 말을 하려는 우화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