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롤프 슈벨
원작 닉 바르코
출연 에리카 마로잔(일로나), 조아킴 크롤(자보), 벤 베커(한스), 스테파노 디오니시(안드라스) 외

참으로 매혹적이다. 일로나가 그렇고 ‘우울한 일요일’이라는 곡이 그렇듯 이 영화 역시 매혹적이다. 빨려들 듯한 그 매혹의 블랙홀에 휩싸인 느낌이다.

실로 예술이란 그 자체로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인간과 대화를 하고 질문을 던지면서 스스로가 성장해 가는 생명이었다. 안드라스는 ‘우울한 일요일'(여기서는 그 녀석으로 지칭하겠다)을 작곡하였지만 그 녀석이 안드라스에게 던지는 화두는 그 녀석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감성의 단초는 안드라스에게서 출발하였겠지만 그것은 예술을 통해 새로운 의미로 인간에게 다가선다. 그 의미는 완성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무한의 진행형이며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진실을 드러낸다. 언제나 예술은 명료하고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와 닿는 심상으로 우리 내면의 근원을 두드린다.

그 녀석이 던지는 질문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 녀석은 수많은 인간의 생명을 앗아갔는가. 안드라스는 그 답을 찾으려 부던히 노력한다. 자신의 창조물이 살인도구가 되는 것에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녀석이 던져주는 심상을 더욱 침울한 언어로 덧입히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그 답은 안드라스의 삶 그 자체에 있었다.

일로나를 사이에 두고 미묘하지만 ‘줄앤짐’을 연상시키는 리버럴한 사랑의 황금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남자 자보가 일로나에게 매혹된 독일인 사업가 한스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적자생존이란 동물 세계에나 적용되는 말이오. 인간 세상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나는 믿소.’ 그는 일면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장사치로서 잇속에 매우 밝은 듯 하지만 일면 피고용자인 안드라스를 친구로서 대하고 사랑에 있어서도 동등한 처지임을 선뜻 인정하는 것으로 보면 보통 떠올리는 자본주의형 인간은 아닌 듯 하다. 그의 신념은 독일인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지점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것, 도구 이상으로 보는 그의 인간됨은 안드라스가 구해내지 못했던 그 녀석의 화두를 어렴풋 잡아내는 데까지 이른다. ‘인간의 존엄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재겨 디딜 틈조차 없다고 느끼면, 정녕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필요란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녀석은 침울한 어조로 이렇게 되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드라스는 인간답게 산다는 것의 미로를 헤매다가 막다른 길에 다달았음을 깨달을 때 미련 없이 그 녀석의 형체를 고스란히 자기 인생의 형체로 옮겨온 것이다.

결국은 그렇구나. 두 가지를 깨달았다. 음악 역시 내가 모르는 언어로 나에게 계속 속삭이고 있었구나, 나는 얼마나 몰취향의 감성을 지녔길래 그 속삭임의 미동조차 느끼지 못하였을까. 수백의 영혼이 그 녀석과의 대화에서 죽음만이 그 시대의 최후의 출구임을 느꼈는데, 나는 대화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영혼이란 말인가. 아는 만큼 느낀다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자라고 배워온 이 사회의 몰취향, 무감성을 탓할 것인가. 그러기에는 나의 나태함이 그 앞에서 버티고 있음을 느껴버린다. 하릴없이 주는 것만 받아먹는 나태한 동물.
그래도 나름으로는 영화는 내가 대화할 수 있는 ‘그 녀석’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모호한 생각으로 자위한다. 적어도 나의 언어와 영화의 언어가 만나는 교집합의 공간은 음악의 그것보다는 더 클 것이다라는 식의 안일한 생각.

그래서 과대해석을 하며 이 영화를 이렇게 이해해 버린다. 음악의 언어가 영화의 언어 속에서 유난히 빛을 발하는 영화, 그것이 시대와의 주고받음을 이루는 영화, 우울한 음악이 정신으로 승화되는 영화.

감독 곽지균
출연 김래원 김정현 배두나 진희경 윤지혜

하숙집 친구들과 같이 이 영화를 보았다. 같이 한 방에서 이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남자들이란…’

이 영화가 두 남자의 성에 눈을 뜨고, 동시에 사랑에 눈을 뜨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건 말짱 헛거였다.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새롭고 파격적인 섹스 이벤트였다. 이 영화 자체도 자효와 수인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을 뿐, 그 주위에서 그들의 내면을 뒤흔들고 갈등과 화해를 동반하게 하는 혜정(진희경)과 하라(윤지혜), 남옥(배두나)은 자효와 수인의 언저리에서 섹스와 사랑의 대상으로만 보일 뿐, 몸만 보여줄 뿐 속내는 없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우리는 자효와 수인이 되어 그들의 여성 편력, 쌓여가는 성경험을 즐겁게 음미하고 있었으니 도대체가 이 영화가 왜 제목이 ‘청춘’이고 왜 수인이 자살을 하며 왜 자효가 그렇게 사랑에 회의적이었다가 남옥을 통해 사랑을 깨닫는지는 들어오지가 않았다.
새로운 이벤트를 기대하던 우리는 그만 중반을 넘어서면서 지쳐 버렸고 더이상의 파격적 이벤트는 없노라, 그녀들의 몸매는 더이상 볼 것이 없노라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영화가 너무 lose한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고 점점 딴 얘기나 꺼내 놓는다. 속으로 ‘영화 좀 보자구’라고 하면서도 ‘말해봤자 뭐하겠나’ 싶기도 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지만 나도 그네들과 다를 바 없다.
왜 젊은 시절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고통스러워야 하는지 그 답을 알 수 없이 영화는 흘러가기만 한다. Vincent에 얽힌 그 사연도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알 수가 없다. 주위는 시끄럽고 이벤트에만 열광한다. 가뜩이나 이 영화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감을 못 잡겠는데 더더욱 내러티브를 쫓아가는 것이 무리인 듯하다.

그 결과 이 영화를 보고 남는 것은, 내 친구 말처럼 이런 영화 보고 열광하고 푸념할 바에야 포르노를 볼 것이지라는 생각과 청춘은 성적 욕구의 억압에서 그 고통이 출발하는가, 그리고 남자들이 일삼는 여성 물상화의 횡포에 대한 나름의 반성이었다.

우리의 주인공 가축몰이 인형 우디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는 펭귄 인형 위지가 주인 앤디의 엄마 손에 이끌려 팔려 나가는 것을 저지하려다 알이라는 인형 가게 주인의 손에 ‘납치’된다. 알은 한때 인기가 있었던 인형 TV 프로의 주인공인 우디와 제시, 불즈아이, 그리고 프로스펙터를 모아서 도쿄의 박물관에 팔아 큰돈을 손에 넣으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편 납치된 우디를 구하기 위해 정의의 용사 버즈(Buzz Lightyear)를 비롯한 친구들은 위험한 구출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여기서 이 영화의 판타스틱한 모험은 시작된다.

이 영화는 정말 신난다. 장난감의 세계라는 판타지가 있으며 각 장난감마다의 독특한 기능과 개성이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캐릭터를 구축하여 나름의 재미를 선사하고, 그 섬세한 그래픽과 효과가 있어 흥미진진하다. 포테이토가 구출작전에 동참할 때 아내 포테이토가 각 표정의 눈알 하며 갖가지 악세사리를 챙겨 넣어주는 것이나 버즈가 장난감 가게에서 만난 벨트 찬 버즈가 아직도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레이저 광선을 쏘아대는 것이나 Z대왕의 등장으로 빚어지는 스타워즈의 패러디는 그야말로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지경이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디의 영화롭던 과거를 회상시키는 그의 동료 제시와 애마 불즈아이, 그리고 프로스펙터이다. 우디 본래의 모습(부여받은 기능)을 환기시키면서 신나게 가축몰이하던 그 생기발랄함을 발산하는 제시는 더더욱 눈부신 캐릭터이다. 이들이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판타지의 세계는 인간 밖의 또다른 세계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 없이 쉽게 몰입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다. 문득 보다보면 소리를 내지 못해 책장 뒤에 박혀 버려진 위지의 모습이나, 옛 주인에게 버림받아 알의 손에까지 오게 된 제시의 모습은 존재 기능을 하지 못하는 장난감의 실존적인 물음을 제기하면서 처연한 감정을 일으킨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주인이 나를 버린다면, 부쩍 자라서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슨 존재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 이 영화를 내내 관통하는 이 물음은 앤디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획득한 장난감들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 알이 큰 돈 한번 건지기 위해 우디를 앤디 엄마 몰래 슬쩍 가지고 가는 장면에서는 더더욱 처연한 생각마저 든다. 우리가 쉽게 물건으로 인지하고 부수고 가지고 놀고 버리고 바꾸고 하는 그 수많은 사물들이 나름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쉽게 교환가치화해 버리는 횡포(?)는 과연 어떻게 면죄부를 받을 것인가 하는 것 말이다. 이는 더 나아가 우리 주위 사람들과 소외받는 그 무엇들에게까지 가 닿는다. 내가 저 사람을 돈으로 볼 때,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있을 때 그는 얼마나 심각한 고통을 겪을지…이 영화는 작은 동화 속에서 그런 슬픈 감정을 이끌고 존재의 도구화를 발랄한 웃음 뒤로 경고하는 것 같다.

그런데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이 장난감들은 시종일관 자신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때에서만 행복을 느끼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더 이상의 획기적인 자기 존재 인식에 대한 전환이 없다. 제시와 프로스펙터는 이미 주인이 언젠가는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것과 사랑으로부터 소외받는 것들에 대한 자각이 있다. 그러나 결국 이 판타지는 앤디의 세계 속으로 울타리지워져 버리고 만다. 그들은 적어도 ‘지금’ 주인이 자신을 사랑하고 즐겁게 가지고 노는 것에서만이라도 기꺼이 행복해한다. 우디의 구출작전이 성공하고 제시와 불즈아이까지 새 식구로 맞이한 앤디의 장난감들은 이렇게 스스로가 앤디의 도구가 되는 것을 기꺼워하면서 오손도손 살아간다. 좀 과격하게 말해서 착취당하고 사는 것이 그렇게도 행복함을 그렇게 해피엔드로 포장하여 살포하고 마는 것인가.

여기까지 가면 이 영화를 보고 그리 유쾌해지지 않는다. 은연 중에 내가 이 판타지 속의 장난감이 되어 있노라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앤디라는 주인의 놀이개가 되어 행복해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적당히 즐기려면 그 이전의 단계에서 멈추면 되니까. 한발 물러서서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무관심으로 관조하는 데서도 충분히 즐거움을 얻을 테니까. 내가 장난감이 되지 않고 앤디가 된다면 이들이 행하는 구출 작전은 충분히 즐거우니까. 그들의 살아있음을 즐겁게 지켜보면서 인간보다 더한 인간적인 감정이 세세하게 표출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우니까. 버즈와 Z대왕의 비밀을 폭로하는 스타워즈의 패러디처럼 마냥 여기에는 번뜩이는 재치의 유희가 있으니까.

이 유쾌함 속에서도 한켠으로는 ‘내가 장난감이라면’이라는 생각은 생각보다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아, 제시여, 그대는 왜 앤디의 마을을 고마워하는가. 유쾌한 제시…차라리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을 영원히 받으려는 탐욕스러운 프로스펙터가 될 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