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까트린느 브레이야
제작 : 장 프랑소와 르쁘티
촬영 : 요르고 아르바니디
출연 : 카롤린 듀세/사가모르 스테브넹/프랑수와 베를리앙/로코 시프레디
제작년도 : 1999년

프랑스의 여성 감독 까뜨린 브레이야가 만들어 외설 시비까지 이끌어 내었던 ‘로망스’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기존 여성에 대한, 그리고 남성에 대한 관념이나 이미지를 전복시켜 표현한다. 주류 상업 영화에서 나타나는 남성의 성적 욕망과 여성의 대상화는 철저하게 그 자리를 바꾼다.

초등학교 교사인 마리는 모델인 남자 친구 폴을 깊이 사랑한다. 그러나 폴은 오랜 동거 기간 동안 마리와의 정신적인 사랑만을 유지하고 성적 관계는 계속 피한다. 마리는 사랑하는 폴에게서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 없음을 절망하면서 성적 방황을 하게 된다. 까페에서 우연히 만난 파올로라는 중년 남자로부터 육체적인 사랑을 경험한 후 다시 자신이 일하는 초등학교 교장 로베르와의 사도 마조히즘까지 경험하면서 방황하던 마리의 자아 동일성은 주체적으로 재정립되고 자신을 외면하는 폴을 잔인하게 복수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남성이 예전까지 그려졌던 애매모호한 존재로서의 여성과 다를 바 없이 묘사되고 여성이 오히려 내러티브의 중심에 서서 자기 의식의 명확함을 드러내면서 계속적으로 자기 내면에 질문하고 귀기울인다는 점이다. 폴은 그 뒤바뀐 남녀 표상의 한 쪽 극에 있다. 마리는 폴을 끊임없이 욕망하지만 폴은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만일 사랑한다면 왜 그녀와 성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고 왜 점점 그녀를 멀리하면서 개인적인 생활에 젖어드는 것인지, 그리고 왜 마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나이트 클럽에서는 다른 여자에게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내면서 정복욕을 불태우는지 마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넋두리가 계속된다.
폴은 정말 이 영화에서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성적 욕구를 지극히 통제할 수 있거나 또는 스스로 억압하면서 사랑이란 플라토닉이 진실한 것이라는, 사랑은 섹스 없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마리를 기만하고 다른 여자에 대한 정복욕을 품는 것을 보면 폴은 마리 또한 일종의 정복의 대상으로서, 이미 정복한 대상이므로 더 이상의 투자는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리에게 다른 여자는 만나지 않으며 성관계도 맺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실제로 그는 마리와 성관계를 맺지 않는 것처럼 다른 여자와도 성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성적 욕망이란 과연 부재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에게 있어 성적 욕망은 정복욕이라는 것으로 대체된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여성이라는 존재를 성교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정복할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성교는 종족 번식이라는 인적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서만 인지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관념이 차별적으로 구별되어 있다(이 영화에서 마리와의 유일한 성관계 장면에서 마리가 ‘내가 남자가 되고 당신이 여자가 되어’라는 성역할 교환 또는 뒤바꿈의 제안이 나오자 성관계를 거부하고 마리를 내팽개친다). 그에게 있어 남성·여성이라는 성(gender 또는 sex)에 대한 관념은 고정된 체계로서 전복 불가능하게 구분지워진 관념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추측하건대 그는 엄격한 교육(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 교육)을 통해 성적 욕망이 금기시되거나 억압받아 왔을 것이며 따라서 성이라는 것은 번식 이외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억눌린 성적 욕망을 정복욕이라는 일종의 폭력적·기만적 성향으로 대체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리와 성적으로 대비될 뿐만 아니라 욕망에 대한 솔직함에 대해서도 대비되는 존재로서 상징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마리는 자신의 성적 욕망에 솔직하다. 그녀는 폴을 끊임없이 욕망하지만 그것은 폴의 관념 앞에서 좌절되고 그 좌절된 욕망은 다른 남성을 향하는 것이다. 그녀도 성적 욕망에 대하여 솔직하면서도 일종의 환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 환상이라는 것은 자신의 성적 욕구는 남성에 의해 수동적으로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리는 계속 폴의 성기에 집착하고 손과 입으로라도 그것을 소유하려 한다. 이것을 여성의 거세 콤플렉스에 기인한 남성 성기에 대한 동경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일 것이다. 그 환상은 파올로와의 성관계, 건달에게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 그리고 로베르와의 사도마조히즘적 의식을 통해 욕망에 솔직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 욕망은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만이 남게 된다.

이 막다른 길에서, 또는 새롭게 열린 길에서 그녀는 자신의 욕구마저 억누르고 기만하려 하는 폴에 대해 처절하게 복수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며 자아에 대한 깨어있는 삶을 기약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까뜨린 브레이야가 말하려던 것은 아마도 여성도 남성만큼이나 자신의 욕구에 충실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과연 욕구는 억눌려야 하는가 자유로와야 하는가에 대한 반성을 유도하는 것일 테고, 동시에 거기에 대한 해답은 마리와 폴의 대립적 관계 속에 녹아 있는 것일 터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기존 사회가 억압하거나 숨겨 온 여성의 성적 욕망마저 끄집어 내면서 인간이 스스로 억누르는 내면적 욕구에 귀기울일 때에 한 개별 인간을 이루는 정신은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를 억압하는 것들을 전복하자라는 도발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다.

쿤둔

감독 : 마틴 스콜세지
각본 : 멜리사 매티슨
제작 : 바바라 드 피나, 멜리사 매티슨
출연 : 텐진 듀톱 차롱, 규메 테통, 툴쿠 잠양 쿵가 텐진, 텐초 예쉬 파이창, 텐초 걀포, 체왕 미규 캉사
제작년도 : 1998년

‘당신은 진정으로 부다입니까?’ ‘나는 그림자이다. 물 위에 비치는 달과 같다. 중생들은 나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줄 뿐이다. 중생의 열반은 내가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열반은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모든 중생이 한 명도 남김없이 열반에 이르기 전까지 자신의 열반을 유보한 현생 부처 14대 달라이 라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이다. 그는 중생의 열반을 위해 14번째의 윤회를 돌아 두 살 박이 아이가 되어, 달라이 라마의 빈 자리를 대신하는 섭정에게 인도되어 세상에 나타난다. 그는 공산화된 중국에 침략당하는 티벳을 구제하기 위한 무거운 짐을 안고 태어났다.

사실 그는 모든 티벳인들의 그 순결한 정신이 그 순결한 정신을 끊임없이 더럽히려는 세상에 대해 자신들을 인도할 하나의 기둥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결국 달라이 라마라는 존재를 달라이 라마답게 할 수 있는 티벳인들의 종교적 정신의 힘이 분명히 있다는 것만이라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와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을 그들에게는 우리는 잃어버린 것 같은 정신의 순결함이 아직도 흐르고 있다.

종교적 삶이 정치적 현실에 핍박받을 때, 중국이 티벳을 복속시키려 할 때 태어난 티벳의 종교적, 민족적 지도자 쿤둔은 어쩌면 스콜세지의 눈에는 뉴욕의 더러운 거리에서 피어나기를 바라는 구원의 존재와 겹쳐져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콜세지는 선과 악, 핍박하는 이와 핍박받는 이의 구도는 피하는 것 같다. 달라이 라마로 대표되는 티벳의 종교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범위에서만 틀지워지는 것이 아니어서, 쿤둔은 유럽의 중국에 대한 침략의 역사를 이해하려 하고 모택동을 악인으로 단정하지도 않는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그가 앞으로 비폭력의 투쟁을 해 나갈 대상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혹시 섭정이 아이를 잘못 찾은 것은 아닐까라는 쿤둔의 회의에는 정치적 현실에 대해, 고통받는 중생에 대해 한없이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어 어린 나이에 무거운 사명을 짊어진 그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까지 불러 일으킨다.

정서적으로 동화된 상태에서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생기게 되는 티벳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는 오히려 부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색모래로 쌓아올린 겹겹의 만다라를 쓸어 모아 강물에 경건하게 붓는 신은 티벳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이상을 이 모자란 머리와 가슴에 어렴풋이나마 심어주기 때문이다.

순진하기까지 한 순결한 정신을 만나는 것은 내가 부다에게 입는 은혜일지도 모른다. 헐리웃의 그네들도 그러해서 티벳을 사랑하는 것이겠지?

비포 선라이즈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
출연 줄리 델피, 에단 호크
95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내가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보기를 아끼던 ‘비포 선라이즈’가 티비에서 했다. 지나가다 눈에 들어온 영화의 장면은 절대 혼자서는 안 보겠다는 유치한 다짐을 다시금 져버리도록 해 버렸다.

수많은 영화 장르 중에서 보통 영화 속 두 인물에만 촛점이 맞추어져 있는 영화는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화해 등에만 관심을 쏟게 한다. 이는 영화가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고 한 곳에만 심혈을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고 보는 사람들에게도 다른 인물은 어떻게 그려지는지, 주변 세상은 어떻게 그려지는지 눈여겨 볼 수 없게 할 수 있는 일종의 면죄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제시와 셀린느 두 인물의 쉴새없는 대화와 그들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비엔나의 전경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이 영화는 그 면죄부가 지닐 수 있는 특권을 미덕으로써 쓰는 것 같다.

세상에 이런 커플도 있겠다 싶다. 제시는 순진한 소년 같은 열정이 넘치면서도 사람에 대한 신뢰에 의문을 품는 남자이다. 셀린느는 프랑스인 답게 충분히 철학적이고 자기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또 동시에 충분히 낭만을 즐기는 여자이다. 이 남과 여가 유럽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같이 비엔나에서 내리는 것만도 다분히 그들의 특별함을 말해 주지만 그들이 쉴새 없이 나누는 대화는 그 특별함을 넘어 나에게는 보편성까지 가져다준다.
삶과 죽음, 신과 인간, 전통과 현대, 남성과 여성, 자연과 인위, 만남과 헤어짐, 사랑 등 그들은 인간이 떠올리고 추구하며 고민하는 모든 것을 대화 거리로 풀어낸다. 영화 전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그들의 대사는 하나도 놓칠 만한 것이 없더라. 아직 젊어서 세상에 체념하거나 좌절하지도 않고 순수한 열정과 애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들이기에 수다처럼 내뱉는 그들의 대화는 진실되게 느껴진다.
’우리 부모님은 역동의 순간에 젊은 시절을 보냈죠. 전 부모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남들보다 풍요롭게 자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래도 전 갑갑함을 느껴요.  세상 젊은이는 다 똑같은 것 같아요. 역사를 통해 젊은이들은 다들 고뇌하고 괴로워 하잖아요’, ‘만일 신이 임한다면 사람에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에 임할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사랑을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권태를 느끼고 그 사람에게 지친다고 했죠? 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어야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릴 거에요’라는 식의 대사는 유치할지라도 진실한 열정이 넘치는 젊은 남녀의 내면을 고스란히 전해 준다.

영화 내내 그들이 우연히 만나서 서로가 사랑의 느낌을 받고 헤어지게 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우선 제시의 소년같은 눈빛과 열정, 셀린느의 당당하고 솔직하면서도 사려깊음에 반하게 되고, 비엔나의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풍경에 반하게 되며 그 안에서 거리를 거닐고 배를 타며 술을 마시면서 대화하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반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셀린느의 말처럼 그것은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남녀의 애정이 가지는 미묘한 감정을 잡아내면서 그 안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 리차드 링클레이터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반했을 법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그 미모와 연기에도.

그런데 문제다. 나는 언제쯤에나 이 영화를 나만의 셀린느와 함께 볼 수 있을까…-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