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즈리턴

그들의 시작에는 빛이 있을까

제작 반다이 비주얼, 오피스 기타노
프로듀서 모리 마사유키, 쓰게 야스시, 요시타 타키오
감독·각본·편집 기타노 다케시
촬영 아나기시마 가즈미
미술 이소다 노리시로
녹음 호류치 센지
음악 히사이시조
조감독 시미즈 히로시
출연 안도 마사노부, 가네코 겐, 오스기 렌
수입 한아미디어 배급 아트에이전시 나다
제작연도 1996년 상영시간 108분 등급 15세 관람가

 드디어 보았다. 학교 영화 동아리가 주최한 영화상영회는 나에게 한가닥 빛이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기타노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신지와 마짱은 학교에서 말썽만 피우는 인물들이다. 그들 주위에는 만담가가 되겠다는 녀석들도 있고 커피숍 여인을 사모하는 녀석도 있으며 한결같이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며 꿈을 키우는 녀석들이 있다. 학교에서는 신지와 마짱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다만 피해만 끼치지 말라는 당부만 한다. 신지와 마짱은 바보이다. 그들은 어떠한 재능도 없고 세상에서 불필요한 인간으로 취급당한다.
 입시를 위해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할 때 자신의 꿈을 쫓아 내달리는 녀석들이 있으나 마짱과 신지는 그런 부류에 낄만한 꿈도 없다. 자신들이 지닌 재능이란 선생들을 골탕 먹이는 것뿐이다.

 고교 졸업을 앞둔 아이들은 이미 폭력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강한 자에게 약한 자는 비굴하게 복종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이제 그들은 세상에 나가 강한 자의 대열에 서느냐 약한 자의 대열에 서느냐의 기로에 서서 피터지는 경쟁을 해야 한다. 이 피터지는 경쟁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 바람직한 삶과 바람직하지 못한 삶의 구분이란 없다. 경쟁의 양태만 다를 뿐 그들에겐 그다지 다르지 않은 방식의 삶이 기다리는 것이다.
 신지와 마짱은 그 경쟁의 대열에서 이탈해 있다. 약육강식의 법칙에서 도태되어 버린 이 두 녀석들은 우연히 복싱을 접하게 되고, 그 중에서 경쟁력 있는 신지는 그곳에 적을 두게 되고 복싱에서도 도태된 마짱은 예전에 만났던 야쿠자 두목 밑으로 들어간다.

 졸업을 한 아이들은 각기 제 자리를 찾아 사회에 흡수되어 들어갔다. 그러나 어느 한 녀석도 제대로 적응하는 이들이 없다. 세상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또는 룰을 어기는 반칙을 가르친다. 아직 세상의 쓴 맛을 보지 못한 아이들은 세상을 전전긍긍하거나 실패한다. 과연 누가 이 세상을 살 만하다고 하는가.

 여기 폭력이 내재된 반칙 시스템의 가운데에 야쿠자와 복싱이 있으며 그 안에 마짱과 신지가 있다. 잠시 그들은 잘 적응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약한 자는 강한 자의 한 방에 맞고 쓰러지며 강한 자의 발에 짓밟힌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맛본다.
 그렇게 약지도 똑똑하지도 못해 타인을 짓밟고 일어설 만한 힘도 없고 능력도 없던 그들은 결국 고교 시절의 자전거 타던 순간의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내뱉는다. ‘우리 이제 끝난 걸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잖아’ 그러면서 웃는 그들의 모습 뒤에는 슬픔이 베어 있다. 생존이 걸린 무한 질주의 대열에서 비껴나온 신지와 마짱은 서로를 위안하며 또한번 싸움터로 뛰어들 준비를 하는 것이다.

 과연 그들의 새로운 시작에는 빛이 있을까?

 

화양연화花樣年華In the Mood for Love

감독 왕가위
열혈남아
아비정전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
해피투게더 1998 깐느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수상
화양연화 2000 깐느영화제 기술상 및 남우주연상 수상

촬영 크리스토퍼 도일(두가풍)
출연 장만옥/양조위

중년의 부부 두 쌍이 있다. 그들은 같은 집에 세들어 살고 있다. 그들은 어느날 자신의 아내 또는 남편이 서로 내연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사랑에게 배신을 받고 또다른 사랑으로 그것을 어루만지려 한다.

중년에 새롭게 찾아온 사랑이란 힘들고 조심스러울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가볍고 스피디한 요즘 세상에서 보면 ‘집으로 가는 길’의 그들만큼이나 답답하다. 그러나 참고 참고 또 참으면 그들의 사랑에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키노 편집장 정성일 씨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좌파의 이상을 식지 않은 가슴으로 뿜어대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인 중의 한 명으로 왕가위를 거론했다. 그는 왕가위의 작품 전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왕가위라는 사람 전체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빌리면 왕가위는 영화 작품 활동을 통해, 영화와 함께 성장하며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왕가위의 영화를 본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나 화양연화를 같이 본 이의 말에 의하면 왕가위의 영화는 전체를 다 엮어서 볼 때 한 줄로 꿰어 나아가는 곳을 볼 수 있다고 하니 정성일 씨의 말은 빈말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왕가위에 대한 나만의 이미지가 모자이크처럼 명확치는 않지만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사랑에 버림받은 남녀의 또다른 사랑 키우기에 촛점이 모여져 있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라틴 음악을 지겹게 들으며, 또 전화면에서 본 것 같은 영화 속의 데자뷔를 일으키는 화면들을 반복해서 보며 감정 과잉은 아닌가 할 정도의 분위기를 억지 흡수하며 보았다.

장만옥과 양조위는 방을 마주하고 있는 집에 같은 날 이사와서 운명일지도 모르는 스침을 반복하며 사랑의 운을 띄운다. 그리고 그러한 예감은 양조위의 아내가 장만옥의 핸드백과 같은 것을 쓰고 있고 장만옥의 남편이 양조위의 넥타이와 같은 것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며 서로를 보듬으면서부터 구체화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기 위해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다가감을 거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래도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향해 나간다.
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중년의 유부남, 유부녀 사이의 숨길 수밖에 없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같이 본 이의 말처럼 상처를 간직하고 자신을 안아 줄 사람을 찾으면서도 동시에 타인에게 다가가지 못하거나 다가가는 데 서툰 사람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사랑을 잃은 사람의 상처 쓰다듬기로부터 시작된 사랑이라는 점에서 추측하는, 자기 연민의 정서적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들은 이별해야 할 순간을 대비할 만큼 소심하고 이미 결말을 예고하고 있는 사랑을 한다. 그래도 그 사랑의 순간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양조위가 머무는 모텔을 나오다 정지하는 장만옥과 양조위처럼, 그 순간은 그냥 그렇게 멈추어 있고 싶은 순간이다. 거기에 라틴 음악의 끈적끈적함과 서로 스치며 지나가는 슬로 모션과 담배를 물고 있는 양조위를 비추는 스탭 프린팅(정확한 용어인지는 모르겠다)이 더하여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때가 묘한 그리움의 이미지가 되는 것 같다.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치고는 그 줄거리의 전개가 밋밋하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이 영화를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하게 하는 힘은 아무래도 조심스럽고 소심한 그들의 사랑이 주는 아련하고 애타는 정서에 있거나 음악과 화면이 주는 이미지의 정보에 대한 궁금증에 있는 것 같다.

이 영화가 던져주는 정보의 양이 아직 나의 좁아터진 머리와 가슴으로는 감당하기에는 버거워서 억지춘향격의 생각이거나 잘못 짚은 가닥이 많을 지도 모른다. 대충의 느낌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어야 다음에 다시 볼 때 보탬이 될 것 같아 긁적여 본다.

아, 그리고 내가 긁적이는 것들이 모두 내가 떠올려 낸 생각이거나 또는 전적으로 옳은(?) 생각이 아님을 모두들 아시리라 믿는다. 나 역시 보는 눈이 좋지 않아 남의 눈을 빌려 내 느낌이나 생각의 테두리를 가다듬고 어줍잖은 뼈대를 갖추기도 하니 앞으로도 오해 없이 글을 읽어주시기 바란다. 나는 어디까지나 기록하면서 살찌우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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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Glenn Jordan
출연 Alec Baldwin, Jessica Lange, John Goodman, Diane Lane, Patricia Herd
원작 테네시 윌리암스의 동명 희곡
1995년 TV(미국)
– TV 방영명 :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 비디오 출시명 :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오늘 성적 편견에 대한 탐구라는 과목 수업 시간에 영화를 하나 봤다. 제목이 ‘StreetCar named Desire’란다. 그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그런데 알렉 볼드윈이 나오고 화면은 칼라이다.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95년에 TV용으로 만든 영화였다.

수업 시간에 이 영화를 통해 주어진 과제는 스탠리와 블랑쉬 중 누가 문화인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질문을 계속 던져 봤지만 양자택일하라는 과제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블랑쉬(제시카 랭)는 동성연애자 남성을 남편으로 맞아 결국 남편의 자살로 결혼생활에 파탄을 맞게 되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위해 문란한 생활을 한 여자이다.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억압받으면서 점점 신경쇠약에 자신만의 망상 속에서 살게 되었다.
어둠의 탈출구를 찾고자 찾은 동생 스텔라(다이안 레인)의 집은 한껏 과장된 고상함과 까다로움을 보여주는 블랑쉬에게는 너무나 너저분하고 누추하다. 그리고 그곳에는 근육질의 남성을 대표하는 스텔라의 남편 스탠리(알렉 볼드윈)가 있다. 스탠리는 처음부터 블랑쉬를 못마땅해 하고 블랑쉬 역시 그러하다. 블랑쉬가 동생 집에 와서 찾게 된 어둠의 탈출구는 바로 스탠리의 친구 미첼(존 굿맨)이었다. 그러나 스탠리가 미치에게 블랑쉬의 과거를 다 밝히고 블랑쉬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빛을 잃어버리고는 더욱더 망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블랑쉬는 세상으로부터 억압당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 같다. 스탠리는 그 억압하는 기존 질서나 규범 체계인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인물 중 누가 더 문명인인가 하는 것이다. 문명인이라는 것이 뭐지? 야생에서 동물에 의해 길러지지 않은 이상 사람이면 다 문명 속에 있는데. 문명에 잘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문명이 이성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할 때에 이성이 잘 발달되어 인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인가?
그러면 스탠리가 문명인인가? 스탠리는 ‘깨끗하지’ 못한 블랑쉬와 마찰을 빚다가 결국은 폭력을 쓰던데. 폭력도 문명의 속성인가?
오히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 하던 블랑쉬가 문명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문명이라는 것이 위선과 기만의 가면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 본능적 욕망이라는 것이 보통 사용하는 문명이라는 말과 연관지어 생각될 수 있을까?

도대체가 쉽게 답을 내기가 어렵다. 누구 한 명이 문명을 표상하는 인물이라 볼 수가 없을 뿐더러 문명인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도 쉽지가 앖다. 이런 과제를 내어 놓고 강사는 5분 내에 네 다섯 줄로 써 내란다. 그것도 스탠리와 블랑쉬 중 한 명을 선택하란다. 여간 황당한 것이 아니다. 참 살아가면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 많겠다. 이 수업처럼 말이다. 어떻게 나를 속이지 않으면서 살 수 있을까.

영화를 보여줄 것이면 오프닝 장면부터 엔딩 크레딧까지 다 보여줄 것이지 강사는 또 처음 약 5분 가량과 끝 약 5분 가량을 끊어 버린다. 게다가 영화를 보여줄 것이면 엘리아 카잔의 원작을 보여줄 것이지 95년도에 TV용으로 만든 걸 보여주는지.(지는 이 영화를 여러번 봤단다. 원작이 아니라 이 TV용 영화를?)

이런 영화 한 번 보려면 마음먹기가 쉽지 않은데 괜히 강사는 사람 마음만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고 억지 답을 요구해 버렸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