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찬욱
1963년 생
서강대 철학과 졸업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1992), <3인조>(1997)
비평집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1994)

제작 : 이은, 심재명(명필름)
출연 : 이병헌, 송강호, 신하균, 이영애, 김태우

되도록이면 돈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영화는 최대한 비디오로 해결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가끔 꼭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찜해 놓은 영화가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이하 JSA가 그러했다.
같이 지내는 세진이와 꼭 보자는 약속을 해 놓고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드디어 오늘 보게 된 JSA.
우선 대중들이 왜그리도 입소문이 지독히도 났는지, 왜 쉬리의 초반 흥행 돌풍을 앞질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박찬욱이란 감독의 이름이 생소하다. 그 감독의 작품을 봐두었던 게 전혀 없다.(사실 한국 영화 자체를 본 게 별로 없다) 그러므로 감독에 대한 이미지에 고착되어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없었다.(사실 요즘 나오는 영화 대부분이 그렇다)

영화는 분단의 현실 속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판문점. 그 곳에서 남과 북의 병사 사이에 싹튼 우연한 우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남한 병사와 북한 병사 사이에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한 미스테리적 요소를 취하며 관객의 호기심을 잡는다.
포스터 문구대로(여덟발이 아니라 열한 발이었다. 왜 여덟발이라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 사이에 열한 발의 총성 안에 담겨 있는 진실을 –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중심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미스테리적 요소보다도 영화에서 진실이라 보이는, 남북 병사들의 우정, 바로 그 원인이자 과정인 부분에 더 비중을 두고 만든 영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20자평에서 본 글처럼 냉전 이데올로기로 몰아 붙이려는 사람들에 대한 저항 같기도 한 이 영화는 우리네 사람들의 거시적인 현실을 네 명의 병사에 투영한 것처럼 보인다. 왜 우리는 서로를 기만하고 위장하며 이 대치 상황을 지키고 있는가. 무엇을 위한 일이며 누구의 잘못인가. 우리는 북한을 괴뢰 정부로, 우리를 정통성을 확보한 정부로 인식하고 어떠한 상황에도 이러한 공식을 대입하여 판단한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제3자인 스위스 중령 이영애의 눈에는 양자 모두 거짓만을 얘기할 뿐이다. 우리도 그들을 기만하고 우리 자신과 세계를 속이며 그들도 우리를 기만하고 그들 스스로를 속이며 세계와 문을 닫은 것이다.
영화 속 병사들은 대사처럼 분단의 반세기, 오욕의 세월, 그 상처를 뛰어넘어 – 한 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 – 그렇게 우정을 키우고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벗었지 않던가.
어쩌면 간단한 것이다. 그들도 우리도 스스로가 쳐 놓은 울타리를 허무는 것은 말이다. 분단의 현실이란 타자에 의해서만 주어진 것도 아니요,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그 함정 속으로 뛰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스스로가 자기 배반의 역사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어쩌면 우리네들의 자아 동일성이라는 문제를 한편으로는 우스우면서도 조그만 자극만 줘도 터져 버려 비극이 되어 버리는 판문점의 한 이야기를 통해 제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노선도 그들의 노선도 아닌 그 경계선이나 그 바깥에서.
그런 의미에서 중립국 스위스 장교이자 과거 북한군의 딸로 설정된 이영애의 위치는 이 영화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말할 수 있다. 어쩌면 군더더기 인물인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를 그 역할은 실제로는 이 영화를 어떤 이데올로기적 틀로도 해석하지 말아달라는 감독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스위스 장교 소피 중령은 양대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희생된 우리 민족의 슬픈 운명을 표상하기도 한다. 북한 포로 중 포로 교환 때 그 어느 진영으로 가는 것도 거부한 그녀의 아버지는 결국 중립국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세계의 고아가 되어 버린 그녀의 가족사가 그것을 말해 준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남한 병사와 북측 병사 사이의 그 문제의 사건이 일어나는 장면.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가 배경에 깔리면서 총격이 벌어진다. 남한 병사가 북측 병사를 권총으로 죽이는 장면이다. 어쩌면 우리가 역사의 죄인이라는 의미인지도 모를 그 장면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처절한 상징이다. 진정으로 돌아오지 않는 편지 속 사연의 주인공들이 아직도 그러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과연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를, 지금까지 가져 온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바라봐야 하는 시기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는 이 영화.

초반에 남측 병사가 투신할 때 스톱모션을 비롯해 카메라를 회전시키는 장면이나 지뢰밭을 제거할 때 스크린 양쪽에서 불꽃놀이 하듯 번쩍이던 섬광을 처리한 효과 같이 조금 영화 색깔과 어울리지 않는 과잉 기교도 보이기는 하지만 침착하게 내용을 전개시키는 힘이나 미스테리와 드라마 사이에 균형을 잃지 않고 유지하는 연출은 뛰어나다. 박찬욱 감독은 3년만의 신작에서 작품성과 흥행성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의 차기작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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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 강우석
감독 : 박헌수
시나리오 : 박헌수
출연 : 최민수, 황신혜, 여균동, 이미연
한 빵 굽는 사내가 있다. 그는 빵을 굽는 것은 좋은 사랑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다. 자신의 인생관과도 맛물려있는 빵굽기의 미학을 자기의 업으로 삼고 자기 가게도 하나 있고 자기 집도 하나 마련했으며 사랑하는 아내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날 문제가 하나 생겼다. 마냥 웃으며 행복할 줄 알았던 아내가 언제부터인가 한숨을 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에게서, 그리고 평범한 일상에서는 살아가는 의미를 찾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런 그녀를 다시 행복하게 해 줄 방법을 찾아 골머리를 앓던 그에게,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한 남자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나에게도 여자친구가 생겼다? 알고보니 이건 부부교환이나 다름없다… 한마디로 스와핑이다. 윤리의식이 붕괴되고 있다는 요즘 참 문제되는 것들도 많다. 스와핑도 마찬가지이다. 감독은 왜 스와핑을 영화의 소재로 삼았을까?
그런데 솔직히 사랑하는 아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나 말고 다른 사랑 하나 생기는 게 문제가 되기나 할까? 어디까지나 나를 나로서 사랑하고 그 넘을 그 넘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아내라면 말이다.
거 참, 회괴한 논리이기도 하지.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결혼이란 게 엄연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에게 속하여 한 평생 살아갈 것을 강력한 사회규범으로 계약한 게 아닌가? 그 계약을 그렇게 쉽게 깨고는 나를 나로서, 그 넘을 그 넘으로서 사랑한다는 이상한 박애주의로 방패막이를 한다는 게, 도대체가 먹힐 수 있는 얘기인가?
이렇게 보면 영화 속의 ‘나’라는 놈은 참 이상한 놈이다. 이러한 회괴망칙한 논리를 가지고 사랑 운운하니 말이다. 그리고 감독도 참 문제가 많아 보인다. 이런 불륜을 소재로 이렇게 깔끔하고 코믹 풍이 넘치는 드라마 영화를 만드니 말이다.
하지만 감독은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 같으면 한평생 한 남자, 한 여자만을 사랑하며 살 것 같냐고, 살다 보면 중년에 새로운 사랑이 생기지 않으란 법이 있느냐고.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쉽게 속이려 하지 말라고.
‘나’와 아내, 그리고 그 놈과 그 놈의 아내, 서로의 사랑의 화살이 엇갈려 꽂혀 있는 상황에서 쌍쌍이 마주치는 장면은 참 묘한 긴장을 준다. 그리고 내가 그 놈의 아내를 만나고 그 놈이 내 아내를 만나는 현장이 동시에 서로에게 들켜 버렸을 때, 서로가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있던 사실을 창피하게 발각되었을 때, 황당함과 동시에 우리는 온갖 사회적인 관계 때문에 감추어야 하는 마음의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그래, 어차피 살아봐야 반세기인 인생, 결혼 50주년을 앞두고 죽어버린 할아버지의 5단 케잌처럼 순간순간 자기 마음의 단맛을 제대로 느끼면서 사는 것보다 나은 것이 뭐가 있겠는가?
어찌보면, ‘넌 참 편하게도 생각한다, 사는 게 그리 쉬운 건지 알어? 얼마나 힘들고 각박한 세상인데.’라는 훈계조 소리를 한마디 들을 만도 하다. 그래도, 영화는 인생은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제아무리 여기저기 쫓아다녀도 결국 그 본질은 단순한 것이라고.
‘나는 아내를 아내로서 사랑하고, 그녀를 그녀로서 사랑하고 그 놈을 그 놈으로서 사랑한다’
참 세상 편하게 사는 최민수, 주노명의 말이다.
굳이 우리 고전을 들추어 보자면 예기(禮記)에 ‘大樂必易, 大禮必簡’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대충 위대한 예술은 쉽고, 위대한 예, 법은 간단하다는 말이 된다. 온갖 복잡한 체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네들은 정작 쉽고 간단한 본질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닐까?

감독 : 데이빗 린치
출연 : 앤서니 홉킨스

7월 22일, EBS에서 세계명화극장이 방영되던 때였다…
처음 시작부터 무채색의 화면이 눈길을 끌었다…무얼까…
제목이 ‘앨러펀트 맨’이었다. 데이빗 린치 감독의 영화이다…
씨네21을 통해 대충 소개받은 바로는 영국에서 기형으로 태어난 한 인간의 실화를 다룬 휴머니즘의 영화라고 했다…

그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영화로 들어갔다…
영화는 한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태어난, 불운의 기형아가 서커스단에서 혹독한 대우를 받으며 지내다, 한 의사로부터 병원으로 옮겨져 자신의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고 인생의 충만함을 되찾는다는 이야기였다…

아름다운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보기 역겨울 정도로 ‘추한’ 기형의 아들, 이것은 마치 우리내 인간의 속내를 까발리는 설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내내 엘러펀트 맨, 아니 존 멜릭은 자신을 추악하게 생긴 신기한 괴물 쯤으로 여기고 뭇 사람들의 볼거리로 이용해 돈이나 챙기려는 서커스 단장 브리츠의 마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존은 브리츠로부터 자신의 ‘존재의 하찮음’을 강요받으며 사람들과의 소통을 끊어버린다. 매일 존을 구타하며 인간이 아닌, 동물로서의 엘러펀트맨을 존에게 강요하던 브리츠, 참으로 경멸스러운 인간이었다.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관객으로서의 나는 브리츠에 대한 증오가 솟아올랐다.
그런데, 영화는 나에게 브리츠 개인만이 경멸스러운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경멸스러운 존재는 비단 브리츠만이 아니라, 병원 격리실에서 홀로 존재의 환희를 느끼고 있는 존을 또다시 볼거리로 삼아 사람들에게서 돈을 챙기는 병원의 화부나,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는 –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 추악한 존의 얼굴을 보고 경악하고 비웃으며 멸시하는 속된 보통 사람들 무리들이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는 아직 ‘블루 벨벳’과 ‘트윈 픽스’밖에 본 것이 없지만 그 영화들에서 베어 나오는 린치의 주제의식은 보통 사람들에게서 비치는 악마성과 추악한 본성이었고 이 영화 또한 위 영화의 의식과 같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블루 벨벳이나 트윈 픽스와 다른 점은, 억압과 멸시 속에 한없이 괴로워하는 존재인 존에게는 의학적인 호기심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연민으로 그를 돌봐주는 의사가 있고 그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아릿다운 여배우가 있으며, 그를 평생토록 병원에서 마음의 치유를 받으며 지낼 수 있도록 선처해준 영국 왕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데이빗 린치가 다른 영화들에서 보여준 인간의 용서할 수 없는 악마성과 그 희망 없음의 주제가 이 영화에서는 – 비록 상투적이기는 하나, 아니 어쩌면 그의 영화에는 일정 정도의 상투성은 베어 있으니까 – 희망 있음의 장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존 멜릭은 참으로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고 20여년동안 커져 온 피부 외적인 부종과 기관지염으로 끊임없는 육체적인 고통에 괴로워하고 있지만, 그 내면만은 순수하고 깨끗했다. 틈틈이 브리츠 몰래 성경도 읽어왔고 시편의 시적 아름다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존, 로미오와 줄리엣의 감미로운 대사의 아름다움과 사람 몸짓의 동선으로 어우러지는 연극 공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참지 못하는 눈물을 보이는 존 멜릭은 존재하고 있는 기쁨을 진정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데이빗 린치는 이 존 멜릭의 고통받는 운명과 보통의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내면을 통해 예수의 형상화를 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놀라고 무서워할까봐 직접 가서 볼 수 없는 성당의 모습을 상상으로만 꾸민 미니어처 작업을 끝내고 ‘이제 끝났다’라고 내뱉는 존의 대사는 마치 자기가 이땅에 태어나면서 짊어진 예수적 사명에 대한 은유로까지 느껴진다.
한 소녀의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의 그림을 응시하던 존은 -자신은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보통 사람처럼 잘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는 듯이 그림 속의 소녀처럼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는다.

대체 정상은 무엇이고 비정상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고 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그 대립하는 의미에 대해 어떠한 기준을 두고 살고 있는가?
영화에서 처음 존 멜릭이 등장할 때 느꼈던 기괴함과 역겨움의 시선은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어느새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면서 느낄 수 있다. 결국에는 정상 속에 숨어 있는 비정상, 아름다움 속에 숨어있는 추함 보다는 비정상과 추함 속에 숨어있는 정상성과 아름다움이 더욱 값지다는 것을, 더욱 빛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데이빗 린치의 기괴스럽고 냉정한 영화계보에서 유난하게 느껴지는 휴머니즘의 영화를 이렇게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天地不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