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지나는 캠핑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알버트의 집을 찾는다. 지나는 새로 지을 집에 알버트네 앞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유서 깊은 사암 벽돌을 쓰고 싶어 한다. 그 사암 벽돌을 갖고 가도 괜찮을지 알버트에게 부탁하려는 지나는 알버트의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시작한다. 이 때 지나와 알버트의 대화는 도무지 주제를 파악할 수 없도록 겉돈다. 홀로 사는 노인 알버트는 지난 주에 전화를 받다가 넘어졌고 친구들이 찾아왔는데 넘어진 날에 혼자였는지 사람들과 함께였는지 횡설수설이다. 사암을 주겠다고 직전에 말한 것을 잊었는지 몇 번을 반복하는 알버트와의 이 대화가 영화 <어떤 여자들>의 한 시퀀스를 길게 채운다.

<어떤 여자들>에 담긴 인물들의 말은 지나와 알버트의 대화처럼 일말의 명확한 정보와 대다수의 파악 불가능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로라가 읽는 의뢰인의 사건 관련 서신 역시 마찬가지다. 몇 분에 걸쳐 서신 내용을 전해 들어도 우리는 로라를 집요하게 찾는 의뢰인이 처한 피해 사건의 내용과 법리적 곤경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목축업자 여인은 과묵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의 과묵함이 파악 불가능한 말이 일으키는 혼란을 줄여주는 덕분에, 역설적이게도 서사의 흐름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목축업자 여인은 엘리자베스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 후 헤어진다.

이 영화를 서사와 메시지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 영화에서 인간의 언어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서사를 온전히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과장하자면 영화 곳곳에 삽입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것처럼, 귀기울일 것 없이 지나치듯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 음성과도 같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시퀀스는 앞서 말한 지나와 알버트의 대화 장면이다. 여기서 횡설수설하던 알버트는 집 앞 거친 초원에서 들리는 메추리 소리를 흉내 내며 마치 “How are you?”와 같이 들린다고 말한다. 지나는 알버트가 흉내 내는 다른 메추리 소리에 이내 “I’m just fine”이라고 응답한다.어쩌면 이 때가 지나와 알버트가 온전하게 대화하고 있는 유일한 순간인 것처럼 느껴진다. 지나가 자신의 목적을 숨기고 의례적으로 건넨 첫 인사에서는 실패한 알버트의 안부가 메추리의 소리를 통해 응답한다. “How are you?”와 “I’m just fine”은 이 영화의 다른 언어와 달리 감정과 서사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희박한 주체의 감정과 서사의 여백을 자연과 사물에 대한 감각이 채운다. 누군가는 이것이야말로 서부 영화 전통을 떠올리게 하는 대지의 물성이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미국 북서부 몬태나주 소도시와 외곽 자연의 겨울에 대한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빛과 공기와 소리가 이 영화에 가득하다. 그런데 이 영화의 물질적 감각이 이끄는 느낌은 여러 층위가 혼재되어 있는 것 같다. 앞서 말한 메추리의 소리처럼 느슨하게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대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타자와 주체의 구분을 뒤섞고 혼동시키기도 한다.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고 있는 로라 옆에서 들리는 그렁그렁 코 고는 소리가 뒤늦게 로라의 반려견이 내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는 소리에 대한 감각이 우리의 인식을 교란하는 지표가 된다. 또는 로라가 들른 쇼핑몰에서 인디언 복장을 한 사람들을 카메라가 오랫동안 지켜 볼 때에는 미국의 역사적 타자가 상기되기도 한다. 그리고 물론 목축업자 여인이 말을 끌고 목장을 나설 때면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눈 덮인 거대한 산맥이 물자체적 물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물적 감각은 의미를 무화하기도 하고 대리하기도 하며, 대체하기도 한다. 감각적 정보가 지닌 이런 복잡한 면모를 특정한 의미망으로 수렴시킬 방법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보탤 수 있는 말은 리빙스턴 시내의 로라, 도시 외곽 캠핑 지역의 지나, 그리고 벨프리라는 시골 마을 목축업자 여인이 그들을 둘러싼 다양한 양태의 타자성을 경험하는 동안 우리는 낮은 밀도의 정서 안에서, 그 경험을 스치듯 감각해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본다면 영화 안에서 세 여성 인물이 남성, 여성 타인과 관계 맺는 양상에 대한 페미니즘적 가능성도 포괄해 생각해 볼 여지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 의문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왜 세 인물을 각자의 지평에 따로 존재하게 두지 않고 굳이 연결점을 만들려 하는 걸까. 로라의 내연남이 지나의 남편 라이언이라는 것, 목축업자 여인이 리빙스턴 시내 법률 사무소에서 기어코 로라를 지나치듯 만난다는 것이 이 황량한 여백의 세계를 사는 세 여인에 대한 감각을 운명적으로 묶고 싶게 만든다. 내가 감각한 것은 그들의 운명일까 그것을 덮고 있는 무심한 물리적 세계일까.

<해안가로의 여행>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나로 하여금 영화의 허구적 세계에 깊숙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기괴한 장애물이 영화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영화 <큐어>에서 경찰의 공개 심문 자리에 선 마미야가 “본부장, 당신 누구야?”라고 내뱉는 질문이 일으키는 효과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관통하는 관심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자아가 텅 비어 버린 듯한 마미야는 끔찍한 최면 연쇄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앉은 심문 자리에서도 태연하다. 그리고 당신 자신에 대해 아무 말이나 해 보라는 후지와라를 향해 오히려 몇 번을 반복해 본부장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되묻는다. “뭘 묻고 싶은 거야?” 후지와라는 마미야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비껴가려 한다. 마미야의 치명적인 몇 마디가 주체에 균열을 가하고 보는 이조차 당황하게 만든다. 기괴함이란 이처럼 감당하기 힘든 근원적인 질문을 마주하고 불안해진 주체의 신경증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자신의 영화가 그런 기괴함을 불러 일으키는 지점을 품고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종종 생각하게 된다.

현실의 기술 복제 예술인 영화는 현실적 허구로서 자기 타당성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 들이기 힘든 환상이 출현할 때, 영화는 때로 관객이 품을 만한 의심과 검증을 스스로 대리 수행함으로써 이 허구적 세계의 현실성이 믿을 만한 것임을 납득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속임수에 가깝지만, 영화가 자기 세계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나면 관객은 그 태도를 따라하게 된다. 가상의 세계를 그럴 듯하게 완결된 것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영화는 시치미를 떼고 자기 검증을 해 본 척 하며 의심스러운 틈을 봉합하는 것이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도 이 같은 봉합이 수행된다. 사고 3년 만에 돌아온 남편 유스케가 미즈키 앞에만 보이는 허상은 아닐까 하는 의심은 지하철 역무원과 대화를 하는 장면부터 서서히 해소된다. 미즈키 이외의 타인과 대화하고 관계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가 보여 주면서 우리는 유스케의 육체성을 믿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상하게 견디기 어려운 어색함을 느껴야 했다. 유스케가 영화 속에서 정말 실존하는 인물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온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영화는 그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유스케와 같은 존재라는 시마카게가 깊은 잠에 빠지고 나서 시마카게의 집이 폐허로 돌변하는 것이나 후지에의 죽은 동생 마코와 미즈키의 죽은 아버지의 육신을 대면하는 이 영화의 세계를 제시해 주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나는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이것이 영화가 허구의 자기 검증 뒤에 남겨 놓은 이상한 잔여물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한 아이가, 그리고 시장에서 어떤 승려가 유스케를 향해 보내는 응시에 붙잡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유스케의 육체성을 확인시켜 줄 정도의 검증에 그치지 않고, 응시하는 눈빛을 보태어 놓았다. 그들의 응시는 영화가 구축한 허구적 세계에 일부러 내 놓은 갈라진 틈 같았다. 텅 빈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영화 자신도 사실 유스케를 이상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그 순간을 지난 이후에도 영화가 자기 세계가 잘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음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제국주의의 잔혹한 실체를 알아 버린 사토코가 홀로 제국주의의 심장과 대면해야 할 상황에 처하자 그의 정신이 무너진 것처럼, <해안가로의 여행>은 유스케를 의심하는 영화 자신의 응시를 감지하고도 이 허구적 세계를 계속 믿으며 따라 가야 하는 일이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그러나 구로사와 기요시는 광기를 경험하더라도, 혹은 그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어떤 것과의 대면을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레 미제라블>

이 영화는 파리 외곽의 작은 도시 몽페르메유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르포르타주다. 이 고착화된 슬럼 구역에는 이민자와 빈민이 밀집되어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가 혼재하고 무슬림과 집시가 드나드는 이 곳은 21세기 비참이 압축된 공간이라 할 만하다. 영화는 이들의 삶을 탐사한다. 영화가 이 지역을 담당하는 강력반 경찰의 행적을 따라 가기는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그들과 동행하는 기자의 시선에 가깝다. 

경찰은 이 지역의 주민들을 경계하고 적대한다. 범죄와 사건이 끊일 날 없는 몽페르메유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위험 인물이다. 실제로 몽페르메유의 사람들은 위험하다. 누구는 살인을, 누구는 절도를, 누구는 폭행을 저지른다. 이 영화는 결코 몽페르메유 사람들의 선량한 이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반대로 경찰이 의심하는 대로, 그들 중에서 결국 사건의 범인을 찾아 내 보여 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에 대한 이해를 단지 잠재적 범죄자와 같은 수준에 머물지 않고 싶어진다. 이것은 어쩌면 하층민과 빈민가의 삶을 다루는 영화에 대해 지니게 되는 오래 된 관습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몽페르메유의 삶을 다른 수준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삶의 표면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계급적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걷어낸다는 뜻이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하다 — 이데올로기의 층위가 옅어지는 순간의 현상의 표면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와다가 이사의 집을 수색할 때 마주치는 아프리카식 계모임이나 공터에서 어울려 노는 아이들의 인류학적 현장뿐만 아니라,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경찰들의 소진한 모습에서도 그 표면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 내내 우리가 지켜보는 표면은 몽페르메유 사람들의 적대감 서린 눈빛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화염병을 들고 경찰을 노려 보는 이사의 눈빛은 순수하게 응축된 적대감 그 자체다. 범죄 사실보다도 이들을 더욱 위험하게 보이게 하는 이 눈빛이 어떤 현상의 표면에 가깝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경찰의 태도에 상응하는 반응이라고 서서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정 범죄 혐의와 상관 없이 모든 주민에 대해 경계하고 적대적인 경찰과, 그것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몽페르메유 사람들을 지켜 본다. 경찰과 주민들의 적대는 서로에게 표면이자 심연이다.

시민을 존중하고 절차를 엄격하게 지키려 하는 경찰 스테판은 <레 미제라블>을 경찰의 폭력에 대한 빈민촌의 저항 같은 장르적 세계로 축소되지 않도록 만드는 인물이다. 동시에 그 역시 대결의 현장에 연루됨으로써 영화 속 적대를 당사자의 차원으로 고정시킬 수 없게 하는 균열 지점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몽페르메유에서 벌어지는 일의 표면으로부터 그 이상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는 이를 강렬한 사건의 표면에 뛰어들기 전에 이미 암시한 바 있다. 즉,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프랑스 국기가 휘날리는 월드컵의 열기가 환유하는 국가, 불평등하게 구조화된 체제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더해, 중심부 국가 내부에서조차 본원적으로 주변화를 필요로 하는 세계체제 원리의 이데올로기적 시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몽페르메유의 사람들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위험에 포획되어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적대적인 눈빛은 세계의 적대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눈빛은 세계의 폭력에 대해 나 있는 입구이자 출구다. 이 순환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없을까? 이 근원적인 질문에 답할 지혜가 내게는 없다. 다만 <레 미제라블> 안에서 말하자면 스테판이 이사를 겨눈 그 총을 내려 놓는 것만큼 시급한 것은 없어 보인다. 스테판의 총이 이사의 화염병보다 더 파국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