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더 하우스>

<인 더 하우스>는 대체로 빛을 과장하지 않는다. 클로드가 라파 가족의 밤을 탐사하는 문제적인 장면에 들어 찬 빛과 어둠의 표현주의적 충동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는 빛은 부드럽고 그림자는 옅게 다루는 편이다. 자연광처럼 느껴지는 빛이 여러 각도에서 고르게 인물을 비추어 얼굴의 굴곡이 도드라질 겨를이 없는 야외 낮 장면을 보면 오히려 이 영화의 빛이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 와중에 빛과 어둠의 대조가 두드러진 장면이 나오면 이내 그 예외성 때문에 눈여겨 보게 된다.

광원이 화면 안에 놓여 인물과 사물에 깊은 그림자를 만드는 장면이 클로드와 제르망의 관음적 욕망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뻔한 독해일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가 조성해 가는 빛을 다루는 방식의 평균치를 갑자기 벗어나기 때문에 이루어 내는 효과는 크다. 화면 안에 자리한 광원은 시각을 성립시키는 빛의 존재를 뚜렷이 상기시킨다. 감각의 조건으로 머물지 않고 인물, 사물과 함께 화면을 구성하는 존재로 전면 등장할 때 빛은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는 영화적 진술이 된다. 라파 부부의 대화를 엿듣다 황급히 돌아선 클로드가 벽에 걸린 파울 클레의 그림을 보는 척하는 장면에서 건너편 벽의 조명 빛이 클로드가 은폐하려는 것을 동시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것처럼, 화면 속 광원은 그 자체로 말하는 제3의 존재다. 제르망 부부가 여전히 클로드의 소설 이야기에 여념이 없는 극장 속에서 영사기 빛이 시각화하는 거대한 열망의 크기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며 빛에 대한 생각을 촉발하는 것은 사실 화면 속 광원보다 극대화된 조도가 만드는 느낌이다. 클로드와 제르망이 클로드의 소설에 대해 논하고 이야기의 방향을 모색하는 교실 장면은 한쪽에 난 창문으로 쏟아지는 빛이 너무나도 밝아 교실 내부를 환히 비춘다. 그 밝기가 야외 낮 장면보다도 밝아 의아할 정도다. 빛이 측면에서 사선으로 들어오는데도 인물의 얼굴 그림자는 부드럽고 빛을 받은 실루엣이 때로는 밝게 번지기도 한다. 반사판으로 그림자를 조절하고 최대의 조도를 실내에 쏟은 이 장면이 교실 내부를 신전과 같이 만들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라파 가족의 일상을 두고 자신의 욕망을 투사해 소설을 만드는 클로드와 그 작업을 지도하는 제르망이 이 순간 어떤 신적 권능을 지닌 것처럼 심취해 있음을 극대화된 조도가 드러내고 있다고 느끼고 나면, 이 영화가 빛을 신전과 현실, 그리고 심연의 세 단계로 나누어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클로드와 제르망의 신적 권능이 현실과 재현의 세계를 뒤섞을 때 벌어지는 참상을 지켜 보면서 영화는 예술의 존재 의미를 냉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지닌 다양한 층위의 냉소가 향하는 것은 결국 착취하는 관계에 대한 것이다. 제르망이 아내 쟝과 클로드를 착취하듯이 클로드 역시 제르망과 자기 삶을 착취한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양자적 관계의 군상은 자기 결핍을 다른 것으로부터 보상 받으려 할 뿐 아니라 독점하고 침해하는 양상으로 점철되어 있다. 예술을 본받을 것 하나 없지만 미적 감각은 키워 주는 허영의 도구로 대하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클로드의 소설 작품 역시 현실에서 인간의 삶을 착취하여 완성된다.

현실을 착취하는 예술의 탐욕을 여실하게 보여 주는 마지막 장면은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이나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카메라의 응시가 관음증적 착취의 시선으로 이행하는 것은 그 렌즈가 누구의 눈으로 기능하는가 하는 문제에 달렸음을 상기시킨다. 이 장면은 이중으로 덧댄 눈에 가까울 것이다. 한 프레임을 가득 채운 아파트의 각 세대를 관음증적으로 바라보는 클로드의 시선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영화 자신의 시선, 그 중층적 시선의 결이 이 장면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테다.

그러나 이에 반하는 예를 들어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클로드가 몰래 집 구석구석을 도둑질 하듯 뒤져 보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숨죽이며 벽에 붙어 섰을 때, 카메라는 클로드가 불가능한 시야까지 움직여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에스더를 확인한다. 이 때 카메라는 전적으로 클로드의 확장된 눈이 되어 서스펜스를 만들어 낸다. 서스펜스의 법칙 아래 카메라는 오로지 훔쳐보는 자의 시선만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카메라 시선의 지위를 자기 냉소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사후적으로, 그것도 예외적으로만 가능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순간을 만나기 위해 이 영화는 위험한 질주를 해 본 것이다. 영화 안에서 신적 권능을 지닌 카메라 시선의 문제는 그 시선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프로듀서로 일해 온 찬실이는 평생 함께 작업해 온 감독의 돌연사로 한 순간 삶의 기반을 잃어 버린다. 작가주의 영화로 유명한 감독이 떠나고 난 후 뒤에서 실무를 챙겨 온 프로듀서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찬실이는 즉시 경제적 곤궁에 처하고 소명과도 같던 영화 만드는 일을 지속할 길도 찾지 못한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이 상황을 더 비참하게 느끼게 만든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이처럼 자신을 추동하는 근거를 잃고 삶의 나락에 빠진 찬실이에게 다시 일어서라고 응원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자기 반영적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찬실이가 영이에게 거절 당한 후 눈물 젖은 버스를 타고 돌아올라치면 주인집 할머니가 냉해를 입고 죽어 가는 꽃을 보며 “불쌍해라” 말하는 숏이 뒤를 잇고, 찬실이가 할머니의 시를 들으며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고 나면 다음 숏에서 소피의 프랑스어 수업 시간에 ‘너도 그렇다’라는 시를 읊는 영이의 목소리가 이를 이어 받는 것처럼, 영화는 스스로 찬실이의 감정을 반영하고 응답한다. 한겨울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숨 죽은 열매만 가까스로 매달고 있는 모과 나무를 바라보던 어느 외국인은 찬실이가 그 모과를 동일시하도록 이끄는 영화 자신, 그리고 작가의 응시를 전한다. 영화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찬실이의 마음을 살핀다. 귀신 장국영은 그 자체로 찬실이가 사랑하는 대상이 찬실이에게 되돌려 주는 반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오직 찬실이만 모른다.

여기서 이 영화의 감흥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찬실이가 절망에 빠져 자기 자신조차도 지각하기 힘들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화가 찬실이의 욕망을 전개하고 의인화한다. 찬실이는 모르는 찬실이의 마음이 곧 영화이고 그 뒤에 숨은 작가의 마음이 되는 세계에 참여하고 나면 우리는 찬실이를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처럼 확정된 태도의 세계가 단지 순진한 위로의 결을 넘어서게 만드는 것은 찬실이라는 인물 자체 덕분이다. 찬실이는 본래 자신이 사랑하고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데 진심인 인물이다. 영화를 더 이상 만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의 앞에 놓인 폐허가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찬실이가 맹목적이고 순진한 쾌락원칙 주의자라고 생각할 때쯤 찬실이의 다른 면모를 확인하게 된다. 찬실이를 측은히 여긴 배우 친구 소피가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하자 찬실이가 직접 일을 해서 벌겠다고 말할 때부터, 그가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원칙의 문제를 비껴가지 않고 투쟁하는 것과 함께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찬실이에게 영화가 알려 주려는 것은 “당신은 이미 당신이 원하는 것을 두고 계속 투쟁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찬실이를 향하는 이 메시지가 우리에게까지 반영되고 나면 이것을 단지 순진한 자기 승인의 기제라고만 말하고 싶지는 않게 된다. 우리는 투쟁하지 않는 것은 그것대로 치러야 할 대가가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찬실이가 사랑해 마지 않던 영화의 흔적을 폐기하고 영화 마을을 떠나려고 할 때 귀신 장국영의 눈물과 주인집 할머니의 시가 그를 멈춰 세운다. 지금 찬실이가 떠나려고 하는 그 곳이 갈증의 대상이 아니라 궁금한 대상이 되었다는 자기 고백을 떠올리면 찬실이는 앞선 두 붙잡음으로부터 끝내 자신이 외면할 수 없는 이끌림을 재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이를 예술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싶은 욕망에 대한 근본적인 각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만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찬실이에게 원경험을 새긴 영화 <집시의 시간>이 찬실이를 찾은 순간, 영화처럼 아코디언을 둘러 메는 찬실이를 카메라는 천천히 가까이 다가가며 바라본다. 집도 돈도 남자도 없이 청춘을 보낸 채 지루한 시나리오를 써 내려 가는 찬실이가 영웅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12월 비평의 편지 주제는 ‘집에서 본 영화, 영화관에서 본 영화’였다.(링크) 이 주제에 대해 내가 기대한 바는 사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다루었던,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관람 행위의 사회성에 대한 논의였다. 극장에서 보는 영화만이 영화적 체험의 본령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나는 언제나 벤야민의 이론을 떠올리며 의식하고 있었다. 벤야민을 사랑하지만 나는 이 이론에 대해서만큼은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벤야민을 오해해 오고 있었거나.

오랜 시간 수많은 시네필로부터 들어 온, 암실(Darkroom) 속에서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본다는 것의 고유함과 위대함을 찬양하는 태도는 라이트룸(Lightroom)의 시대에도 다른 환경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취향의 편협함에 불과하다. 그러나 벤야민이 말하는 극장이 가능케 하는 집단 관람의 사회성은 다른 문제였고, 그것을 영화의 고유한 체험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게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중 이주연의 영화음악에서 이상용이 하는 말을 들으며 영감을 받아 오래 전 트윗한 적이 있었다.(링크) 이를 다시 부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역사 초기에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와 함께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도 있었다. 키네토스코프는 만화경과 같아서, 뷰파인더 같이 작은 창을 통해 작은 암실 통에서 영사되는 영상을 감상하는 장치다. 이것은 오직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기술복제시대의 초기는 더 많은 관람 전파를 위해 거대한 스크린과 거대한 암실이 필요했고 영화 보기의 방법으로 시네마토그래프가 승리했다. 그러나 디지털 복제가 가능한 현대에 와서는 각자의 만화경, 키네토스코프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것이 이상용의 이야기였다.

영화적 환상에 대한 사적 경험이 집단적으로 관계 맺으며 감상과 비평적 태도가 사회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영화적 체험이라고 한다면, 암실의 거대한 스크린은 당대의 기술적 한계에서 연유하는 조건이었을 뿐, 극장 바깥 라이트룸 세계의 스크린에서도 그 체험은 가능하다.

24장의 사진이 모여 1초의 영상을 이루고 숏이라는 파편이 모여 총체적 작품이 되는 영화적 형식이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적 체험은 극장 안에서조차 사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다. 그것을 집단화하고 사회화하는 기능이 암실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이유가 라이트룸 시대에는 없다.

벤야민이 말하고자 했던 영화적 체험, 사적으로 고유하면서도 사회적인 체험은 기술복제가 가능한 예술로서의 영화가 지닌 가능성의 본질이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지만 그 가능성은 기술복제 자체에 있다. 필름과 극장보다 복제 기능이 더 확장된 시대, 라이트룸 시대, 디지털 키네토스코프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현 시대에 영화적 체험과 그 가능성을 여전히 극장과 암실에서만 모색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가능성을 갉아 먹고 혐오하는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