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생명이 탄생하기 적절하지 않은 버전의 우주, 어느 행성의 황량한 산 위에 돌이 놓여 있다. 이 풍경이 적막에 휩싸여 있는 동안 화면에는 문자가 새겨진다. “여기선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돌이 되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단지 어떤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화면에 표시되는 대화 지문을 통해 알게 된다. 산에 놓인 두 개의 돌은 에블린과 그의 딸 조이이다. 한낱 돌이 의인화된다. 나는 이 장면이 즐거웠다. 영화가 이 두 개의 돌 위에 대화 지문을 제시하고 쇼트와 역쇼트로 두 돌을 번갈아 보여 주면서 너무 능청스럽게 돌이 인물인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듯한데, 기꺼이 그 시치미를 믿고 싶지 않은가.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그 순간 우리는 시치미 떼는 듯한 연출을 믿도록 강요받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 불완전한 환상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다고 영화는 관객을 끌어 들인다. 관객이 참여해서 완성하는 환상의 효용성 때문에, 영화는 이렇게 환상의 불완전성을 즐길 만한 것으로 다루기도 한다. 그렇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돌을 음성과 시선을 지닌 인물로 지시하는 장면은 우리가 믿지 못할 환상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현실의 감각으로 돌아와서 보면 돌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돌, 사물은 감정도 이성도 욕망도 의지도 없다. 즉자적 존재의 수준으로 환원된 에블린과 조이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미동도 하지 않고 영겁의 시간을 산 위에 그저 놓여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에블린과 조이가 돌이 된 상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돌이 에블린과 조이로 치환된 상태를 보고 있다.

인물이 사물화한 것이 아니라 사물이 의인화된 것처럼, 조이의 베이글은 허무주의의 물화된 상징이 아니다. 나는 조이의 허무주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조이는 무기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이가 자신이 경험한 수많은 평행우주의 자아로부터 진정으로 무의미를 깨달았다면, 다른 평행우주 수많은 버전의 에블린을 찾아 헤매고 세계를 파괴해 대는 조부 투바키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이, 조부 투바키는 간절한 욕망을 지녔다. 이를 이해 받고 싶은 욕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이가 평행우주에서 발견한 것은 무의미가 아니라 무의미에 대한 불안의 중핵이다. 무한에 가까운 가능성의 어떤 현실태도 희열에 닿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는 불안, 그 감당하기 버거운 감정. 조이는 이런 심연의 불안을 이해해 주고 그 늪에서 자기를 구원해 줄 존재를 간절히 찾는 중이다. 그것도 자신에게 그런 곤경에 빠뜨린 어머니 에블린으로부터. 허무주의자는 어머니의 이해를 갈구하지 않을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베이글의 원은 허무주의보다, 그에 대한 불안과 공황 상태를 시각화한다. 이에 대한 에블린의 대답은 불안에 대항해 의지로 낙관하라는 것에 가깝다. 의지로 희열과 환상의 붕괴를 버티고 욕망하기를 멈추지 마라. 어쩌면 그것이 궁극적으로 직면할 허무와 불안의 끝에서도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최후의 조건일지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평행우주의 무한 가능성(그리고 동시에 무한의 무의미)을 한꺼번에 견디고 있는 에블린의 얼굴에는 그런 최후의 의지가 엿보인다. 치명적 무의미에 대한, 무지를 향한 의지. 나는 왠지 그 얼굴이야말로 진정한 허무주의자의 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진다.

<레베카>

영화는 소설의 화자 ‘나’를 구현할 수 있을까. 영화 <레베카>는 지난 밤 꿈 이야기를 들려 주는 여성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영화가 진행되면 우리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자 주인공의 목소리다. 그러나 영화는 끝까지 그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는다. 영화 시작의 꿈 독백은 원작 소설의 설정을 따라서 여자 주인공을 소설의 화자 ‘나’의 위치에 두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 화자의 시점에 닿을 수 없다. 화자 ‘나’로 씌어진 소설은 이를테면 독자가 ‘나의 뇌’로 뛰어 드는 것인 반면에, 영화의 관객은 ‘나의 눈’보다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의 관객은, 또는 관객을 인도하는 카메라는 ‘나의 눈’, ‘나의 귀’와 연결된 뇌까지만 접속할 수 있다. 시청각적 환영을 포함하여, 화자 시점에서 감각된 것까지만 영화는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감각적 정보 처리보다 더 깊은 차원의 뇌, 어쩌면 영혼이라 부를 수도 있을 그것에 연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영화 <레베카>의 화자 ‘나’ 전략은 곧바로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 대부분에서 여자 주인공의 시선을 감각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의 첫 장면, 꿈의 독백만이 여자 주인공이 화자로서 현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영화의 화자는 인물이 될 수 없다. 인물의 독백을 담은 장면에서도 영화는 그것을 카메라가 대리하여 재현한다. 우리는 그 장면의 카메라 서술이 화자의 것이라고 오인하기로 약속했을 따름이다.

나는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내내 궁금했다. 영화가 맥심 드 윈터의 죽은 아내 레베카의 이름으로 짙게 덧칠되어 있는 반면에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 자체가 이 영화를 모호하고 신비롭게 만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덕분에 이름 없는 여자 주인공은 레베카와 등치적 존재가 될 가능성이 생기기도 한다. 두려워 하면서 동시에 적대해야 할 대상, 그리고 대체해야 할 존재인 레베카와 여자 주인공은 치명적인 비밀을 공유한다. 절대 맨들리 저택 바깥으로 새 나가서는 안 되는 그 비밀이 맥심 드 윈터의 아내가 될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라는 점에서, 여자 주인공에게는 맨들리의 화재와 함께 도려 낸 레베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맥심의 살인, 레베카의 부도덕을 듣고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사건 은폐의 공범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여자 주인공은 의아한 면이 있다. 그의 행동이 아니라, 그것이 납득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내 반응이 의아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댄버스 부인의 레베카에 대한 집착 또는 광기와 달리 여자 주인공의 사건 은폐 동참 행위가 이상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의 맥심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영화는 분명 표면적으로 여자 주인공이 맥심을 사랑한다는 믿음을 훼손하지 않는다. 레베카가 암 진단 후 죽음을 예정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맥심과 여자 주인공은 사건의 죄의식에서 벗어날 길이 열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 주인공의 감춰진 욕망이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동시에 드는 것은 왜일까.

이 영화는 트랙-인, 트랙-아웃 쇼트를 많이 볼 수 있는데, 나는 여자 주인공을 다루는 트랙 쇼트가 전반부에는 트랙-아웃을, 후반부에는 트랙-인을 위주로 구사되고 있다고 느낀다. 이름을 박탈당한 수동적 주체처럼 느껴지는 전반부의 여자 주인공은 트랙-아웃되며 그를 둘러싼 귀족과 하인, 그리고 저택의 공간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소설의 화자 ‘나’는 차라리 이름을 박탈당한 주체를 표상하기 위해 이 영화에 승계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반면에 맨들리 저택의 주인이자 맥심의 소위 정실 부인이 되고자 하는 후반부에는 여자 주인공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는 카메라가 우리를 여자 주인공의 감정과 욕망에 끌어 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여자 주인공이 맥심의 정실 부인, 맨들리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때는 레베카의 흔적을 없애고 가장 무도회를 개최하려던 때가 아니라, 레베카의 죽음과 관련한 사건에 대해 맹목적으로 맥심의 편에 서는 순간이다. 영화는 이 변화의 순간, 우리가 여자 주인공의 맹목성에 가담하도록 만든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카메라의 트랙 쇼트와 같은 영화적 감각을 따라, 우리가 이를테면 영화의 욕망 중추에 연결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그 전반부와 후반부의 분기점이라 할 만한 순간에 영화가 보여 주는 시점 쇼트가 의미심장하다. 레베카가 죽던 날 진실을 맥심이 털어 놓고, 그 말을 듣는 여자 주인공의 시선을 체현한 듯한 카메라가 소파 위의 허공을 움직인다. “레베카가 소파에 누워 있더군. 아파 보이고 이상해 보였소. 그런데 갑자기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더군…….” 이렇게 맥심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카메라는 마치 실제 레베카가 소파에서 일어나 움직이며 말하는 장면을 찍고 있는 것 같다. 이 쇼트에는 맥심의 목소리와 여자 주인공의 시선뿐만 아니라 레베카의 보이지 않는 환영까지 동시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이 쇼트 이후에 나는 이 영화가 지탱하는 욕망을 의심해 보고 싶은 욕구를 느낀 것 같다. 카메라가 여자 주인공의 시선을 빌어 비가시적 환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나는 영화의 욕망 중추와의 연결이 잠시 끊어진 것처럼 느꼈다.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재현하는 것만큼 존재하는 것을 재현하지 않을 가능성, 영화가 가난한 여성과 귀족 남자의 사랑으로 묘사할 만큼 여자 주인공의 계급 상승 욕망을 묘사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이 쇼트에 담긴 비존재로부터 흘러 나오는 것 같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쇼트는 화자로서의 카메라가 관객을 현혹하고 있다는 자기 폭로, 자기 분열의 표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영화의 화자는 영화 안에 이름 없이 존재한다.

<미드소마>

스웨덴의 작은 마을 호르가에 도착한 이튿날 절벽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의식을 목격하고, 대니는 이곳을 떠나려 한다. 그날 밤 대니는 이상한 꿈을 꾼다. 숙소 건물을 몰래 나온 크리스티안과 친구들이 대니를 남겨 두고 호르가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목격하고 절규하는 대니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절벽 의식에서 목격한 처참하게 망가진 시신, 그리고 자살한 여동생과 부모의 시신이 대니의 꿈을 가득 채운다. 하루 아침에 가족을 잃고 남자 친구와 관계마저 불안한 상황에 놓인 대니를 지배하는, 누군가로부터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이 트라우마가 응축된 장면에 담겨 있다. 그런데 이 꿈은 대니의 심리와 반대다. 현실에서는 대니가 호르가를 떠나고 싶어 하는데 꿈에서는 남자 친구와 그의 친구들이 대니를 남겨 두고 떠난다. 대니가 직접 목격했을 것 같지 않은 동생과 부모의 죽은 모습이 꿈에 나타난다는 점이 의아하지만, 이 장면이 대니가 꾸는 꿈이 맞다고 한다면 이 꿈의 전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니가 당장 호르가를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 펠레가 찾아 와 대니를 설득하고 위로한다. 처음에는 이 전통을 이해해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펠레는 이 호르가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가족이고 힘들 때 붙잡아 주었다고, 크리스티안이 힘들어 하는 너를 잘 붙잡아 준다고 느끼는지 묻는다. 대니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니는 호르가를 떠나지 못한다. 나는 이 때 대니가 펠레에게 설득 당했기 때문에 호르가를 떠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대니는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하는 크리스티안을 버리고, 이 호르가에서 자신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니의 꿈은 그 기대, 욕망을 그것이 야기하는 죄책감과 두려움 안에서 뒤집힌 방식으로 상연하고 있다.

대니의 욕망이 실현되는 방식은 파국적이다. 크리스티안은 비겁하지만 대니는 파국적이다. 크리스티안은 선택과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려 하고 대니는 그것을 감당하면서까지 매달리려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대니가 갖게 되는 원망과 분노는 증폭된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취약한 주체 대니에 대해 가혹한 반응일지 모르지만, 대니의 이 감정이 펠레로부터 매개된 욕망과 만날 때, 그리고 더불어 호르가의 이교적 의식을 통해 드러날 때, 그것은 치명적으로 위험해진다. 불타는 희생양을 바라보며 희열에 찬 듯한 대니의 웃음에 동참하는 것이 어쩐지 나는 위험해 보인다.

호르가의 이교적 문화는 이 영화를 기괴하고 공포스럽게 만든다. 물론 동시에 농담처럼 만들기도 한다. 호르가는 서구 근대 주체의 타자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자기 자신에게 투사해 본 농담 같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농담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저렇지 않지”, “스웨덴에 실제 저런 문화는 없어”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스웨덴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폭소했다고 한다. 누구도 이 영화가 표현하는 세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이 영화는 단지 우리 안의 편견과 왜곡된 환상을 우리 안에서 전유해 보고 있을 뿐이다. 다만, 당신이 우리와 같은 주체라면.

그렇게 구성한 호르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타자성의 핵심은 주체가 소멸된 공동체라는 점에 있는 것 같다. 호르가의 사람들에게 개인의 삶은 모두 공동체의 종교적 의식을 수행하는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정해진 연령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기꺼이 희생 제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랑과 슬픔 같은 개인의 감정도 의례적 집단 행위 안에서 소거된다. 전근대 종교적 파시즘에 가까워 보이는 이것이 타자에 대한 서구 근대 주체의 왜곡된 환상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목가적 환상과 더불어 자기 지시적으로 유희한다는 것은 다소 혼란스러운 일이다.

이 영화의 공포는 호르가의 광기 어린 종교 의식에 대니의 감정과 욕망을 밀어 넣는 데서 야기된다. 그것은 정말로 공포스러운 일이다. 대니라는 취약한 주체가 이교적 타자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기만적으로 즐기기 위해 희생됐을 가능성을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주해야 하는 것은 유사 종교와 살인의 뒤섞인 향락 앞에서 무너진 대니의 정신이다. 영화는 왜 대니를 그렇게까지 만들어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마도 아리 애스터는 개의치 않겠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그 욕망이 불가해하고 공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