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게임의 이런 스토리텔링 방식이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닮아 있어서 재미있다고 느낀다. 삶에는 많은 이야기 조각들이 있다. 원한다면 이것을 서사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굳이 그러지 않는다. 삶이 이야기가 되는 것은 조각들을 끼워 맞추려고 애쓸 때나 가능한 일이다(현실의 작가, 특히 내러티브 논픽션을 쓰는 작가는 이 조각들을 서사화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냥 살아간다. 도처에 있는 정보와 사건과 이야기를 스쳐 지나간다. 마찬가지로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도 이야기를 대충 흘려듣고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심지어 그런 플레이가 즐거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발견하려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야기를 목격할 수 있다.

김초엽, 「세계를 경험하는 것」, 『아무튼, SF 게임』

내가 종종 망각하는 사실을 이 문단이 깨우쳐 준다. 나는 의미와 이야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는 하지만, 사실 그것을 깨닫지 않고도 삶은 경험으로 나아간다. 위 표현대로, 우리는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나와 타인의 삶에서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욕망이, 경험으로서의 삶을 자꾸만 간과하게 만든다.

[조안이 당신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아, 그리고…….]

남자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걸 당신에게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가 내민 것은 작은 유리병이었다. 찰랑거리며 흔들리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으나 무엇인지 모를 수는 없었다.

단희는 손을 내밀어 유리병을 받았다. 조심스럽게 밀봉된 필름을 벗겨냈다. 뚜껑을 열려고 했지만 손이 떨려서 유리병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졌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남자는 단희에게서 유리병을 건네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넘겨주는 순간 단희가 심하게 손을 떨었고 병은 그만 바닥에 떨어져 엎질러지고 말았다.

단희는 그 즉시 방을 채우는 어떤 입자들을 느꼈다. 입자들은 일렁였고 공기 중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단희는 희미하게 감지되는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양말이 사막 구석에서 모자를 쓰고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제 단희에게도 입자들은 의미라기보다는 냄새에 가까워졌다. 둔감해진 후각기관은 한때 조안이 했던 것처럼, 공기 중에서 어떤 기억과 감정을 읽었다. 입자들이 단희를 그 시절로 데려갔다. 의미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에게로.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너무 구체적이어서,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장면으로. 조안이 말했던 그 공간들로.

<숨그림자>, 김초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