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마지막 시퀀스는 충격적이고 어리둥절한 의문에 휩싸이게 만든다. 내가 지금 무엇을 본 것일까. 플롯은 느슨하게 구성되어 있고 카메라는 인물의 행위나 산촌의 풍경을 명상하듯 가만히 지켜보는 쪽에 가까웠던 영화가 갑자기 인과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개념화하기 힘든 방식의 이미지 배치를 우리에게 던진다. 하나가 바라보던, 어느새 사라져 버린 사슴은 무엇인가. 그 사슴의 몸에 난 총상흔과 흐르는 피, 그리고 쓰러진 하나가 흘리는 코피는 어떤 유사성을 떠올리도록 유도하는 것일까. 타쿠미는 왜 느닷없이 타카하시를 해치는가. 타카하시는 죽은 것이 맞는가.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과 당혹감은 정당하다. 이미지, 그리고 숏과 숏의 배치는 보는 우리로 하여금 개념과 이야기를 생산하도록 만든다. 이는 단지 독립적인 하나의 이미지나 앞뒤 숏의 연속적 배열에 한정되지 않고, 영화의 러닝타임 전체, 또는 이보다도 확장된 시공간에서 우리가 본 것과 보지 못한 것까지 아우르는 활동이다. 그런데 마지막 시퀀스는 이 영화에 대한 기억과 느낌에 균열을 내고 의미의 배열에 혼란을 야기한다.

이를테면, 이 시퀀스에서 사슴은 이전에 숲속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어슴푸레 보이던 그 사슴과 다르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그러진 얼굴의 사슴은 하나의 시선의 대상 사물로서 사슴이 아니다. 마지막 시퀀스의 사슴은, 말하자면 그 시선에 대해 되돌려 주는 타자의 응시는 아닐까 하는 느낌을 자아낸다. 나는 이 영화에서 이전에 사물의 응시를 가시화한 장면이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인물의 시선을 따르는 장면도 별로 보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 사슴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 인과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국면을 열어 놓는다.

나는 이 마지막 시퀀스에 대해 어떤 해석의 버전을 내놓기가 망설여진다. 해석의 정확성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다, 해석하면 진부해질 것 같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지막 시퀀스를 스스로 의미화를 포기하듯이 던져 놓았고, 이런 갑작스러운 질적 전환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언어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항, 환상과 유령, 꿈의 해석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식상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언어로 제시할 만한 해석의 가능성이 많지 않다고 느낀다. 나는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방법론이 타당한지 살피기 전에, 이 영화가 이런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게 온당한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서 나는 어떤 인물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경험을 종종 한다. 류스케는 인물이 왜 그러한지를 이해시키기보다 그러한 인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 영화에서 내게 이해되지 않는 인물은 타쿠미였다. 타인에게 친절하지 않거나 절대 존댓말을 하지 않는 것 같은 점보다, 왜 매번 하나를 집에 데려오는 일을 잊어버리는 인물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마지막 시퀀스의 느닷없는 질적 전환의 원인, 그러니까 하나의 실종은 타쿠미의 그 건망증 때문이다. 타쿠미는 매번 계곡물을 길러 오는 일을 타인과 함께 하다가, 반복적으로 하나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야 하는데 잊어버린 걸 불현듯 깨닫는다. (매번 그 연기는 어색하다.) 타쿠미에게 하나는 왜 종종 망각하는 존재인 것일까. 그리고 그런 타쿠미로 인해 촉발된 마지막 시퀀스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의미화의 곤경은 타쿠미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곤란함을 나는 앞으로도 계속 느낄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하마구치 류스케는 어떤 인물을 사건 그 자체로 두고 영화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수께끼 인물을 의미화하고 싶은 유혹은 하마구치 류스케가 노리고 파 놓은 의미의 텅 빈 함정에 무턱대고 뛰어드는 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이 영화에 대해서는 그 함정에 뛰어들기가 망설여진다.

<추락의 해부>

<추락의 해부>의 법정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법적 판결이 무엇을 근거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층 차양막에 난 핏자국과 사뮈엘 말레스키의 직접적인 사인, 즉 머리 왼쪽의 강한 충격에 대한 인과 관계를 재현 검증한 두 과학 수사관의 증언은 상대방의 의견을 완전히 기각하지 못한다. 4층 다락방에서 스스로 뛰어내렸을 가능성에 대한 논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이는 3층 발코니에서 사뮈엘을 누군가 밀치고 둔기로 머리를 가격하는 것이 가능할 개연성이 적다는 것에 따른 상대적 우위일 뿐이다.

이 공판 이후로 법정 공방은 증거주의의 원칙을 잃은 것처럼 흘러간다. 검사는 산드라가 남편 사뮈엘을 정서적으로 괴롭혀 왔으며, 사건 하루 전 크게 다툰 점, 사건 당일 조에와의 인터뷰를 방해한 사뮈엘에 대해 분노했을 가능성을 부각하며 산드라를 몰아 세운다. 과학 수사가 명백하게 밝힐 수 없는 사건의 인과를 심증적 개연성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법정 증거주의의 원칙 위에서는 불가할 것이다. 프랑스의 법정이 다른 원칙을 채택하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적 심리의 관점에서 보면 과학 수사 이후 검사의 논리 전개는 초점을 맞추어 가지 못하고 산개하거나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도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마치 이것이 판결을 이끄는 결정적 증언인 것처럼 배치하고 있지만 말이다. 다니엘 역시 과거 사뮈엘의 심적 상태를 유추할 수 있는 말을 증언했을 뿐이다. 나는 그저 산드라가 사뮈엘을 살해했을 증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검사의 기소가 기각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는 판결의 이유를 알려 주지 않는다. 과학 수사의 증명 불가능성을 제시한 이후 가능한 법정 공방의 방식은 법리적 다툼이겠지만,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그 과정을 생략한다. 그리고 사건에 대한 판결이 오로지 산드라와 사뮈엘의 관계나 그들의 심적 상태에 달려 있는 것처럼 바라본다. 그러나 이 영화의 법정이 인물의 내면을 향해 무대화되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이 영화는 법정이 사건과 인물의 표면을 다루는 곳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영화는 사건 표면의 진실, 즉 사뮈엘 추락사 직전의 순간을 가려 놓고 산드라의 중립적으로 굳어 있는 얼굴 밑으로 뚫고 들어 갈 균열도 보여 주지 않는다. 아들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도 온전히 믿기 힘들다. 판단하기 어려운 다니엘이 마르주의 조언대로 그저 산드라를 믿어 보기로 결정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판은 인물 내면의 동기를 향해 전개되지만 정작 인물의 내면은 파악 불가능한 대치 상태가 이 영화를 대하는 곤란함일 것이다. 영화의 중간 지점, 사뮈엘의 추락사 용의자로 산드라가 기소되어 공판이 준비될 때 영화는 1년 후라는 자막 표지와 함께 그 시간을 모두 생략한다. 기소된 시점부터 아들 다니엘과 피의자 산드라의 상호 작용을 차단하기 위해 마르주가 산드라의 집에 파견되었다. 피의자와 아들, 그리고 법무부 파견 직원이 동거하는 1년의 맥락을 가리는 것부터 이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곤란함은 예정된 일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표면에 머물면서 판단을 미룬다. 다니엘의 시각장애 보조견 스눕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 영화가 미루어 놓은 진실의 담지자일 것이다. 그 표면을 뚫고 들어가면 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심장함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서려 있다. 그러나 진짜 곤란함은 사건과 인물의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통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판결은 이루어진다는 것이 진정한 곤란함이다. 법적 판결은 맹목적으로 수행적이다. 사건이 있으면 법은 반드시 판결한다. 이 영화도 1심 판결 결과를 마지막 국면으로 삼는다. 이는 불가피하다. 이 영화는 진실의 판별 불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해 법정을 오해하거나 오용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판별의 불가피함을 이미 감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측면의 진실은 반대편의 진실이 징후적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괴인>

영화 <괴인>의 초반부는 공사 현장을 생활인의 감각으로 묘사한다. 불규칙하게 울리는 타카 소리,계단으로 피아노를 들어올리는 힘겨운 과정, 수고에 대한 답례일지도 모를 피아노 연주를 덤덤하게 응시하는 인부의 얼굴이 생활 세계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 중에서 기홍이 테이블쏘에 합판을 올리고 무심한 듯, 그러나 완벽하게 능숙하지는 않은 듯 맹렬한 전기톱에 밀어넣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이 나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직업과 생활 세계에 내재한 치명적 위험을 드러내면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피아노 교습소의 공사 현장을 묘사하는 첫 시퀀스만 본다면 이 영화는 목수와 공사 인부의 노동에 대한 생활 감각적 고찰이라고 해도 될 법하다.

그러나 이후 이 영화는 추측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영화는 눈 앞에 펼쳐지는 사태를 인지할 수는 있으나 사태들을 모아 총체적으로 의미화하는 것은 곤란한 부류의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보고 난 후 이상하게 이 영화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면, 그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정리하기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런 혼란을 느끼는 것은 이 영화가 자신을 <괴인>이라는 제목으로 명명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제목에 이끌려 누가 ‘괴인’인가 하는 질문을 품고 영화를 보면 처음에는 당연히 목수 기홍이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기홍은 아무에게나 반말을 일삼고 이상하게 무례한 인물인데, 옥상에서 건넛집 남녀를 훔쳐보는 순간 앞으로 기홍의 기괴한 욕망과 인격을 묘사할 이 영화의 미래를 예감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후 기홍의 집주인 남편 정환이 기홍의 차 지붕이 찌그러진 사건에 대해 과도한 관심으로 기홍의 세계를 침범하면서, 그 다음에는 보호종료 아동 하나가 그 사건의 범인으로 이들 사이에 등장하면서, 또 그 다음에는 집주인 아내 현정이 술을 들고 남편 몰래 기홍의 방을 찾으면서 ‘괴인’의 용의자는 연쇄적으로 확대된다. 마치 모든 인물이 일견 ‘괴인’의 면모를 지닌 것처럼 전개되는 이 영화는 영화의 제목이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각 인물의 이상한 면모를 관통하는 통합적 의미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들 인물의 기괴한 면모가 직업 또는 계급적 특징의 한 측면과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뿐이다. 기홍은 목수 반장이라는 직업 세계의 성격을, 정환과 현정은 유한 계급의 권력과 허영을, 하나는 보호종료 아동의 취약함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것은 위험을 내재한 정치적 환유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영화의 제목은 단지 맥거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각 인물을 정말 ‘괴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까지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각 인물은 ‘괴인’의 개념에 부합하는 수준까지 가기 전에 멈춘다. 예컨대 기홍은 옆집을 훔쳐 보고 여성에게 아슬아슬한 플러팅을 하기도 하지만 마트에서 임산부에게 계산 순서를 양보하기도 하며, 더욱이 같이 일하던 친구 경준이 고향으로 내려가고 현정의 친구가 의뢰한 인테리어 공사가 기약 없이 미루어지자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면서 ‘괴인’의 용의선상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기홍이 유력한 용의자에서 멀어지는 것은 정환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마찬가지로 하나가 등장하면서 정환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의심은 하나에게 옮겨 간다. 특히 현정이 기홍과 함께 사라진 다음 날 아침에 벽에 기대 선 채 고개를 떨군 정환은 그저 측은한 인물이 된다.

앞서 이 영화가 계급적 특질에 따른 인간의 괴인적 면모 고찰로 이 영화를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언급했지만, ‘괴인’의 용의선상에서 인물들이 조금씩 이탈하는 방식은 계급적 위상 관계에 따른 개념적, 인과적 이행이라기보다 단지 새로운 다음 인물이 등장하면서 관심 대상이 전환됐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때 ‘괴인’으로 보였던 이전의 인물은 생활 세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인물로 달리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다른 인물들이 계급 적대의 환유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동안 보호종료 아동 하나는 정환의 집에 몸을 의탁하는 데서 끝나는 이 영화는 내게 묘한 미결감을 남긴다.

‘괴인’이 누구인지 한 인물로 확정하지 못하고 다른 인물로 계속 미끄러져 가기만 하는 난감함은 기홍이 정환의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기홍이 정환의 집으로 이사 가는 공간 전환의 과정이 영화에는 담겨 있지 않다는 점이다. 기홍이 다세대 주택 옥상에서 옆집을 훔쳐보다 핸드폰을 벽 사이로 떨어뜨리고 난 다음 장면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기홍은 이미 이사한 새 집 자랑을 하고 있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기홍이 집주인 정환과 첫 대화를 하는 장면까지 기다려야 한다. 국면이 전환되고 본격적인 인물 사이의 미끄러짐이 시작된다는 징표를 영화는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밤길을 지나는 자전거 탄 두 남녀 장면은 반대로 무엇을 위해 공백 같은 표지판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의미의 단서를 던져 놓고 그것에 머무르는 것에는 저항하는 듯한 모순적 욕망을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는 난감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