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 더 스킨>

이 영화는 적절하게 단일한 이야기로 통합하는 데 필요한 이름들을 생략하고 있다. 엔딩 크레딧에서도 인물의 극중 이름은 찾을 수 없다. 극중 스칼렛 요한슨을 로라라고 지칭하는 글이 보일 때마다 나는 의아했다. 이들과 나는 다른 영화를 본 것일까. 장르적 관습에 기대어 그들을 외계인이라고 상정해 볼 수 있고, 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알려진 소설이 그들을 분명하게 인간 사냥 노동을 하는 외계인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렇게 인식하고 지켜볼 것이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인물의 이름도 알 수 없고 상황에 대한 정의도 없는 이 영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 외부의 참고점을 통해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필요하게 만드는 침묵이 이 영화에 대해 더 말해야 할 대상일 것이다.

나는 영화에 대해 말할 때 오로지 그 영화에 근거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만, 사실 이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저마다의 인식과 욕망, 감정과 감각의 맥락으로 영화의 내적 세계를 마주하기 때문에, 영화에만 근거한 경험이란 순수한 환상에 가깝다. 순수한 환상의 준칙을 지키면서 수행할 수 있는 의사소통은 영화에 대한 우리의 감각 정보를 논하는 것에서 더 나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해 감각에 대해서조차도 우리는 공통된 언어를 만들기 쉽지 않음을 생각하면, 영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영화에 대해 잉여적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존재가 우리의 과잉된 인식에 우선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의미가 허용되지만, 존재와 마주친 출발점을 기입하고 그곳을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는 영화에 대해 말하는 동안 의미의 복잡계 영역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영화로 돌아와서, 스칼렛 요한슨과 오토바이를 탄 남자는 누구인가. 그들을 외계인이라고 가정해도 다른 의문이 이어진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는 스칼렛 요한슨과 어떤 관계인가. 남자는 세간의 말처럼 스칼렛 요한슨의 상사인가. 초반에 시신으로 등장한 여자는 누구인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행위를 하나의 이름으로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여기에는 다른 반례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스칼렛 요한슨과 마찬가지로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일 수도 있다. 시신으로 등장하는 여자는 남자가 잡아 온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그들을 외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에도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에 나오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빛과 원의 형상은 지구로 침입하는 외계 존재의 시각화라기보다 세포의 생성, 생명의 탄생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가. 알 수 없는 단어를 나열하는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는 외계의 존재가 아니라 로봇의 언어 테스트 과정을 보여 주는 것 같다고 말할 수는 없는가. 그들을 로봇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러므로 이 영화를 어떤 명시적인 이름, 분명한 목적론의 체계 안에서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오류를 범하는 일일 것이다. 이를 경계하면서 이 영화에 대해 말하려 할 때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기호와 상징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일이 아닐까. 남성과 여성의 군상 이미지들로부터 성별 구분에 대한 사회 문화적 맥락을 떠올리고, 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섹슈얼리티에 반응하는 남성들로부터 여성 혐오의 다양한 양태를 논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 맥락 안에서 껍데기만 남은 남자, 껍데기를 벗고 검은 실체를 드러내는 여자는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의미를 내포한 이미지일 것이다. 유혹에 이끌리는 남자는 내부가 없다. 반면 강간 당하는 여자는 검은 심연이 파괴된 외부 표면을 목도한다. 이것은 물론 섹슈얼리티의 맥락 안에서 향락적 주체의 파괴적 성격을 상징할 것이다. 조금 더 생각을 이어 간다면, 나는 이 두 이미지가 남자와 여자의 상태를 드러내기보다 그 반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상인 그들의 내부 없음과 파괴된 표면, 그리고 검은 심연은 그 일을 저지른 주체를 반영하는 상징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 같은 기호적 가능성을 살피는 중에도 나는 여전히 스칼렛 요한슨의 정체에 대해 궁금하다. 나는 그가 다른 행성이라고 물리적으로 한정 지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타자라는 의미에서 외계인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존재가 처음부터 남자들과 완벽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면서 동시에 막간의 시간 동안은 전혀 감정 없는 것처럼 비어 있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잘 믿기지 않아서, 이것이 가능한 재현인지 나는 계속 질문하게 된다. 내게는 그가 인간 여성의 자아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숲속에서 도망치던 그의 얼굴에 가득차 보이는 표정은 인간의 두려움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표정과 행동에 대한 내 지각 체계가 일으키는 착각에 불과한 것일까. 이 영화에서 사건의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것, 안면기형 남자를 풀어 주는 그의 선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영화가 재현하는 그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영화 외부의 이름을 빌리고 싶은 유혹과 그럼에도 파악되지 않는 타자에 대한 의문을 혼란스럽게 견디는 일이다.

<운디네>

영화는 운디네가 요하네스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운디네는 요하네스에게 “날 떠나면 널 죽여야 해. 알잖아.”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당혹스럽다. 이별의 대가가 죽음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를 요하네스도 알고 있으리라 확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그러나 요하네스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또는 알면서도 부정한다.) 이 순간 운디네의 말이 영화를 보는 관객을 향하고 있다면 어떨까. 우리가 운디네의 말로부터 유럽의 운디네 설화를 정확히 연상할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나,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일상적 언어의 세계를 벗어나는 이상한 움직임을 감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마지막까지 영화 속 운디네가 설화에 나오는 그 물의 정령 운디네라고 확정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직접적으로 운디네 설화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 수 있다. 그보다 이 영화는 자기 입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이 자신의 이름을 기어코 부르고 싶게 만들고 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만큼 <운디네>에는 토템의 신화적 세계를 빌려 오지 않고서는 해소할 수 없는 환상이 현실을 지배한다.

자연과 사물을 상징물로 다루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자연과 사물이 영화적 현실을 이끈다는 점에서 <운디네>에 깃든 토템은 환각적이다. 수족관의 잠수부 장식품을 둘러싼 궤적을 떠올려 보면, 이 장식품은 단지 미래에 대한 암시라기보다 스스로 사건을 일으키는 저주 인형에 가깝다. 스스로 운디네를 불러 내는 목소리의 주인이 되고, 잠수부 크리스토프가 운디네의 새로운 연인이 될 것을 알려 주며, 이대로 사랑과 행복이 지속될 것 같던 연인에게 닥칠 파국을 예고하기도 한다. 그 순간마다 잠수부 인형을 향하는 카메라의 응시는 잠수부 인형이 주술적 힘으로 운디네와 크리스토프의 서사에 침입해 들어온 것 같이 느끼게 만든다. 마지막에 이 잠수부 인형은 운디네의 환영을 통해 크리스토프에게 돌아오기도 한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환상의 중핵이 이것에 투사되어 있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정령은 운디네가 아니라 정작 이 잠수부 인형에 깃들어 있고, 운디네로 하여금 신화적 운명으로 끌어 당기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잠수부 인형처럼 이 영화에서 사물은 말 그대로 현실을 마술적으로 끌어 당기는 힘이 있다. 도시의 모형이 실제 건물과 거리를, 물이 운디네를 끌어 당긴다. 또는, 쉼 없이 개발되는 도시 문명 아래 잠긴 습지의 신화적 세계가 베를린을 끌어 당겨 삼켜 버린다.

서사가 뒤틀려 있는 것도 이 때문일까. 크리스토프가 사고를 당한 날 밤 운디네가 그와 전화로 다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영화에서 서사적으로 명시적이다. 이보다 더 이상한 것은 운디네가 잠수부 인형의 다리를 부러뜨린 날 예기치 않게 크리스토프가 찾아 와 하는 첫마디 말이다. 멀리서 운디네의 집을 찾은 크리스토프는 운디네를 보자마자 2번 터빈의 제어 장치에 결함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내 운디네와 깊이 포옹하면서 이 말은 더 이어지지 않는다. 잊혀질 뻔한 이 말은 이후 크리스토프의 사고 현장을 찾은 운디네에게 크리스토프의 동료가 설명하는 사고 경위와 연결되는 것만 같다. 그 동료는 수중 터빈이 열렸고 크리스토프의 다리가 끼어 제때 물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고 말한다. 앞선 크리스토프의 말을 사고 경위 설명과 포개어 생각해 보면 운디네와 크리스토프가 함께 한 현실에서의 시간은 더 짧아질 것이고, 그 이후의 서사도 더 광범위하게 환각의 영역으로 재편될 것이다. 파국을 수행하고 물 속으로 침잠하는 운디네가 그려 내는 물 속 공기방울의 운동이 시간의 순행을 거스르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환각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을 집어 삼켰다.

<운디네>에 동참하려면 이 영화가 우리의 인식을 교란하는 방식을 즐겨야 한다. 운디네가 강의에서 말하듯이 동독 붕괴 30주년이라면 2020년 현재임이 분명하지만, 인물들의 손에 쥐어진 소품이 피처 폰이라는 사소한 교란까지 말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특정한 단서와 인식 틀을 자꾸 교란하는 것은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이 즐겨 쓰는 전략인 것 같다. 그러나 현대식 카페와 자동차가 시대 인식을 흔들어도 결국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침공을 연상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트랜짓>), <운디네>에서 벌어지는 인식의 교란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 덕분에 우리는 설화의 알레고리로 향하고야 만다.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의 또 다른 전작 <피닉스>에서는 넬리에 대한 남편 조니의 인식이 교란된다. 넬리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인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 남았다. 그러나 총상을 입고 성형수술을 해야 했던 넬리를 조니는 알아 보지 못한다. 넬리가 죽은 줄만 알고 있는 조니는 넬리의 유산을 노리고 얼굴이 바뀐 넬리를 가짜 넬리로 행세하도록 만드는데, 조니가 깨닫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넬리에 대한 이해에 가까이 다가간다. <피닉스>가 향하는 목적지는 조니가 넬리를 끝내 알아 보는 것이다. 어쩌면 펫졸트 감독의 영화에는 이처럼 교란을 경유하고야 만날 수 있는 온전한 인식에 대한 열망이 관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운디네>는 신화적 환상을 교란의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이것은 우리 안에 상실된 채 억압된 것을 직시하고 해소하려는 내적 성찰에 가깝다. 도시 개발 역사학자 운디네가 습지를 덮고 무한히 확장해 온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품은 사라진 것의 좌표를 설명하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직접적이다. 베를린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사라진 것의 역사를 살펴 봐야 하는 것처럼, 우리 내부로부터 사라진 신화적 세계의 흔적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흔적으로 남은 그것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이길래.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그것이 속죄의 여정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시리어스 맨>

<시리어스 맨>의 본편은 대니의 귓구멍에서부터 시작한다. 카메라는 대니의 귓속을 서서히 빠져 나와 라디오로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Somebody to Love’를 듣고 있는 대니의 귀를 비춘다. 수업 시간에 몰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니는 일전에 거래한 대마의 값을 치르려고 집요하게 페이글을 부르다가 결국 선생님으로부터 적발 당하고 라디오까지 압수 당한다. 이처럼 영화는 대니의 곤경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앞으로 지켜 볼 곤경은 대니가 아니라 그의 아빠, 래리의 것이다.

대니의 곤경에 대해 우리는 대니에게 너의 수업 태도 불량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래리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래리에게 닥친 곤경들에 대해 우리는 래리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내 놓을 수 없다. 래리의 곤경은 자신이 선택한 것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곤경이 래리를 선택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대니의 곤경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가 보는 것이다. 히브리어 수업 시간에 몰래 노래를 듣고 있는 대니의 귓구멍에서 솟구쳐 나온 곤경이 만물의 원인과 결과를 연구하는 물리학자 래리에게 불확정적 재난으로 변모하고 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인과적 설명은 세계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코엔 형제에게 운명은 선택의 총합이 이룬 결과도 모든 것이 미리 정해진 거대한 결정론의 섭리도 아닌, 우연히 만난 치명적인 어떤 사태다. 그것은 엔트로피의 법칙과 같아서, 의도한 바를 거스르게 만드는 무질서의 운동 자체이며, 일이 꼬이게 만드는 힘이다. 그것은 때로는 자신의 갈길을 막거나 쫓아오는 치명적인 살인마의 모습으로, 때로는 영문도 모르게 발생한 사건의 변수나 곤경의 형태로 나타난다. 일상에 침입하여 주체의 평온을 흩트리는 그것, 그리고 이를 맞닥뜨린 주체의 반응은 코엔 형제의 오래된, 어쩌면 평생을 쏟고 있는 관심사다.

코엔 형제의 영화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침입하여 나를 쫓아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몇 가지 기호적 장면을 찾을 수 있다. <시리어스 맨>에서 매일 하굣길마다 벌어지는 대니와 페이글의 추격전처럼 직설적인 것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블러드 심플>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변주되어 온 벽이나 문의 비가시적 응시 만큼 치명적인 것도 없다. 열기에 녹아 반쯤 흘러 내린 벽지를 가만히 쳐다보거나, 그 너머로 서서히 다가오는 살인자의 움직임을 벽이나 문 뒤로 감지할 때 우리는 그렇게 비가시적이고 설명 불가하지만 분명하게 다가오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역사 깊은 벽과 문의 암시는 나로 하여금 카메라가 집 문 앞에서 대화하는 래리를 비추거나, 동료 교수가 연구실 문에 기댄 채 래리에게 말을 거는 구도를 잡을 때 괜히 무언가 불안을 느끼게 만든다.

코엔 형제는 규율과 금지의 봉인이 해제되고 자유로운 주체가 된 현대인이 느끼는 근원적인 불안의 다양한 양태를 다룬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진 후 그것의 결과가 전적으로 자기 책임이 된 시대, 이 시대 주체의 불안은 자신의 선택과 행위가 사태와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에 발생한다. 신이 사라진 지금 사태는 운명으로 섣불리 말할 수도 없다. 주체와 사태-운명 사이를 중계하는 타자, 책임을 미룰 수 있는 타자가 사라진 후 사태-운명과 직접 대면하고 그것을 자기 책임 하에서 감당해야 하는 주체는 때로는 어리둥절해 하고 때로는 그것과 투쟁하며 때로는 지쳐 버린다. 그리고 <시리어스 맨>에서처럼 때로는 대상 없는 원망에 빠진다.

아내 주디스가 싸이 에이블먼과 정분이 난 것도, F 학점을 준 클라이브 박과 그의 아버지가 명예 훼손과 학점 구제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괴롭히는 것도, 동생 아서가 밖에서 사고를 치기 시작한 것도 래리의 책임 밖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책임의 전가를 위한 래리의 히스테리가 발생한다. 텅 빈 원망은 사태의 책임에 대한 편집증에서 유발된다. 이것은 어쩌면 코엔 형제가 다룬 인물들이 그들의 영화 세계에서 오랫동안 말 못한 원망의 자기 표현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리어스 맨>은 코엔 형제의 영화 계보 안에서 가장 솔직하게 자기 반영적인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래리의 히스테리적 반응에 대해서조차 코엔 형제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 주지 않는다. 래리에게 닥친 곤경들은 아들 대니의 유대교식 성인식 이후 잠잠해지고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랍비의 조언을 들으며 간신히 견디던 래리에게 이 곤경들은 차라리 종교적 시련과 극복의 과정이라는 교훈으로 지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안심하는 사이 거대한 토네이도가 다가오고 래리에게 건강에 대해 불길한 전화가 한 통 걸려 오는 영화의 마지막은, 코엔 형제가 인식의 바깥, 윤리와 책임 너머의 영역을 종교적으로 오인하고 승화하려는 시도를 적어도 자신의 영화 세계 안에서만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보인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신에게 위임하지 않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 영화의 처음에 삽입된 짧은 액자 영화에서 부부의 집을 방문한 늙은 랍비가 유령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늙은 랍비의 몸에 송곳을 찌른 아내에게는 단 하나의 분명한 진실이 있다. 그 랍비는 3년 전에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방문한 늙은 랍비는 정말 유령이거나 그를 사칭하고 있는 중이다. 송곳을 찌르고 랍비를 물리친 아내는 남편과 달리 두려워 할 것이 없다. 그가 근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분명한 인식이 이 미스테리하고 공포스러운 상황을 불식시킨다. 그러므로 앞선 질문에 대한 코엔 형제의 대답은 이렇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여라.” 가장 솔직하고 자기 반영적인 영화 <시리어스 맨>을 코엔 형제는 어떤 은유나 암시도 쓰지 않고 담백한 이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의미와 인과, 책임에 대한 강박과 불안으로 고통 받는 인간과 영화 세계의 인물에게 코엔 형제가 그토록 하고 싶은 말이 이것 아니었을까. 믿기 힘들지만 이것은 성실하고 윤리적인 위로의 말이다.

라캉은 “진리에나 신경 써라, 그러면 치유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는 영웅적 태도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진리에 직면하라, 모든 것을 걸어라, 결과를 무시하라, 그러면 치유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2020년 한 해 동안 영화 리뷰 쓰기 모임에서 쓴 글이 또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 모임이 아니었다면 나는 나를 그 무엇으로도 추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코로나와 고립, 취약함으로 얼룩진 2020년이 행복했는지 묻는다면 머뭇거리겠지만, 헛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이 쓰기 모임이었다. 깊이 고맙고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