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어스 맨>

<시리어스 맨>의 본편은 대니의 귓구멍에서부터 시작한다. 카메라는 대니의 귓속을 서서히 빠져 나와 라디오로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Somebody to Love’를 듣고 있는 대니의 귀를 비춘다. 수업 시간에 몰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니는 일전에 거래한 대마의 값을 치르려고 집요하게 페이글을 부르다가 결국 선생님으로부터 적발 당하고 라디오까지 압수 당한다. 이처럼 영화는 대니의 곤경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앞으로 지켜 볼 곤경은 대니가 아니라 그의 아빠, 래리의 것이다.

대니의 곤경에 대해 우리는 대니에게 너의 수업 태도 불량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래리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래리에게 닥친 곤경들에 대해 우리는 래리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내 놓을 수 없다. 래리의 곤경은 자신이 선택한 것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곤경이 래리를 선택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대니의 곤경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가 보는 것이다. 히브리어 수업 시간에 몰래 노래를 듣고 있는 대니의 귓구멍에서 솟구쳐 나온 곤경이 만물의 원인과 결과를 연구하는 물리학자 래리에게 불확정적 재난으로 변모하고 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인과적 설명은 세계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코엔 형제에게 운명은 선택의 총합이 이룬 결과도 모든 것이 미리 정해진 거대한 결정론의 섭리도 아닌, 우연히 만난 치명적인 어떤 사태다. 그것은 엔트로피의 법칙과 같아서, 의도한 바를 거스르게 만드는 무질서의 운동 자체이며, 일이 꼬이게 만드는 힘이다. 그것은 때로는 자신의 갈길을 막거나 쫓아오는 치명적인 살인마의 모습으로, 때로는 영문도 모르게 발생한 사건의 변수나 곤경의 형태로 나타난다. 일상에 침입하여 주체의 평온을 흩트리는 그것, 그리고 이를 맞닥뜨린 주체의 반응은 코엔 형제의 오래된, 어쩌면 평생을 쏟고 있는 관심사다.

코엔 형제의 영화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침입하여 나를 쫓아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몇 가지 기호적 장면을 찾을 수 있다. <시리어스 맨>에서 매일 하굣길마다 벌어지는 대니와 페이글의 추격전처럼 직설적인 것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블러드 심플>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변주되어 온 벽이나 문의 비가시적 응시 만큼 치명적인 것도 없다. 열기에 녹아 반쯤 흘러 내린 벽지를 가만히 쳐다보거나, 그 너머로 서서히 다가오는 살인자의 움직임을 벽이나 문 뒤로 감지할 때 우리는 그렇게 비가시적이고 설명 불가하지만 분명하게 다가오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역사 깊은 벽과 문의 암시는 나로 하여금 카메라가 집 문 앞에서 대화하는 래리를 비추거나, 동료 교수가 연구실 문에 기댄 채 래리에게 말을 거는 구도를 잡을 때 괜히 무언가 불안을 느끼게 만든다.

코엔 형제는 규율과 금지의 봉인이 해제되고 자유로운 주체가 된 현대인이 느끼는 근원적인 불안의 다양한 양태를 다룬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진 후 그것의 결과가 전적으로 자기 책임이 된 시대, 이 시대 주체의 불안은 자신의 선택과 행위가 사태와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에 발생한다. 신이 사라진 지금 사태는 운명으로 섣불리 말할 수도 없다. 주체와 사태-운명 사이를 중계하는 타자, 책임을 미룰 수 있는 타자가 사라진 후 사태-운명과 직접 대면하고 그것을 자기 책임 하에서 감당해야 하는 주체는 때로는 어리둥절해 하고 때로는 그것과 투쟁하며 때로는 지쳐 버린다. 그리고 <시리어스 맨>에서처럼 때로는 대상 없는 원망에 빠진다.

아내 주디스가 싸이 에이블먼과 정분이 난 것도, F 학점을 준 클라이브 박과 그의 아버지가 명예 훼손과 학점 구제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괴롭히는 것도, 동생 아서가 밖에서 사고를 치기 시작한 것도 래리의 책임 밖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책임의 전가를 위한 래리의 히스테리가 발생한다. 텅 빈 원망은 사태의 책임에 대한 편집증에서 유발된다. 이것은 어쩌면 코엔 형제가 다룬 인물들이 그들의 영화 세계에서 오랫동안 말 못한 원망의 자기 표현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리어스 맨>은 코엔 형제의 영화 계보 안에서 가장 솔직하게 자기 반영적인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래리의 히스테리적 반응에 대해서조차 코엔 형제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 주지 않는다. 래리에게 닥친 곤경들은 아들 대니의 유대교식 성인식 이후 잠잠해지고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랍비의 조언을 들으며 간신히 견디던 래리에게 이 곤경들은 차라리 종교적 시련과 극복의 과정이라는 교훈으로 지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안심하는 사이 거대한 토네이도가 다가오고 래리에게 건강에 대해 불길한 전화가 한 통 걸려 오는 영화의 마지막은, 코엔 형제가 인식의 바깥, 윤리와 책임 너머의 영역을 종교적으로 오인하고 승화하려는 시도를 적어도 자신의 영화 세계 안에서만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보인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신에게 위임하지 않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 영화의 처음에 삽입된 짧은 액자 영화에서 부부의 집을 방문한 늙은 랍비가 유령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늙은 랍비의 몸에 송곳을 찌른 아내에게는 단 하나의 분명한 진실이 있다. 그 랍비는 3년 전에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방문한 늙은 랍비는 정말 유령이거나 그를 사칭하고 있는 중이다. 송곳을 찌르고 랍비를 물리친 아내는 남편과 달리 두려워 할 것이 없다. 그가 근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분명한 인식이 이 미스테리하고 공포스러운 상황을 불식시킨다. 그러므로 앞선 질문에 대한 코엔 형제의 대답은 이렇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여라.” 가장 솔직하고 자기 반영적인 영화 <시리어스 맨>을 코엔 형제는 어떤 은유나 암시도 쓰지 않고 담백한 이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의미와 인과, 책임에 대한 강박과 불안으로 고통 받는 인간과 영화 세계의 인물에게 코엔 형제가 그토록 하고 싶은 말이 이것 아니었을까. 믿기 힘들지만 이것은 성실하고 윤리적인 위로의 말이다.

라캉은 “진리에나 신경 써라, 그러면 치유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는 영웅적 태도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진리에 직면하라, 모든 것을 걸어라, 결과를 무시하라, 그러면 치유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2020년 한 해 동안 영화 리뷰 쓰기 모임에서 쓴 글이 또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 모임이 아니었다면 나는 나를 그 무엇으로도 추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코로나와 고립, 취약함으로 얼룩진 2020년이 행복했는지 묻는다면 머뭇거리겠지만, 헛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이 쓰기 모임이었다. 깊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몇 년 동안 깊은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상실감과 자책이 중첩되고 반복되면서 나를 갉아 먹었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지 말하기가 짐짓 부끄럽고 고통스럽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소진되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겠고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 그리고 불안만 남은 것 같았다.

이제 조금씩 폐허를 수습하고 있는 듯 하다. 내 얘기를 마음 열고 들어 줄 상담자를 찾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 감정을 진정시킨 후 한 일은 상담자의 조언에 따라 내가 할만한 활동을 찾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온라인 필사 수업을 들었다. 옮겨 적는 글에 이내 염증을 느끼고 나는 다시 영화를 찾았다. 영화 비평 읽기 강좌를 듣기 시작했고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다시 기억해 내려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화 리뷰 쓰기 모임도 찾았다. 글쓰기는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이고 내게 끝없는 고통의 과정이지만 “즐기지 못하는 일이라도 좋아할 수 있다”는 상담자의 조언이 옳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영화 리뷰 쓰기 모임 덕분에 오랜만에 본 영화를 생각하고 정리하게 되었다. 글과 생각은 언제나 모자라지만 오랜만에 블로그에 영화 보고 쓴 글을 남길 수 있어 좋다. 더욱 좋은 건 리뷰 쓰기 모임에서 한 해 동안 쓴 글을 책으로 엮어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일이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즐기지는 못하지만 나를 구해 주는 일이다.

서론이 지나치게 길었다. 영화 리뷰 쓰기 모임에 뒤늦게 합류해 쓴 영화 두 편에 대한 글을 블로그에도 기록으로 남겨 둔다.



사랑에서조차 자유로운 세계는 없다

– <더 랍스터>

영화 <더 랍스터>가 우화적 세계를 제시하는 방법은 인물들로부터 감정을 제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간으로서 시민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성 상대를 찾는 순간에도 인물들은 좀처럼 상대에게 웃음 짓지 않는다. 냉혹한 여인이 데이빗의 형을 죽였을 때에도 데이빗은 복수라는 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은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눈에 칼을 들이미는 동안에도 데이빗의 눈빛에는 두려움 하나 없다.

인물들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인물에 동일시하지 않고 신적인 관점에서 학문적으로 사건을 관찰할 수 있도록 채택한 연출 방법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 세계에서 억압 받고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영화 속 세계의 사람들은 감정을 나누는 법을 모른다. 사랑이라는 감정적 상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요함으로써 정작 감정적 상호작용과 자유의지는 마비된 사회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세계다.

감정적 동일시를 원천차단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고안된 내레이션을 통해 근시 여자는 데이빗이 “감정이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감추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전한다. 영화는 데이빗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억지로 만드는 데 실패하는 전반부와 사랑하는 감정을 감추는 데 실패하는 후반부로 나뉘는데, 수용소처럼 싱글들을 모아 놓고 짝짓기를 강제하는 호텔이나 이 커플 이데올로기 파시즘 체제에 저항하며 사랑을 금지하는 게릴라 조직 모두 공히 억압하는 것은 사랑을 둘러싼 감정의 자유의지와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이다.

감정을 표현하고 나누는 능력을 잃어버린 이 세계에서 사랑을 다루는 태도는 기괴하고 어리석다. 사랑할 상대를 찾거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외면적 동일성을 찾고 만드는 일이다. 근시 여인이 데이빗도 나처럼 근시인 것을 보고 사랑에 빠지거나 절름발이 남자가 코피 흘리는 여자와 커플이 되기 위해 벽에 얼굴을 처박아서라도 코피 흘리는 사람이 되려는 모습들. 감정 교환이 불구가 된 이 세계에서는 각자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무표정하게 각자의 춤을 추는 적막에 찬 장면처럼 모든 행위의 본질적 효과가 사라지고 우스운 몸짓만 남는다.

근시 여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데이빗이 근시 여인처럼 똑같이 눈 멀기 위해 자신의 눈을 칼로 찌르려는 마지막 시퀀스는 안타까운 촌극이다. 이 시퀀스는 눈 먼 채로 돌아올 데이빗을 기다리는 근시 여인이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이는 감정의 자유의지와 자기 존엄을 위한 투쟁에 각성하고 고군분투한 데이빗과 근시 여인조차 사랑에 대한 체제 이데올로기의 맹목적 열정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상기시킨다.

호텔과 게릴라 조직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에도 이 세계에서 그들이 사랑을 실천하고 증명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로 같아지는 것 말고는 없는 것이다. 감정을 표정과 목소리에 담는 법을 모르는 세계라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방법이 없고 사랑에서조차 그저 주어진 세계의 선택지에서 배회할 뿐, 자유로운 세계는 없다고 이 영화는 부조리하게 말한다.



<연애몽>의 빛나는 순간만을 기억하고 싶다

– <쓰리 타임즈>

영화 <쓰리 타임즈>의 원제는 최호적시광(最好的時光), 가장 좋았던 때의 빛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1966년, 1911년, 그리고 2005년 각 시대를 배경으로 연인으로 묶인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는 각 시대에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일까, 가장 빛나는 순간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품고 보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충분한 답을 내 놓지 않는다. 1966년을 다룬 첫 번째 챕터 <연애몽>만이 명료하게 떠올라 빛나고 있음을 인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에 반해 1911년을 다룬 두 번째 챕터 <자유몽>에서 기생(서기)과 개화파 시인(장첸)의 관계는 억압되어 침잠하고 있으며 2005년을 다룬 세 번째 챕터 <청춘몽>에서 진정(陳靖, 서기)과 아진(阿震, 장첸)은 정처 없이 부유하고 있다. 각 챕터의 부제목은 그것이 충만하여 빛나는 때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이 결핍된 시간을 말하는 것만 같다. 이들에게 빛나는 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같고 카메라는 이따금 그들의 감정을 가만히 지켜 볼 뿐이다. 무성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자유몽>에서 예외적으로 할애된 유성영화의 순간이 영화적으로 빛나는 것을 제외한다면 나는 1911년과 2005년의 이야기는 빛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이 영화가 가장 좋았던 때인 1966년의 빛나는 순간을 상기하며 1911년과 2005년을 반추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치가 순차적이지 않고 1966년 – 1911년 – 2005년인 것은 1966년이 참조점이 되어 그보다 과거와 그보다 미래를 바라본다는 의미가 아닐까. 1911년과 2005년에 대한 1966년의 대답 또는 그 반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에 대한 내 원경험이 오직 <연애몽>에서 서기, 슈메이의 놀란 웃음과 아프로디테 차일드의 노래 Rain and Tears를 둘러싼 간절하고 애틋한 감정의 응축으로 남은 것도 이 때문일까.

첫 번째 챕터 <연애몽>은 1966년 입대를 앞둔 한 청년(장첸)과 당구장에서 일하는 여인 슈메이(秀美, 서기)가 연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만 가오슝(高雄)의 한 당구장을 즐겨 찾는 청년은 본래 슈메이가 오기 직전 직원 하루코(春子)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고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 편지는 슈메이의 손에 넘어가서야 비로소 연애편지가 되었고, 군인이 된 청년은 휴가 중 다른 곳으로 떠난 슈메이를 애타게 찾고 결국 만나고 끝내 연인이 되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슈메이와 청년이 연인이 되기 직전 끝난다는 점에서 <자유몽>, <청춘몽>과 마찬가지로 <연애몽> 역시 연애가 부재하고 그것을 갈구하는 인물이 거기에 가 닿으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챕터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나서 청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가 시작하고 10분 동안 우리는 감정을 알아채기 힘든 인물들의 행위를 바라본다. 아마도 청년이 하루코에게 건네는 편지에서 감정의 단초를 알 수 있을텐데, 영화는 이 편지를 받은 하루코의 옅은 웃음 외에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편지의 내용은 하루코가 떠나고 새로 온 직원 슈메이가 읽는 동안 청년의 목소리 내레이션으로 설명된다. 영화는 하루코가 아니라 슈메이를 통해 청년의 마음을 들려 주고 싶은 것이다. 편지에는 청년의 상실과 실패,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담겨 있다. 청년은 얼마 전 어머니를 여의었고 두 번 대학 시험에 떨어졌으며 곧 군대에 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청년은 당신이 있는 당구장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고백한다. 그는 위로 받을 누군가가, 아무라도 필요하다고 구애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하루코와 슈메이는 청년이 품는 욕망의 대상이고, 영화는 청년의 욕망을 제 것으로 하여 따라간다.

그러나 <연애몽>은 (그 누구와도) 사랑 받고 싶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청년의 욕망과 감정을 청년을 통해 드러내지는 않는다. 대신 영화는 슈메이의 응답을 통해 욕망의 실현 가능성을 알려 준다. 뒤늦게 알게 되는, 슈메이가 청년의 편지에 답장을 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하루코의 편지를 전해 읽는 처음부터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슈메이의 표정과 얼굴을 통해서 말이다. 편지를 읽으며 웃음 지을 때, 자이(嘉義)로 떠나는 배 위에서 쓸쓸한 표정을 지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후웨이(虎尾)의 당구장에서 청년을 보고 놀라움의 웃음을 지을 때. 슈메이의 응답이 있을 때 영화는 감정을 고양시키고 이를 통해 청년의, 또는 이야기의 욕망은 정당성을 얻고 배가된다. 청년이 편지에 적은 노래 제목이 카메라가 슈메이의 표정을 가까이 지켜보는 순간 노래가 되어 흐르듯이 욕망은 슈메이의 응답을 통해 환상이라는 실체를 얻게 된다. 슈메이의 응답이 만드는 환상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응답 없는 하루코가 필요했을 것이리라. 청년이 가오슝에서 자이로, 그리고 후웨이로 슈메이를 찾아 헤매게 되는 동력 역시 숨겨진 슈메이의 응답이다.

카메라는 마지막 장면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조심스레 꼭 붙잡는 청년과 슈메이의 손을 클로즈업하기까지 이 둘만의 공간을 섣불리 할애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에는 당구대나 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침범해 들어온다. 후웨이의 당구장에서 재회한 청년과 슈메이가 벅찬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당구 치는 손님이 이들을 가리고 관객의 시선을 방해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야기가 품은 욕망과 달리 카메라는 청년과 슈메이를 타인 다루듯 한다. 마치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의 애틋한 사연을 힘겹게 찾아 내야 할 것처럼. 마치 사심 없이 바라보고 있는 어느 공간에서 우연히도 이 일이 벌어진 것처럼. 카메라는 이야기의 욕망과 힘겨루기를 벌이는 것이다. 이야기가 인물과 함께 욕망을 품고 나아가는 동안 카메라는 인내심을 가지고 거리를 둔 채 그들의 움직임만 지켜보는 듯한데, 이는 오히려 이야기가 지닌 욕망의 에너지를 응축, 강화한다. 두 남녀가 손을 꼭 움켜쥐는 마지막 클로즈업 쇼트는 카메라의 거리 두기가 더 이상 이야기의 욕망의 인력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이다. 카메라가 이야기의 욕망을 끝내 승인하고 그곳에 달라 붙어 버리는 영화적 희열의 순간이다.

<연애몽>은 희열에 도달하기 위해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영화적 대답 같다. 달리 말하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열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적 태도 같다. 욕망 – 사랑에 대한 열정을 끊임없이 돌이켜 보지만 끝내 긍정하고, 그것을 소비하기보다 정당한 방식으로 구축해 나가려는 노력처럼 느껴진다. 슈메이의 응답만이 영화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듯이, 욕망이 대상을 착취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 같다.

<연애몽>이 다루는 태도를 대척점에 놓고 <자유몽>과 <청춘몽>을 생각한다. <자유몽>에서 지주의 아들인 개화파 시인은 기생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착취한다. 시인과 기생 모두 신분 제도와 가부장제에 압도되어 자신들의 사랑을 추구하기를 두려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독히 비겁한 인물은 소위 개화파 시인이지만 말이다. 반면 <청춘몽>에서 진정과 아진의 눈빛은 서로를 갈망하는 순간에도 공허하다. <자유몽>과 달리 어떤 것도 허용되기 때문에 어떤 것에서도 희열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 <자유몽>과 어떤 것도 허용되는 <청춘몽>,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연애몽>. <연애몽>은 <자유몽>과 <청춘몽>의 중간 어딘가에 있다. 시공간적으로도 그렇다. <자유몽>의 유곽과 <연애몽>의 당구장, 그리고 <청춘몽>의 도로로 공간 범위는 점진적으로 확장된다.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시간 역시 <자유몽>은 몇 달, <연애몽>은 몇 일, 그리고 <청춘몽>은 몇 시간의 단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애몽>은 욕망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렇지만 구성된 시공간의 범위에서도 <자유몽>과 <청춘몽> 사이의 중용이며 그렇기 때문에 빛날 수 있다는 의미일까.

그래서 나는 첫 번째 챕터 <연애몽>이 다른 두 챕터를 안타까워 하며 반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차라리 <연애몽>은 반추할 대립자가 불필요하다면 어떨까. 허우샤오시엔은 시대의 관계를 구성하면서 자신의 역사의식을 반영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허우샤오시엔 개인의 역사와 노스탤지어가 스며들어 있을 터다. 그는 그것을 읽어 주기를 바랐는지 몰라도 이 이야기를 역사의식으로 치환하면 이야기도 역사의식도 얄팍해져 버리지 않을까. 1911년의 우창봉기나 1966년 대만의 징병제, 2005년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 각자가 지닌 순간의 역사적 다층성을 억압하거나 소진시키지 않고 이 영화를 선해하기 위해 <연애몽>의 빛나는 순간만을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