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히만 아일랜드>

크리스에게 창작은 고문과도 같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야기를 만드는 일부터 크리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인 것 같아 보인다.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이 출현하고 실현되며 때로는 충돌하는 구조 그 자체이기 때문에, 나는 그 구조의 동력을 발견하고 추동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그 과정의 무게를 견뎌 내야 하는 작가란 얼마나 자기 파괴적인 일에 몰두하는 건가 생각해 보고는 한다. 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강박적으로 탐색해야 하고, 그렇게 잉태된 이야기가 자기 자신의 욕망과 대결하는 시간을 마주하면서 끊임없이 분열하는 주체다.

어쩌면 영화에서 크리스와 토니의 상태를 가르는 것은 작가로서 자기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토니에게 작가는 작품이 세계에 현현하기 위해 거쳐 가는 매개자라면, 크리스에게 작가는 작품을 세계에 끄집어 내는 존재가 아닐까. 세상으로 끄집어 내는 자, 또는 출산하는 자로서 크리스는 작품에 책임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는 것처럼 보이며, 이것이 크리스가 토니와 변별되는 지점이리라. 사랑해 마지않는 잉마르 베리만이 6명의 부인과 9명의 자녀를 두고도 가족을 소홀히 한 작가라는 얘기를 듣고, 베리만의 안식처였던 포뢰 섬의 주민들이 베리만을 여전히 불쾌해 하는 모습을 보며 크리스는 상념에 빠진다. 그에게 책임과 불안이라는 태도는 작품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과 세계로 확장되어 있는 것 같다.

나는 크리스가 포뢰 섬에서 착상하게 된 이야기가 별로 흥미롭지 않다. 에이미가 조지프를 두고 겪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공감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조지프가 떠난 후 절망한 에이미를 이 이야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크리스는 선뜻 인도하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그 다음이 관건인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이제 막 시작에 불과해 보이는 에이미에 관한 이야기(가제가 <하얀 드레스>인 것으로 보인다)가 <베르히만 아일랜드>에서 과도하게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그것이 크리스의 내적 갈등이 야기하는 정합적인 한계라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보다 이 영화가 영화 속 크리스의 영화를 자신과 연결하는 방식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나아 보인다. 크리스의 설명에 따라 박자를 맞추어 재현을 수정하면서 시작한 크리스의 영화가 앞서 말한 이야기의 말미, 중요한 분기점에서 크리스의 잠재적 현실과 구획 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이다. 크리스가 만난 영화학도 함푸스가 크리스의 영화에서 같은 인물로 등장하는 것도 더해서,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크리스의 현실과 가상을 상호 반영적인 세계로 표현하려 한다. 현실과 가상의 뒤섞임을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가상의 유효성이 증명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토니, 함푸스, 나아가 잉마르 베리만과 작가에 대한 크리스의 감정과 욕망이 가상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을 만큼 유효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크리스의 현실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할 만큼 유효하기도 하다. 크리스가 그의 영화 <하얀 드레스>의 결말을 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이유가 자기 감정과 욕망이 야기할 파국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크리스가 끝까지 밀어붙여서는 안 될, 막다른 금기를 깨닫고 이야기에서조차 실현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가상의 공간에 한정되지 않으며, 현실의 층위에서도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면. 크리스의 가상과 영화의 현실 모두에서 감지되는 파국의 가능성은 이 두 층위의 경계를 모호하게 중첩시킴으로써 봉합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마치 가상과 현실 양자를 순환하는 구심력이 크리스를 파국으로 이탈하지 않도록 끌어 당기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크리스라는 작가의 파국에 대한 근심과 불안이 가상과 현실의 순환 고리를 필요로 하는 것일지도.

<아네트>

<아네트>는 영화가 그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원리에도 불구하고, 내밀한 사적 세계를 들여다 보는 예술이기도 함을 보여 주는 한 예다. 주어진 시간 동안 우리가 카메라라는 유일한 시선에 사로잡혀 그 시선의 망막 앞 또는 뒤를 공개적이지만 은밀하게 체험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시선의 진짜 주인이 존재한다고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허구적 세계를 믿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감독 레오스 카락스와 그의 딸 나스티야가 직접 등장해 영화의 시작을 알리고 나면, 표현주의적 모험 같은 이 영화의 낯설고 익숙한 모든 면모에 대해 레오스 카락스의 자의식과 욕망을 연결하고 싶어지는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이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레오스 카락스와 나스티야임을 알아 채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 영화가 감독 개인에 붙들려 있다고, 감독의 고백을 대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형성하는 것이, 어딘가 익숙한 원형적 이야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영화적 선택을 견디는 한 방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어떤 환상에도 관대할 수 있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것이 레오스 카락스가 온전히 사적인 환상을 자유롭게 표출하게 위한 선택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 볼 수도 있다. 안의 죽음부터 헨리의 자기 혐오적 불안과 도취적 충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낯설게 침입하는 인서트 쇼트부터 여과 없이 밀어 붙이는 무대 장면의 맹목성까지. 이 영화를 독해하는 것이 대개 레오스 카락스의 취향과 감정, 욕망과 성찰을 탐색하는 길로 향하는 것은 관객인 우리에게 피하기 힘든 여정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숨막히게 내밀해 보인다.

영화가 레오스 카락스의 욕망-상징 체계에 포섭되어 있는 것 같은 이 작가주의적 질식 상태를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네트의 존재가 아닐까. 정확히 말하면 인형 아네트에서 인간 아네트로 변신을 감행하는 순간 말이다. 아네트가 인간의 육체로 등장하는 순간은 영화의 내밀한 환상을 실현하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그 실현이 환상을 무너뜨리는 순간이 된다. 인간 아네트는 아버지가 사랑할 것은 더 남아 있지 않다면서 아버지, 심지어 어머니로부터도 착취 당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 선언은 어쩌면 영화의 내적 진실 또한 폭로하는 것 같다. 나는 이 말이 영화가 인형 아네트를 착취했다는 것도 동시에 암시한다고 느낀다. 영화 내부의 환상에 예속된 존재로서, 인형 아네트는 영화가 재현하는 살인의 안전한 목격자, 착취적 상황의 무해한 대리자이지 않았는가. 아네트는 이제 영화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표정을 짓지 않는다. 말하고 노래하는 인간 아네트는 긴장과 어색함 같은 통제되지 않은 진짜 얼굴의 잉여를 품고 있다. 인간 아네트는 헨리에게뿐만 아니라 영화 자신에 대해서도 거부의 몸짓으로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헨리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짐짓 인형 아네트를 진짜인 것처럼 재현하는 영화의 환상을 전복하는 적대자로 나타난 인간 아네트. 그는 헨리의 소위 심연이라는 환상으로 향하는 영화의 움직임을 중지시킨다. 이 때 영화가 진실을 직시할 유일한 가능성이 열린다. 그것은 레오스 카락스를 경유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성립되는 영화적 경험, 자폐적 환상을 종식시키고도 지속 가능한 이야기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어떤 시간을 거쳤더라도 마지막에는 결국 인간 아네트를 선택했다는 것이 우리가 이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미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