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새롭게 사유하라!
출처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50184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 2008.02.21

플롯보다는 정보를 통한 영화감상을 요구하는 할리우드영화에 대처하는 새로운 사유 훈련법 1탄 <미스트>

(스포일러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실 분들은 자제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충분히 경고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건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가 아니라 지난 한해에 만들어진 할리우드영화를 한달 동안 몰아서 본 다음 중얼거린 질문이다. 제이슨 라이트먼의 ‘10대 소녀의 지옥을 웃기게 그린’ <주노>와 마이클 베이의 ‘10대 소년의 로망을 심각한 척 담은’ <트랜스포머>를 한해에 동시에 보게 되었을 때, 텍사스에 관한 두편의 ‘웨스턴 이후’의 영화라고 할 수밖에 없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비범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라드>와 조엘 코언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 다음 뉴질랜드에서 온 앤드루 도미닉이 브래드 피트를 주연으로 연출한 ‘웨스턴’ <제시 제임스 암살>을 보게 될 때,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와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를 동시상영처럼 보았을 때,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을 정반대의 방향에서 던지는 <본 얼티메이텀>과 <아임 낫 데어>(와 <스파이더 맨3>까지)를 거의 연달아 보게 되었을 때, <본 얼티메이텀> 각본을 쓴 토니 길로리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마이클 클레이튼>으로 감독 데뷔했을 때, 미국에 관한 두개의 이상한 연대기인 <조디악>과 <아메리칸 갱스터>를 시즌별로 보았을 때, 그런 다음 1980년대 뉴욕을 무대로 한 경찰과 러시아 마피아 사이에 낀 클럽 매니저를 다룬 제임스 그레이의 <우리는 밤을 지배한다>를 보게 될 때, <클로버필드>를 본 다음 집에 와서 다운로드받은 리처드 ‘도니 다코’ 켈리의 <남쪽나라 이야기>를 볼 때, 지지난해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한 것을 숀 펜이 <인투 더 와일드>에서 거의 이루어낸 것을 볼 때, 그냥 무엇보다도 데이비드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가 만들어지고 있을 때, 구스 반 산트가 ‘여전히’ <파라노이드 파크>를 찍고 있을 때, 지금 미국영화는 무엇일까, 라고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하는 이야기지만 스필버그가 <우주전쟁>을 찍었을 때 무언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했다. 프랭크 카프라처럼 <터미널>을 찍은 다음 갑자기 존 포드의 <수색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걸작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하워드 혹스처럼 <뮌헨>을 연출했다. 그러고 난 다음 두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걸작 전쟁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제작했다. 올해 (루카스와 함께)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으로 돌아오지만 지금 준비하는 영화는 <링컨>(!)이다.

할리우드영화가 영화보는법을 바꾸고 있다

이 러한 상황이 벌어진 토픽의 단절이 언제인지를 정확하게 지적하지는 못하겠지만, 1999년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가 (미국에서만) 1억달러 블록버스터가 되었을 때 (할리우드식으로 말하면) ‘무언가’ 벌어졌다. 이 쓰레기는 1999년 버전 <네 멋대로 해라>가 되었다(‘의미심장하게도’ 그해에 <매트릭스>가 만들어졌다). 이걸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비평적 용어란 없다(하지만 온갖 해설은 있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미국영화는 영화를 거의 와해시켰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와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쓴 것이 아니다(그렇다고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원래 가지고 있던 비밀의 형식이라는 것을 마치 잉여인 것처럼 몰아세운 다음 재빨리 거기에 영화와 닮은 새로운 근거들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것과 영화 사이에 어떤 공통의 분모가 있는 집합처럼 보였지만 일단 구멍이 뚫리자 그 속으로 새로운 모델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스크린이라는 표면에 구멍이 뚫려 통과하기 시작하자 거기서 어떤 상황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예술이라기에는 너무 생산적이고, 재생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놀랄 만큼 창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약간 거슬러 올라가서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과 조너선 드미의 <섬씽 와일드>를 언급하고 있지만 난 그 ‘이후’를 말하고 있는 중이다. 이걸 그냥 포스트모던하군, 이라고 말하는 것은 철지난 유머다. 내가 할리우드영화를 보면서 점점 기괴하게 생각하는 것은 영화 자체는 금방 이해가 되는데 본 다음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거의 플롯의 구조가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이 할리우드영화를 쉽게 이해하게 만드는가? 플롯없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 <조디악>을 본 다음 <살인의 추억>처럼 플롯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가? <본 얼티메이텀>을 본 다음 이 영화가 아무 인과관계 없이 고작해야 세개의 시퀀스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 텅 빈 플롯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지 않는가? 단 하나의 시퀀스로 이루어진 두편의 영화의 (놀랄 만큼 창조적인 다음 한심할 만큼 게으른) 반복 <데쓰 프루프>. 아니, 차라리 스포일러의 만연 속에서 그 영화의 플롯이 궁금해서 영화를 보러간 적이 있는가? 심지어 <클로버필드>를 보러 온 관객의 대부분은 어떻게 찍혔는지조차 알고 온다. 그 앞에서 우리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새로운 상황이라면 영화를 보는 방법을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무엇을 어디서? 왜 보는 방법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혹은 의심하지 않는가?) 나는 지금 미국영화를 예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읽고 있다면 당신은 내 논점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다.

정보를 통해서, 정보로 영화를 설명하는 게임방 시대의 시네필들

오 늘날 영화를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영화라는 사건을 가능한 세계의 한 가지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영화-사건-가능, 이라는 하나의 삼각형. 다른 하나는 영화라는 정보를 존재하는 세계의 일부로 읽는 것이다. 영화-정보-경험, 이라는 또 다른 삼각형. 전자의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영화는 눈에 보이게 줄어들고 있다. 후자의 방법은 거의 모든 영화들이 우리 시대의 광학적 기계장치를 다루는 전략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를 볼 때 이제는 그것을 보는 직관적 감각이 얼마나 예민하고 풍요로운가라는 (다소 상투적인 비유이지만) 유목민적인 산책의 구경보다 그 영화를 둘러싼 정보를 얼마나 더 많이 갖고 있느냐에 의해서 그 영화가 더 잘 보이는 네트워크로서의 집단적 전송과 리플이 이 시대의 영화감상을 특징짓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착각하면 안 된다. 오늘날 이 네트워크의 특징은 대화가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오로지 사이버 대화가 있다. 정말 있는 것은 전송뿐이다. 전송하고, 전송받고. 베냐민적 영화보기에 대한 맥루한적 영화보기의 승리. 어쩔 수 없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미국영화(의 관객교육 방법)의 승리. 오늘날 젊은 시네필들이 영화 그 자체보다 영화를 둘러싼 정보에 더 열중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노트북 세대의 첫 번째 시네필들, 게임방 시대의 첫 번째 시네필들. 그들은 사실상 재빨리 새로운 영화 보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그들은 영화를 본 다음 견해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정보의 오류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정보를 경유하고, 정보를 통해서, 정보로 영화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영화를 더 잘 보려고 혼자서 명상에 잠겨 자기의 생각을 말하려 들 때 새로운 시네필들에게 그 노력이 일종의 영화적 문맹이거나 혹은 부질없이 관념적인 잡담처럼 보이는 것은 이유가 있다. 혹은 지식이 이들을 간섭하려들 때 맹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보는 쪽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쪽에서 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할리우드영화가 있다. 이제 영화를 볼 때 시각적 플롯이나 시간적 형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코드를 보는 것만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혹은 코드를 놓치면 더이상 영화가 잘 보이지 않는다. MTV는 새로운 감상방식을 교육했고, 게임은 내용보다 룰이 중요한 플롯을 만들었으며, (펄프 소설과) TV와 팝송과 만화는 영화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멀티플렉스는 거의 테마파크가 되었으며(혹은 그 역을 성립시켰으며), 속편 시리즈물은 영화를 박스 세트로 부풀렸고, 웹은 지구상의 모든 관객에게 각자 자신의 ‘사이버 지면’을 가진 블로그 영화평론가로 만들었으며, DVD 서플은 해설로 해석을 대체하였고, 유튜브는 명장면 발췌의 무법천지가 되었으며, 영화는 우리 시대의 글로벌 라이프스타일의 일부가 되었다. <시민 케인>을 잘 보기 위해서는 리뷰를 찾는 대신 이 영화를 백번 보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 <아임 낫 데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번 보는 쪽보다 웹 사이트를 뒤지는 쪽이 낫다. 이제는 검색어를 얼마나 정확하게 선택하느냐가 얼마나 적합한 미학적 용어를 알고 있느냐보다 그 영화의 핵심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 그냥 한마디로 이 새로운 영화들의 핵심은 정보를 미학적으로 만드는 데 있다. 미국영화, 말 그대로 정보의 바로크적 네트워크.

우리 주변에 만연한 이상한 태도 중 하나는 할리우드영화가 바보 같다고 그냥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다. 사태는 정반대이다. 바보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들은 위대한가? 그것은 또 다른 질문이다. 어떤 이들은 정보로 이루어진 미국영화가 단지 하부의 뇌만을 자극한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부의 뇌를 자극하는 영화만 다루자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머리 안에서 영화가 작동한다면 그때 상부와 하부는 동시에 활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한쪽없이 다른 한쪽이 설명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표현주의영화들은 필름누아르와 하드보일드와 공포영화와 뒤섞였으며, 러시아 몽타주영화들은 갱스터영화들과 뒤섞였으며,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영화들은 멜로드라마와 뒤섞였으며, 네오리얼리즘영화들은 텔레비전과 뒤섞였으며, 모더니즘영화들은 MTV와 뒤섞였으며, 홍콩영화들은 액션 미장센이 되었으며, (… 등등) 변주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미국영화의 ‘지금’을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사실상 동시대 영화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데없는 새로운 상황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 상황은 거의 전면적이고 게다가 ‘여기’서 재생산되고 있다. 나는 그것이 저기서가 아니라 여기서, 그리고 그때가 아니라 지금 우리 동네 멀티플렉스에서 (혹은 당신의 컴퓨터 안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동의를 제안하는 것이다. 같은 말의 다른 테제. 나는 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낸 미국영화의 전술 앞에서 우리가 새로운 유격전을 벌이기 위해 재빨리 함께 새로운 사유의 훈련에 돌입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말하자면 이 글은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훈련을 위한 사용자의 가이드북을 만들려는 일종의 예비적인 서론으로 읽혀야 한다. 가벼운 몸 풀기, 너무 헤비하지 않게. 약간 성공적이고 대부분 엉성하지만, (스포일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직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은, ‘그렇지만’ 전선의 약한 고리를 이루고 있는 <미스트>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다른 영화에서 얻은 경험으로 이해를 요구하는 <미스트>

(그 러므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모든 것을 안개 속에 가린 상황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쪽은 투명한데 저쪽은 그냥 하얀 벽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슈퍼마켓 유리창 저편을 쳐다보는 것뿐이다. 마지막에 잠시 안개가 걷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다.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를 보고 있으면 첫 번째 질문은 거기서 시작한다. 하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그건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게 상관이 없어진 것일까? 여기에는 어떤 유혹이 있다. <미스트>는 영화를 보는 관객을 슈퍼마켓 안에 있는 누구와도 동일하게 다루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안개 너머의 ‘그것’과 어떤 연대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 관객으로 하여금 이 상황에 개입하기를 원치 않는 듯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들어준다. 그것을 구경꾼이라고 말하기에도 다소 애매하다. 이때 관객은 슈퍼마켓 안의 희생자들이나 혹은 ‘그것’ 말고 영화 바깥의 누군가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바깥의 누군가? 그렇다. 이때 그 누군가는 이미 이것을 본(것의 반복이라고 믿고 있는) 당신 자신이다. 오늘날 제대로 매장하지 않아서 귀환하고 있는 것은 영화 속의 증후가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 이미 우리가 본 영화들의 경험이다. <미스트>는 자신의 부족한 설명을 그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들에 떠넘기고, 그런 다음 비슷한 상황을 약간 변주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목매달아 자살한 두명의 군인 시체 앞에서 데이빗이 웨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냐고 다그칠 때, “막을 찢자 저쪽 구멍에서 무언가가 나왔어요”라는 대답을 할 때,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할 때, 나에게 그 말은 화면 저 너머의 영화들로부터 당신이 이미 본 것들이잖아요, 라는 대답의 판본으로 읽혔다. 그래서 관객에게 다 설명되지 않더라도 끝내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어떤 우쭐거림 같은 것을 부추기고 있다. 설명되지 않은 설명된 것들, 이라는 어떤 이상한 합의. 우리에게 떠넘긴 설명.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 합의를 끌어내는 일곱 가지 판본이 있다(물론 이것은 더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카모디 부인의 말을 따라 일곱개의 봉인이 열리는 순간이라고 읽어볼 생각이다).

1. 프랭크 다라본트와 스티븐 킹의 관계로 읽기

첫 번째 판본. 이게 가장 따분하다. 프랭크 다라본트와 스티븐 킹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합의를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스티븐 킹의 소설을 프랭크 다라본트는 마치 그의 소설의 집사라도 된 것처럼 충실하게 옮겼고, <쇼생크 탈출>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다음 <그린 마일>은 (지루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스티븐 킹의 팬클럽이라면 이 판본은 충분히 따져볼 만한 게임이다. 우선 영화의 절반 정도를 따라갈 때까지 프랭크 다라본트는 매우 충실한 독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카모디 부인이 점점 종교적 광신을 슈퍼마켓 안의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부터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핵심은 마지막에 있다. 둘 다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는 함구무언한다. 스티븐 킹은 문자의 상태이기는 하지만 ‘희망’(hope)을 제시한다. 프랭크 다라본트는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아들로 이루어진 ‘유사 대가족’의 몰살로 끝을 낸다. 그런 다음 갑자기 군대가 나타나 데이빗이 살아났음을 알린다. 이것이 절망인지, 아니면 새 출발의 암시인지는 단언하기 힘들다. 그러나 아홉살인 아들 빌리를 아버지의 손으로 죽이는 것은 어떻게 읽어도 음울하다. 하지만 프랭크 다라본트는 자신만이 이 책의 유일한 독자임을 주장하면서, 이 마지막 장면은 오로지 스티븐 킹 책의 독서 끝에 “그 다음은?”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한다. 증후적 독해? 차라리 신경증적 독서라면 어떨까? 좀더 밀고 나아가서 1980년에 쓴 소설을 2007년에 영화로 옮길 때 각자의 배경이 된 각자의 시대의 대중을 통과하기 위해서 엔딩을 바꾸어야 했는가? 레이건 시대로부터 부시의 시대에로. 그런데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차이? 아니면 원래 스티븐 킹의 소설이 이러하게 끝이 나야 했던 것을 오로지 원작에 의지해서 ‘올바르게’ 수정한 것인가? 그러나 이 문제에 매달릴 때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놓친다. 안개가 흐려놓은 것은 진짜 무엇인가?

첫 번째 판본의 변형. 그러므로 만일 <미스트>를 스탠리 큐브릭이 찍었다면?(<샤이닝>) 브라이언 드 팔마가 찍었다면?(<캐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찍었다면?(<데드 존>) 존 카펜터가 찍었다면?(<크리스틴>) 로브 라이너가 찍었다면?(<미저리>) 조지 로메로가 찍었다면?(<크립쇼>) 브라이언 싱어가 찍었다면?(<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괄호의 자리에 호명된 영화 대신 <미스트>가 각자의 그 영화를 만들었을 때 있었다면?

2. 히치콕의 <새> 버전으로 읽기

두 번째 판본. 주유소 근처에 자리잡은 슈퍼마켓에 갇힌 다음 ‘그것’이 찾아든다. 이 상황은 거의 즉각적으로 히치콕의 <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멜라니는 슈퍼마켓에 갇히고, 그런 다음 주유소가 폭발하자 새가 날아들기 시작한다. 물론 히치콕의 <새>는 슈퍼마켓에서 내내 진행되지는 않지만 미치의 집에 갇혀서 새들의 마지막 공격을 받는다. 그런 다음 미치와 멜라니,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은 차를 타고 해변가 마을을 빠져나간다. 희망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구름 너머의 햇빛은 여기를 벗어나면 탈출에 성공했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이 마지막 장면은 프랭크 다라본트보다는 스티븐 킹의 버전에 가깝다(당연히 스티븐 킹은 <새>를 보았을 것이다). 여기서 <미스트>를 <새>와 비교하는 대신 <새>의 버전으로 다룬다면 어떻게 될까? 말하자면 <새>를 ‘새 없는’ 이야기로 읽을 때 미치가 어머니와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서 멜라니와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이야기로 다시 쓸 수 있는 것처럼, 만일 <미스트>에서 ‘그것’들은 단지 맥거핀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상 데이빗을 중심으로 가족관계를 다시 세우는 이야기로 읽게 된다면 우리는 시작하자마자 잠시 등장한 다음 영화가 거의 끝날 때 거미줄에 묶인 아내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라는 난처한 질문과 만나게 된다. <미스트>는 데이빗의 가족을 두번 부수는데 한번은 데이빗의 실제 가족이고, 다음 한번은 데이빗의 유사가족이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곤충들의 개입이다. 데이빗이 그의 곁에 다가온 금발의 매력적인 여자 아만다와 서로 결정적으로 이끌리는 순간 슈퍼마켓에 날아온 ‘그것’은 거대해진 불나방들이다. 그 둘 사이에 감정적인 교류가 일어나는 순간 마치 그 불길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곤충들이 날아들고 슈퍼마켓 안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 그건 마치 아만다에 대한 데이빗의 어떤 감정적 물(物)의 즉각적인 현신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 다음 데이빗을 괴롭히는 문제는 당연히 가족이라는 끈이다. 그때 데이빗을 성가시게 만드는 ‘그것’은 거미들이다. 끊임없이 거미줄을 뽑아내고 데이빗을 붙잡으려 든다. 그리고 마침내 집에 돌아갔을 때 그의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거미줄에 칭칭 묶인 그의 아내의 시체다. 그런 다음 데이빗은 새로운 가족을 꾸밀 수 있을까? 그러나 데이빗은 더 나쁜 선택 앞에 직면하게 된다. 안개는 그의 눈앞에서 끝나지 않고, 이 오리무중 속에서 결국 아들과 아만다와 (할머니)이렌느와 (할아버지)밀러를 이번에는 자기 손으로 몰살한다. 그리고 혼자서 ‘그것’의 희생양이 되기를 기다린다. 말하자면 <미스트>에는 가족의 몰락이라는 테마가 있다. 이때 질문은 단순하다. 이 욕망의 대가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공허한 저항의 몸짓 속에서 절망적인 엔딩이 사실상 가족으로부터 데이빗을 완전하게 탈출시키는 알리바이라면 문득 <미스트>의 첫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 포스터를 그리는 데이빗이 지금 거의 완성을 눈앞에 둔 그림은 외로운 총잡이 롤랜드다(IMDb.com ‘잡동사니’ 정보에 의하면 스티븐 킹의 <다크 타워>라고 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존 카펜터의 <안개>(The Fog)가 있단다).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고, 갑자기 닥친 폭우가 그 그림을 완전히 망쳐놓는다. 만일 그 그림이 데이빗의 욕망의 지식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그림이 데이빗의 현실 속의 행동으로만 완성될 수 있는 밑그림이라면? 그때 아만다는 팜므파탈이라기보다는 데이빗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죄의 전이를 대신 떠안는 희생양이 된다. 하지만 그때 데이빗은 아들 빌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3. 좀비영화로 읽기

세 번째 판본. <미스트>는 괴물영화인가, 좀비영화인가? ‘그것’의 형상은 괴물이지만 행동은 좀비처럼 보인다. 그때 <미스트>는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거의 리메이크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마을을 점령하고, 그런 다음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오늘은 할로윈 데이도 아니고, 13일의 금요일도 아니다. 그냥 오늘 안개가 마을을 채우고, 그런 다음 안개 저편에서 ‘그것’들이 공격을 해온다. 내 관심은 이들이 공격한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 때맞춰 공격하느냐는 것이다. 때를 안다는 것. 좀비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아무 계획이 없으며, 전술도 없다. 사실상 좀비는 허깨비들이다. 그런데 항상 슈퍼마켓 안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들이 습격해야 할 때를 우리에게 일러준다. 그런 다음 우리를 경유하여 ‘그것’들은 슈퍼마켓을 습격한다. 이때 나는 이 말을 약간 수정하고 싶어진다. 안개 저편에서 ‘그것’이 습격해온다기보다는 안개가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미스트>를 읽을 때 대부분 기대고 있는 것은 이 판본이다. 이때 안개가 만들어내고 있는 ‘그것’은 슈퍼마켓을 공격해오는 문어처럼 여러 개의 발을 가진 촉수달린 괴물, 날개달린 곤충, 거미들, 티라노사우루스처럼 보이는 거대한 괴물이 아니라 슈퍼마켓 안에서 미쳐가는 사람들의 심리적 공황상태다. 프랭크 다라본트는 슈퍼마켓 안으로 몰아넣은 다음 계속해서 사람들을 자극한다. 물도 충분하고, 먹을 것도 있고, 여러 가지 생필품이 있으며, 공간도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 여기서 바깥이 잘 보이는 슈퍼마켓의 커다란 통유리 창만이 여기와 저기를 나누고 있다. 안개로 가득 차서 차라리 벽처럼 보이는 저기. 나가면 몸이 순식간에 두 동강난 채 돌아와야 하는 안개 속. 매번 다른 ‘그것’들. 이 순간 영화적 게임은 단순하다. 슈퍼마켓 안의 사람들의 드라마가 진행되고 거의 통제 불능까지 밀어붙인 다음 마치 이 내부의 드라마의 진행을 잘 아는 것처럼 한껏 미루었다가 때로는 조금 일찍 때로는 조금 늦게 안개 저편으로부터 대답이 온다. 물론 그 대답은 무자비한 공격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 안개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부등가교환의 대칭이다. 관객은 바깥에 있는 ‘그것’보다 안에서 (전반부) 설명에 귀기울이지 않는 뉴욕에서 온 흑인변호사 브렌트와 (후반부) 종교적 선동을 하고 있는 카모디 부인을 훨씬 미워하면서 이 영화의 악당의 자리에 배치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이 상황에서 카모디 부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것’을 카모디 부인이 불러들인 것이 아니며, 카모디 부인이 없다고 해서 이들이 안전한 것도 아니다(혹은 그럴 능력도 없다). 이때 <미스트>는 도착적 경제의 방식으로 희생의 대상을 호명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브렌트와 카모디 부인은 자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대답한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쓴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에게 악의적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벌이는 나쁜 행동. 그러나 그 행동이 임무에서 나온 것이며, 그 임무가 법과 종교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때 법과 종교를 동시에 부정한 다음 데이빗과 그의 일행은 무엇을 얻었는가? 아무것도! 그들은 그 다음에 안개 속의 무아지경을 헤맨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사실상 <미스트>는 역설적으로 차라리 안개 이쪽 편에 법과 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는 쪽과 그 둘을 부정한 다음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으로 가는 것,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내기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내기가 끝나면 더 나쁜 다음 내기가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음산한 파시즘의 도래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상징적 방어선을 포기했을 때 마주치는 참을 수 없는 현실을 보는 편이 나은지를 선택하라는 내기로 볼 것인지는 당신의 판단이다.

4. 생태파괴가 부른 재난영화로 읽기

네 번째 판본. 이것은 약간 고지식하다. 그냥 제목 <미스트>를 믿는 (척하는)것이다. 말하자면 <X파일>을 보면서 얻은 교훈을 적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음모론의 신도들은 이야기에 관점의 이동을 통해 일종의 왜상으로 보는 대신 그 자체를 믿음으로써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다음 약간의 재치를 부린다. 자, 스티븐 킹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모두 믿습니다. 다만 안개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나에게 설득시킨다면. 믿는 방법은 간단하다. 여기에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복잡한 음모론과 과학에 대한 비관적 정보들과 저 너머에 총체적인 그 어떤 계획이 있다는 신념이 뒤죽박죽이 된 삼위일체를 세우면 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개를 믿을 만한 그 무엇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판본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제쳐두고 “안개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달린다(그렇게 함으로써 안개를 맥거핀으로 생각하는 입장과 불화에 빠져든다). 물론 음모론은 현대판 사이비 알레고리이다. 그러나 이 의심이 어떤 위로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미스트’라는 기표의 형식적인 기의는 ‘안개’지만 실제적인 기의가 ‘사실은’ (사실은?) ‘알고 보니’ (정말?) ‘공해’였다, 라는 환경주의적인 생태학적 의심으로 바꿔치면 갑자기 모든 플롯의 황당무계함이 어떤 상징성의 인과관계를 획득하고 (사이비) 과학적으로 설명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나타난 모든 ‘그것’들은 환경파괴의 희생으로 인한 생물학적 기형의 결과이며, 인간들은 자신이 파괴한 환경의 피해자가 되었으며, 자신의 결과 앞에서 이성과 종교는 무기력하며, 후회는 때가 늦었다. 하지만 … 등등. 이때 <미스트>는 괴물영화나 좀비영화가 아니라 재난영화라는 장르로 재빨리 옮겨간다. 흥미로운 것은 <미스트>가 재난영화가 되었을 때 일차적인 희생자들은 슈퍼마켓 이쪽이 아니라 유리창 저쪽의 ‘그것’들이며, 이쪽의 사람들은 이차적인 희생자들이자 간접적인 가해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완전히 반대의 방식으로 읽힐 수도 있다. 자, 무엇이 ‘그것’을 저렇게 만들었는가? 그 원인의 고갈이 이루어지자,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자동차는 기름이 떨어져서 멈춘다. 그런 다음 그들은 집단적으로 자살한다. 그때 자살의 행위가 희생자로부터 사실은 자신들이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결정한 선택이라면? 말하자면 멈춘 자동차로부터 전달받은 메시지를 이해한 것이라면? 만일 이 자살이 공해를 만들고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인간들의 잘못을 대표해서 행동하는 죄의식의 표현으로 읽으려고 시도한다면? 그때 데이빗만이 살아남은 결과가 ‘안개’의 진정한 메시지라면? 당신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이때 당신의 자리에 인간이라고 말을 바꾸면 좀더 근사해진다). 그러므로 공존을 모색하라! 하지만 어떻게? X파일에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한 가지씩 있다. 좋은 소식은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그 비밀의 진실이 저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5. 포스트 9·11로 읽기

다 섯 번째 판본은 이것을 반대로 뒤집은 것이다. 이건 좀 웃겨 보이는데 슈퍼마켓을 미국이라고 환유의 자리에 가져다놓는 것이다. 이를테면 1963년에 만들어진 <새>에서 ‘새들’의 공격을 쿠바의 미국 침공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읽는 글이 만연한 적이 있다(그리고 이러한 시사적 읽기를 정치적 읽기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같은 방식으로 ‘안개’를 포스트 9·11로 쳐다보는 것이다. 요즘은 문화 담론에서 이라크가 인기다(그러나 이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스티븐 킹이 1980년에 이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잠시 눈 감아야 한다). 사실 슈퍼마켓는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근사한 비유다. 슈퍼마켓 안에는 마치 중계방송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 다른 계층, 인종, 남자와 여자, 직업, 나이, 그리고 종교까지 골고루 배치해놓았다. 그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린 다음 자기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진행을 위해서 슈퍼마켓 주변을 안개로 둘러싼 다음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위협 아래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매번 새로운 ‘그것’이 공격을 해온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정말 목표로 하는 것은 다문화주의인가? 만일 그것을 핑계로 내세워서 법적인 형식의 절차(브렌트)와 종교적인 믿음의 담론(카모디 부인)을 고의적으로 과장하여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다음 그것을 포기하도록 유혹하기 위해서 던져진 미끼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프랭크 다라본트는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것’들이 공격해왔을 때 문득 카모디 부인에게 달라붙은 곤충이 유심히 만져보더니 마치 그녀를 알아본 것처럼 그냥 무사히 내버려두고 떠나는 장면을 추가했다. 이것이 우연인지 응답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프랭크 다라본트는 의도적으로 그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그런 예외적인 순간을 포함한 ‘그것’(들)의 공격 방식은 예고없는 테러처럼 보이며, 슈퍼마켓 안의 토론은 번번이 중단된다. 말하자면 슈퍼마켓 안의 민주주주의적 절차를 방해하는 것은 안개 너머의 ‘그것’이다. 마치 세계화에 대한 그 어떤 민주주의적 절차를 포기하도록 적절한 타이밍에 테러가 이루어지는 것처럼(그래서 9·11 테러는 빈 라덴이 부시와 짜고 벌이는 사기극이라는 설은 꽤 구체적으로 많은 글에서 제시되고 있다) ‘그것’들은 때를 맞춰 공격해온다. 이때 이 판본에서는 안개보다 유리창이 놀랄 만큼 구체적인 비유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자신들이 세계화에 무척 열린 입장을 갖고 있다고 몇번이고 반복해서 주장해왔다. 슈퍼마켓의 유리창은 공격을 당하는 이쪽을 투명하게 모두 보이게 전시하고 있다. 반면 유리창 저쪽은 안개에 가려서 무언가 기분 나쁘고 섬뜩한 비밀을 지닌 채 음험하게 이쪽을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여기에 ‘그것’과 공존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슈퍼마켓 안에 대해 이유를 알 수 없는 적대감을 지니고 있으며, 안개는 저쪽의 ‘아마도’ 폐허가 되어버렸을 황폐한 풍경을 감추고 있다. 마치 이라크의 진실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북한의 진실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판본은 여기서부터 정말 재미있어진다. 왜냐하면 이 논의를 계속하기 위해 이제부터는 영화가 논쟁적 불화를 제기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판본은 슬라보예 지젝이 나보다 백배는 잘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후’는 지젝에게 맡겨두기로 하자.

6. 텔레비전의 문법으로 읽기

여 섯 번째 판본은 <미스트>가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첫 장면에서 폭우가 내린 다음날 아침 집을 떠나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슈퍼마켓에 들어간 다음 갑자기 이상한 줌이 나온다. 꼭 그것을 드러내놓고 찍은 것은 아닌데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갑자기 망원렌즈로 잡은 다음 마치 인물을 놓치기라도 할 것처럼 잡아당긴다. 전체를 그렇게 찍은 것도 아닌데 종종 ‘느닷없이’ 그렇게 찍었다. 처음에는 <미스트>가 저예산영화이기 때문에 규모를 숨기기 위해서 그렇게 연출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가 절반이 지나도록 슈퍼마켓 안에서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이 공간을 일종의 스튜디오처럼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공간 안에 들어온 모든 인물들이 어차피 엑스트라이기 때문에 통제할 필요가 없는데도 구태여 그렇게 찍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깥은 온통 안개뿐이기 때문에 <미스트>는 바깥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게다가 이야기는 바깥에 나가면 위험하다, 는 전제를 놓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연출자 입장에서는 반대로 바깥을 무시해도 된다. 도대체 이 줌은 무엇일까? 그건 줌으로 ‘무엇’처럼 보이고 싶기 때문에 동원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어떤’ 스타일의 유사 효과 때문이다. 좀더 이상한 것은 테크니컬러로 찍었는데도 매우 흐릿하게 현상했다는 것이다. 바깥은 안개 속이고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것이 투명한 유리창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낮의 채광상태가 가장 나쁜 상태에서 진행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찍었다. 그런 다음 공간의 폐쇄성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닌데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은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찍었다. 그건 표정을 잘 보기 위한 것도 아니고 미학적인 선택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전체 공간의 마스터 숏도 없고 공간 설정은 유리창을 기준으로 잡고 세로로 진행된다. 그래서 인물들의 동선은 앞과 뒤로만 움직이고, 종종 그게 뒤엉켜서 이 인물이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그래봐야’ 슈퍼마켓 안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공항 터미널이지만 훨씬 큰 공간의 이동선을 정확하게 시각적으로 연결하는 스필버그의 <터미널>과 비교해보라). 말하자면 <미스트>는 이상할 정도로 단조롭게 찍힌 영화다.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문득문득 끼어드는 페이드다. 그게 필요한 것도 아닐뿐더러(여기서 일주일씩 머무는 것도 아닌데 시간의 경과를 왜 설명해야 하는가) 종종 이런 영화에서는 가까스로 만든 긴장을 중단시키기 때문에 교과서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편을 권장한다. 그렇다고 페이드를 이용해서 트릭을 쓰거나 그 사이에 어떤 감정적인 변화의 추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이 어떤 리듬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개입한다. 그냥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더라도 프랭크 다라본트의 <쇼생크 탈출>이나 <그린 마일>에 비해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단조롭게 만들어졌다. 왜 그렇게 찍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미스트>는 텔레비전처럼 찍은 영화이다. 아니, 차라리 영화관보다 텔레비전으로 보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영화다. 혹은 텔레비전을 보는 방식으로 보아야 하는 영화다. 나는 셋 중 어느 쪽이 가장 좋은 답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미스트>가 영화와 텔레비전 사이를 흐릿하게 만들 목표를 가진 것은 분명하다. 프랭크 다라본트 자신도 이런 목표에 충실하기 위해서 이전 영화들과 완전히 다른 스탭을 구성했다. 프로덕션디자인을 한 그레고리 멀튼, 촬영을 한 론 시미트, 편집을 한 헌터 M. 바이어는 프랭크 다라본트가 <마제스틱>을 찍은 다음 텔레비전 시리즈 <레인>과 <쉴드: XX 강력반> 에피소드를 작업할 때 함께 일한 스탭들이다. 할리우드에는 오늘날 자신이 텔레비전 드라마인 줄 아는 많은 영화들이 있다. <러브 액츄얼리>(2003)는 그중에서 가장 성공한 예일 것이다. <클로버필드>는 자기가 유튜브인 줄 아는 영화다. 점점 더 영화의 존재론은 외양과의 틈새 사이에서 위협받고 있으며, 그것이 위험인지 혹은 진화인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힘들다. 그러나 자꾸만 영화는 이 외양의 하위 분할 속에서 새로운 정보의 모델들과 뒤섞이고 있다. <미스트>는 새로운 영화는 아니지만 (이동진의 관용구 ‘재미있는 척’을 다소 변주하여) 새로운 척하는 영화이기는 하다.

7. 안개를 가스로 놓고 홀로코스트의 느슨한 비유로 읽기

일 곱 번째 판본만 나에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 때문에 <미스트>를 미루어두었다. 이제 이 영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보았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스포일러에 대한 두려움없이 비로소 이 판본을 이야기할 생각이다. 나는 스포일러 때문에 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미스트>에서 안개의 카니발리즘(의 스펙터클)을 본 것 이외에는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정한’ 취향이다. 내가 <미스트>에서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마지막의 마지막 장면이다. 마지막은 데이빗이 그의 아들 빌리와 아만다, 이렌느 할머니, 밀러 할아버지를 ‘안락사’시킨 다음 죽음을 기다리며 괴물을 기다리는데 안개 너머로 탱크가 나타나서 구조되었음을 알린다. 이 장면 자체는 별로 놀랍지 않다. 슈퍼마켓을 떠난 다음 안개 속을 달리는 자동차를 방향을 맞추지 않고 세번에 걸쳐 반복 편집했을 때 이 엔딩은 예고된 것이다. 이 편집은 사실 계속 그 자리에 있다는 뜻이며, 그런 다음 ‘그것’들이 저 멀리 떠나가는 모습을 롱숏으로 볼 때 그 빈자리를 무엇이 대신 채울 것이라는 질문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데이빗은 이 영화의 편집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다음 장면에서 데이빗 앞을 트럭이 지나간다. 그 트럭에서 머리 짧은 한 여자가 두 아이를 안고 가면서 데이빗을 냉랭하게 쳐다본다. 그녀는 거의 영화 초반부에 슈퍼마켓을 가장 먼저 떠난 두 아이의 엄마다. 두 아이가 집에서 자기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큰애가 산만해서 둘째를 돌보지 못할 거라고 하면서, 브렌트에게 도움의 시선을 던지고, 카모디 부인에게 동의를 구하고, 군인들에게 동정을 구하는 제스처를 취한 다음, 아들 빌리를 껴안고 쭈그리고 앉은 데이빗에게 마지막 간청을 한다. 데이빗은 이 모두를 대표하는 것처럼 차마 말을 꺼내길 주저하면서 “보시다시피 저도 지금 아이 때문에”라고 그 눈길을 피한다. 그러자 이 젊은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참으로 모두들 매정하군요”라는 한마디 말을 남긴 다음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금방 이 젊은 엄마를 잊었고, 대부분 아마도 그녀가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은 그녀가 생존했음을 알린다. 내 질문은 그녀가 어떻게 살았을까, 가 아니라 그녀의 생존이 무엇을 증언하느냐는 것이다. 그녀가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말하자면 <미스트>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영화인가? 만일 그녀가 없었다면 <미스트>는 안개가 드리워진 ‘이전’과 걷힌 ‘이후’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생존이 확인되는 순간 갑자기 ‘이전’과 ‘이후’가 하나로 묶인다. 여기에는 체험의 공유라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둘은 공포를 공유할 것인가, 생존을 공유할 것인가? 그녀는 책임을 물을 것인가, 증오를 상대화할 것인가? 그녀가 거기 살아 있을 때 데이빗은 죽은 아들을 위해서 어떤 변명을 할 수 있는가?

여 기서 <미스트>를 정말 감당할 수 없게 밀고 가는 것은 슈퍼마켓을 포로수용소로 설정한 다음 안개를 가스로 놓고 홀로코스트의 느슨한 비유로 읽는 것이다. 나는 젊은 엄마의 짧은 세버그 헤어스타일을 보면서 할리우드영화들이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여자들을 다룰 때 항상 관습적으로 보여주는 동일한 머리 모양이 떠올랐다. 물론 <미스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질문을 밀고 갈 생각도 없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이후’ 생존의 윤리와 기억의 증언이라는 질문이 반복되고 있다. 만일 <미스트>가 우리에게 단 한 가지만이라도 진지하게 질문을 제기했다면 나는 이 마지막 숏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것이 예술적이건 아니면 상업적이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 살인을 막을 수 없다면 우리가 방어해야 할 숏은 무엇인가? (첫 번째 유격훈련 끝)

최근 출퇴근 대중교통 이용시간이 급격히 줄어들면서(그만큼 걷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말) 씨네21을 읽는 속도가 무척 줄어들었다.
3주 전 600호 중(ㅡ.ㅡ;) 가장 재미있었던 기사는 바로 이것, ‘정윤철 감독, 평론가에게 묻다.’
당연히 정성일과의 인터뷰가 분량이 가장 길다 ㅋㅋ

[정윤철 감독, 평론가에게 묻다] 일일편집장을 시작하며

[정윤철 감독, 평론가에게 묻다] 정성일 ①

[정윤철 감독, 평론가에게 묻다] 정성일 ②

[정윤철 감독, 평론가에게 묻다] 김영진

[정윤철 감독, 평론가에게 묻다] 황진미

[정윤철 감독, 평론가에게 묻다] 일일편집장을 마치며

종종 본론을 보충키 위한 곁얘기에서 본론에서 다하지 못한 그 사람의 진심을 볼 수 있다. – 본론은 내용을 진행시키기 위한 그만의 욕망으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 이 글을 다 읽기가 곤란하다면 최소한 두 부분이라도 건져낼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 모두들 영화비평의 위기를 말한다. 지금 다시 떠올려 볼만한 다네의 유명한 제안, 영화에 관한 평이란 완전하게 불필요하다. 대중은 평 없이도 영화를 보고, 극장은 글 없이도 가득 채울수 있다. 말하자면 영화평이란 잉여이다. 그런데 그게 필요하다면 왜 필요한가? 그건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다. 영화를 본 다음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영화에 관한 평을 읽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경험의 연장이며, 보충이며, 대리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평은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겹쳐놓을 수 있어야 한다. 세르주 다네는 영화를 본 다음 정리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핵심은 그 인상을 보존하고, 그것만으로 버티는 것이다.  영화와 세상 사이의 중재. 그냥 영화를 본 다음 인상적으로 떠오른 생각들. 수첩을 가득 채운 두서없는 메모. 이 글은 그렇게 쓰여졌다.”


“나는 영화가 지나치게 자기를 뽐내거나(실험영화들), 반대로 너무 겸손해할 때(미디어로서의 영화들) 흥미를 잃는다. 물론 그걸 더 좋아할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취향을 말하는 중이다. 영화는 세상과의 긴장을 유지할 때, 그래서 그 둘사이의 관계에 내가 개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생각이 활동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다. 결국 영화는 어떤 자세로 세상을 보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어떤 자세를 선택할 때 거기서 진실을 볼 수 있느냐는 선택의 내기이다. 영화와 세상 사이를 중재하는 자세와 거리.”

 

정성일의 가을 영화 산책 [1]
2006.10.11 08:00

약간의 사연. 나는 간절하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영화는 내게 연애를 하자고조르고 있었다. 그래서 책상에서 일어나 거리로 나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너무 오래 책상에 앉아 있었다.텔레비전이 보는 사람을 안방의 정주민으로 만든다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거리를 쏘다니는 유목민으로 만든다. (들뢰즈가 아니라)레지스 드브레가 한 말이다. 영화를 보러 달려가는 두근거리는 마음 혹은 보고 난 다음 지금 막 보고 나온 영화를 생각하고 또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영화는 오가는 길이라는 사유의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대부분 영화를 길에서 깨달았다.나는 교실에서 영화를 배운 적이 없다. 또다시 하염없이 긴 글을 쓸까 지레 겁을 먹은 김혜리 기자는 일단 홍상수의 <해변의여인>을 쓰지 않겠다는 약속에 안심을 했음이 분명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까스로 허락받은 산책. 나는 인터넷을 종료하고영화를 보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영화평은 영화 보는 경험의 연장

(그저 떠오르는 대로 열거하는) 산책의 대가들의 명단. 보들레르의 산책. 지가 베르토프의 산책. 모네의산책. 알베르틴의 산책. 다이스케의 산책. 벤야민의 산책. 로셀리니의 산책. 도미오카와 유키코의 산책. 솔레르의 산책. 차이밍량의 산책. 홍상수의 산책. (고작해야) 그들을 흉내내고 있는 나의 산책. 더 솔직히 말하면 영화에 대한 메모만으로 가득찬 산책-글쓰기는 내 오랜 꿈이었다. 나는 이러한 글쓰기를 세르주 다네의 (신문 <리베라시옹>에 1981년 7월18일프리츠 랑으로 시작해서 1986년 1월24일 펠리니의 <진저와 프레드>로 연재를 마친)‘영화-일지’(Cine-Journal)를 읽으면서 배웠다. 물론 나도 안다. 내가 아무리 해봐야 다네만큼 높이 상공 비행한 다음 내려다보지 못한다는 것을. 다네가 보여준 더 많이 보려는 욕망. 그는 어떤 영화는 슬로모션처럼 보아야 하며, 어떤 영화는 디졸브하듯이 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영화를 보는 내가 영화-되기. 지금 모두들 영화비평의 위기를 말한다. 지금 다시 떠올려 볼만한 다네의 유명한 제안, 영화에 관한 평이란 완전하게 불필요하다. 대중은 평 없이도 영화를 보고, 극장은 글 없이도 가득 채울수 있다. 말하자면 영화평이란 잉여이다. 그런데 그게 필요하다면 왜 필요한가? 그건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다. 영화를 본 다음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영화에 관한 평을 읽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경험의 연장이며, 보충이며, 대리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평은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겹쳐놓을 수 있어야 한다. 세르주 다네는 영화를 본 다음 정리하지말라고 충고한다. 핵심은 그 인상을 보존하고, 그것만으로 버티는 것이다. 영화와 세상 사이의 중재. 그냥 영화를 본 다음인상적으로 떠오른 생각들. 수첩을 가득 채운 두서없는 메모. 이 글은 그렇게 쓰여졌다.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척하다가 정말 바람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바람난아저씨가 카바레를 떠돌듯이 영화관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아아, 바람난 영화야, 여기 아저씨가 왔다. (후렴) 지금은가을이니까. 그래서 급기야 마감일에 다시 한번 전화를 하고 말았다. 내 말도 안 되는 푸념을 들은 김혜리 기자는 한주 미루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한 다음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그런데 몇매를 쓰고 있어요?”라고 물었다. 우물거리면서 대답하자잠시 기다리라고 한 다음 누군가에게 분량을 의논하였다. 그러자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진짜 그것만쓴대?” 그 말이 들리는 수화기를 든 나는 저 멀리 끝나가고 있는 늦여름의 한강을 무심코 보고 있었다. 지난여름에 골뱅이가나타나서 현서를 잡아먹었던 그 한 많은 강. 또 누군가가 뛰어들 강.

 

2006년 여름, 정치적 계절의 도래

<괴물>

물론 <괴물>은 아직도 상영 중이다. 나는 ‘(하지만…)’으로 글을맺었고(<씨네21> 제 565호, ‘노골적이고 단호한 정치적 커밍아웃’), 그리고 허문영이 그 다음을 이어 썼다. 그글은 내가 놓친 부분을 정확하게 찾아서 다시 쓰고 있다(<씨네21> 제566호,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은누구인가’). 하지만 나의 ‘하지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좀더 정확하게 나는 서문을 쓴 것이고, <괴물>은이제부터 더 이야기되어야 한다. <괴물>이 내게 가장 새로운 것은 이야기 구조에 있다. 봉준호는 이야기가 진행되면될수록 점점 인물들을 흩어놓는다. 혹은 일부를 빼낸다. (박희봉) 말하자면 여기에는 고전적인 이야기 구조에 역행하는 배치의분산화가 있다. 아니, 차라리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면서 편집은 점점 산만해지고 있는데, 그걸이용해서 무언가를 회피하고 있다는, 이렇게 무책임하게 인상적으로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걸 말하지 않기 위해 각자의 인물이자기 차례가 왔을 때 책임을 떠넘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걸 말해야 하는 숏이 다음에 나와야 할 때 갑자기 영화는 다른장소에 있는 다른 인물 신으로 달아나버리고 만다. 물론 술래는 괴물이다. 더 미룰 수 없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 말도 못하는괴물의 차례가 돌아온다. 중심의 결여라고 할까, 주변의 점으로 이루어진 가운데가 빈 원형이라고 할까, 이 이상한 이야기의 진행안에서 종종 이야기를 구경하는 것 같은 수평 트래킹 카메라는 분산되는 인물과 그걸 붙이려는 편집 사이의 무심한 매듭이다.이를테면 괴물이 한강에서 뛰쳐 올라와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는데 그냥 무심하게 원효대교를 지나가는 버스 안에서 그걸 쳐다보는승객의 수평운동의 시선. 나는 <괴물>에 대해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서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한 가지 더 지적할 점. <괴물>의 날씨는 박강두와 그의 가족이 병원에서 탈출한 다음부터종잡을 수 없다. 심지어 한강 둔치로 들어가는 굴레방 다리를 지나기 전에 그렇게 내리던 비가 거길 지나가자마자 개어 있다.그런데 여길 지나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걸어서도 1분이면 충분하다. 이 비현실성 혹은 초현실주의적인 날씨. 겨우 50m 이쪽과저쪽이 마치 다른 도시처럼 보이는 거리. 나는 한강에 나타난 괴물보다 이쪽이 훨씬 신기해 보인다. 그런데 봉준호는 그게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괴물>에는 무언가에 고착된 채 그걸 집행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요소를 끌어안고 거기서 눈에보이는 광경만을 펼친다. 혹은 무언가 상상을 덧쓰려는 현실효과를 뿌리치려는 완강한 저항이 있다. 대중 안에 이데올로기의 폭탄을던지는 것은 오늘날 그렇게 점점 상상이 환상을 덮어쓰는 방식으로만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괴물>이 좀더많은 질문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질문을 온통 돈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대한민국 영화담론의 빈곤함이다. 아무래도<괴물>을 말하기 위해서는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질문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다세포 소녀>

<다세포 소녀>

하지만 여기 나는 한편을 더 추가하고 싶다. ‘B급 달궁’(이라는 예명을 쓰는 채정택 작가)의, 얼짱김옥빈의, 혹은 이재용의 <다세포 소녀>는 건드리기도 전에 끝났다. 이 영화를 말할 때 성 정치학이나 장르의 혼합,혹은 패러디를 말한다. 하지만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에 대해서는 애써 질문을 피한다. 그 반대로 나는 이 소녀가 가장궁금하다. ‘B급 달궁’의 원작에서는 주변 인물에 지나지 않는 이 소녀가 갑자기 이야기의 중심에 왔을 때, 그래서 계급모순이중심에 올 때 성 정치학은 왜 창백해지는가? 왜 이 영화에는 도착은 있는데 전복이 없는가? 혹은 성에 대한 애착만큼프롤레타리아를 사랑하는 것은 왜 불가능한가, 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만든다. 그걸 이재용이 질문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그 반대로 질문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성애자 앞에서 트랜스젠더는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받는’ 타자이지만, 부자앞에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타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괴물>을 본 다음 <다세포 소녀>를 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올 여름, 마침내 다시 정치의 계절이도래하였다. 혹은 <괴물>은, <다세포 소녀>는 2006년, (평화로운 국면인 척하는) 대한민국을(계급모순과 반식민지 분단체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 아래 놓인) 대한민국답게 만들어주고 있다. 내년에는 대통령 선거를 한다고한다. 다가올 미래 앞의 기기묘묘한 예고편. 내년 대통령 선거는 괴수와 싸우는 영화가 될까, 아니면 정치적 복장도착의 뮤지컬이될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야기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지난 여름이 끝나기 전 몇편의 영화를 더 보았다. 먼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 두편을 모두 본 것은 <파이란> 때문이다. 나는 <파이란>이 지닌통속성에의 향수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해에 <순애보> <봄날은 간다> <번지점프를 하다><소름>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나왔다는 사실을 환기해 주기 바란다. 나는 지금 멜로드라마만 열거한것이다(그해에 가장 대중적인 영화는 <친구>였다). 이 명단은 예외없이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사랑을 잃지 않는 행위를선택한다. 그것을 우리 시대의 쿨한 사랑법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파이란>은 갑자기 낭만적 사랑의 제스처를 택한다.거의 복고취향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의 통속성. 나는 이 반시대적 연애영화의 행위가 너무도 용기있어 보여서 그걸 방어해야 한다는어떤 만족을 얻었다. 그러나 그 만족은 어떤 망설임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파이란>을 본 다음 이 영화의 장점이(김해곤의) 시나리오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송해성의) 연출 몫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해성이<카라>로 데뷔한 것은 (적어도 내게) 악재로 작용하였다. 세 번째 영화 <역도산>은 송해성보다는 어딘가(이 영화를 제작한) 차승재의 영화처럼 보였다. 그런 다음 <우리들의…>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연애…>을 먼저 보고 난 다음 보게 되었다. 결과는 좀 이상한 방식으로 대답하였다. 이 두편의 영화는<파이란>을 둘로 나눈 것 같았다. 둘 다 거의 벼랑까지 밀고 간 다음 눈물을 요구했고, 둘 다 지지리 궁상을 떨면서바닥을 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둘 다 사랑에 빠진 커플에서 남자쪽에 기대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신파조 이야기 안에서조차그래도 산다는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끈덕진 장점은 김해곤의 것이었고, 강재라는 남자에게 부여한 피와 살은 송해성의 것이었다.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먼저 <연애…>. 영운은 비루하지만 그만큼 흥미있는 등장인물이다. 그러나 <해변의여인>의 김승우를 ‘직전에’ 먼저 본 것은 김해곤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홍상수는 일단 자기 영화 안에 배우가 들어오면거의 일그러뜨리다시피 한 다음 자기 이야기 안에서 반쯤 자백을 하듯이 연기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는 배우에게 일종의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다. 그리고 그걸 점점 더 잘한다. 문제는 그게 너무 인상적이어서 다른 영화에 그 배우가 나올 때 그렇게홍상수 마음대로 구겨지고 이리저리 잘라낸 이미지가 남아서 (혹은 복원되지 않아서) 남의 영화 안에서 홍상수 영화 속의 인물의이미지와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승우는 이상하게 이야기의 시선이 잘 투영되지 않는다. 홍상수는 그걸 안 다음,이를테면 세 그루의 나무 앞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음을 터트려도 김승우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같은 자리에 김태우는갈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연기의 문제가 아니라 모델의 문제이다. 그런 다음 홍상수는 재빨리 고현정과 송선미에게 응시의 자리를돌려서 문숙과 선희를 번갈아 그 곁에 앉혀놓고 그 앞에서 김승우에게 말하게 만든다. 그때 김승우는 항상 보는 대신 보인다.그러나 <연애…>에는 그럴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술집 여자 연아(장진영)는 보는 사람을 설득시키기 매우 힘든등장인물이다. 그러므로 이 인물을 믿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영운이 동원되는 구조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혹은 연아라는 인물의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은 영운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연아는 영운의 환상의 대상이다. 그런데 연아쪽에서 영운을보게 되면 이 주관적인 감정선을 객관적으로 노출시킬 위험과 만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납득할 수 없는 연아쪽에서 영운을볼 때 이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이비) 브레히트적 조건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인물을 믿을 수 없을 때 이야기는 앞으로나아가지 못한다. <연애…>는 그 상황이 가슴 아프게 우습지만, 그 안의 인물들이 그 상황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을끝내 떨치지 못한다. 그러면 그걸 보는 나는 무엇을 구경해야 할까?

 

연민으로 끝나고 마는 눈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우리들의…>는 비슷하면서 다른 문제에 부딪힌다.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강동원은‘완전소중’이다. 얼마나 멋있는지 죄수복을 입어도 빛이 난다. 곁에 선 이나영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강동원이 그저 슬쩍 슬픈표정을 짓는 게 더 안쓰럽다. 게다가 이 형무소는 차라리 기숙사처럼 보인다. 지난해 추석에는 하지원이 그 곁에서울었고(<형사 Duelist>), 올 추석에는 이나영이 옆에서 울고 있다. 내년에는 누가 그 옆에서 또 울까? 그러나영화 속에서 누군가가 우는 것과 그걸 보는 내가 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는 영화를 볼 때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송해성은 잘 울리지 못한다. 그의 재능은 울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는 것을 보는 데 있다. 그는 남자가 우는 걸 가장 잘보는 감독이다. <파이란>은 그 순간과 만날 때 보는 사람을 움직인다. 최민식도 강재에게 공감을 가졌던 것 같다.그런데 최민식은 전형적인 메소드 액터이다. 그는 지나치게 강재 안까지 들어갔다. 그런 다음 최민식은 강재에게서 나오기 위해서거의 몸부림을 쳤다. 오대수라는 인물을 선택한 것은 배우로서 일종의 자살이다(<올드보이>). 그렇게 해서라도 강재를죽이고 내가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거기에 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그런데 반대로 강동원은 사형수 정윤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세상은 공평하다. 지나치게 멋있는 남자들은 모델은 잘할 수 있지만 배우는 힘들게 한다. 강동원은 좀더 부서져야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연기를 못하는 것이아니라 너무 근사해서 문제다. 그렇다고 모델로서 그 인물을 흉내내기에는 정윤수가 던져진 상황이 너무 드라마틱하다. 마지막 선택.그렇다면 강동원은 정윤수 그 자신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공지영은 소설을 쓰면서 정윤수를 그려낼 때 단 한번도 강동원을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맹세를 해도 좋다. 강동원과 정윤수는 인생에서 거의 공집합이 없는 삶을 살아오다가 여기서 처음 마주쳤을것이다. 브레송의 유명한 말. 영화에는 두 가지 인물이 있다. 하나는 인물을 배우가 흉내내는 것, 또 하나는 인물이 모델을 닮는것. 잡으러 가기와 잡아당기기. 모델이 강동원일 때 정태성은 그를 잡으러 왔다(<늑대의 유혹>). 하지만 모델이정윤수일 때 강동원은 그를 자기 안으로 잡아당겨야 한다. 송해성은 정윤수의 눈물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보려고노력한다. 그러나 거기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정윤수가 아니라 강동원이다. 그때 눈물은 오로지 가련한 연민으로 끝난다. 하지만<우리들의…>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을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죽음의 두 가지 측면, 자살과 사형은 이나영과 강동원의 눈물을 경유하여 삶의 상실이라는 슬픈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사랑의 상실은 삶의 상실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있는 것일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눈물은 이미 주어진 현실을 얼룩진 왜상으로 만들어 진실을 보도록도와주지도 않는다. 눈에 머물지 못하고 그저 흘러내리는 눈물. 세상을 보는 대신 이야기에 내던져진 슬픈 눈물. ‘안습’ 내기.눈물은 영혼을 비쳐 보이거나 그 반대로 감정을 증발시켜버린다. 매우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 둘이 함께 만든<파이란>이 그 두편의 영화 어느 쪽보다 좋다. 그러나 <우리들의…>에 대해 쓰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내게<연애…>를 쓰는 것도 그만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미있지만 너무 많은 영화가 어른거린 <천하장사 마돈나>

<천하장사 마돈나>

이해영과 이해준의 첫 번째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는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들이시나리오작가에서 시작한 사람들답게 보는 내내 이미 정해진 결론까지 가면서도 작은 반전의 대목들을 기습적으로 배치해두고 있었다.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너무 많은 영화들이 어른거린다. 이를테면 어쩔 수 없이 수오 마사유키의 <으랏차차스모부>. 게다가 트랜스젠더 ‘이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후’에 대해서 어떤 작은 대답조차 할 생각이 없는 이영화의 태도는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을 결국 구경거리로 만들고 말았다(그들은 그 후일담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 그만두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의 윤리적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박철희의 <예의없는 것들>은 왕가위의 <타락천사>의 두이야기를 샘플 리믹스한 것 같다. 말을 못하는(금성무) ‘킬라’(여명). ‘그녀’(윤지혜)는 막문위를 흉내내고 있는 중이다.그래도 다행히 ‘망기타’는 흐르지 않는다. 조범구의 <양아치어조>는 좋지는 않지만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게만들었다. 이 영화에는 날을 세운 감정의 칼과 그것에 찔린 다음에도 그걸 참아내는 포옹이 함께 있었다. 나는 그가 멀리 갈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번째 영화 <뚝방전설>은 좀 어리둥절했다. 내가 그의 첫 번째 영화를 잘못 보았든지아니면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이 바뀌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새 도망친 여름.

 

스튜디오로 귀환한 타르코프스키의 세계 <리턴>

가을이라고 느꼈을 때 처음 본 영화는 안드레이 즈비야긴체프의 <리턴>이다. 이 영화는 임상수의<바람난 가족>이 베니스영화제에 간 해에 황금사자상을 받은 데뷔작이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이 영화는 ECM영화다.집 떠나간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아들 앞에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레닌 ‘이후’ 러시아영화에서 줄기차게 반복해서 다루어온억압에의 귀환이다. 말하자면 서방세계의 아버지와 달리 러시아영화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정신분석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 무게가 더크다. 이미 많은 영화들이 그러한 화법을 택했고, <리턴>은 그러한 전통에 기대어 진행된다. 그러나 즈비야긴체프가새로운 것은 그 앰비언트 사운드의 디자인이다. 돌아온 아버지가 두 아들과 집을 떠난 다음 모든 장면은 야외에서 진행된다. 그런데사운드는 거의 밀폐된 것처럼 완전하게 통제된 스튜디오 안에서 작은 소리들을 일일이 만들어서 장면 안에 배치하였다. 그때 이사운드의 느낌은 ECM 음반을 들을 때의 그 차가운 명징함과 소곤거림, 어떤 노이즈도 없는 제로 상태, 허락되지 않는 잔향효과,모자이크에 가깝게 편집된 선율의 카탈로그, 어떤 작은 팬 홈도 남겨두지 않은 채 매끈하게 다듬어진 방음효과 안의 공간에 초대받은것 같은 인상을 준다. 즈비야긴체프는 그렇게 아버지의 대지를 스튜디오의 영토로 만들고 있다. 여기서 시간은 음향 안에 있다. 그안으로 돌아온 리듬적 인물과 그 속으로 떠나는 선율적 풍경. 그때 세상은 하나의 음향-기계처럼 느껴진다. <리턴>은타르코프스키 영화의 귀환의 실패이다. 물론 미학적 실패가 아니라 그 목적론의 실패라는 의미에서이다. 여기에는 타르코프스키가소망하는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지나가는 시간(의 경험) 안에서 되찾을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희망이란 없다. 아버지가돌아오지만 그는 상자를 되찾은 다음 미처 열지 못하고 예상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므로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를추론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버리고 영화의 기호들에 우리의 감각을 열고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리턴>

그때 타르코프스키와 즈비야긴체프는 둘 다 바람에 관심이 많다. 타르코프스키는 심지어 헬리콥터를 동원해서바람을 만들어 들판의 나무를 뒤흔든다. 하지만 즈비야긴체프는 여기서 바람에 움직이는 나무를 찍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스튜디오에서 녹음된 바람 소리를 들려준다. 혹은 자연 속에서 찍은 이미지를 일일이 DI 작업을 해서 디지털 풍경으로 만든다.그때 타르코프스키를 연상케 하는 이 여행은 정반대로 기계적인 녹음으로 배열된 음향과 이미지로 자연을 인공의 영토로 코드화한다.흐루시초프 혹은 브레즈네프 시대를 산 타르코프스키는 스탈린 시대의 아버지가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타르코프스키의 아버지들이 이미 죽었거나, 유령이거나, 끝내 돌아오지 않거나, 바보이거나, 미쳐버리는 것은 이유가 있다. 푸틴시대의 즈비야긴체프는 고르바초프 시대의 아버지를 우스꽝스럽게 기다린다. <리턴>의 질문은 아버지가 왜 돌아왔느냐가아니라 왜 떠나갔느냐, 에 있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지 않는다. <리턴>은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음울한유머이다.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홍상수 영화 <해변의 여인>

그 다음. 안 쓰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냥 몇 가지 메모. 홍상수의 일곱 번째 영화는 장 르누아르가 미국에 가서 1946년에 찍은 첫 번째 영화와 제목이 같다. 그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인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영화에서 홍상수는 해변가 빌라 이층에 빌린 중래의 방을 중심에 놓고 복잡한 동선을 그은 다음 그 사이를 넘나들거나 되돌아오거나혹은 쳐다보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때 불투명한 문과 커튼 사이로 (반)투명한 창문은 프레임의 숨바꼭질을 위한 알리바이가 된다.갑자기 프레임의 일부가 안 보이거나(저 문 너머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혹은 프레임의 일부가 구멍이 난것처럼 뚫려서(창문 너머에 있는 저 여자는 누구일까) 프레임 안에 프레임이 보인다. 말하자면 건축이라는 질료성을 영화적투시도법의 미장센으로 다시 구성한 장 르누아르의 화면과 동선. 문과 창문. 사실 그 둘은 모두 구멍이다. 프레임의 막힌 구멍과뚫린 구멍. 여기서 막힌 문은 분리에 실패한 소외이며 그 창문은 소외당한 욕망의 블랙홀이다. 그때 그 방문과 창문에서 내가떠올린 것은 루이스 브뉘엘의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미처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개미들이 기어나오는 구멍 뚫린손이다. <안달루시아의 개>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변가에 부서진 상자가 보이고 난 다음 모래에 파묻힌 두 남녀가 보이자거기 “봄날에”(au printemps)라는 자막이 떠오르면서 끝났다는 사실을 떠올리시길. <해변의 여인>은 이제까지그가 만든 영화 중에서 가장 가까이 초현실주의에 기대고 있다. 심지어 그게 좀 아슬아슬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가 비유에기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해변의 여인>

(이미 당신께서 읽었을) 두개의 글을 읽고 나는 홍상수를 배운다. 김소영은 두명의 중래를 놓고 그사이에서 벌어지는 표면 위의 기호의 싸움을 본다(<씨네21> 제569호, ‘영화적 재미의 새로운 경지’). 이를테면“(중략)… 우연성을 필연으로 엮어내는 서사가 영화감독 중래의 강박관념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문숙과 선희가 닮았다고 말하게된다. 그리고 이 진술은 둘을 함께 목격한 식당주인, 그리고 선희에 의해 반복된다. 그러나 이 반복으로 가는 대한(??)의미화로 가는 대신 영화의 서사적 추동성은 문숙이 이것을 잘라내는 중단, 정지로 간다. 그녀는 중래를 놀리듯 말한다. 나는 반복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잠시 멈춘 다음 다시 읽었다. 기호의 반복과 서사(-운동의) 중단. 혹은정지. 반복 안의 중단. 사유하도록 강요한 다음 다시 이야기 안으로 끌어(attractive)들이기. 홍상수의 내밀한 몽타주.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 나는 항상 남의 글을 읽고 배운다. 그때 배움은 여전히 나의 행복함이다. 그런 다음 허문영은 오랜친구에게 보내는 듯한 더할 나위 없이 예를 갖춘 사랑이 그윽한 향처럼 번져나오는 글을 썼다(<씨네21> 제 560호,‘남자와 여자와 개의 시간’). 허문영은 여기서 이상하게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해변의 개’를 끌어안고 개의 자리를 둘러싼인간의 형상에 대해서 <해변의 여인>을 거의 다시 쓰다시피 했다. 나는 이 개가, 그러니까 ‘돌이’, 혹은 ‘똘이’,또는 ‘바다’가 <해변의 여인>의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라고 믿는다. 나는 두개의 글을 읽은 다음 그 ‘이후’에 또쓰는 건 중언부언이야, 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나는 <해변의 여인>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훔치면서 배운다. 이것이8월 말, 9월 초의 나의 첫 번째 배움이다.

글: 정성일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가을 영화 산책 [2]
2006.10.11 08:00

 

동해로 향하는 서해안의 여인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생각. 서해안에 가서 찍은 이 영화는 서울을 꼭짓점으로 한 다음 지정학적으로 남서쪽에 가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도 그 세 사람이 도착해서 바다를 바라볼 때 이상하게 자꾸만 동해안에 가서 진행되는 것처럼 90도 상상선을 그은 다음 그들을 바라보고 왼쪽 45도에 카메라를 세운다. 그런데 <강원도의 힘>에서는 강원도의바닷가에 가서 반대로 진행하였다. 지숙은 그녀의 두 친구와 함께 강원도 해변가에 간다. 짧은 신이지만 여기서 <해변의여인>과 거의 동일한 장면이 나온다. 그녀들은 해변에 도착해서 바다를 본 다음 돌아서 모텔을 보는데 그 앞에 웬 말이 서있다. 주인은 이 말 이름을 ‘주필이’라고 가르쳐주는데 지숙의 친구는 그 이름을 듣고 “주피야, 주피야, 넌 어쩌다 여기까지왔니”라고 묻는다. 그런 다음 다시 그 세 사람은 해변가에 앉는다. 그런데 카메라는 구태여 그녀들을 마치 서해안에 온 것처럼,그러니까 이번에는 상상선의 오른쪽에 가서 보여준다. 바다는 건물이나 길과 달리 고정된 것이기 때문에 마스터 숏으로 방향을 정하면그걸 반대로 틀어놓기 매우 힘들어진다. 나는 <강원도의 힘>을 보았을 때 이 신이 너무 이상해서 무척 인상적이었다.사실 난 이런 장면을 만나서 설명이 안 되면 거의 못 견디는 쪽이다. 이 장면에서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홍상수는 아직영화에 서투른 예술가이거나(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원도의 힘>은 에릭 로메르 ‘이후’에도 새로웠다) 아니면 그 스스로의이미 완성된 세계 안에서 결론을 갖고 영화를 시작한 셈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시행착오란 없다. 이미 그는 영화에 대해 결론을내렸고, 다만 그 안에서 반복의 역설 아래 차이로서의 반복과 반복 안의 차이 사이를 오갈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끈질기게 내기를 미루었다. 그런데 꼭 10년 만에 <해변의 여인>으로 서해안에 간 홍상수가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바다 앞에서 반대로 진행할 때 어떤 쇼크를 받았다. 홍상수는 <강원도의 힘>에서 해변가를 ‘서해안의 힘’처럼보여준다. 그런데 <해변의 여인>은 내게 <동해안의 여인>으로 보인다. 나는 문숙의 차가 마지막 마지막신에서 지정학적으로 서해안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면서 가다가 갑자기 수렁에 빠진 다음 두 남자의 도움을 받아 거기서 빠져나오자마자갑자기 유턴을 할 때 아니, 여기서 유턴을 할 거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여기는 길도아니고 모래사장 한복판이다. 나는 거기서 차를 수렁에서 건져주는 두 남자 대신 그녀 스스로 ‘똥차’라고 부른 하늘색(푸른바다색?) 마티즈의 유턴을 보았다. 그때 서해안을 가던 차는 유턴을 해서 천연덕스럽게 동해안처럼 되돌아간다. 이때 나는 가까스로되찾은 긍정된 세계로부터 재빨리 다시 물러나는 홍상수를 본다. 똥차 혹은 버림받은 개. 개의 예와 아니오와 문숙의 예와 아니오.그것은 되돌아오는 것일까, 나아가는 것일까.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변덕스러운 봄날의 뿌연 공기.

 

김기덕에 대한 작은 연대

<시간>

나는 <해변의 여인>을 본 다음 막 개봉한 김기덕의 <시간>을 다시 보러 갔다.그러는 동안 김기덕은 소란의 한복판에 외롭게 던져져 있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에 거의 개의치 않는 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그의 영화이지 그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사회가 끝난 다음 이루어진 기자회견을 거의 소설로 각색한 기사에 항의하는 배급사의회견 전문을 다운받았고, 심야에 생방송으로 중계된 <100분 토론>을 산만하게 보았고, 그 방송이 끝난 다음 김기덕이연합통신에 보낸 메일 전문을 읽었다. 김기덕은 네이버 조회 인기검색어에도 올라왔다. 김기덕의 메일에 달린 글은 그의 영화에 대한글보다 더 많았다. 심지어 그 메일에 수능시험 논술고사 채점하듯이 문장 단위로 일일이 토를 단 기사마저 있었다. 김기덕은텔레비전 인터뷰에 응한 다음 “나는 언론을 실험용 쥐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제 누가 누구를 조롱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지경까지 가고 있었다. 그런 다음에 다시 보는 <시간>은 나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텅 빈 영화관에는 나를 포함해서 8명이 쓸쓸하게 앉아 있었다. 조롱의 게임은 누가 바보인지를 놓고 벌이는 내기였다. 대답은 둘 다이다. 그것을 그자리에 앉아 있는 관객 수가 무심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시간>의 개봉을 촉구하기 위한 격문의 형식을 빌려 단지줄거리 소개만 했기 때문에(<씨네21> 제549호, ‘반복 안에서 찾은 새로움: 김기덕 감독의 신작<시간>을 최초로 보고 쓰다’), 좀더 안을 들여다보는 글을 쓰고 싶었다. 이 영화에 가장 따뜻한 글을 쓴 사람은 남다은이다(<씨네21> 제566호, ‘죽음만 남을 때까지 계속되는 반복’). 하지만 <시간>이 한국에서 개봉한 것이 김기덕에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에 대해 이제는 솔직하게 판단하지 못하겠다. 꼭 내가 쓴 글 때문에 개봉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 일정 정도 개입한 글을 쓴 나는 이 황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그저 쳐다보았다.<시간>에 대한 담론은 정작 빈곤하기 짝이 없었고 모두들 김기덕의 말에 대한 주석에 매달려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걸 보는 내 느낌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흘려가면서 물어뜯듯이 매달린다는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고 그 주석에 어떤 집요한 성찰이 있거나 혹은 그 말을 경유하여 영화 안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물론 김기덕의 영화를 싫어할 수 있다. 그러나 싫어하는 것이 김기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걸 혼동하면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이 김기덕의 열네 번째 영화를 보기 위해서 칸이나 베니스 혹은 뉴욕, 어쩌면 도쿄까지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서울에서 다시 ‘개봉’할 때까지 나는 더이상 그의 ‘새로운’ 영화에 대해 쓰지 않을 생각이다. 이것이 김기덕에 대한 나의 작은 연대이다.

 

오즈의 계절에 듣는 밥 딜런의 음악

그런 다음 잠시 망연자실하게 돌아보았다. 이제 막 여름이 끝나고 가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 사이.늦은 여름 혹은 이른 가을. 말하자면 오즈의 계절. 지금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노래다. 밥 딜런의 (‘공식해적음반’ 연작을 제외하고, 그러나 5장의 라이브와 그레이트풀 데드와의 라이브와 한장의 사운드트랙을 포함해서) 39번째 앨범<모던 타임스>는 그냥 한마디로 심금을 울린다. 이 앨범은 누구나 연상하듯이 채플린의 그 유명한 마지막 무성영화와같은 제목이다. 하지만 밥 딜런이 여기서 채플린에게 오마주를 바치거나 패러디를 하는 것은 아니다. 구태여 떠올리자면 채플린이토키시대에 끝까지 무성영화로 저항한 것처럼 밥 딜런은 여기서 ‘옛것이지만 근사한’ 재즈 블루스 백 밴드에 기대어 중얼거리면서노래한다. 그는 이번에는 엘모어 제임스와 윌리 브라운, 머디 워터스, 로버트 팻웨이 혹은 토미 존슨 사이 그 어딘가에서,말하자면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의 탁류에 몸을 내맡기고 세션 맨들과 어울려 흘러가듯이 노래한다. 그런데 비평가들은 로니 존슨의영향 아래 놓여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도 세 번째 트랙에서 느닷없이 머디 워터스처럼 <롤링 앤 텀블링>을 노래할 때는이상하게 걷잡을 수 없는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밥 딜런의 모든 앨범이 훌륭하지는 않지만 거의 동시에 데뷔한 폴 매카트니의 행보와비교하고 있으면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의 실패를 노래하는 고다르 <사랑의 찬가>와 <아워뮤직>

<사랑의 찬가>

나는 똑같은 마음을 고다르에게서 느낀다. 광화문에서 <사랑의 찬가>와 <아워뮤직>을막 보고 나오면서 고마워, 고다르, 라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두 영화를 마치 동시상영처럼 보여주지만, 두 영화는 전혀 다른자리에 있다. <사랑의 찬가>는 일상의 물건들이 이미지가 될 때 우리로 하여금 지금 우리가 우주의 질서 안에 살고있다는 숭고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때 고다르는 단지 숭고함의 물신주의에 매달리는 대신 이미지가 덧없이 영화라는 시간 속에서사라져가는 것을 다루면서 이미지를 다루는 영화의 운명과 임무에 대해서 계속 질문한다. 고다르의 영화를 보려면 무엇보다도 질문을견뎌야 한다. 질문은 고다르에게 영화의 존재 이유이다. 아니, 차라리 고다르의 카메라가 사물의 이미지를 건드릴 때 세계가 질문을던진다, 라고 말하는 편이 맞다. 반대로 <아워뮤직>은 이미지의 교육학이라고 부르게 만든다. 그건 반드시‘연옥’편에서 고다르가 하워드 혹스의 <그의 여자 프라이데이>를 텍스트 삼아 숏과 상대 숏의 관계에 관한 긴 강연을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미 이 토픽은 1963년 장 피에르 우다르가 로베르 브레송의 <잔다르크의 재판>을 본 다음(라캉의 ‘봉합’(suture) 개념을 빌려) 문제제기를 하였고, 그때 고다르는 이미 나나가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수난>을 보다 말고 갑자기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비브르 사비>를 찍은 다음이다. 핵심은 왜 그걸 지금다시 끌어들이고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역사적 관계, 그에 영화가 대응하는 판타지와다큐멘터리, 그런 다음 숏과 상대 숏의 비대칭성이라는 삼항 관계로 놓고 진행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그리고 이 영화는 단테의<신곡>을 빌려 지옥, 연옥, 천국이라는 삼부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 고다르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진행중인 역사가 변증법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고다르는 실패한 것이 역사이지 변증법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진행이 중단된모순으로서의 상대 숏, 좀더 정확하게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물어본다. 상대 숏으로서의 팔레스타인. 안티테제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변증법은 잘못된 종합명제로서의 천국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다. <아워뮤직>의 ‘천국’은 불길하다. 말하자면 주한미군에게  ‘작통권’을 갖게 해달라고 하소연하는 우파들이 날뛰는 대한민국은 고다르에게 21세기의 천국이다. 제국의 천국. 역사 속의이미지들은 지옥의 피에 젖어들고, 현재 진행 중인 연옥의 이미지들이 모순의 불평등에 시달릴 때, 미래의 천국은 미군의 이미지들이점령할 것이다. 그것이 고다르가 부르는 ‘우리의 음악’(notre musique)이다. 음악은 아직 (혹은 영원히) 도래하지않은 이미지를 부르는 호명이다.
그렇게 노래하는 고다르와 밥 딜런. 나는 이 두 사람을 같은 해에 ‘발견’했다. 그런 다음 그들의 새로운영화 혹은 노래를 기다리면서 살았다. 때로는 실망했고, 때로는 의심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아니,그러기는커녕 항상 나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다. 그걸 뒤쫓아가면서 나는 배우고 또 배웠다. 그 안에 있는 앎의 비밀. 아니 차라리 세계라는 비밀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기호. 지치지 않는 사랑. 앎과 사랑 사이를 연결하는 긍정. 그 사이(entre). 그 둘이연결될 때 배움의 느낌이 불러일으키는 상위형식의 비밀에 대한 간절한 궁금증. 그 형식 안에서 활동하는 나의 능력의 한계가안겨주는 슬픔. 그러므로 그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의 찬가>와 <아워뮤직>을 보면서, 혹은 밥 딜런의<모던 타임스>를 들으면서 또 배운다. 이것이 이번 이른 가을의 두 번째 배움이다.

 

디지털카메라의 놀라운 클로즈업 <퍼펙트 커플>

그리고 종로에서 짧은 축제가 있었다(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는 이미 끝났다. 멀어서 오지 못한 것은유감이지만, 게을러서 보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일곱 번째를 맞는 서울영화제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는 올해가 가장 재미있었다. 나는 영화가 지나치게 자기를 뽐내거나(실험영화들), 반대로 너무 겸손해할 때(미디어로서의 영화들) 흥미를 잃는다. 물론 그걸 더 좋아할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취향을 말하는 중이다. 영화는 세상과의 긴장을 유지할 때, 그래서 그 둘사이의 관계에 내가 개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생각이 활동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다. 결국 영화는 어떤 자세로 세상을 보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어떤 자세를 선택할 때 거기서 진실을 볼 수 있느냐는 선택의 내기이다. 영화와 세상 사이를 중재하는자세와 거리.

스와 노부히로의 <퍼펙트 커플>과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더 선>은 동시상영처럼 볼필요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여기에 마이클 만의 <마이애미 바이스>를 더하고 싶다. 본 것은 내게 매우 큰 의미가있었다. 스와와 소쿠로프는 자기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든다. 스와 노부히로는 지금 막 이혼을 결심한 부부의이틀간의 감정적인 위기를 다룬다. 소쿠로프는 1945년 8월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다음 유폐되어 살고 있는 천황히로히토를 다룬다(그리고 마이클 만은 마이애미의 두 형사를 다룬다). 이 세개의 인물 다루기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셋다 디지털카메라로 인물에게 다가간다. 그래서 필름 카메라로 다가갈 수 없는 거리까지 바짝 다가간다. 그 놀라운 클로즈업이 전혀다른 내용, 전혀 다른 스타일, 전혀 다른 인물에게서 동시에 벌어진다. 이때 클로즈업은 카메라와 얼굴 사이에서 그 이전에 한번도본 적 없는 거리를 창조한다.

<퍼펙트 커플>

나는 이미 마이클 만에 대해서는 말했다(<씨네21> 제568호, ‘눈물과 매직 아워’).그러므로 그 뒤를 이어 스와 노부히로,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퍼펙트 커플>은 로셀리니의 <이탈리아여행>을 파리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영화다. 스와 노부히로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인 것 같다. 세 번째영화 <H 이야기>에서는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자기 방식으로 리메이크했다. 그런데 이영화를 알랭 레네에게 보내자 레네는 “편집이 되지 않은 영화를 왜 내게 보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일화는스와 노부히로 스타일을 간단하게 설명해준다. 스와 노부히로는 영화에서 데드 타임을 그냥 내버려둔다. 그는 로셀리니보다는 존카사베츠에 더 가깝다. 그래서 장면은 때로 배우에게 맡겨지고 종종 한없이 이어지기도 한다. 영화는 1시간44분 동안 고작44숏이다(중간에 나오는 검은 자막은 셈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게 한신을 한숏으로 찍은 것은 아니다. 대부분 그렇게 찍기는했지만 그러나 갑자기 장면을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같은 방을 쓰다가 다른 방으로 옮긴 아내 마리를 찾아 남편니콜라스가 찾아간 장면에서 갑자기 숏을 나누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스와 노부히로는 고정된 카메라로 롱테이크로 찍을 때는 소통의단절을 보여주다가 그들의 대화가 소통될 때 갑자기 나누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영화의 비밀은 롱테이크나멈춘 카메라에 있지 않다. <퍼펙트 커플>에서 이 두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은 카롤린 샹페티에의 카메라와 그카메라와 거의 혼연일체가 된 동시녹음 기사 장 클로드 로뢰가 들려주는 미세한 소음들이다. 카메라는 멈춰 서 있는데 사운드의붐마이크는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있다. 그래서 어떤 장면은 마치 후시녹음을 한 다음 폴리를 한 것처럼 제한적이고, 어떤 장면은 카메라는 이쪽에 와 있는데 붐마이크는 저쪽에 있어 카메라와 붐마이크가 숏과 상대 숏의 역할을 한다. 가장 놀라운 장면은 마리가로댕의 조각이 있는 미술관에 들를 때다. 그때 장면은 모두 실내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이 실내를 두개의 전시 공간으로 나누고있는데, 그때 카메라와 붐마이크는 공간이 오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임 안에 누군가가 들어와야만 그 존재를 인정한다.말하자면 장소가 지닌 물질성과 붐마이크가 갖는 질료성 사이에서 카메라가 그것을 중재한다. 그 안에서 스와 노부히로는 이혼을 앞둔불안한 마리가 불멸의 예술품으로 남아 있는 로댕의 조각상이 주는 영원성과 우연히 어린 아들과 함께 거기를 찾아온 옛날 고등학교동창이 자신의 아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삶의 소멸 사이에서 겪는 심리적 동요를 끌어낸다. 영화는 두번 아내 마리와남편 니콜라스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간다. 그런데 카메라가 너무 가까이 가서 표정을 알 수가 없는 얼굴을 보여준다. 그때이 얼굴은 말 그대로 풍경처럼 보인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다룬 <더 선>

세 번째. 알렉산더 소쿠로프는 매우 난처한 세명의 인물의 연작을 찍었다(아마도 이 연작은 계속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 하나는 레닌을 다룬 <몰로크>이고, 그 다음은 히틀러를 다룬 <타우르스>이고, 그리고<더 선>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다룬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그들의 결정이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다루면서 소쿠로프는 그런 역사적 책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미 전쟁은 끝났고, 히로히토는 작은 도서관에 유폐된 채 지낸다. 마치 채플린처럼 우스꽝스러운 그의 뒤뚱거리면서 걷는 모습은 미군 점령관 맥아더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지만(그는 중얼거린다. “내가 저런 인물을 또 어디서 보았을까?”), 여전히 히로히토를 모시는 가신들은 그를 ‘태양의 신’으로생각한다. 전쟁에 진 것은 인간인 신하들의 책임이며, 여전히 신인 동시에 일본 그 자체인 히로히토에게 누가 될까 인의 장벽을친다. 그래서 히로히토가 국민들에게 알리는 담화문으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전쟁에 책임을 진다”는 녹음을 한 젊은 남자는 그녹음과 함께 할복자살한다. 그때 소쿠로프는 시종일관 이 영화를 거의 꺼져버릴 듯한 어둠 속에서 진행한다. 그래서 이미지들은‘일본의 태양’인 히로히토가 마치 금방이라도 꺼져서 어둠이 세상을 삼켜버릴 것처럼 희미한 빛과 거의 화면 전체를 지워가는그림자로 가득 차 있다. 사실 그 태양은 꺼져야 한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희미하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는 유일한빛이다. 이 영화에서 다른 등장인물들은 얼굴의 일부가 그림자들이 갉아먹은 것처럼 지워져 있지만 히로히토의 얼굴은 항상 온전하게보인다. 신과 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이 인물을 소쿠로프는 자신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따라간다. 그때 소쿠로프는 ‘감히’히로히토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신이 가질 수 없는 삐죽대는 뻐드렁니와 주름 잡힌 피부를 거의 만질 것처럼 본다. 거기엔어떤 신화도 없다. 그러나 그렇게 다가가서 인간의 얼굴을 드러낼 때, 그래서 그가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볼 때조차, 그를 신으로 남겨놓기 위해 그 주변의 인물들이 기꺼이 복종하고 심지어 할복자살을 할 때 히로히토는 그가 염원하는 인간의 자리에 내려오지못한다. 소쿠로프는 종종 히로히토의 얼굴을 바짝 다가가서 찍지만 <더 선>은 소쿠로프가 쓰고, 연출하고, 찍었다.거의 폐소 공포증에 가까운 이 영화에서 이따금 히로히토의 상상을 따라 도쿄가 폭격당하는 장면이 꿈결처럼 펼쳐진다. 그때 불바다가된 도쿄거리를 날아다니는 것은 마치 헤엄을 치는 듯한 물고기들이다. 그 기괴한 장면들은 이 태양의 신이 바다에서 온 것은아닐까, 라는 환상에 빠질 만큼 소름 끼친다. 한 가지 더. 영화 중간에 나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 5번>은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이다. 내가 이 위대한 대가의 연주를 평가할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나는 이 연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봐야 하는 10시간30분짜리 영화 <필리핀 가족의 진화>

올해 서울영화제에서 백지수표를 위임받고 거기에 다섯편의 추천작을 써넣었다. 그중 한편이 라브 디아즈의<필리핀 가족의 진화>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보려면 그날 하루를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10시간30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반문할 것이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건 그날 하루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로테르담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 다음날 아무 영화도 보지 않았다. 그냥 하루 종일 이 영화를 다시생각했다. 간단한 줄거리. 할머니와 그녀가 낳은 남매가 있다. 오빠는 세딸을 남겨두고 아내가 도망갔으며, 여동생은 돈 벌러마닐라에 갔다가 강간을 당한 다음 미쳐서 쓰레기장에서 자기의 아들이라고 믿는 아이를 주워서 고향에 돌아온다. 마르코스 대통령독재치하의 필리핀은 이 작은 시골에서도 혁명군과 정부군의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진다. 오빠는 골치 아픈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혁명군 편을 들면서도 빨치산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이 문제가 되어서 매를 맞은 그는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다. 오빠가돌아왔을 때 여동생이 동네 남자들에게 납치되어서 강간을 당한 다음 매장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가 주워온 소년은 총을 구한다음 그들을 쏘아 죽이고 고향을 떠난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이제 오빠의 집과 소년이 떠돌다가 흘러들어간 집을 오가면서진행된다. 오빠는 소년을 대신해서 감옥에 갔다 온 다음 소년을 찾아서 필리핀을 떠돌다가 도둑이 된다. 오빠는 그러면서 마닐라의범죄조직에 연루된다. 그러는 동안 고향에서 오빠의 어린 딸을 노리는 시장은 계속 할머니를 찾아와 어린 그녀를 첩으로 달라고조른다. 한편 소년이 머무는 집에서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인 아버지는 금맥을 발견하겠다고 세 아들과 함께 정글을 헤매다가 그의아들 중 한명이 금을 둘러싼 갈등 끝에 옛 친구의 부하들에게 맞아 죽고 실종된다. 아버지는 복수를 맹세한다. 그러는 동안독재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마닐라로 돌아온 민주인사 베그니노 아키노는 공항에서 총에 맞아죽고, 그의 아내 코라손 아키노가 투쟁을계속한다. 마르코스는 실각하지만 군부가 재집권을 하고, 민중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필리핀 가족들은 아직도 투쟁중이다.

좀더 놀라운 이야기는 <필리핀 가족의 진화>가 5시간30분의 <남부, 바탕>,그리고 9시간의 <예레미아>와 함께 3부작으로 이루어진 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보아도 다보지 못한다. 나는 두 번째 이야기만을 보았을 뿐이다. 라즈 디아브는 필리핀 근대사라고 할 이 거대한 서사를 8년에 걸쳐찍었다. 문제는 영화 속의 인물들은 정말 나이를 먹고, 한편으로 베타 캠으로 시작한 촬영은 DV로 바뀌면서 영화의 화질이바뀐다! 게다가 필리핀 근대사의 사건들을 발췌한 텔레비전 화면들도 그냥 사용하였다. 말하자면 기술적인 완성도로 본다면 일부는마치 아마추어가 찍은 것처럼 약점이 많고, 무엇보다도 사운드의 문제는 부분적으로 너무 손실이 커서 일정 수준에 맞춰놓고 상영하면중간에 안 들리다가 갑자기 큰소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흑백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보는 사람을 움직인다. 단지 그것이 정치적인문제를 다루거나 혹은 역사를 건드려서가 아니라 여기에는 새로운 화법이 있다. 라즈 디아브는 역사와 가족사를 단순하게 도식적으로병렬시키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필리핀의 근대사는 숨 가쁘게 바뀌고 있는데도 거의 나라 끝에 위치한 것 같은 이 두 가족은자본주의와 봉건적 관료제, 반근대적인 인습과 이기적이고 야만적인 개인들의 욕심, 정치를 내세운 교활한 잇속, 민중투쟁을 하다가독재 권력을 타도하는 순간 권력으로 변모하는 해방전선의 동지들, 그 속에서 부서져가는 여자들, 여자들 사이의 착취, 그 악순환의고리들이 어떻게 필리핀이라는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때로 이것은 마치 현장에 취재나온 기자의 생방송 중계처럼진행되기도 하고, 때로는 거의 시적인 실험영화처럼 DV를 이용한 무한정한 롱테이크로 진행되다가, 마닐라의 범죄 소굴에서는장르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산만하기보다는 인물들의 사건 안에서 피와 살을 부여하는 것은 이것이 누가 보아도전투적으로 연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를 보지 말고 영화를 만든 과정을 보라고 충고했다.만일 라즈 디아브의 <필리핀 가족의 진화>를 영화사의 계보에 놓아야 한다면 오페라풍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만든 루키노비스콘티의 <대지는 흔들린다>로부터 이어지는 긴 미학적-사회적-정치적-여정의 21세기 버전일 것이다.

사적인 고백. 그런데 이 영화를 추천한 다음 의기양양해하다가(*^^*) 갑자기 그날 아침 아, 어쩌면 그상영시간에 질려서 아무도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그리고 영화관에도착했다.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그 자리에 28명의 관객이 각오라도 단단히 한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도 그 곁에앉았다. 이걸 처음부터 다시 본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힘들었지만 나는 그들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사람이 중간에가고, (중간에 세번의 휴식이 있었다) 신기한 건 중간부터 보기 시작한 몇 사람이 있었다. <필리핀 가족의 진화>를본다는 것은 영화가 주는 관습과 싸우면서 투쟁적으로 획득하는 자유로운 리듬의 쟁취의 일부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영화는2시간이라는 상영시간에 굴복해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이야기를 하건 그 시간 안에 풀어내야 하는 시간의 물리적 경제성 앞에굴복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모든 이야기가 2시간 안에 해결될 수 있는가?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는 순간 영화의시간적 경제성이란 무효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28명의 투쟁적인 관객에게 동지들, 이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단 한번의 상영.우리는 2006년 9월11일 월요일, 하루 종일 함께 있었다. 나에게 영화 친구란 말하자면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분들이다.

 

지아장커에게 배우다

<스틸 라이프>

마지막 수다. 내가 가을이 막 시작되려는 9월의 첫 번째 주말에 들은 기쁜 소식은 지아장커가베니스영화제에서 <스틸 라이프>(三峽好人)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는 뉴스였다. 물론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걸읽으면서 문득 구정이 쓴 글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구정은 베이징전영학원에서 문학과 영화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그런다음 지아장커 영화의 시나리오를 함께 쓰고 그의 조연출이 되었다. 그는 지아장커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고하는 글을 쓴 적이있다. “1997년, 우리는 졸업할 때가 되었다. 친구들은 각자 앞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지아장커는 여전히 영화를 찍고 싶어했으나, 아무런 대책없이 그와 함께할 친구는 없었으며, 모임은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조금도슬프지 않았고,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시간은 벌써 이렇게 흘렀고, 우리는 생계의 부담을 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서로 바라볼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졸업하기 4개월 전, 지아장커가 돈을 구해왔다. (중략) 지아장커가 나와왕홍웨이(<소무>의 주연)를 찾아왔다. 우리 같이 영화를 찍자. 구정, 네가 조감독을 맡아주고, 왕홍웨이, 네가주연을 맡아줘. 역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야. 우린 거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화를 찍으러가니까.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찍는거였으니까. 우리는 결코 거절할 수 없었다.”(구정, ‘우리 같이 영화 찍자’, <지아장커, 중국영화의 미래>) 그영화가 <소무>이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다음 1980년대 중국을 통과하는 가무단 이야기<플랫폼>을 찍었고, 다퉁에 사는 두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임소요>를 그렸고, 베이징 테마파크에서 일하는청춘을 그린 <세계>를 찍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지아장커는 여전히 중국 사회주의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를 찍고 있다. 그는 아주 멀리 왔지만, 그러나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나는 그것을 지아장커에게 배운다. 이것이막 시작하는 가을에 세 번째 배움이다. 오늘 밤에는 그에게 축하 메일을 쓸 생각이다. 그렇게 이 수다스러운 일개 영화평론가의가을밤이 깊어가고 있다. 당신은 오늘 밤 누구에게 메일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글: 정성일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