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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녀의 ‘거짓말 왕국’ 힘든 세상 버텨내는 법

나는 처음에 〈하나와 앨리스〉의 줄거리를 읽은 다음에 도대체 이 자가 어쩌려고 이런 이야기를 갖고 영화 한 편을 만들려고 작정했는지 의아한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도대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여고생 하나와 앨리스(본래 이름은 아리스가와)는 오랜 친구다. 선배 남학생 미야모토 마사시를 좋아하던 하나는 마사시가 셔터 문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자, 깨어난 그에게 거짓말을 한다. “선배, 저에게 사랑을 고백한 거 기억 안 나세요? 선배는 원래 ‘앨리스’가와를 사랑하다가 저를 사랑하게 되었잖아요?” 그 말을 믿은 마사시는 앨리스를 찾아갔다가 의문에 잠긴다. “왜 나는 저렇게 사랑스러운 ‘앨리스’가와와 헤어진 것일까?” 이와이 순지의 〈하나와 앨리스〉는 거짓말의 진심에 관한 이야기다. 모든 것이 거짓말로 이루어진 세계, 하지만 그 속에서 그걸 지키기 위해 하나와 앨리스는 안간힘을 쓰지만 거짓말은 진실을 찾아간다.

이와이 순지의 영화는 패턴의 반복이다. 처음에는 오해로 시작해서 굽이굽이 온갖 잡다한 사연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진실의 비밀에 이른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진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이른바 ‘이와이 월드’가 갖는 기기묘묘함은 현실의 찡그림을 다루면서 실재의 진실에 이르는 대신 결국 진실의 환상에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현실에 있는 얼룩을 지우기 위해 애쓰는 대신 그 얼룩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매달리게 된다. 하나의 두려움은 사실상 역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일종의 도미노를 가져온다. 그 상실을 막기 위해 앨리스는 마사시 앞에서 우정의 이름으로 하나의 거짓말 무대에서 연기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마사시를 관객으로 한 연극이다. 하지만 곧 이 연극은 거짓말을 내세운 진실의 연극이 된다. 이제 누가 관객이고 누가 연기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이와이 순지는 술래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숨바꼭질의 순정 만화를 펼친다. 그러나 그 만화가 우스꽝스럽지 않은 것은 시노다 노보루가 시종일관 손으로 들고 찍은 에이치디 카메라가 소녀들의 심장 박동 가까이까지 다가간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마음의 흔들림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 사랑의 술래잡기에 홀린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그저 쳐다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이 연극은 하나와 앨리스가 자신들의 우정을 위하여 지어낸 이야기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는 그들 앞에 ‘눈떠야’ 하는 현실은 남편과 이혼하고 철없는 연애에 몰두하는 어머니와 살아야 하는 앨리스의 이혼가정과, ‘꽃 귀신 집’ 아이였던 자폐증 환자 하나의 세상 만나기의 곤란함이다. 소녀들은 그 참혹한 세상과 마주하기를 피하기 위하여 거짓말의 왕국을 만들어낸다. 하여튼 세상을 건너가야 한다면 부딪쳐서 부서지는 대신 거짓말의 사다리를 타고서 어른이 되는 쪽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겨울에서 시작해서 가을에 끝나는 이 이야기 속의 소녀들은 부쩍 성장했고, 하나와 앨리스는 그렇게 세상을 건너갈 것이다. 혹은 그것이 이와이 월드가 환상으로 세상을 버텨내는 방법이다. 낯간지럽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이겨내야 한다.

김선일 테이프는 우리 휴머니즘의 실상을 증언한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여기 녹화 테이프가 하나 있다. 그 테이프의 녹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일부 편집된 내용으로 방영되었기 때문에 원본 테이프의 시간은 알 수 없다). 화면 비율은 DV로 찍힌 것으로 보아 두 가지 비율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중 3 대 4의 비율을 택했다. 김선일씨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수를 생각하면 1.66 대 1의 비율이 더 효과적으로 보이지만, 이 테이프는 처음부터 텔레비전 방영을 목표로 만든 비율인 것 같다. 그래서 텔레비전 방영시 레터박스 처리될 수 있는 것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라크어가 각국어로 번역될 것을 염두에 두고 그 비율을 생각한다면 1.66 대 1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테이프는 알자지라에 제공되었지만, 결국 이 테이프가 해외방송에 방영될 때 번역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은 뒤에 늘어서 있는 ‘유일신과 성전’(이라고 알려진 무장단체)의 테러리스트들과 그 앞에 앉아 있는 김선일씨가 전부이다. 배경은 장소를 알 수 없게 별다른 특징이 없는 벽을 기대고 서 있으며, 그 벽에 ‘유일신과 성전’을 나타나는 커다란 휘장이 걸려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장소를 추정할 수 없게 만들면서, 동시에 자신들을 나타내는 효과적인 미장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여기에 더해 좀 복잡한 문제가 있다. 알자르카위로 추정되는 복면 괴한과 그 주변의 테러리스트들이 들고 있는 총기의 종류와 발음 악센트, 인질을 앉혀놓은 의자의 색, 그리고 벽면 색과 미군 이라크 수용소 사진을 추정해서 첫 번째 미국인 인질 테이프 자체가 미국의 조작이라는 음모론이 있다. 그러나 그 문제와 이 테이프의 진위 여부를 판독하는 것은 내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카메라의 구도는 좀 특별하다. 생각하기에 인질로 잡힌 김선일씨를 잘 보여주기 위해 화면 비율 3 대 1의 지점에 놓을 것 같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도상으로 김선일씨 부분은 화면 프레임에서 상반신 바스트숏만 나오며, ‘유일신과 성전’ 인물들이 거의 니숏으로 잡힌다. 아마도 이 구도는 ‘유일신과 성전’을 나타내는 휘장을 중심에 놓고 마스터숏으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 별다른 기교없이 찍혔으며, 우리가 볼 수 있는 테이프만으로는 녹화 카메라 기종을 알 수는 없을 것 같다. 조명을 하지 않았지만, 배경의 벽이 보여주는 반사광과 인물들의 그림자를 보건데 실내의 차단된 공간에서 키 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메인 전광등 아래서 찍힌 것으로 보인다. 전체를 원 테이크로 찍지는 않았지만 일체의 인위적인 편집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거의 원본 테이프에 손을 대지 않았다. 몇번의 카피를 거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화질이 거칠기는 하지만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카메라는 고정된 장소에서 고정된 앵글로 찍혔으며, 의도적으로 아무런 감정없이 찍혔다. 인물의 반응에 따라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으며, 김선일씨의 모습이나 표정, 얼굴, 자세, 행동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말하자면 카메라의 개입이 없다. 그러나 개입하지 않은 카메라가 오히려 김선일씨의 대사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테이프의 효과는 사실상 이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에 있다. 김선일씨의 말은 알자르카위가 요구한 것인지, 그 자신이 한 말인지는 (내가) 알 수 없다. 다만 그 내용은 명확하며, 오해의 여지가 없다. 가장 중요한 말, 나는 살고 싶다. 그러나 그는 죽었다. 더 정확하게 그를 살리지 않았다.

김선일 테이프는 짓밟힌 휴머니즘의 유령

(영화평론가로서의) 나는 이것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 녹화 테이프에 대해서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않는 점이 하나 있다. 이 테이프가 ‘이제부터 항상 현재로서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김선일씨가 살아났다면 이 테이프는 과거의 역사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김선일씨가 죽는 순간 이 테이프는 역설적으로 불멸성을 획득했다. 왜냐하면 이제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살려달라고 하소연했던 그를 살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 하소연한 그 순간은 앞으로 영원히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우리에게 하소연하게 될 것이다. 불가능의 역설. 그러므로 이 테이프에 담긴 내용은 항상 우리의 휴머니즘을 질문할 때 실제시간이 될 것이다. 이 말이 중요하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우리는 녹화 테이프의 저 살려달라는 비명과 함께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판의 현장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녹화 테이프와 함께 부끄럽게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이 테이프는 미안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지금의 정부)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입으로 휴머니즘을 이야기할 때마다 돌아와서 제발 살려달라고 하소연할 것이다. 비유가 아니라 그 화면이, 그 이미지가, 그 얼굴이, 울부짖으면서, 비명에 차서, 우리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무엇보다도 직접적으로 한 인간의 있는 힘을 다해서 하소연할 것이다. 그 앞에서 휴머니즘을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지금의 정부가 퇴진한 십년 뒤에도, 찬성을 찍은 국회의원들이 다 죽은 백년 뒤에도, 그리고 다시 천년 뒤에 (혹시 대한민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그저 역사 안의 국호만으로 남는다 할지라도) 2004년 대한민국에 살았던 인간들의 휴머니즘에 대해 질문할 때마다 ‘라이브’하게 돌아와서 우리의 휴머니즘에 대해서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을 것이다. 그렇게 이 녹화 테이프는 살아남은 우리를 영원히 죽기 직전의 그 시간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죽기 직전의 순간에 번번이 무기력해질 것이다. 같은 장면의 영원한 반복. 테크놀로지의 시대가 보여주는 플래시백의 끝없는 재생 효과가 가져온 지옥의 영겁회귀. 아무리 사과하고 끝없이 용서를 빌어도 녹화 테이프는 그보다 더 오래 살려달라고 호소할 것이다. 그 어떤 후회도, 그 어떤 반성도, 그 어떤 용서도 오늘날 녹화 테이프보다 더 진실되지 못하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재생된 장면 앞에서 잘못의 시인 이상의 의미를 얻지 못한다. 김선일씨는 지금도 우리 앞에서 하소연하고 있다. 그렇게 간절하게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그는 죽었지만, 그는 녹화 테이프 속에서 지금도 우리의 결정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 녹화 테이프는 우리 시대의 짓밟힌 휴머니즘에 대한 유령이다. 이 테이프는 하나로 끝나야 한다. 정말로, 정말 끔찍한 말이지만, 이 녹화 테이프가 우리 시대의 예고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계속)

1968년 1월 21일 북한에서 남파한 무장공비 31명은 청와대근처까지 접근했다가 단 한 명을 남기고 전원 몰살당했다. 살아남은 무장공비 김신조는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나는 북조선 1240부대 소속이며,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중앙 정보부는 북한에 “이 치욕을 갚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북한에서 내려보낸 것과 똑같은 숫자의 31명을 선발해서 ‘김일성 주석궁에 침투시켜 모가지를 따오는’ 계획을 세웠다.

공식 부대명은 공군 7069부대 소속 2325전대 209파견대, 하지만 1968년 4월에 만들어져 ‘684부대’라고 알려진 특수부대를 만들었다. 이 부대는 사형수와 무기수, 혹은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로 구성해 그들에게 “작전 성공 시 모든 형벌 및 전과기록을 말소하고 새로운 삶을 정부가 보장한다”고 약속하였다. 그들의 훈련은 실미도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끔찍한 훈련은 그들을 고작 3개월만에 ‘김일성 목을 따올 수 있는’ 부대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작전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평화통일을 내세웠고, 이제 684부대는 무의미해졌다. 그렇게 3년 4개월을 기다렸다.

김일성 모가지 따러간다던 그들

정부는 부담스러워진 684부대를 ‘말소’시키려고 했고, 684부대원들은 그 결정이 부당하다는 것을 하소연하기 위해서 실미도를 벗어나 전원 청와대로 향했다. 그들은 인천에 내리자마자 버스를 탈취해서 청와대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을 가로  막고 나선 군부대에 의해서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대낮 총격교전 끝에 전원 자폭하였다. 1971년 오후 2시 25분의 일이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은 4명도 그 이듬해 3월 10일 사형집행 하였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실미도 사건이다.

강우석의 열 번째 영화 「실미도」는 그냥 거두절미하고 북한의 1240부대가 청와대를 눈 앞 에 두고 전멸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남한의 684부대가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대낮에 자폭하는 것으로 끝난다. 거의 기록이 남겨져있지 않은 이 묻혀진 역사 속의 사건을 다루면서 인물들은 모두들 하나의 결론만을 향하여 달려간다. 그들은 집단의 결론을 따르고, 그 결론에 의해 운명을 결정한다. 아무도 여기서 피해가지 못한다. 거기서 선택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죽을 것인지, 아니면 운명에 저항하며 죽을 것인지 사이의 차이뿐이다. 그 선택은 신기하게도 31명의 684대원들도 그러하지만, 악역을 떠맡고 역사의 그 자리에서 그들의 운명을 관장한 것처럼 보이는 중앙정보부의 간부들도 마치 사후적으로 역사를 승인하듯이 오직 그들의 죽음에만 몰두한다. 여기에는 그 어떤 협상도 없으며, 마치 역사를 받아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저 상투적으로 말한다면 강우석은 여기에 또 다른 드라마가 개입하기를 원치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그 목표는 결국 허망한 전원 자폭이다.

이 영화를 그저 주어진 대로 보면 별다른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너무 명백해 보인다. 31명은 범죄자들이었고, 사면을 대가로 지옥과 같은 훈련을 견뎌낸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의 결정에 따라 ‘모두 죽는다’. 실미도 사건은 그 이야기만으로도 듣는 사람을 슬프게 만든다. 그건 박정희 시대의 모든 사건이 그러한 것처럼, 혹은 전두환이나 노태우 정권의 저 비도덕적이고 반인간적인 대부분의 사건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냉전 이데올로기 아래 분단의 이름으로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희생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31명의 무의미한 죽음을 다룬 것만으로도 감동적일 것이다. 별다른 감상적인 드라마를 끌어들이지 않은 이 영화는 역사에 대한 고발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그 반대로 역사를 끌어들인 스펙터클처럼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누가 찍어도 슬픈 것은 영화 때문이 아니라 역사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영화는 생각할수록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이 영화가 어설프게도 그 모든 인물들이 피와 살을 얻지 못한 채 그저 역사의 인형처럼 움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적으로만 말한다면 그 누구도 역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그저 사건 주변만을 빙빙 맴돈다는 생각을 마지막 순간까지 버리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강우석의 잘못이다. 하지만 정말 괴이한 점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실미도」는 이미 벌어진 사건을 다시 구성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를 사후적으로 승인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역사를 올바르게 구성했냐고 물어보는 것은 사이비 논쟁이다. 올바른 질문은 그 역사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허구가 정당하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사건주변만을 맴도는 역사의 주인공들

강우석은 처음에는 단도직입적으로 사건을 찍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은 훈련과 배신, 그리고 죽음이다. 수많은 등장인물에도 불구하고 신기할 정도로 이야기는 단순하고,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 배경을 알 수가 없다. 잘못은 저질러졌으며, 그것은 결국 잘못 수습되어진다. 그걸 다루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단순해져도 피할 수 없는 함정이 생겨난다. 자기가 만들어낸 인물과 자기가 다루어야 할 사건을 주어진 역사 안에서 통일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역사 안의 사건은 언제나 매우 불균질하며,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은 복합적인 모순을 끌어들인다. 그걸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건이 벌어질 때 거기에는 언제나 이데올로기가 스며들기 마련이며, 그것을 사건으로 성립시키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 환상이라는 버팀목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첫 장면. 깡패로 살아가는 강인찬(설경구)는 청와대에 김신조의 1240부대가 침투하던 날 횟칼로 상대편 조폭 두목의 배를 쑤신다. 이 장면은 김신조의 부대와 강인찬의 칼질을 교차 편집해서 마치 김신조의 부대가 청와대에 들이닥쳐 박정희의 ‘배떼기를 쑤시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니까 영화적으로는 이미 죽인 것이기 때문에 강인찬의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거나, 처음부터 달성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강인찬은 사형 선고를 받고, 그런 다음 684부대장 최재현 준위(안성기)가 찾아와 “나를 위해서 다시 한번 칼을 잡지 않겠냐”고 묻는다. 강인찬은 왜 다시 칼을 잡고 북한에 올라가 김일성의 목을 따려는 것일까? 단지 사면 받고 잘 살기 위해서? 여기에 여전히 우리 시대를 맴돌고 있는 저 뿌리깊은 냉전 이데올로기의 기괴한 설득이 개입한다.

강인찬의 아버지는 북한에 자진 월북하였으며, 그로 인한 연좌제로 강인찬의 인생은 망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강인찬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복수심이 도착된 상태로 “김일성의 목을 따서 남한에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어머니와 떳떳하게 살고 싶다”는 동기라면 그 지옥을 버틸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 드라마 전체를 밀고 나간다. (정말 놀랍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영화가 아니라 2003년에 만들어진 영화이다) 강인찬은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고 사회적으로 이미 죽은 인물이다. 죽은 아들이 정부의 부름을 받고 그 임무의 수행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약속하는 ‘제도적’ 아버지 최재현의 약속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 이 영화의 사실상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강인찬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북한에 자진 월북한 아버지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에 수시로 침투하면서 임무를 수행하는 아버지이다. 그러나 아들 강인찬은 두 명의 아버지 모두로부터 배신당한다. 그래서 결국 강인찬이 “김일성의 모가지를 따러” 북한에 침투하건, 그 반대로 “우리의 존재를 알려주기 위해‘” 청와대로 향하건 그에게는 결국 같은 행위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 아버지의 배신에 대해서 맞대면하는 상징적 자살의 몸짓이다.

그러나 그 몸짓은 역사의 무대에서 아버지의 연출 아래 펼쳐지는 아들의 쇼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진정한 비극이다. 아들 강인찬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 뿐이다. 그는 그의 동료들을 대상으로 이제 아버지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강인찬의 아버지, 역사의 권력은 아버지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자리에 오르려는 그에게 벌이 내려지고, 강인찬은 그의 새로운 아들(들)과 함께 자살한다.

그들은 왜 교전하지 않고 자살했나

여기서 가장 이상한 것은 이미 벌어진 사건과 허구적으로 더해진 사건을 하나로 봉합시키기 위해서 북한에 보내지기 위한 특수부대의 주인공으로 북한에 의해 상처받은 아들을 필요로 하는 저 복수심에 불타는 냉전주의 이데올로기와 박정희 시대, 독재권력의 관료적 체제에 의한 희생으로 버림받은 아들을 같은 자리에 가져다 놓은 믿음이다. 거기에는 희생의 이름 아래 두 개의 역사적 결과를 동일한 수준으로 다시 재구성하는 기괴한 봉합이 있다.

강인찬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인 괴물이다. 왜냐하면 두 명의 아버지는 전혀 다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실미도」는 거기에 권력과 역사의 희생 아래 죽음을 받아들인 비극적 숭고함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사실은 그 믿음이 괴물인 셈이다. 그것은 역사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잘못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때 생겨나는 거짓 비난이다. 그것이 어쩌면 여전히 박정희의 유령이 우리 사이를 배회하는 이유일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31명의 684부대 대원들은 역사 속에서 죽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하소연하지 못한 그들도 함께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31명의 집단 자살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 “김일성의 모가지를 따올 수”도 있었던 그들은 교전하지 않고 자살한 것일까? 자살은 명백히 소멸이 아니라 메시지이다. 더 이상한 질문. 대통령이 시간 날 때마다 조건절을 달아 그만 두겠다고 공공연하게 약속하는 지금 왜 「실미도」와 같은 대중영화가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믿음을 안고 만들어질까? 신문을 보다가 푸념을 했다. 사건이 안 생기는 날이 하루도 없군요. 옆에 앉은 낯선 분이 대답했다. 그게 남한에서 사는 재미지요. 나는 그 사람이 31명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이상한 나라에서 우리는 역사 속의 살아있는 시체들과 함께 이상하게 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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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정성일

월간말 2004년 211호